Red Ocean - I
아, 뭐가 이렇게 경사가 급해? 계단 하나 하나를 내려 가기도 벅찼다. 발을 조금이라도 헛디디면 그대로 저 밑바닥에 고개를 처박을게 분명할 정도로 위험한 이 길을 차학연이 매일마다 오고 갔단 말이지. 재환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계단을 모두 내려 온 재환이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다시금 코트를 여몄다. 학연 못지 않게 추위를 많이 타는 지라 자꾸만 스며드는 쌀쌀한 바람이 달갑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 주위 어디에 약국이 있으려나. 아마 감기약은 처방전이 있어야 하지 않나? 해열제를 사야 하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재환이 이내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내가, 지금 차학연 걱정을 하고 있는거야..?
그럴리가 없잖아. 그래, 그저 자신 때문에 아픈 고용인이 다 죽어가니까. 고용주로서 조금의 선심을 베푸는 것 뿐이다. 그 이상의 감정은 없다. 자꾸만 고개를 들고 일어서는 미묘한 감정의 끄트머리를 싹둑 잘라 낸다. 애써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앞으로 나아갔다. 동네가 고요한지라 제 심장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날, 학연이 울며 나간 후 한참을 침대 위에 미동 없이 앉아 있었다. 옷을 입을 생각도 없이 멍하니 벽만 바라 보다 천천히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분이 매우 이상했다. 환각제라도 먹은 것 마냥 학연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왠지, 저도 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든지 하고 싶은 대로 살아 왔었기에,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가진 적도, 가지려고 하지도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정도로 돈이 많았고, 그럴만한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으니까. 그래, 그랬었다.
그러나, 난생 처음으로 뜻 대로 되지 않는 일이 생겼다. 바로 차학연.
재환이 스며드는 한기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쿨럭, 쿨럭. 이러다가 나도 감기에 걸릴 것만 같다. 어서 약을 사러 가야겠다. 재환이 발걸음을 좀 더 빨리 재촉했다. 조금 걷자 재환이 타고 왔던 세단이 보였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닐 듯 하니 굳이 차를 타지 않아도 되겠지. 오랜 습관인 앞머리 쓸어 올리기를 시전하며 걷자, 큰 길이 나왔다. 그러나 보이는 것 이라고는 철물점과 열쇠상, 그리고 몇몇 식당 뿐.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거야? 짜증이 솟구친다. 그 때, 저 멀리 이 쪽으로 걸어 오고 있는 여성 한 명을 발견했다. 장 바구니를 들고 계시는 것으로 보아 이 동네에 거주 하는 듯 싶다.
" 저기요. "
" 음? "
" 뭐 하나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
" 아이고, 총각이 참 훤칠하네 그려. 뭐가 궁금해서 그래요? "
" 아. 다름이 아니라. 여기 약국이 어디 있습니까? "
" 약국! 이 길로 쭉 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으면 바로 나올겨. "
" 아, 이쪽 길. 감사합니다. "
재환이 살짝 고개를 숙이자, 곱게 주름이 진 얼굴로 재환을 향해 웃었다. 그나저나 이 동네에 총각 같은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네? 허름한 동네에서 훤칠한 총각 만난지가 도대체 얼마만이야 그려. 그럼 조심해서 가게. 재환이 약간 멍한 시선으로 멀어지는 아주머니를 바라 보다 이내 등을 돌렸다. 허름한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다, 맞는 말이었다. 척 봐도 명품으로 보이는 옷을 입고 깔끔하게 머리를 다듬은 저는 이 동네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또 가슴이 시큰거렸다. 그 말이 마치, ' 차학연과 이재환은 어울리지 않는다. ' 라고 들려서.
.. 아니, 차학연과 어울리지 않는 게 왜 기분이 나쁜거지? 어째서?
머리를 세게 벅벅 문지른 재환이 달리듯이 걸었다. 요즘 생각이 많아졌다. 복잡하다. 그런 건 딱 질색인데..
