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경쾌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경수를 발견한 준면이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밖으로 나가자 경수는 낡은 도끼를 붕붕 흔들며 밝게 웃어 보였다. 서울에서 왔다더니 게을러 빠졌구나, 얼른 얼른 일어나서 숲에나 가자! 경수의 성화에 못 이긴 준면이 두터운 후드 집업을 대충 걸치고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가자 왠 일인지 카이는 아무 말 없이 잠자코 누워만 있었다. 하지만 경수의 재촉에 카이에게 가 보지 못하고 준면은 발걸음을 빨리 했다.
“자, 잘 봐라. 여길 그냥 이렇게 후려치면 되는 거야 별 거 없지?”
“진짜 별 거 없네. 뭐 이런 걸 가르쳐 준답시고…….”
비아냥거리는 준면에게 도끼를 넘겨준 경수가 해볼테면 해보라는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준면을 바라보았고, 도끼를 다부지게 쥔 두 손으로 나무를 향해 붕― 흔들어 보였지만 나무는 꿈쩍도 않고 있었다. 푸하하하하. 기분 나쁜 경수의 웃음소리에 준면이 눈을 모나게 뜨고 홱 고개를 젖히자 경수는 여전히 웃음을 그치지 못하며, 하하하, 내가 그럴 줄 알았다. 그게 한 두번 해서 되는 일이면 개나 소나 나무꾼 되서 먹고 살았겠지. 연습 좀 더 해야겠네. 그래도 잘 했다. 경수가 오늘은 할머니가 집에 안 계셔 홀로 집을 지켜야 한다며 짧은 수업을 서둘러 끝냈다. 투덜거리는 준면의 어깨를 탁탁 두드린 경수는 힘내라는 말과 함께 키득이며 언덕을 올라갔다. 재수없는 새끼. 준면은 경수의 뒤통수를 말없이 노려보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인기척 하나 없이 누워만 있던 카이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엄마! 아빠!”
집 안엔 아무도 없었다. 준면은 가쁜 숨을 내쉬며 서둘러 집 뒤쪽으로 향했고, 몸을 축 늘어트린 카이를 끌어안고 이리저리 카이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 이런 상황에 어떠한 대처를 해야 하는지 제대로 배우지 못한 자신의 지식 수준을 한탄하며 준면은 힘없이 늘어진 카이를 들어올렸다. 무거워 뒤지겠네. 다시 카이를 내려놓은 준면은 잠시만 기다리라며 낙엽으로 대충 카이의 몸을 덮은 뒤 집으로 헐레벌떡 들어섰다.
“따뜻한 물이랑……, 수건. 그래!”
부엌에 들어서 커피 포트에 물을 담아 물을 데우고, 흰 수건까지 꺼내든 준면은 냉장고에서 호빵 두 개와 바나나 우유까지 품에 안고 자신의 몸을 다 덮을 듯한 낡은 담요까지 모두 다 챙겼다. 띵하는 소리와 함께 커피 포트에서 물이 다 끓자 조심스레 바가지에 옮겨 담은 준면은 두 손에 서툴게 모든 것들을 쥐고 카이가 누워있는 쓰레기 더미로 다가섰다. 카이야……. 눈물까지 그렁그렁 매달고 카이를 향해 달려가던 준면은, 그 자리에 멈춰 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하늘색 바가지를 땅에 곤두박질 치게 만들고야 말았다.
“카이야……?”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자신이 어루만졌던 회색 빛 털은 온데간데 없고, 왠 꾀죄죄한 남자가 추위에 떨며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었다. 카이야……, 너 카이야? 준면이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다가가며 카이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 그 부름에 반응이라도 하는 것 처럼 온순한 표정으로 준면을 올려다보던 사내는, 따뜻하고 오동통한 호빵에 시선을 내보내더니 다시 준면의 얼굴에 시선을 꽂았다. 준면이 살짝 미소지었다. 카이네……. 음식과 자신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준면이 자신 쪽을 향해 먹을거리를 던져주기를 기다리는 눈빛이 카이였다. 어쩌다 이런 상황이 연출된 건지 묻기도 전에, 준면은 서둘러 카이를 향해 호빵을 던져주고 떨어진 바가지에 우유를 담아 건넸다. 거지가 배 안에 들어있는 것처럼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치운 카이는 여전히 추위에 달달 떨고 있었다. 준면은 팔에 걸치고 있던 낡은 담요로 카이의 몸을 둘둘 말아 주었다. 쓰레기 더미와 일심동체 되어 지내다 보니, 어젯밤 씻긴 것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릴 정도로 카이의 몸에선 퀴퀴한 냄새가 풍겼다.
“추워?”
“……”
“신기하다. 너 진짜 늑대 인간이었어? 내 말이 진짜로 이뤄졌네…….”
“……”
“근데 말도 못하고, 바보.”
