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술 취한 아저씨가 아니다. 맞다. 지구대가 왔다가 갔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세훈이 민증도 안 나온 고딩이라는 것을 인증해주었다─
“야! 니 몇 살이야? 나이까지 깠는데 왜 자꾸 아저씨래?!” “나이가 여기서 왜 나오노? 술 마시면 다 아저씨 아이가?” “아!! 나 술 안 마셨다니까?! 멀쩡하다고!” “아무튼 내는 그런 소리 못 들었습니더. 좋은 말로 보내드릴 때 가이소.” 결국 일을 다 끝마치지도 못하고 오신 미숙이 아주머니, 그러니까 종인의 어머니가 온 후에야 모든 사건이 정리가 되었다. 종인아!!!! 세훈이는 엄마 친구 아들이야! 돌아오신 어머니께 등짝을 세 대 맞은 종인은 전세가 역전됨을 느꼈다. 봤지?ㅋ. 종인은 저를 보고 세훈이 비웃는 것이 느껴졌다. 세훈은 종인의 어머니가 보지 않을 때 종인에게 들릴만큼 작게 속삭였다.
개기면 안돼. 미안하다고, 얼른 들어오라는 종인의 어머니와 함께 세훈은 드디어! 종인의 집에 감격스러운 첫 발을 딛게되었다. 진짜 들어오기 오지게 힘드네. 세훈은 들어오자마자 집 구석구석 훑기 시작했다. 밖에서 보기와는 다르게 생각보다 넓고 깨끗한 내부가 만족스러웠다. 뭐야. 겉에서 볼 땐 귀곡산장이더니 엄청 깨끗하네, 세훈이 집 감상에 빠져있을 때 쯤 거실에선 제2차 대전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김종인이 패망할 독일이라면, 어머니는 영국, 그리고 난 무기 파는 미국정도 되겠군.
“엄마. 내랑 상의도 안하고 이 뭐하는 짓인데?”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세훈의 캐리어을 대신 들고 집으로 들어온 종인이 가방을 팽겨치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엄마는 내하고 상의도 안하고, 내가 이 집에 가장 아이가, 와 혼자 결정하는데. 응답하라1997에서만 보던 속사포같은 거친 경상도 사투리는 세훈의 혼을 쏙 빼놓기 충분했다. 애석하게도 종인의 어머니는 정치를 하지 않으신게 다행일 정도로 독단적인 성격이셨으며, 종인은 세훈이 잠시 신세를 지게되었다는 그런 말은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엄마가 그런 거 하나하나까지 너하고 상의해야되니? 씩씩거리며 사투리를 쏴대는 종인과는 달리 완벽한 서울 말씨를 구사하는 종인의 어머니는 종인에게 침착하게 반격하기 시작했다. 세훈이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함께 하게 된게 그리 아니꼽니? 마음을 그렇게 써서 되겠니? 엄마가 말하지 않은 건 실수였지만 너도 너무 나무라는거 아니니? 도저히 대구에서 아들 키운지 18년 되셨다고는 믿을 수 없는 완벽한 서울 말씨는 과연 정여사의─세훈의 어머니─친구라고 할만하였다. 키도 크고 남자답게 생긴게 툭 건들이면 버럭버럭 대들게 생겨서는, 종인이 어머니의 윽박에 입을 꾹 다무는 모습을 보고 세훈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안 생겨서 마마보인가. 세훈은 만약 종인에게 토끼같은 귀가 있었다면 추욱, 처져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딱 촌놈같이 생긴게 혼나니까 불쌍하긴 하네.
“아주머니. 전 괜찮아요. 몰랐을 수도 있는건데요.” “미안해…. 아줌마가 종인이한테 말을 해놨어야되는데.” “괜찮아요. 종인이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종인이?”
