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파찌
"야, ○○. 우리 파스타 먹을까?"
"그래, 민규가 오랜만에 맞는 말했네. 오빠들이 사 줄게. 가자!"
눈을 한껏 아래로 내리깐 채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내 기색은 이석민과 김민규를 하룻 강아지로 만들었다. 나는 영혼 없는 걸음을 재촉했다. 김민규가 다리를 휘적이며 짧은 내 걸음에 제 것을 맞췄다. 두 사람의 시선에 뒤통수가 저릿했다. "야, 어떡하지? 많이 화났나 봐." 이건 이석민이 말한 거였고, "너 같으면 화 안 나겠냐? 폰트는 왜 키워 났어. 병신." 이건 김민규가 말한 거였다. 나는 기가 차다는 듯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불편한 낌새를 알아차린 이석민이 달려와 자켓 안 쪽에 있던 지갑을 내밀었다. 나는 이석민을 향해 고개 돌렸다.
"지갑 뭐 어쩌라고?"
"먼지처럼 털어 주세요."
가운데에서 상황을 살피던 김민규가 주머니를 뒤지더니 구겨진 지폐 몇 장을 내 앞에 대고 흔들었다. "누나, 저도 돈 많아요." 김민규의 손에는 만 원 두 장과 천 원 세 장이 있었다. 제법 꼼수를 부리는 둘의 행동에 웃음이 났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냉혹하다. "지랄들 한다..." 나는 금세 어제의 만행을 떠올려 냈다. 쌀쌀맞은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이석민이 흠칫 몸을 떤다. 정문을 향해 걷는 내 발걸음은 무거웠다. 물론 표정은 그보다 세 배쯤 더 어두웠다. 김민규랑 이석민이 뒤에서 따라오는 게 다행이었다. 아랫입술을 이로 씹다가도 '권순영' 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둥둥 뜨면 쪽팔림에 몸서리쳐야만 했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씨발, 씨발. 진짜로 씨발.' 지금 내 상황에서 "어머, 무슨 여자애가 저런 상스러운 소리를 해?" 따위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내 핸드폰 안에는 고귀한 11자리 번호가 있다. 이름 권순영, 연극영화과, 21살,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1위. 나는 상상만 해도 숨통을 조여오는 어제의 일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어제의 나는 권순영과 함께 앉아 조원들을 기다렸다. 조원들은 멋대로 이십 분 가까이 늦었다. 나는 적막감을 못참았고 김민규에게 연락했다. 당연하게도 김민규는 나에게 답장했다. 내용은 나눔바른고딕과 최대 크기로 이루어졌다. 돋보기가 필요 없다는 극강의 폰트 크기와 가독성 좋은 폰트체 말이다. 권순영은 김민규가 보낸 톡을 읽었다. 분명 읽었을 것이다. 회의를 거듭 나누는 동안 권순영은 내 쪽을 보지 않았다. 내 앞에 앉았으니 한두 번은 마주쳤을만 한데도. 나는 우리 조가 무슨 주제를 결정했는지, 언제 또 만나기로 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혹시 몰라 핸드폰으로 회의 내용을 녹음한 게 다행이었다. 권순영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제일 먼저 카페를 빠져 나갔다. 단편 영상을 편집 중이기 때문에 바쁘다는 이유였다. 선배들은 권순영이 자료 조사라도 제대로 해 줬으면, 싶은 듯했다. 그에 비해 나는 영혼을 죄다 카페에 두고 나온 것 같았다.
오후 강의를 두고 학교로 돌아가 이석민과 김민규를 찾아냈다. 우선, 이석민의 멱살부터 쥐었다. 기겁한 김민규가 도망가는 동안, 나는 거의 우는 목소리로 짜증을 퍼부었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화를 주체할 수 없는 건 둘의 변명 때문이다. "잘 생각해, 무려 연영과야. 첫 연애를 연영과와 할 수 있는데 이게 왜 흑역사임." 그 말은 은근 설득력 있으면서도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한 마디로 내 앞에서 만행을 저지른 김민규를 잡아다 가혹한 엄벌을 내리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지갑을 꺼냈다. 순간적으로 진한 맥주의 생각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나는 뒤돌아 외쳤다. 조금 의기소침해 보이는 태도로 말이다.
"김민규, 민증 가져왔어?"
"......"
내 물음에 대답 않던 김민규가 눈을 굴렸다. 이석민이 나를 한 번 보더니 김민규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김민규가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 그럼. 있지. 요즘 어느 구칠이 민증을 안 가지고 다녀."