준면은 그렇게 자신의 코를 자극하는 찝찝한 냄새에도 아랑곳 않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쓰레기 더미 안으로 몸을 숨겼다. 체온이 어느 정도 오른 건지 두 눈을 꿈벅거리며 졸고있는 카이에게 자신의 어깨를 내어주며 준면이 낮게 중얼거렸다. 우와, 이제 진짜 우리는 오도 가도 못하겠다 카이야. 엄마 아빠가 널 보고 또 무슨 욕짓거리를 내뱉으며 내쫓으려 할까……. 나는 너랑 헤어지기 싫은데. 적잖이 충격을 받은 준면이었지만 그저 자신 혼자 이 모든 일을 겪고 있다는 게 맘에 드는지 샐샐 새어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한 채 카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외부인의 손길에 적응되지 않은 건지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잠시 움찔할 뿐 준면은 내내 카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람으로 변하니까 니가 나보다 크네, 자존심 상하게시리. 낮게 미소 지은 준면은 한참을 카이의 곁을 지키다 트럭이 멈춰 서는 요란스러운 소리에 쓰레기 더미를 빠져나갔다.
“또 그 안에서 늑대 새끼랑 뒹굴고 있었니? 공부는 했고?”
“아, 맞다. 오늘 경수가 장작 패는 거 알려준대서 거기 따라갔다가 잠깐……”
“됐다. 대학 같은 거 니 만족 시키려고 가라고 하는 거지 하나도 상관 없어. 저 늑대 새끼 묶어놓으려면 목줄이 필요한데……”
노끈이 없었나? 엄마가 창고 안으로 발을 디디기 무섭게 준면이 그런 엄마를 막아섰다. 엄마, 아빠, 이리 앉아 봐요. 동그란 갈색 상엔 잘 익은 홍시가 놓여있었고, 참 달다, 아주 잘 샀어 하며 감을 칭찬하는 아빠와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준면을 바라보는 엄마를 앞에 두고 준면이 꼴깍 침을 삼켰다. 그……, 늑대 인간 말이예요……. 어렵사리 뗀 첫 마디에 결국 엄마가 탕하고 상을 쳤다. 김준면, 너 이런식으로 굴려고 시골 내려왔어? 정말 다시 서울로 가 버리길 원해서 이러니? 이상한 건 어디서 많이 봐서, 늑대 키우는 걸 허락해줬더니 이젠 그놈이 인간이 되길 바라고 있는 거야? 엄마의 윽박에 준면이 고개를 푹 숙였다. 바라기는 무슨. 그런 생각은 꿈에도 못 했는데 지 혼자 사람이 되어버린 걸 준면이 어떡하란 말인가. 준면은 울상이 되서 자신이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했다. 카이가……, 사람이 됐어요.
부모님은 기가 찬 표정으로 준면을 바라보았고,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집 뒤쪽에 쌓여져 있는 쓰레기 더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저 쓰레기들을 다 태워버리든 어디 내다버리든 해야겠어, 기분 나빠서 원. 엄마는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고 아빠는 괭이를 들고 와 허튼 놈이면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겠다며 큰 소리를 놓았다. 카이야. 낮게 카이의 이름을 부른 준면에 카이가 모습을 보였다. 묵은 때가 가득 묻어나 까무잡잡한 얼굴을 보고 어제 늑대인 카이의 모습을 본 때보다 몇 배는 더 놀란듯한 부모님의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 여보, 아무래도 내가 너무 오래 세상을 살았나봐요. 뒷목을 잡고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엄마는 두 말 할것 없이 경찰서로 향했다.
“엄마! 경찰서 가서 뭐 어쩌게요. 그 사람들이라고 카이 믿어줄 것 같아요?”
“그거야 걔 사정이고. 어디든 고아라고 꾸며내서 보내버리면 되는 거 아니겠니? 애당초 너한테 허락해준 내가……”
“서울로 가 버릴거야!”
뭐? 엄마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준면을 내려다보자 준면은 카이를 꼭 끌어안았다. 준면의 품이 불편한건지 낮은 으르렁거림과 함께 잠시 몸을 뒤척이던 카이는 이내 속눈썹이 길게 뻗어있는 두 눈을 곱게 감고 준면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준면은 엄마를 원망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누군 이 시골에 오고싶어서 왔나? 서울로 가요. 나도 서울 가서 다시 내 친구들이랑 뛰어 놀고 싶고, 차라리 분필 가루 들이마시면서 콜록이는게 더 낫겠어. 하지만 나 카이는 절대 포기 못 해요. 알아서 해요 이제부터. 준면의 말에 엄마는 결국 주저앉았고 아빠는 그런 엄마를 데리고 차에 올랐다. 끝을 보자고 애를 쓰는구나 김준면. 엄마는 냉정했고 트럭은 말없이 경찰서로 향했다.
