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O/카디백도] 순정소설 <12>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3/c/3/3c3be6c9a7257e5c3aa1338fd46301bb.jpg)
아침부터 공기가 축축하니, 오후엔 비가 올 것 같다. 하늘도 뭉게뭉게 무서운 먹구름을 머금고 있었다. 월요일에 비가 오는 건 왠지 일 주일 내내 우울할 것 같아서 싫은데. 우산을 가지러 집에 다시 들어갈까 했지만 날 기다리고 있는 백현이 때문에 그럴 수 없다. 힘차게 유리문을 밀고 백현이에게로 달려갔다. 백현인 날 보자마자 왼쪽으로 한 바퀴, 오른쪽으로 한 바퀴. 날 이리저리 돌려봤다. 공항에서 수색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 교복에 뭐가 묻었나?
"왜 백현아..?"
"아무 일 없었지?"
"무슨 일?"
"아니야. 얼른 걷자."
백현이와 함께 걷는 매일 같은 시간, 매일 같은 등교길이다. 우리 둘의 뒤를 따르는 사람도 없고 우리가 쫓는 사람도 없다. 내 아침잠을 훼방 놓는 이른 등교지만 이렇게 고요한 등교길이라면 좋다.
순정소설
w. 아우디
"어제 연습만 했어?"
"연습만 안 했어. 종인이가 일찍 가야 될 것 같다고 해서 저녁에 혼자 티비 봤어."
"다음 주면 시험인데 공부는?"
"오늘부터 할 거야.."
백현이가 내 성적으로 날 미워하진 않겠지만 시험은 싫다. 처음으로 백현이네 집에 가서 시험 공부를 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고등학교에 들어선 다섯 번째 시험이라니. 얄미운 시험. 지금까지 숙제를 열심히 했으니 공부는 조금만 해도 되지 않을까? 학원 선생님은 숙제만 제대로 해도 성적이 나올 거라고 하셨다. 저번 시험을 생각하면 아닌 거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양심에 찔리니 벼락치기 계획을 세워야겠다. 어느새 잊어버린 시험 시간표를 억지로 기억해내고 있는 와중, 백현이가 내 마음이 간질간질한 질문을 했다.
"경수야. 만약에 백만장자랑, 장동건이랑, 김태희랑 나랑 넷 중에 고르라고 하면 누구 고를 거야?"
"음.. 백현이."
너무 빨리 백현이라고 대답해버린 것 같아 잠시 후회했지만 백현이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기분 좋은 미소를 보였다. 백현이도 나를 택하겠지? 같은 질문을 되물을 필요 없이 난 백현이의 표정만 보아도 대답을 알 수 있었다.
"오늘은 나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 학년 회의 있어."
"또?"
"시험 겹치기 전에 미리 하는 거래."
혼자 가기 싫은데. 조금은 풀이 죽는다.
아무도 없는 교실은 비록 적막했지만 교실의 공기는 밖보단 보송보송했다. 이 교실도 몇 분 후면 왁자지껄해질 것이다. 끼이익 소리를 내는 의자를 조심스럽게 빼내고 자리에 앉기 전에, 나는 멈칫하게 됐다. 책상 위에 샛노란 비타민 봉지가 작은 쪽지에 끼워져있었다.
「비타민C가 아이큐에 좋대요 곧 시험이잖아요」
누구지? 백현이가 나 먹으라고 놓아둔 건가? 백현이는 나랑 같이 왔는데, 글씨체도 백현이 글씨체가 아닌데. 아니면 내 친구 중 하나가 어제 두고 갔나보다. 나는 그것을 책상서랍 구석에 넣어두고 곧장 엎드렸다. 침대보다 더 익숙하게 머리를 기대게 되는 책상이다. 나는 제 시간에 등교한 내 짝이 내는 기척에 다시 눈을 떴다.
"있잖아.. 혹시 내 책상 위에 누가 비타민 올려놨는지 알아?"