나는 한숨을 내뱉고서 신발 밑창을 땅바닥에 질질 비볐다. "술이나 마시러 가자." 내 말에 이석민과 김민규가 머뭇 거렸다. "대답해라." 강압적으로 말하니 그제야 천천히 다가온다. 우리는 발길을 옮겼다. 둘은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대신 한 번 분위기를 타면 목으로 쭉쭉 넘기는 게 흠이었다. 주정이라면 주정일지도 몰랐다. 우리가 가는 곳은 술 좀 마시는 재학생들이라면 모두 거쳐간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대학생 지갑 사정 알아 주는 고마운 가격에 편한 분위기, 무엇보다도 친절하신 이모의 덕이 한몫했다. 벌써부터 기분 좋아진 나는 일부러 마구 웃었다. 일종의 "나 술 마시면 화 풀릴 것 같으니 입 다물고 따라와." 하는 신호였다. 기특하게도 잘 알아들은 김민규가 동조했다.
"후레쉬 세 병이랑 모둠 감자튀김 주세요."
이석민이 들어서자마자 테이블 하나를 잡곤 소리쳤다. 이모는 이석민을 곧잘 반기셨다. 잘 둔 아들마냥 어머니들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이석민의 특기였다. 이윽고 알바생이 다가와 신분증을 확인했다. 귀찮기는 해도 몇 년 뒤 검사를 그리워할 나를 상상하니 딱히 거부감은 안 들었다. 먼저 나온 소주병을 뒤집은 이석민이 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 이런 거 다 어디서 배웠어?"
"술자리 자주 나가면 선배님들이 알아서 쫙 알려 줌."
"언제 나갔대."
"사랑받기 위한 몸부림이다."
이석민의 말에 김민규가 혀를 쯧 찼다.
"사랑은 무슨, 고생길 오픈이지." "첫 잔은 원 샷."
나는 질색했다. 이석민은 쏟아지는 비아냥에도 아랑곳 않았다. 우리는 가볍게 잔을 맞댄 후 그것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과학실 알콜 램프를 위장에 쏟는 기분이 들었다. 먼저 식도가 타들어 갔고 다음에는 장기가 쓰라렸다. 그걸 티내듯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상하게도 술맛이 평소보다 셌다. 안주를 먹지 않아 금세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김민규가 내 등을 두드렸다. 병 주고 약을 주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 둘 같이 바보 같으면서도 마냥 착한 애들이 또 없었다.
생각해 보면 나와 달리 김민규나 이석민은 늘 소문이 자자했다. 김민규가 술자리에 나타나면 알게 모르게 인원이 늘어났고 이석민이 발표를 할 때면 삽시간에 강의실이 조용해지고 시선이 집중됐다.
나는 영향력 있는 친구들을 뒀다는 기쁨보다도 '얘네가 여자였으면 더 편했을 텐데.'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 그게 미안해져 한 잔을 더 마시려고 하니 김민규가 제지해 왔다.
"○○○. 적당히 마셔. 얘가 벌써부터 취하려고 작정했네."
남 챙기는 게 수준급인 김민규 탓에 나는 손을 내려야만 했다. 입이 자꾸만 허전했다. 안주를 기다리며 말 없이 이석민과 김민규의 얘기만 듣고 있을 때, 안 테이블에 있던 여자 두 명이 나오더니 우리에게 다가왔다. 한 명이 학교 과잠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재학생인 듯했다. 어깨에는 숫자 '15'가 떡하니 있었다. 미친, 선배였다. 자각하자마자 어깨가 굳어들었다. 그 중 머리 긴 여자가 나와 김민규 사이에 서고는 말을 걸었다.
"저기, 우리 자리에 사람이 부족해서 그런데 합석할래요?"
속이 쓴지 물로 달래던 이석민이 기침을 연속했다. 이석민을 보며 "어..." 하고 말을 질질 끌던 나는 김민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 못지 않게 당황한 듯했다. 나는 이런 거에는 쥐약이었다. 평소라면 단호하게 거절했을 나지만 내 앞에서 대답을 기다리는 두 선배들은 예쁜 외모로 판단력을 흐리고 있었다. 여자는 여자의 적이라는 말, 여자는 예쁜 여자를 질투한다는 말. 그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나 하는 말이었다. 여자도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 확실히 내 성지향성은 여자에게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예쁜 언니는 좋다. 잘생긴 게 최고라는 맥락과 상통하는 듯했다. 김민규가 이름 모를 선배들과 얘기를 나누는 사이 나는 이석민과 시선을 공유했다.
