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을 잃었다. 그것도 완전히. 경수는 프린트물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책상 앞에 앉아 머리를 부여잡고 좌절했다.
어떡하지... 하나도 모르겠어... 울상을 짓고 있는 그의 입꼬리가 한없이 처졌다. 당장 내일, 아니 열두시를 훨씬 넘긴 시간이니 오늘 오전에 시험이
있는데 적은 시험범위를 우습게 보고 탱자탱자 놀다가 슬슬 걱정이 되어 프린트물을 펼쳐들었거늘, 이건 무슨 소리? 인지부조화 이론? 이요인 이론?
노르에피네프린이랑 글루타메이트은 뭐고 아세틸콜린과 알츠하이머의 상관관계는...? 어 이거 분명 강의 시간에 들었는데... 그랬는데...
왜 펼친 프린트의 첫 장부터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는건지, 경수는 그냥 멘붕상태였다. 휴학을 했다가 다시 복학을 하고, 벌써 반년하고도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그는 아직까지 공부라는 것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초등교육과 중, 고등, 그리고 지난 대학생활 2년, 거기다 유치원 다닌
기간까지 합쳐서 약 16년이란 세월동안 끊임없이 쉬지않고 열심히 하지는 않았어도 그래도, 학생 신분에는 충실히 살았는데 어째서 고작 1년을
쉬었다고 그 영겁의 세월같았던 16이라는 각인을 잊어버린 것인지. 나는 왜 매년 리즈를 갱신하는가... 에 대해 경수는 깊은 고찰에 빠졌다.
기껏 알던 것도 쉬고 오니 머릿 속은 깨끗하게 리셋되어 있었다. 남들이 더 발전해 미래를 향해 나아갈 때 나는 왜 때문에 그나마 뇌 속에 쑤셔박았던
전공에 관한 지식을 대체 어디로 날려버린 것인지... 그렇게 자아성찰의 계기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시간에 한 글자라도 더 눈에 담는 게 그의 학점에
훨씬 더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란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지만 차마 인정하기는 싫어 사뿐히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
"아아... 망했어..."
흐어어... 이상한 신음소리를 내며 책상 위로 엎어진 경수의 눈에 방금까지 열심히 자신의 온기로 달구어놓은 핸드폰이 들어왔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 손이 이내 또 슬금슬금 핸드폰으로 향하고 있었다. 안돼!! 안돼..! 안된다고..!! 안되는데... 안되...려나...?
결국 이성은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그 작은 손이 꼬물꼬물 핸드폰과 맞닿으려는 순간, 타이밍 좋게 화면이 켜지며 요란스럽게 노래를 불러댔다.
벨소리는 요즘 한참 대세로 떠오른 아이돌 그룹 '이엑스오'의 '드르렁'이었다. 노래가 나온 것은 한여름이었지만 뒤늦게 그들의 무한 매력에
빠져 본의 아니게 일코하고 있는 남덕 경수는 나 드르렁 드르렁 드르렁 대 하는 후렴구를 이엑스오와 나 홀로 하모니를 이루어 따라부르며
흐뭇하게 웃다가 얼마 안가 끊겨버리는 전화에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바로 발신자를 확인하니 보이는 것은 쌈박하게 성까지 붙여 풀네임으로
저장한 '변백현'. 하, 참을성도 없는 새끼, 그거 뭐 십초나 될까 하는 시간을 못기다리고 전화를 끊다니. 열심히 백현을 씹고 있던 경수를 알아 챈
것인지 또 다시 울리는 벨소리에 발신자를 확인하자 보이는 것은 역시나 변백현. 하.. 지 욕하는건 또 어떻게 알고, 귀신같은 변백현.
"왜, 뭐"
- 넌 뭐하느라 이 우.. 우월한 변백현님께서 친히 전화를 걸어주셨는데 한 번에 못받냐?
"야!! 내가 너 그거 하지 말라 그랬지?!"
- 내가 뭘? 우.. 우월한 우리 경수 화났쪄염?
"하... 개새끼..."