"엥? 모르겠는데?"
정말 누구지? 잘못 놓고 갔나보다. 사소한 것에 머리를 굴리고 싶지 않아 숙제를 펼쳤다. 풀어야 할 분량이 엄청나게 늘었다. 시험이랍시고 이렇게 감당 못할 정도의 숙제를 내주신 거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니까 그래도 풀자! 속으로 구호를 외쳐놓고 눈꺼풀은 어느새 반쯤 감겨졌다. 안 돼, 감기면. 시험이 다음 주란 말이야.
선생님이 깨웠다면 억지로라도 공부를 했을 텐데 자습시간이 줄줄이 이어졌다. 그 때문에 행복했던 건 잠깐, 가혹한 체육 선생님은 자습 시간을 주지 않았다. 모두가 불평을 하며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다. 이렇게 눅눅한 날씨에 체육 시간은, 오래도록 빨지 않은 체육복과 어우러져 공부하고 싶은 기분을 아주 멀리로 몰아낸다. 선생님도 그걸 염려하셨는지 아이들을 데리고 강당으로 들어갔다.
평소엔 강당을 쓸 일이 자주 없다. 학년마다 체육 수업을 하는 장소가 각각 달라서, 실내 활동이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강당엔 가지 않는다. 강당 안에선 1학년 후배들이 열심히 탁구를 치고 있었다. 주황색 탁구공이 왔다 갔다 탁구대 위에서 통통 튀기도 하고 바닥에 나뒹굴기도 했다. 작년엔 저거 안 했는데. 지금 배우는 것보단 훨씬 재밌어보여서 나도 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졸지에 강당 구석 자리 신세가 된 우리반은 두 편으로 갈라 피구를 했다. 나는 공 피하기에 소질이 없었고, 아이들 모두가 남자애들이니만큼 승부욕이 강했기에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시간에 난 공을 맞았다.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피구에 관심이 떨어진 난, 어물쩡 가장자리를 지키며 1학년들의 탁구 게임을 구경했다. 가장 턴이 빠르게 돌아가는 탁구대로 눈이 갔다. 누구보다 역동적이게 호들갑을 떨며 탁구를 치던 선수 둘은 세훈이와 종인이었다. 종인인 탁구도 열정적으로 하는구나. 나는 아예 몸을 틀어서 둘의 경기를 지켜봤다. 막상막하의 탁구 게임 끝에 탁구공이 미끄러져 내게로 데굴데굴 굴러왔다. 그리고 내 발치에 멈춰섰다. 종인이가 그것을 집으려 달려왔다.
"어! 형."
"탁구 재밌어? 나도 하고 싶다."
"저 하는 거 봤어요?"
"응. 잘하더라."
"진짜요? 잘하는 거 아닌데.."
"븅신아, 그만 떠들고 공 주워와!!"
세훈이가 많이 급한 모양이다. 종인이는 공을 집어들고 다시 탁구대로 뛰어갔다. 자리에 서서, 나를 향해 웃더니 보란듯이 멋진 서브를 날렸다. 종인이는 첫 인상이 그닥 좋지 않았지만 친해지면 잘 웃는 것이 참 좋은 후배 같다. 거기까진 좋았지만, 아까완 다른 형편 없는 실력으로 게임의 맥을 끊는 종인이었다. 탁구공에 시선을 둬야하는데 자꾸만 나를 힐끔댔다. 결국 세훈이는 탁구채를 탁구대에 집어던졌고, 종인이를 끌고 구석진 곳으로 갔다. 구경거리가 없어진 나는 다시 피구를 구경했다.
"경수 형."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저쪽에 있던 종인이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왜?"
"그게요... 저랑 탁구 칠래요?"
"그럴까? 그치만 일 학년 수업 방해한다고 선생님이 혼낼 거야."
"괜찮아요. 어차피 저기 못하는 애 가르치느라 바쁘신데."