'야, 대박. 존나 예뻐.'
내 입모양을 알아차린 이석민이 실실 웃었다. 그 틈에 선배들이 내 팔을 끌었다.
"에이, 우리 이상한 사람들 아니에요. 같은 학교 같은데? 맨날 똑같은 애들끼리 마시는 거 질려서 그러니까 합석해요."
충분한 설득력에 나는 질질 끌려갔다. 끌려갔다는 표현보다는 자발적으로 걸어나갔다는 게 옳았다. 이석민은 술병을 챙기고 있었다. 나는 가방을 들고서 선배들을 따라 나섰다. 넓은 단체용 테이블에 우리 말고도 다섯이나 더 있었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자리에 앉았다. 김민규랑 이석민은 오히려 내 선택에 놀란 반응이었다. 어쩐 일이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가장 끝에 있던 여자가 우리를 반겼다. "미안해요. 동기들이 다 군대 가고 남은 게 얘네뿐이라. 비율 안 맞아서 재미가 없더라구."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하긴, 합석으로 인해 정확하게 10명으로 짝이 맞아떨어지긴 했다. 나는 사람 좋게 웃다가 그 옆에 있던 남자를 힐끔 바라봤다. 어디서 많이 본 인영이었다. 여지껏 애써 관리했던 표정이 무너졌다. 권순영이었다.
나는 일부러 느리게 눈알을 굴렸다. 그리고는 어색하게 다른 남자에게 고정시켰다. 내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여기까지 데려온 선배가 물었다.
"몇 학번이에요? 과는 어디려나. 경영?"
입 다물고 있던 나와 달리 유난히 사람을 반기는 이석민과 김민규가 물 만난 고기마냥 잘도 털어댔다.
"저희 셋 다 언론정보학과 1학년이요."
"저 타 과랑 합석 처음 해 봐요, 대박이다."
김민규가 내 팔을 툭툭치며 "그치?" 하고 동의를 바랐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여선배들이 박수를 치며 대답했다. "우린 다 연영과인데. 나보다 한 살 어리네? 너네 되게 잘생겼다." 나는 웃었다. 그것 말고는 딱히 취할 행동이 없었다. 이석민이 하도 쩌렁쩌렁한 소리를 질러대니 권순영이 이쪽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나는 기겁하며 고개를 돌렸고 김민규에게 바짝 붙었다. 권순영은 강의실이나 카페에서 봤을 때와 다르게 한껏 꾸민 차림새였다. 보라색 스카잔 점퍼를 걸치고서 머리는 잔뜩 손 본 게 분명했다. 나는 괜스레 김민규의 옆구리를 찌르며 시큰둥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관찰했다. 새삼 잘생겼다. 내가 의식을 안 했을 뿐이지 김민규는 기가 막히게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이석민도 마찬가지였다.
같이 다니는 동안 나에게 대신 전해진 선물만 수십 개. 번호를 요구해 온 애들이 합 열 명이었다. '뭐야, 나 과탑들이랑 다니고 있었네.' 잘생긴 게 최고라는 내 신념은 땅에 묻힌 지 오래였다. 나는 정말 드라마 남자 주인공이면 끝인 인생이었던 거다. 갑자기 슬퍼졌다. 월요일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유일한 삶의 낙 [달이 그린 구름빛] 의 박보경에게는 미친 사람처럼 열광하다 욕까지 내뱉었으면서 김민규나 이석민 앞에서는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언젠가 김민규가 지나가듯 말한 적이 있었다. "너 그러다 진짜 결혼 못하고 막... 베개에 박보경 프린팅해서 안고 다니면 어떡해?" 그 말에 언젠가는 연애하겠지, 하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나는 사실 무의식적으로 '연애 불가' 라는 고정 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석민의 자취방에 쳐들어가서 치킨을 시키고 김민규의 사물함을 훔쳐쓰는 철판 깐 여자였다. 그러니 결국 상대가 잘생겼든 평범하든 나는 연애하지 못할 팔자였다.
충격에 빠져 멍하니 입만 벌리고 앉은 내 앞으로 안주가 놓였다.
"가운데, 저쪽 테이블에서 온 새내기는 이름이 뭐야?"
부대찌개가 잘 끓어 가고 있네, 하는 멍청한 생각을 할 때쯤 웬 남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속으로는 '저요?' 를 외치며 입 밖으로는 "○○○인데요..." 하고 순발력 있게 대답했다. 생긴 게 꼭 외국인 같았다. 재미 교포, 뭐 그런 걸까. 푼수 같은 헛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있던 연영과 학생들이 모두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형, 뭐 하는 거예요. 새내기한테 손 뻗고 그럼 안 되죠."