세훈이 '종인이'라는 말을 입에 담자 종인은 세훈을 미쳤냐는 눈으로 쳐다봤다. 종…종인이… 종인의 기억에 의하면 자신을 '종인이'라고 불렀던 '남자'는 없었다. 18년산 메이드인 대구 종인에게 남자의 입에서 성을 뗀 '종인'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은 낯설기 그지 없었다. ─그러니까, 종인의 입장에선 자신을 종인이라고 부른다는 것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징그러운 일이었다.종인의 이름에서 성을 떼고 부르는 사람은 엄마와 종인을 좋다고 쫓아다니는 2반 민주뿐이었다─종인은 들어선 안될걸 들은 사람처럼 세훈을 쳐다보았다. 세훈 또한 스스로 자신의 이런 상냥한 말투가 웃기기그지없었다. 서울 친구들이 지금 세훈이 내뱉은 말을 들으면 토악질을 할 것이다. 성격 같아선 아주머니 아들놈 잘못 키우워도 한참 잘못 키우셨네, 라고 해야 직성이 풀리겠지만 세훈은 일단 자신의 싸가지를 킵 해두기로했다. 언젠가 이 싸가지를 써먹을 날이 올 것이다. 특히 김종인, 저 촌놈새끼한테 말이다. 세훈은 생존을 위한 스캔을 끝 마쳤다. 이 집안에서는 제 1서열 미숙이 아줌마,
그리고 제 2서열...은 나, 라고.
*
시골의 아침은 조용하고 평화롭다. 서울처럼 도심으로 출근하는 차로 북적이는 일도 없으며, 포장도 덜 된 종인의 집 앞 이차선 도로는 흙먼지 조차 날리지 않는 그런 고요함이 있었다. 차가운 공기 사이로 새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가벼운 발걸음은 가을의 날씨와 어울렸다. 이렇게 종인은 아침 일찍 버스를 기다리며 하루를 시작
"야. 김종인."
하는 고요한 수면 위에 돌맹이, 아니 바위를 던진 것은 세훈이었다. 세훈은 아주 당연한 듯 정류장 의자에 자리를 했고 늘 앉던 자리를 뺏긴 종인은 뭐라 말도 하지 못하고 의자 옆에 조용히 서있었다. 종인은 어제 밤 이후 세훈에게 눈에 띄게 얌전해진 모습이었다. 어제 세훈을 내쫓다가 어머니에게 쳐맞은 쪽팔림도 한 몫했지만, 종인 역시 이런류의 또라이는 무시가 답이며, 개무시는 정답인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정류장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 세훈은 누가봐도 완벽한 서울 사람이었다. 쫙 줄인 교복 바지와 단추 하나 제대로 잠그지 않은 셔츠는 서울 양아치의 표본이라 해도 될만큼 손색없었다.
"와." "버스 언제 와? 빨리 온다며." "곧 온다." "추워죽겠는데..." "단추 채워라." "싫거든?"
세훈은 촌구석은 버스도 늦게 온다며 투덜거리며 다시 휴대폰에 집중했다. 태연자약한 세훈과 달리 종인은 도무지 세훈의 서울 말씨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머스마가 '싫거든'이 뭐꼬…. 조용한 정류장은 세훈이 애니팡하는 소리만 들릴뿐이었다. 어색하다. 세훈은 종인이 어색하지 않은건지, 아예 신경을 안 쓰는건지 조금도 불편하거나 어색한 표정을 찾을 수 없었다. 뿅.뿅. 끼악. 괴상한 소리만이 적막을 채우기 시작했다. 한편, 자신을 전혀 어색해하지 않은 세훈을 보며 종인은 새삼 서울 녀석들의 붙임성에 감탄도 했다더라. 종인은 어제 처음 본, 세련된 본투비 서울소년 세훈이 그저 어색하고 불편할뿐이었다. 종인은 괜히 신발코로 길바닥을 한 번, 두 번 치기 시작했다. 가시나처럼 허애갖고 꼭 기생 오래비처럼 생기가….
"아. 너. 그 발 시끄러워." "..."
뜨끔, 했다. 종인은. 이것이 세훈과 종인의 석달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