주변 애들의 눈치를 보다 종인이를 냉큼 쫓아갔다. 다들 피구를 할 때 나 혼자서만 탁구를 하게 되니 아주아주 신났다. 종인이가 일부러 살살 공을 보내서 조금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땀이 나도록 공을 주우러 돌아다니는 것보다야 낫다. 게임은 즐거웠으나 하나 눈에 밟히는 것이 있었다. 우리에게 엄지손가락을 우뚝 치켜들고 있는 세훈이. 플레이가 뛰어난 것도 아닌데 아까부터 계속 저러고 있다.
"근데 세훈이는 왜 저래?"
"신경쓰지 마세요."
아아. 세훈이가 어떤 앤지 잠시 잊고 있었다. 잘 오고 가던 공이 마침내 떨어졌을 때, 종인이는 굳이 내쪽으로 굴러간 공을 자기가 주워오겠다고 했다. 귀찮을텐데. 친동생도 아닌 후배가 저렇게 잘하는데 나도 우리 형한테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종이 칠 때까지 탁구대를 사이에 두고 신나게 탁구를 쳤다.
오늘은 나를 찾아와주는 애들이 많았다. 불청객 지영이, 또 혜리 얘기를 하러 온 찬열이. 아주 피곤한 점심 시간이었다. 열심히 남소를 기다리던 지영이는 내게 넌 완전 말뿐이야, 하고 토라져서 갔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저렇게 남자를 좋아하는데 소개해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또 찬열이는 이제 막 혜리랑 사귀게 될 것 같다고 했다. 정말 축하할 일이었다. 이제는 찬열이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오전 수업부터 잠을 다 자버린 덕에 오후엔 숙제를 할 수 있었다. 바깥에선 비가 한 방울씩 오기 시작했다. 굵은 빗줄기는 아니었지만 눈을 찌푸리고 보니 비의 간격이 제법 촘촘했다. 학교 끝날 때까지 얼른 그쳐야 할 텐데. 가벼운 봄비이길 바라며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내 집중력이 오래 갈 리 없다. 아아. 지루해. 졸음 없이도 잘만 나오는 하품이다. 그리고 난 다시 꾸벅..
지잉.
허벅지에 느껴지는 진동에 휴대폰을 꺼냈다. 형 졸아요? 종인이에게 온 문자다. 헉, 어떻게 알았지. 종인이가 날 지켜보고 있나 사방을 둘러봤다. 하지만 반 친구들만 있을 뿐이다.
「아냐 나는수업들어」
「수업듣는데답장은 엄청 빨리하네요」
「응.. 지루해 얼른집에 가고싶어」
「한교시만 더 참아요 비오는데우산있어요?」
「없어 어떡하지? 그칠거야」
「안그치면같이가요 나우산있는데 아 백현선배랑가요?」
종인이가 우리 동네에 살아서 다행이었다. 그치만 난 얼마 전부터 종인이의 저 선배라는 말이 거슬린다. 나한텐 선배라고 안 부르면서 백현이한텐 꼬박꼬박 선배님, 선배님. 내가 선배님이라고 안 하면 혼낼 거라고 했는데도 그런다. 아주 괘씸하다.
「진짜 같이가도 돼? 백현이는오늘 바빠서 혼자가야해 근데 종인아」
「네」
「나는 왜선배라고 안 불러줬으면서 백현이는 선배라고해?」
「형은형이고 선배는선배니까」
「에이그런게어딨어 에이..」
난 선배로 안 보일 정도로 우리가 친해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시를 받고 있단 느낌에 왠지 흐릿한 날씨처럼 슬퍼졌다.
「형 이따 내가올라갈게요 수업 열심히들어요」
「알았어!」
우울한 기분도 잠시, 우산 걱정을 덜어서 한결 홀가분했다. 내 바람과 달리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졌기 때문에 종인이가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하늘이 나무랑 꽃이 더 쑥쑥 자라라고 물을 주나보다. 나도 나무처럼 물을 맞으면 쭉쭉 자랐으면 좋겠다. 그럼 나는 우산 없이 집에 가도 괜찮다. 백현이는 왜 종일 문자 한 통 없을까? 백현이도 우산을 잊었다면 큰일인데.