지난 학기 들었던 교직 수업에서 장렬하게 발표를 망친 경수는 반 년 가까이 지난 시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그 때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쪽팔림에 연신 이불에 하이킥을 시전했고, 그 때 맨 뒷자리에서 수업을 듣던 백현은 얄미운 웃음소리를 내며 경수를 비웃어주곤 그 이름도 찬란한
'쫄보'라는 새로운 별명을 그에게 하사해주셨다. 아 진짜 우리 경수 존나 떨어 성대에 모터단 줄 알았잖아. 하며. 그 뒤부터 틈만나면 모든 문장에
붙이는 수식어와 미사여구에는 '우월한'이 꼭 빠지지 않고 들어가게 되었다. 이젠 좀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소심한 우리의 경수는 우월한의 우자만
꺼내도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오르는 그 때의 기억에 몸서리를 치며 즉각 반응을 했고 그런 재미난 반응을 즐기는 백현은 질리지도 않는지
늘 신나했다. 평생 공부와 인연따위는 없다고 생각했던 경수였지만 그래도 대학에 들어와서 나름 괜찮게 나오는 성적에 이제야 내 숨겨진 실력이
드러나는건가 싶어 패기돋게 교직이수를 신청했던 것이 벌써 2년 전이건만, 지난 학기의 발표를 마지막으로 경수는 교직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기로
다짐했다. 그래 내 주제에 교직은 무슨 시발. 발표만 하라고 해도 이렇게 벌벌 떨어대는데 어린 애들도 아니고 머리 다 큰 고삐리들 앞에서 수업했다가
실수라도 한 번 하는 날이면 분명 변백현보다 더한-어쩌면 변백현보다 더한건 아니지만 그래도 수적으로는 월등히 우세한-놀림거리에 시달릴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에 인정하긴 싫지만 선생은 나의 길이 아닌가보다 하고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른 속도로 그 마음을 접은 그는 그저
간신히 지금 듣는 강의듣기에 열중하기로 했다.
- 개새끼라니, 내가 멍뭉이가 맞긴 하지만 너무 격하잖아
"지랄. 헛소리 할거면 끊어"
- 진짜 왜 이렇게 까칠해? 야동이라도 보고 있었던거야 설마? 우리 쫄보가?
"야 이 씨!!"
-어머 진짠가보네
"내가 너냐 이 변태야!!"
- 뭐래. 찬열아- 경수가 나보고 야동본대
백현의 목소리 너머로 굵직한 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우린 야동 볼 나이는 지났지. 이젠 실전이야!' 하며 촐삭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 박찬열이랑 같이 있냐"
- 우린 늘 함께지
"지랄 똥싼다"
있는대로 똥을 씹어먹은 듯한 경수의 이죽거림에 건너편에서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고 잠깐 소란스러워지는 듯 하더니 잔망스런 백현의
목소리 대신 동굴에서 울리는 듯한 찬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우리 경수 화났어?
"아 짜증나게 새벽에 왜 전화해서 염장질이야. 나 놀리려고 쓸데없이 이 새벽에 전화질한거냐?"
- 꼭 그런건 아닌데, 재밌잖아
"재미는 너네끼리 봐!! 떡을 치던 별을 보던 만리장성을 쌓던!!"
씩씩거리며 그대로 통화종료버튼을 누른 경수가 화면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거지같은 찬백. 지랄맞은 찬백.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찬백. 맨날 쳐 싸우다가 꼭 이럴 때만 죽이 잘 맞고 지랄이야.
귀신같은 찬백이들 같으니라고. 어휴 어디서 호모냄새 안나요? 어쩌다 그나마 정상적인 친구라고 있는 것들이 호모인거죠?
난 전생에 엄청난 대역죄를 저질렀나봐... 이번 생엔 되도록 착하게 살게요 하느님...
"아 또 뭐 왜"
- 경수 단호박... 왜 이렇게 단호해... 단호박이세요?
또 다시 울리는 핸드폰에 크게 인심 쓰고 받아줬건만 받자마자 또 드립을 날려대는 찬열에 대답도 하지 않고 종료 버튼에 손가락을 가져가고
있는데 어떻게 안것인지 건너편에서 끊지마 끊지마!! 하는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옴에 결국 경수가 다시 귓가로 핸드폰을 가져다댔다.
