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만의 시간
3부
8.
“자고 온다더니?”
“…….”
“너, 종인이랑 싸우기라도 했어?”
“…엄마.”
“응, 왜.”
“나 배고파.”
도망치듯이 그 집에서 나왔다. 당황한 혜인 누나가 나를 붙잡았지만 갑자기 해야 할 일이 생겼다며 말도 안 되는 핑계까지 대면서 누나의 손을 뿌리쳤다. 마음이 지쳐서일까, 몸까지 지치는 느낌이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며 집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이 와중에 배는 고픈 거다. 그래서 어이가 없어 나 혼자 웃었다. 배고프다는 내 말에 엄마는 별 물음 없이 밥을 차려준다. 식탁에 앉아 잘 넘어가지도 않는 밥을 꾸역꾸역 입 안에 쑤셔 넣었다. 일단은 뭐라도 좀 먹어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갈 것 같았다. 밥을 퍼 올리고, 반찬을 집어 들면서도 자꾸만 누나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아니면 누나가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닐까. 입 안에 가득한 밥알이 모래알이라도 되는 것처럼 퍼석하니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나서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보려 해도 그게 잘 안 된다. 지금 내가 정상인 거 맞지? 누구라도 이 상황에 화가 나서 날뛰어야 되는 게 맞는 거지?
“밥 더 안 먹어?”
“다 먹었어.”
“옆집에서 무슨 일 있었니?”
“일은 무슨….”
“좋다고 나가던 애가 갑자기 들어와선 울상을 짓고 있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내가 언제 그랬어.”
“엄마한테 얘기 안 한다, 이거지?”
“아 진짜 그런 거 아니거든요. 암튼, 나 과제 하러 들어간다.”
더 이상은 못 먹을 것 같아서 수저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으로 들어가려다 싱크대에 놓인 컵을 집고 냉수를 가득 따랐다. 냉수 먹고 속이나 차려야지. 아, 화난다. 화가 나지만 일단 이성적으로 생각하려면 조금 가라앉히는 게 필요해. 그런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 때문에 애써 태연한 척 노력하며 물이 가득 담긴 컵을 들고 내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발,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일어나자마자 밥도 안 먹고 바로 김종인 보러 갈 거라고 부리나케 뛰어갔는데. 이 무슨 봉변이야. 뭐라고? 여자? 여자가 생겨? 마침 손에 쥐고 있던 컵을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찬 느낌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다. 빈 컵을 책상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고 성난 걸음으로 책상 앞에 걸어가 의자를 빼 앉았다.
“아….”
가방에 고이 모셔둔 과제를 꺼내들었다. 이건 과제가 아니라 노동이라고 생각하지만, 지금 뭐라도 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혀야 될 것 같았기 때문에. 물론, 생각만큼 쉽지는 않은 일이다. 화가 났는데 이성 챙기게 생겼어, 지금?
찢어질 듯이 노트를 넘기고 펜을 집어 들었다. 손이 부르르 떨린다. 이 상태로 제대로 글자를 쓸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개의치 않고 비어있는 하얀 종이위에 한자를 적어 내려갔다. 망할, 한자. 시발. 망할, 김종인. 뭐? 여자? 여자가 생겼다고? 종인이가, 여자…가 생긴 게 말이 돼? 누나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김종인은 고2때부터 나랑 연애했고, 지금도 연애하고 있는 건 난데. 여자라니. 여자는 무슨. 누나가 뭔가 착각을 했을 거라고, 그건 절대 아닐 거라고. 머리를 세차게 저어댔다. 그런데도 자꾸만 머릿속엔 경보음이 켜진 채 꺼질 생각도 않고 잘도 돌아다니고 있다. 종인이와, 알 수 없는 모습을 한 여자가 자꾸만 생각이 난다. 직접 두 눈으로 본 것이 아닌데도.
그에, 갑자기 온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쥐고 있던 펜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누나의 말이 무엇이든, 종인이는 아닐 거라고, 그건 절대로 아니라는 생각이 먼저였어야 했다. 연인이든 무엇이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믿음이라고 생각하던 나였는데. 나는 너를 믿지 못하는 걸까. 왜 나는…,
[일어났어?]