종례가 끝난 뒤, 아이들은 저마다 작은 우산과 장우산을 손에 들고 교실을 나섰다. 우산은 까먹을 법도 한데, 나만 빈 손이라 칠칠맞아 보였다. 울엄마가 맞벌이만 안 했어도 내게 우산을 챙겨줬을 텐데. 난 벌써 교실 앞에서 날 기다리고 서있는 종인이를 보며 어색함을 느꼈다. 백현이 대신에 누가 날 기다려주긴 오랜만인 것 같다. 종인이는 굳이 펼치지 않아도 작아보이는 접이용우산을 들고 있었다. 우린 함께 일 층까지 내려갔다. 교문을 나서니 먼저 출발한 색색의 우산이 저만치에서 행군하고 있다. 종인이가 손을 내밀어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빗방울을 손에 받았다.
"비 많이 오네요."
"더 많이 오기 전에 얼른 가자."
종인이가 우산을 펼쳤을 때 종인이의 몸집에 비하면 작은 우산을 보고 웃음이 터졌다. 아무리 봐도 혼자만 써야 할 것 같은데, 종인이는 우산을 들고 빨리 들어오라며 손짓을 했다. 내 머리만 간신히 우산 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우산 너무 작다."
"오늘 아침엔 컸었는데 왜 작아졌지.."
그래도 머리는 젖지 않았다. 종인이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저번엔 갑자기 어깨동무를 해서 날 놀라게 하더니 실은 나랑 붙어있기 싫은가보다. 계속 걷다보니 나와 딱 붙어서 가면 될 것을, 우산대를 잡고 내쪽으로 기울였다.
"이리 붙어. 너 어깨 다 젖겠어."
"더워서 이래요, 더워서. 비 맞으면 시원해요."
"별로 안 더워보이는데..."
이 습한 날씨에 덥다니 신기했다. 조금만 걸었음에도 종인이의 교복 마이 한쪽은 흠뻑 젖었다. 덕분에 난 비를 한 방울도 맞지 않았지만 우산을 뺏은 것 같아 미안해졌다.
"아휴. 빨리 주말 왔으면 좋겠어."
"저는 주말 싫어요."
"왜? 주말이 싫은 사람은 처음이야."
"학교 오는 게 더 좋아서요."
"학교 오는 게 더 좋아? 되게 이상하다."
비 맞는 걸 좋아하고 학교를 좋아하는 미스터리한 종인이는, 어깨를 따라 머리 한쪽도 젖어드는 건 모르는지 오늘도 계속 싱글벙글이다. 시험 때문에 우울할 시기인데도 기분이 좋은 걸 보니 부러웠다. 사실 나도 벌써부터 시험 날엔 일찍 끝난다는 생각에 들뜨긴 했지만, 성적표를 생각하면 다시 우울해지는 것이다. 종인이와 아파트 단지 초입에 다 왔을 때 나는 전속력으로 집까지 달리기 위해 손으로 머리 위를 막았다.
"여기부터 혼자 갈게."
"아니에요. 데려다줄게요. 집까지 별로 안 멀잖아요."
"난 진짜 괜찮아.."
"저가 안 괜찮아서 그래요."
종인이의 교복 왼쪽 소매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여전히 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고, 굳이 날 집 앞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종인이가 걱정됐다. 조금이라도 비를 덜 맞기 위해 집까지 뛰기로 했다.
"종인아 우리 뛸까?"