"최승철 노양심. 군대 안 가고 뭐 하세요?"
최승철. 들려오는 것은 한국 이름이었다. 다들 자연스럽게 말을 걸고 어울리는 걸 보니 내 헛된 예상이 틀린 듯했다. 나는 권순영의 존재를 까맣게 잊은 채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최승철을 보자니 오랜만에 기억 속 홍지수가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1995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홍지수나 최승철이나 헉 소리나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런 최승철이 내 앞에 핸드폰을 밀고서 테이블을 툭 쳤다.
"찍어."
나는 최승철이 건네준 핸드폰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뭐를요?" 내가 봐도 모지리 같았다. 하지만 정말 무슨 뜻인지 몰랐다. 주변이 부산스럽게 변했다. 김민규가 내 앞을 가로막으며 최승철에게 고개를 살짝 꾸벅였다. "얘가 좀 순진해요. 형이 이해하세요." 와중에도 김민규의 친화력에 감탄했다. 언제부터 '최승철' 이 '형' 으로 변한 걸까. 어쨌든 나는 김민규의 눈치 있는 행동 덕분에 그 의미를 깨달았다. 최승철이 다시 한번 덧붙여 말했다. 번호 찍어 줘. 나는 의문스러웠다.
"제 번호는 왜요?"
물음에 최승철이 활짝 웃었다. "너랑 친해지고 싶으니까?" 저렇게 예쁘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은 처음 봤다. 아니다, 처음은 이석민이니까 이 사람은 두 번째 정도. 왠지 주변에 꽃이 있어야 할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최승철의 핸드폰을 들고서 고민에 빠졌다. 나는 남자랑 쉽게 못친해지는데 번호를 줘도 될까. 수능 시험 볼 때나 보였던 신중함을 가했다. 처음에는 야유를 보냈던 사람들이 느려터진 나의 행동에 하나둘 시선을 거두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공과 일을 누른 후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승철이 형, 저랑 교양 같이 듣는 후배예요."
권순영이 몸을 쭉 빼고서 테이블을 가로지르더니 최승철의 팔을 붙잡았다. 최승철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윽고 핸드폰을 거두어 갔다.
"야, 진작 말하지."
당황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주머니 안으로 챙겨 넣은 최승철과 달리 나는 상황을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다. 번호 달라며. 허전해진 손을 달랠 길이 없어 길 잃은 강아지마냥 있으니 김민규가 포크로 감자 튀김 하나를 찍어 내 손에 쥐어 줬다. 권순영이 아는 체를 해 온 것은 의외였다. 애초에 나는 권순영에게 인사하지 않기 위해 버텼고, 권순영은 간간히 이석민이나 김민규만 봤지 내 쪽으로는 전혀 눈길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순영은 참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온 걸 언제부터 알았을까. 이제 와서 아는 척한 이유는 또 뭘까.
나는 결국 "안녕하세요." 하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내 딴에는 조금 큰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었다. 내 수고쯤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을 권순영은 가볍게 눈짓을 했다. 그리고는 곧 시선을 거뒀다. 별일이네. 나는 대수롭지 않게 감자 튀김을 하나 더 먹으려 포크를 잡았다. 그때 웬 여선배 하나가 내 어깨를 붙잡아 왔다.
"아니, 강의도 같이 듣고 이렇게 술자리도 같이 앉았는데 안녕하세요가 뭐야?"
어깨 위로 힘을 가하는 걸 보니 취한 모양이었다. 대화를 엿듣고 온 것 같았다. 취한 사람의 환심을 사는 재주는 없기에 그저 웃었다. 무안하실까 봐 취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분위기 전환에는 소용 없었다. 여선배는 내 목 뒤로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더니 권순영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나갔다.
"안녕, 순영이 오빠 라고 해야지."
"...네?"
내 옆에서 흥미진진하게 관람하던 김민규가 맥주를 뱉어냈다. 순식간에 표정이 딱딱해졌다. 권순영도 마찬가지였다. 하라는 명령조 받은 건 난데 기분 나빠 보이는 건 왜 저쪽인지 모를 일이었다. 듣기 싫다, 이건가. 권순영이 고개를 삐딱하게 비틀고서 대답했다.
"너 취했다. 적당히 마시고 쉬어."