[일어났는데 왜 연락이 없어(눈물)]
액정화면에 떠있는 너의 메시지를 보다가 책상에 그대로 엎드리고 말았다. 아무것도 보기 싫고, 아무것도 듣기 싫고. 아무것도 하기가 싫다. 아무것도. 그 어떤 것도, 지금은 모두다 방해가 될 뿐이라고. 나를 좀, 가만히 내버려두었으면 좋겠다.
‘아, 너 몰랐나보네.’
‘…….’
‘김종인 여자 생긴 거.’
누나의 말이 귓가를 떠나지 않고서 나를 괴롭힌다. 지금, 가장 슬픈 건. 종인이에게 여자가 생겼다는 말의 진위여부가 아니라 내가, 김종인을 믿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왜 너를 의심하게 되었을까. 우리 처음 만나던 그 때였더라도, 지금처럼 행동했을까. 의문이 든다.
“…….”
그동안 우리를 지나갔던 모든 것들이 자꾸만 떠오른다. 대학이 갈리게 되면서, 공통점이 없어져 같이 있어도 대화가 잘 되지 않고. 처음엔 안 그랬는데, 대화가 끊기는 게 싫어서 괜히 쓸데없는 말까지 하게 되고. 그러고 나서는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 후회하기 일쑤에. 자꾸만 반복되는 일상 때문에 만나도 할 말이 없고. 옆집인데도 불구하고 각자가 바빠서 얼굴을 보기도 힘들고. 처음과는 달리 그 애만 바라보고 그 애만 기다리는 나를 발견하게 되고. 그 애의 연락이라면 내 일을 모두 뒤로 한 채 그 애에게 달려가고. 그 애의 말이나 행동 하나에 감정기복이 너무나 심하게 변하고.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변한 걸까. 그리고, 너는 언제부터 그렇게 변한 걸까. 우리는, 왜 이렇게 변한 걸까. 종인아. 내가 너에게 물으면, 너는 대답해 줄 수 있어?
一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늦잠까지 자놓은 터라, 밤에 잠이 안 올까봐 걱정한 게 무색할 만큼 낮잠을 잤다. 그것도 아주, 아주 심각하고 중요한 고민을 하던 와중에. 나도 참 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혼자 머리도 정리하고, 눈도 부비며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다.
“…일어났어?”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였지만 그래도, 놀라서 얼른 고개를 돌려 확인해보았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김종인이 내 침대에 자리를 잡고 누워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책상위에 올려져있던 내 노트와 펜을 쥐고서.
“…….”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냥 그 애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잠에서 깬 나를 한번 바라보고, 다시 시선을 내려 내 과제를 써내려가던 종인이가 다시 한번 내게 시선을 주면서 말한다.
“안 와?”
사실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 몽롱한 상태라서 헛것을 보고 있나 싶기도 하고 아니면 정말로 꿈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아직 덜 깼어?”
“…….”
“이거 꿈 아니거든? 그러니까 빨리 이쪽으로 오세요. 도경수씨.”
꿈, 아닌가보다.
“…뭐해.”
자다 일어나서 그런지, 목소리가 잠겨있다. 큼큼, 거리며 목을 풀면서 그 애가 있는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가자마자 김종인이 내 팔을 끌어당겨 나를 침대에 앉힌다. 그 애 앞에 놓인 걸 바라보니 내 과제가 맞다. 원래는, 내 과제를 대신 해주고 있는 그 애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왜 이렇게 예쁜 짓만 골라서 하냐고 말하면서 그 얼굴에 뽀뽀해줬을 텐데. 지금은 그러기가 싫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랬더니 종인이가 나를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으며 그런다.
“나 착하지?”
“응, 착하네.”
“어?”
“…왜.”
“근데 반응이 왜 이렇게 시큰둥해?”
“내가 뭘….”
“기분 안 좋은 일 있어?”
“...그런 거 없어.”
“그럼 어디 아파?”
“아니...”
“…….”
“…….”
“근데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자다 일어나서 그래. 방금 자다 깼잖아.”
“진짜야?”
“…응.”
“그 말 믿어도 돼?”
“그렇다니까..”