우리 둘은 비 사이를 가르고 빠르게 뛰었다. 어깨에 맨 가방이 들썩거리고 발꿈치가 조금씩 젖어들었다. 봄비는 생각만큼 불쾌하지 않았다. 흔들리는 우산과 종인이가 나보다 앞장서는 바람에 빗방울을 다 피할 순 없었지만 짧은 시간 안에 동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얄미운 비는 그제서야 잠잠해지는 것도 같다. 종인이가 우산을 잠시 내려두고 젖은 머리를 탈탈 털었다.
"아, 뛰었더니 힘들다. 형 춥죠. 얼른 들어가요."
"너 진짜 다 젖었어. 좀 말리고 가."
"됐어요. 이 정도면 금방 말라요."
"아니야. 감기 걸릴 수도 있단 말이야."
종인이는 끝까지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난 억지로 종인이의 팔을 이끌고 엘레베이터에 태웠다. 엘레베이터 바닥은 종인이가 입은 교복에서 떨어지는 물과 우산에서 떨어지는 물 때문에 금세 흥건해졌다. 집에 다 오를 때까지 종인이는 뒤돌아서 엘레베이터 벽에 붙은 거울만 보고 있었다. 나 역시 거울을 보다 거울 속에서 어색하게 종인이와 눈을 마주쳤다. 살짝 무안해졌다. 종인이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몸을 틀어 1, 2, 3, 층수가 써져있는 버튼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 말도 없는 1분이 꽤 길게 느껴졌다. 마침내 엘레베이터가 열리고, 우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곧장 화장실로 들어가 곱게 접혀진 수건 하나를 꺼내 종인이에게 건넸다. 그치만 종인이는 물기 터는 법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렇게 말고 이렇게 탈탈 털어, 이렇게."
종인이가 들고 있던 수건을 뺏어들고 내가 대신 물기를 털어줬다. 한바탕 비를 맞아서 그런지, 종인이는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바보 같았다. 종인이의 표정에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머리에 수건을 마구 부볐다. 나에게도 작은 물방울들이 튀겼다. 장난을 멈췄을 때도 종인이는 내가 겸연쩍을 정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 그래도 머리 안 이상해."
"형."
"어?"
대답을 하지 않고 뜸들이는 종인이 때문에 내가 너무 장난이 과했나, 후회했다.
"아니에요. 저 이만 갈게요."
화났나? 종인이는 현관문을 열고서 나가버렸다. 벙찐 표정으로 서있던 나는, 문을 다시 열지도 못 하고 잘 가란 인사도 하지 못했다. 신발장 옆엔 종인이가 미처 챙겨가지 못한 물기 젖은 우산이 덩그러니 놓여졌다. 어, 이거 가져가야 하는데. 어차피 비도 그쳤으니까 괜찮겠지? 내일 종인이에게 돌려줘야겠다.
학교에 올 때 물기가 다 빠진 우산을 잘 접고 가방 안에 넣어왔다. 아침에 엄마가 집어갈까 방 한켠에 고이 모셔둔 우산이었다. 혹시 종인이가 아직도 기분이 나쁠까봐 사과할 말도 준비했다. 어젠 그냥 장난이었는데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 종인아. 다른 사람이 머리 만지는 거 싫을 수도 있는데 거기까진 내가 생각을 못 했어. 사과는 늦을수록 안 좋으니 빨리 하는 게 낫겠지?
1교시 쉬는시간 종이 치자마자 1학년 7반 교실에 찾아갔다. 우산은 손에 쥔 채다. 작년에 내가 쏘다녔던 아랫층이어도 낯선 아이들로 들어찬 교실은 여전히 어색했다. 내가 뒷문에서 어물대며 종인이를 찾았지만 종인이는 매점에라도 갔는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태민이의 갈색 머리를 발견했을 때, 부를까 말까 고민했지만 이번에도 뒷문으로 들어가려던 세훈이가 나에게 아는 척을 했다.
"선배가 여긴 왜?"
"종인이한테 이거 주러. 종인이 어딨어?"
"걔 오늘 학교 안 왔어요."
"왜?"
"몰라요."
"설마 아픈가.."