이번만큼은 권순영의 말에 격하게 동조하는 바였다. 여선배는 입을 잔뜩 삐죽이더니 다른 자리로 가 버렸다. 그 뒤에 남은 적막과 민망함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술맛이 달아나 버렸다. 애초에 합석하는 게 아니었는데. 망할 얼빠가 문제였다. 권순영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김민규한테 대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까 왔던 여선배가 붉어진 얼굴로 내 주의를 끌었다. 나는 결국 장단에 휘말렸다.
"오빠라고 불렀어요? 친해지려면 그게 짱인데."
"어, 저기. 아뇨. 아무래도 선배시라..."
"요즘 같은 시대에 선후배가 어디 있어? 먼저 번호라도 달라고 해 봐."
"괜찮은데..."
저한테 왜 이러세요. 왜 슬슬 말을 놓는 거예요. 나는 속앓이를 하며 대충 대꾸 했다. 이를 테면, "전 그런 거 못 해요." 혹은 "나중에 할게요." 정도. 하지만 둘러대도 뭐가 그리 맘에 안 드는지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바로 단념했다. 또다시 이목을 끄는 것보다는 한몸 희생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점점 감당하기 힘들어질 때쯤 김민규의 소매를 붙잡았다. 반응이 없어 보니 김민규의 귀끝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얘도 취한 것 같았다. 결국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나는 여선배의 잔소리를 배경 음악 삼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심결에 권순영을 바라봤다. 마침 권순영도 나를 보고 있었다. 왠지 우스웠다. 둘 다 이게 뭐 하는 건데.
내 속을 읽기라도 했는지 권순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권순영은 여선배를 부축했다. 권순영이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내 번호 갖고 있어. 같은 조라 지난 번에 번호 교환했어. 됐지."
여선배는 권순영을 깜빡깜빡 쳐다볼 뿐이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건지 최승철이 마시던 맥주도 내려놓고서 권순영을 도와 여선배를 옮기기 시작했다. 옮긴다고 하니 표현이 조금 이상했지만 지금 하는 모양새로 봐서는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었다. 나는 슬슬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편에서 한창 즐기고 있던 이석민을 붙잡고 고개를 두리번 대며 김민규를 찾았다.
"김민규! 이리와. 이제 가자."
내 다급한 부름에 김민규가 마지막 잔을 비우고서 겉옷을 챙겨들었다. 말이라도 잘 들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권순영에게 몸을 돌려 꾸벅였다. 권순영이 나를 훑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볼 일 보기에 바빴으므로 무작정 "감사합니다. 강의 때 봬요." 하고 나름 착한 척을 했다. 권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술 기운이 돌아서 그런지 몰라도 제대로 마주하고 나니 전체적인 틀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처음부터 생각했던 건데 별 같잖은 옷들도 멋드러지게 입는 재주가 있어 보였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왠지 민망했다.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김민규나 한 번 더 불렀다. 김민규를 기다리고 있을 때 권순영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 들었다.
"김민규?"
그 입에서 나온 김민규란 이름이 낯설면서도 익숙한 것이라 나는 쉽사리 반응하지 못했다. 권순영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쟤가 그 김민규인가 보네. "
권순영이 김민규를 알아봤다. 그걸 이해하자마자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지금까지 누르고 있었던, 잊고 싶었던 기억들이 솟구쳤다. 지독한 사람이었다. 이제야 그 얘길 화두로 삼다니. 나는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한 티를 여실 없이 드러냈다. 나는 권순영을 이해할 수 없었다. 늦은 심술일까. 방금까지는 그 일에 대해 아무 말 없었잖아. 멘붕의 상태에 이른 내게 권순영은 기어코 두 번째 폭탄을 터트렸다.
"나 권순영 맞으니까 술 깨면 자리에 있었다고 알려 줘." "아니..." "잘생겼냐고 궁금해 했잖아." "......" "네 친구 김민규가." "죄송해요... 기분 나쁜 말한 건 아니에요." "알아." 나는 이전과 다른 권순영의 태도에 쩔쩔매기 바빴다. 권순영은 쉽게 말을 놓더니 마치 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처럼 나를 대했다. 너 왜 반말이세요? 따박 쏘고 싶어도 지은 죄가 있기에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보기엔 어때. 나 잘생긴 편인가." 권순영이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기계적인 웃음을 흘렸다. 재촉하지 않는 걸 보니 애초에 관심 없는 질문인 것 같았다. "다음에 볼 땐 너도 나한테 반말해." 오늘은 내 인생 최고로 창피한 날일 게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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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느림의 미학] |
이제 진도 확 뺄 수 있겠네요. 와... (영혼리스한 축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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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 3까지 나온 마당에 이나은은 진짜 불쌍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