머리가 여전히 깨질 듯이 아팠다. 아까 잠깐 깬 뒤로 더 이상 잠이 오지 않는다. 피로함에 지친 눈두덩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준 뒤 관자놀이도 눌렀다. 감기는 나아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아파 본 적이 언제였더라. 아버지가 돌아 가신 후 정신 없이 살아 왔다. 아플 시간도 없었다. 그 동안 피곤하고 힘들었던 것이 오늘 제대로 터지는 것 같았다. 몸이 아파서 그런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재환 생각, 지금 어디에 있을까 라는 생각, 혹시나 길을 걷다 다치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 결국 전부 재환에 관련된 생각이었지만, 학연은 그것을 계속해서 부정했다.
휴대폰이 어디에 있더라. 아까 정택운의 번호를 저장하고 어딘가에 집어 던졌는데.. 학연이 고개를 돌려 머리맡을 살펴 보았다. 까만 액정의 휴대폰을 집어 들고 홀더 버튼을 눌렀다.
" 왜 안 켜지지. "
그 새 배터리가 다 나갔나? 그럴 리가 없는데. 아까 분명 50퍼센트는 남아 있었는데.. 고장이라도 난 건가. 학연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충전기에 휴대폰을 꽂았다. 지독하게 조용한 집 안에 홀로 덩그러니 있는 이 상황이 오늘따라 많이 쓸쓸했다. 항상 이래 왔는데도, 아파서 그런건지 외롭고 추웠다.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에 조금은 적응이 된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나보다. 나는 여전히 약하고, 겁쟁이다. 홀로 있기를 싫어하는 옛날의 차학연에서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물이라도 한 잔 마실까-.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난 학연이 비틀거리며 정수기를 향해 기어가듯 걸었다. 정말이지 세상이 핑글핑글 도는 기분이었다.
딩동.
..? 뭐지.
이재환은 초인종을 눌릴 만큼 신사적인 사람이 아니다. ' 차학연! 문 열어! ' 라고 외칠지는 못할 망정. 그럼, 누구지? 학연이 물컵을 꺼내다 말고 눈알을 데구르르 굴렸다. 살금살금 걸음을 옮겨 고개를 쑥 내밀었다. 꽤나 높은 대문임에도 불구하고 그 위로 머리카락이 쑥 올라와 있었다.
그 때,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가 대문을 타고 넘어왔다.
문 열어. 나 정택운.
" 어? "
정택운..? 그 때 만났던, 그 정택운? 정택운이 여길 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의문을 잠시 접어두고 슬리퍼를 질질 끌고서 대문 앞으로 갔다. 녹이 슨 소리를 내며 열리는 대문 틈 사이로 여전히 하얀 피부를 지닌 ' 정택운 ' 이 나를 빤히 쳐다 보았다. 그 역시 뛰어 오기라도 한 건지 뺨이 조금 붉게 상기 되어 있었다.
" 어, 어. 여긴 왜? "
" ... ... "
" ... ... "
"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었어? "
무슨 일이라니? 학연이 동글동글한 눈동자를 더욱 크게 뜨며 이야기 하자, 택운이 표정을 미묘하게 비틀며 반문했다. 전화 했잖아, 네가.
" 전화라니? 난 그런 적 없는데.. "
" 여기. "
택운이 자신의 휴대폰을 들어 학연의 눈 앞에 가져다 대었다. 발신자명 차학연. 에에..? 학연이 괴상한 소리를 냈다. 내가 언제 정택운한테 통화를 했지. 뭐야. 잘 못 전화가 간 건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학연을 빤히 응시하던 택운이 천천히 그의 앞으로 걸어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너, 아프지?
" 어어? "
" 얼굴이 빨개. "
" 아. 감기에 걸려서.. "
아까의 재환이랑 똑같은 모션을 취하는 택운에 학연이 살짝 당황했다. 전화 한 통으로 여기까지 온 정택운도 뭔가 정상은 아닌 듯 했다. J&B 그룹이면, 이재환의 그룹과 맞먹을 정도로 엄청날텐데. 그런 그룹의 대표이사가 이렇게 한가해도 되는거야? 이재환이나 정택운이나. 정말 편하게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 괜찮아. 학연이 애써 웃으며 택운의 손을 떼어 내려고 했다.
분명히 그러려고 하는데.
.......
" ..뭐냐? "
허스키하면서도 나른한 목소리. 질릴 정도로 익숙한 목소리가 그들의 옆에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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