“늑대 인간이요? 허 참, 이 분들이 서울에서 오셨다고 시골 파출소 되게 무시하시나본데, 저희 그런 장난 안 받습니다. 저희도 나름 바빠요, 네?”
“저희도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온 거구요. 이틀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늑대 녀석이 오늘은 거지 꼴이 되서 있다니까요! 사람이 되었다구요!”
“헤유……, 저,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서울대 교수님이 있습니다. 생명 어쩌구 공부하신 분인데……, 소개 시켜 드릴테니 직접 얘기해 보세요.”
경찰의 말에 엄마와 아빠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끄덕였고 준면은 파출소 밖에서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안돼. 카이를 보낼 순 없어. 준면은 당장에라도 집에 달려가 카이를 품에 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채 잠자코 엄마 아빠가 파출소 밖을 빠져나오기만을 기다렸다.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나오는 엄마 아빠에게 뭐래요? 하고 묻던 준면은 당분간 뚜렷한 답이 없다는 아빠의 말에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다.
“서울대 교수라면 뭐 다를텐가? 그냥 떠돌아다니던 거지로 착각한게 아니냐며 떠들어대고는 돈만 받고 홀라당 가 버릴텐데.”
“그래도 저, 카이인가 뭐시기 당분간은 집에 둡시다. 불쌍하잖아요. 그래도 지금은 인간 모양인데, 추위에 냅둘 수도 없고.”
엄마 아빠의 대화 내용을 몰래 엿듣던 준면은 밖에서 떨고있을 카이에게 창문 밖으로 담요를 하나 더 던져주었다. 저 둔탱이 어떻게 잘 덮고는 있으려나. 준면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자 아빠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준면을 불렀다. 준면아. 아빠의 나즈막한 목소리에 준면이 눈을 동그랗게 떴고, 아빠는 카이를 데려오라는 말과 함께 거실로 나가 신문지와 담요를 준비했다.
“이야후!”
준면은 통통 튀어나가 카이를 얼싸안았다. 카이야, 있지, 너 당분간 우리 집에서 지낸대. 자신보다 조금 체격이 큰 카이 때문에 아빠의 옷을 대충 입혀준 준면은 서둘러 카이를 집 안으로 이끌었다. 어떡해 너무 좋아. 준면은 카이의 볼에 쪽쪽 뽀뽀를 했고, 순간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카이를 보며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야, 너 수컷이잖아! 수컷이 같은 수컷한테 이렇게 부끄러워 하면 어떡해. 준면은 키득거리며 카이를 자신의 방에 앉히고 본격적인 훈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두툼한 애견 훈련 백과를 들고 침대에 앉아, 이것은 겉모습만 인간일 뿐 개와 같다라고 생각하며 카이를 자리에 앉혔다.
“자, 카이, 일어나 봐.”
준면의 말을 어떻게 알아들은 건지 벌떡 일어선 카이가 준면을 내려다보자, 벌써부터 훈련이 빛을 발하는 것 같아 두 눈을 반짝인 준면은 카이에게 조심스레 입을 뗐다. 카이야……, 앉아! 앉아! 앉으라구. 두 손을 붕붕 저어가며 설명하는 준면을 갸우뚱하며 바라본 카이가 철푸덕 자리에 주저앉았다. 오오! 잘했어. 잘했어 우리 카이. 준면이 카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아이 예뻐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은 무한대로 쏟아부으며 한참을 훈련에 집중한 결과, 카이는 제법 앉으라는 말을 잘 알아듣는 듯 했다. 그리고 준면이 박수를 짝짝 칠 때마다, 자신을 칭찬해달라는 듯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럼 준면은 귀여운 카이의 행동에 웃음지으며, 백번이고 더 쓰다듬어 줄 수 있다는 듯 카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쁘다, 우리 카이.”
어느덧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에 밖에 있는 부모님은 어서 자라고 준면을 재촉했고, 준면은 장롱에서 보라색 이불을 꺼내 착착 펼치며 카이를 눕혔다. 자, 카이야. 여기 누워서……, 코오― 자는 거야. 응? 준면의 말에 그저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던 카이는 준면이 자리에 눕자 자신도 따라 누웠다. 다만 그 자리가 바닥에 깔린 이불이 아닌 준면의 침대 위라는 것 뿐. 준면이 당황하며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족히 큰 카이를 밀어냈다. 얘가 왜 이래. 자식이 이뻐해주니까! 니 자리는 저기, 밑이라구. 주인님하고 동급으로 여기면 안 돼 짜샤! 준면은 카이를 밀쳐내려 버둥거렸지만 카이는 그러면 그럴 수록 준면의 품 깊숙히 파고들었다.
“……야, 카이야,……”
자? 준면의 말에 카이는 코를 고는 작은 소리만 낼뿐 답하지 않았다. 깨어있다고 해도 말을 할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준면은 하는 수 없이 카이를 폭 끌어안고 은은히 비추는 달빛에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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