억지로 웃어보였다. 그랬더니 그 애가 안심한 듯 다시 고개를 돌려 내 과제를 대신해서 써주는데 열을 올린다. 그 애의 까만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억지로 올라가있던 입 꼬리를 끌어내렸다. 버릇처럼 한숨을 내쉬려다 참았다. 그렇지 않아도, 잔뜩 기분이 가라앉아있는 나를 의심하고 있는 녀석인데 여기서 한숨까지 더해지면 집요하게 캐물을 걸 알기에.
“오랜만에 데이트 좀 하려고 했더니만 집에서 잠이나 자고 있고….”
“…….”
“밤낮에 바뀌어서 어떡하냐, 너.”
“…….”
“지금 방학도 아닌데 자꾸 게으름 피울래? 혼난다, 진짜.”
습관처럼 잔소리를 토해내는 너의 정수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신뢰가, 믿음이 무너졌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지. 쏙쏙 박히던 너의 말도 들리지가 않는다. 도대체, 너의 어떤 모습을 보고 누나가 그렇게 생각한 걸까. 어떻게 했기에, 여자가 생겼다고 오해를 할 수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누나가 오해를 한 게 아니라, 정말로 너에게 여자가 생겼다면. 넌 어떻게 내 앞에서 태연할 수가 있어? 뭐가 진실이고 뭐가 거짓인지 모르겠고, 나는 왜 너를 믿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너를 완벽하게 믿었다면 누나의 말에도 그냥 웃어넘길 수 있었을 텐데. 난 왜 그러지 못했는지. 나를 이렇게 만든 게, 네가 아닌지.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릿속은 꼬여서 정리가 안 되고, 자꾸만 몸에 힘이 빠진다.
“대답 안하지.”
“…응.”
“아, 성의 없어...또 내 말 한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고.”
“그런 거 아니야...”
“숙제까지 대신 해주고 있는데, 내 말도 안 듣고.”
“…….”
“못됐다.”
“…….”
“대꾸도 안하네?”
“나 못된 거 하루 이틀이냐. 그리고, 네가 더 못됐거든?”
그렇게 말하면서 짧아진 그 애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예전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오는 조금 긴 머리칼의 느낌이 참 좋았었는데.
“종인아.”
“응.”
“너, 머리 왜 잘랐어?”
“그건 왜 물어?”
“그냥, 궁금해서….”
종인이가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노트도 탁하고 접는다. 그걸 침대 밑으로 내려놓더니만 몸을 일으켜 앉아, 옆에 있던 나를 마주보고서 눈을 맞추며 웃는다.
“그냥. 자르고 싶어서.”
“…나도 머리 자를까?”
“안 돼.”
“왜?”
“너 머리 자르면, 되게 귀엽단 말이야.”
“…….”
“귀여워서 누가 데려가면 어떡해. 내 껀데.”
그 말에 그냥 말없이 피식 웃었더니, 왜 웃냐며 팔을 툭 친다. 저도 웃고 있는 주제에.
“아…. 뽀뽀하고 싶은데…못하겠어.”
“…왜?”
“밖에 어머니 계시잖아….”
“…….”
“전에, 우리 누나처럼 갑자기 벌컥 문이라도 열고 들어오시면 큰일나잖아….”
아쉬워죽겠다는 눈으로 두 손으로 내 볼을 감싸며 입술을 꾹 깨물더니만, 닫혀있는 방문을 한번 바라보고, 또 고개를 돌려 내 얼굴 한번 바라보고. 결국엔 녀석이 못 참고 잡고 있던 내 얼굴을 끌어당겨 짧게 입 맞추고 만다. 금방 닿았다 떨어지는 그 느낌이, 생소해서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경수야.”
“응.”
가까이 있는 너의 새까만 눈동자 속에 내 모습이 비친다.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응.”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는 네 목소리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다.
“나만 믿고…,”
“…….”
“…나만 믿어. 아무튼.”
그 말에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웃고 말았다. 그랬더니 너도 대답을 강요하지 않은 채 그저 나를 따라 웃고 만다.
종인아.
나는, 잘 모르겠어.
한참 동안이나, 내 얼굴을 바라보던 그 애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끌어안고 제 품에 가두었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그 따스한 온기 속에서 눈을 감지도 못하고,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나는, 너를 못 믿는 것 같아….
***
있을때 잘합시다^0^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인스티즈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