"용건만 간단히. 이상한 드립 날리려고 전화한거면 조용히 종료버튼을 누르는게 좋을거야. 쥐도새도 모르게 비명횡사하고 싶지 않으면"
- 알게써. 별건 아니고, 시험공부 잘 되가냐고
"하, 지금 나 엿먹이려고 전화하셨어요? 지금 프린트물 폈는데 그냥 읽고 넘어가는 것도 버거워. 어쩔... 외우고 공부하는게 문제 아냐"
- 걍 포기해. 포기하면 편해
"그걸 누가 모르냐. 그러는 너는 왜 이 시간까지 이러고 있는데. 너는 포기 안했냐?"
- 나는 포기 안했는데 변백현이 포기했지
찬열의 목소리 뒤로 '어차피 박찬열이 먹여살릴텐데 뭘' 이라는 백현의 목소리가 겹쳐들려왔다. 그래봤자 셋 다 학점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고
평타 치는 수준이었지만. 경수가 이렇게 걱정한다고 해서 성적이 바닥을 기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노는 것에 비해 나오는 성적을 보면 천재라고
할 만큼 잘 나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학점이 천재적일 정도로 잘 나오는 것이냐 하면 그게 아니고 정말 공부를 안하는 것에 비례한다는 소리다.
찬열과 백현은 뭐 늘 둘이 붙어있으니 공부를 뭘 하던 항상 학점은 비슷비슷하게 나왔고. 이제 경수도 이러고 있을 바에야 적어도 포기하지는
않았다고 자기 자신에게 합리화를 하며 프린트 한 번이라도 보는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미 5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양장폰의
서적을 보는 것은 멍청한 짓이란 것을 잘 알았기에 대충 프린트에 필기해놓지 않은 중요할 것 같은 부분만 옮겨 적어놓은 경수가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찬열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프린트를 눈으로 훑었다.
- ...해서- 야, 듣고 있냐?
"왜- 이제야 좀 짖을 마음이 사그라들어?"
- 헐, 쫄보주제에 많이 컸네 도경수
"뭐래. 그만 짖어. 안그래도 너네 지랄견인거 다 알어 이 비글들아"
- 지도 비글 주제에...
"내가 무슨 비글. 김종대가 비글이지. 아 어떡해. 너네 셋 얼굴만 떠올려도 시끄러워"
귓가에 망할 찬백이들과 하이텐션인 종대 목소리가 한데 섞여 들려오는 것 같은 환청에 경수가 고개를 빠르게 휘저었다.
- 너 내일 김종대한테 그 말 고대로 전해줄거야 두고 봐
"아 시끄러워. 벌써 1시 반이야!! 너 땜에 하나도 못봤어! 끊어 한 줄이라도 더 읽고 자게"
- 그래봤자 머릿 속에 들어오지도 않을텐데 뭘. 키 크게 잠이나 자라
"내가 언젠가는 너네 죽이고 지옥갈거다. 너 나보다 시험 잘 보면 사살"
아직도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두 비글들의 재잘거림을 간단히 손가락을 들어 버튼 하나를 누르는 것으로 제압한 경수가 타는 듯한 똥줄에
정신을 차리려는 듯 프린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외우기는 커녕 전혀 처음 보는 듯 새로운 느낌에 한 줄만 열댓번 씩 반복해서 읽던
그가 점점, 무의미하게 전부 다 읽는 것 보다 차라리 앞 부분을 중점으로 보고 조금이라도 점수를 받을까 하는 유혹에 사로잡혔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결국 대충 한 번을 겨우 훑어보는 것으로 벼락치기라고도 말 할 수 없는 시험공부를 볼일보다 중간에 끊은 듯한 느낌으로 마친 경수가
아침에 학교가는 길에 다시 한 번 읽어야겠다고 다짐하며 빠르게 불을 끄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면서도 바로 잠에 드는 것이 아니라
한참을 핸드폰으로 정보의 바다를 헤엄치고 다니던 그가 결국 3시가 넘는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잠에 들었다. 왠지 경수가 왜 이만큼 밖에 키가 크지
않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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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 앞머리 + 똥머리 처음봐 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