"선배가 알 바예요. 평소에 관심도 없으면서. 근데요, 우리끼리만 있으니까 하는 얘긴데 아무리 선배 남친인지 서방인지 잘났다고 해도 김종인 막 때리고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무슨 말이야? ...백현이?"
세훈이의 말을 듣고 잠시 머리가 멍했다. 남친인지 서방인지, 함부로 말하는 세훈이 때문에 화가 날 것 같다. 세훈이에게 종인이 말고 말할 사람은 없다. 지금껏 입을 굳건히 다물고 있을 거라 믿었던 종인이가 다 말해버린 거였다. 착한 동생이 생겼다고 좋아했는데 지금은 그만큼 실망스러웠다. 분명히 나는 종인이에게 말했었다. 정말 말하면 안 된다고, 그렇게 강조하며 말했었는데.
"백현이든 뭐든간에요."
"백현이가 종인이를 때리다니.. 그럴 애 아니야. 말이 되는 얘기를 해야 내가 믿지. 그리고 백현이랑 나에 대해서 말 함부로 하지 마."
"아, 진짜 답답하네."
종인이가 또 누구에게 말하고 다녔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눈 앞이 캄캄하다. 그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상하는데 세훈이는 얼토당토한 얘기를 했다. 백현이는 남에게 해코지를 할 정도로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나는 백현이랑 제일 가깝고, 백현이를 지켜본 지 오래됐으니까. 세훈이가 어디서 이상한 소문을 듣고 온 게 분명하다. 나는 더이상 대화의 가치를 느끼지 못 하고, 세훈이의 가슴팍에 우산을 안겨주고 돌아섰다.
"선배 그냥 가면 어떡해요!"
아휴, 난 이제 어떡해요.
***
독자님들 날씨가 참 춥죠.. 집에서 수면바지랑 수면양말이랑 수면잠옷 상의 입으시면 안 추워요. 날도 추운데 서럽게 감기 걸리지 마세요. 오늘은 오랜만에 긴 글을 쓰네요. 다름이 아니라 암호닉 신청을 다시 받을까 해요. 처음부터 지켜봐주신 독자님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제가 지금 갖고 있는 암호닉 리스트는 무의미하다고 생각이 돼서요 ^.T 다들 수증기가 되어 증발하셨나보아요. 명목상 암호닉 신청하시는 거라면 차라리 하지 말아주세요.. 익명 댓글 체제의 글잡 게시판에서 굳이 암호닉이 필요한 이유는 독자님들과 조금이나마 소통하고자, 기억하고자 암호닉을 받는 건데요. (작가가 벼슬도 아닌데 암호닉을 받는다는 표현도 조금 부끄럽네요 T.T;;) 나 이만큼 암호닉 수집했다 보여주고자 하는 암호닉이 아니잖아요~
처음 연재를 시작했을 때처럼 독자님들이 남겨주시는 댓글 하나하나 잘 읽고 있어요. 눈팅이든 손팅이든 항상 제 힘이 돼주셔서 감사해요. 진심입니당SZ. 순정소설은 25편이나 30편 사이에서 끝날 예정이고, 세루는 모르겠지만 카디백 얘기로는 일체의 불마크가 달리지 않을 예정이에요. 인티 소녀들이 불마크 좋아하는 건 알지만요~ 제가 순정소설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제목 그대로 카디백의 순애보이지 관능 학원물이 아니에요. 순소의 바보 같은 경수가 종인이랑 백현이 앞에서 바지 벗을 줄이나 알겠나요! 저도 속내는 게이들이 떡이나 쳤으면 좋겠ㅇㅓ요... ㅎㅎ;; 학교 졸업하면 알아서들 하겠ㅈㅛ. 그래도 이 소설 나름대로의 순수한 매력을 알아주셨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말이 너무 많았죠. 마지막으로, 수능을 얼마 앞두지 않은 수험생 여러분들 모두 수능 대박나세요 ^^!
오타나 탈자를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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