칙, 치이익, 치직, .... 9개월 전, 이제 저도 고3이라며 공부만 하자고 희망차게 스마트폰을 갈아치우고 새로 장만한 폴더폰은 통화 상태가 자꾸만 불량해지곤 했다. 지금도 그랬다. 공부만 하자고 폴더폰으로 바꿀 때 학교 기숙사까지 덜컥 신청하고 덜컥 붙어버렸는데, 그래서 외부와 연락할 수단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 불량한 2g 밖에 없었다. 여러모로 짜증나는 상황이었다. 기기 자체는 산 지 얼마 안된 것이었는데, 통신사에 문제가 있는건지 뭔지. 하지만 같은 통신사에 색 마저도 같은 기기를 쓰는 같은 반 복학생 언니는 수능을 3개월 앞두고 그 폰으로 잘도 남자친구와 새벽까지 통화를 해댔다.
주로 그 통화의 장소는 기숙사 컴퓨터실이었다. 열람실에서는 정신머리가 나가지 않는 이상 하지 않는 게 맞았고, 컴퓨터실은 그나마 여유롭고 제한 없는 곳이었다. 휴게실이라는 명목의 장소가 있었지만, 소등 시간인 12시 30분부터는 그 곳 또한 이용할 수 없으니 말 그대로 그저 명목의 장소였다. 그래서 자신이 새벽 4시까지 문예창작과 실기를 준비한답시고 시험기간에 뭣도 안써지는 글을 잡고 있을 때, 자신이 외롭지 않게 그 복학생은 자신과 두 칸 정도 떨어진 의자에 앉아 남자친구와 오빠 먼저 끊어, 아니, 안보고싶은 게 아니구 ... 따위의 말을 하며 흘긋 흘긋 저의 눈치를 봤다.
그저 눈치를 볼 뿐, 전화를 끊는다거나 컴퓨터실에서 나간다거나 하는 적극적인 행동은 취하지 않았으니, 그 시선마저 달갑지 않았다.
하여간, 그런 와중에 저에게도 발신번호 표시 제한으로 전화 한통이 걸려와 받으려 했단 말이다. 그런데 자꾸만 치익, 치직 하는, 마치 무전기의 소음과도 같은 지저분한 소리를 낸다. 자꾸만.
" 여보세요, 여보세요? "
- 치지익, 칙, 치이익, ...
" 아, 또 이러네. 저기요, 잘 안들리는데요, 그냥 끊, "
- 칙, 치익, ... 힘들어 ....
" 네? 누구세요? 잘 안들려요. "
- 이미 치직, 명단에 내가 올랐고 ,... 우리 누나 학교 가야하는데 ... 칙, 치이익, 치직
" 뭐야 ... 혹시 잘못 전화 하셨어요? "
옆에서 나의 통화 내용이 궁금한 듯 자꾸만 고개를 기웃대는 게 느껴졌다. 매일 새벽까지 혼자 컴퓨터실을 지키며 실시간 검색어가 오르내리는 것도 그야말로 시간대 별로 다 지켜보고, 인터넷 기사들을 다 눌러보며 쓸데 없는 정보까지도 다 흡수하고, 그제서야 매우 하기 싫다는 듯 어기적대며 한글창을 키는 내게 이 새벽에 전화가 걸려왔다는 사실이 복학생에게는 그렇게도 신기하게 보였나 싶었다.
- 안녕 , 치지익, 칙 , ... 우리, 얘기 할래? , 치익, 칙, ... 치직...
" 누구신데요? 누구인지는 알아야죠, 변태나 스토커면 어떡해요. "
- 치이익, 치직 - ,.... 권순영 , 치익, 삑, 삐이이익, ...치직, ...
78학번, 서울대.
삐이이이이이이익, 삑, 삑, 삑, 삑, 삑 .... 삐이이이이익! 거기 안나와!? 있는 거 다 안다, 당장 나와!
호루라기는 불량한 통신상태 너머로도 분명히 찢어질 듯 새된 소리를 내고 있었다. 1980년, 스물 세 살의 권순영과의 첫 대면은 녹슨 쇳소리로 가득 점철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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