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박 몇 일인데?"
- 아예 귀국한 모양인 것 같던데? 집도 안 알아보고 급하게 온 모양이야. 며칠 동안 K호텔에 머물다가 옮길 생각이래. 나도 깜짝 놀랐다야
"왜 아무 말도 없이 온거지…. 이유는 못 들었어?"
- 들었으며 내가 너한테 전화했겠냐. 그리고 물어 볼 정신도 없었고, 그럴 분위기도 아니였어. 누나 말이야 뭔가, 예전이랑 많이 달라진 것 같더라.
막 샤워를 마친 종인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털썩, 침대에 앉았다. 벌써 3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입에 오르기 쉬운 이름은 아니었다. 가만히 여자의 이름을 곱씹으며 가슴께의 흉터를 바라보던 종인은 태민의 재촉에 잡생각을 지우려 머리를 흔들었다.
- 야 김종인. 듣고있냐? 어? 야!
"듣고있어 새꺄. 그리고 바뀌긴 뭐가 바꼈겠냐. 그냥 오랜만에 봐서 기분 탓이겠지."
- 병신아 그런 뜻이 아니잖아. 아니 내가 연습 중간에 형들이랑 잠깐 쉬러 나왔는데 어디서 많이 본 여자가 서 있는거야. 처음엔 그냥 직원인가 싶어서 지나칠려고 했는데 윤실장님이 나오면서 누나 이름을 부르는거 있지? 나 진짜 뒷목 잡고 쓰러질 뻔했다. 선글라스 끼고 있어서 더 못알아봤나봐.
"근데ㅡ."
- 여기서부터가 이상하다는거야. 오랜만이니깐 존나 반가워서 기범이 형이랑 막 달려가려고 했거든? 근데 진기 형이 완전 정색하더니 딱 제지하는거야. 가지말라고. 일단 오늘은 아는 체 하지 말라고.
"인사를, 하지말라고 했다고? 형이?"
- 어. 그럴 사람이 아닌데 갑자기 그러니깐 당황스럽더라. 진짜 뭐 있는거 아니냐? 더군다나 이 주말에 윤실장님까지 출근하신거 보면…. 수상하단 말이지."
"………."
- 너 뭐 들은거 없냐? 누나랑 친했잖아.
"있으면 귀국하는 것도 몰랐겠냐. 일단 알았다. 이따 보자"
전화를 끊은 종인이 아직 젖은 머리를 채 털지 못하고 침대에 풀썩 누웠다. 친했다ㅡ라. 우스운 어감이었다.
태민의 말을 하나 씩 되짚으며 생각에 잠긴 종인이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준면의 말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여전히 손에 쥔 핸드폰을 만지작 거린 채 하염없이 천장을 바라만 보고있었다. 꼭, 예전의 누나를 닮은 새하얀 천장.
수 십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는 종인 때문에 잔뜩 신경질이 난 준면이 살짝 부은 얼굴로 거칠게 방문을 열었다. 쿵쿵, 거리는 발걸음으로 재빠르게 종인에게 다가간 준면이 여전히 여유를 부리는 듯한-물론 준면의 눈에만-종인의 등짝을 사정없이 내려쳤다.
"아, 형! 아프잖아!"
"아프라고 때리지 그럼! 예뻐서 때리냐? 너 내가 도대체 몇 번을 불렀는데 대답도 안하고 아직도 이러고 있어? 스케쥴 늦었다고 서두르랬잖아!"
"알겠어요, 알겠어. 옷 갈아 입고 바로 나갈테니깐 먼저 내려가있어."
아침이면 매니저 형과 함께 11명의 멤버들을 깨우느라 유달리 히스테리가 가득해지는 준면을 알기에, 밍기적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난 종인이 다시 머리 터는 시늉을 하며 준면을 달랬다. 그런 종인의 행동에 한층 누그러진 준면은 이내 거실에서 투닥이는 백현과 찬열의 목소리에 다시 얼굴이 시뻘개져선 방을 빠져나갔다.
이미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어쩌면 지겨울 법도 한 흔한 숙소의 아침 풍경이었지만, 종인에게 오늘만큼은 뭔가 기운 빠지고 묘한 기운까지 감도는 것만 같았다.
이웬디. 3년 만에 대한민국 톱스타 아이돌인 그녀가 예고도 없이 한국 땅을 밟았다.
상속자들
"로케이션 준비는 어떻게 하고 이렇게 급하게 귀국을 했어. 미리 귀뜸이라도 해줬으면 숙소라도 잡아줬을거 아니야."
"그딴 시시콜콜한 안부 묻자고 귀국한게 아닌거, 알고 계실텐데요?"
"거 참ㅡ. 사람이 나이가 들면 여유로워지는 법이지. 나도 자네 때는 참 불같았단 말이야. 딱, 지금의 자네처럼."
꽤나 신경질 적으로 머리를 넘긴 웬디가 성난 눈으로 윤실장을 노려보았다. 그런 웬디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유롭게 차를 우려내는 윤실장의 모습에 결국 한 발 물러선 웬디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바래왔던 순간이 코 앞에 다가왔는데도, 아직 마음은 겉모습 만큼 냉철해지지 못했다. 꼬박 3년을 모든 걸 버리고 기다려왔던 순간들인데.
"멤버들은 어쩌고 혼자 귀국했어?"
"성질 급한거 잘 아시잖아요. 그 얘기 듣고도 가만히 있을 것 같았어요?"
"로케이션은?"
"거의 준비 끝났어요. 마무리 단계라, 멤버들한테 얘기하고 먼저 귀국한거에요. 가족들이랑 회사 식구들한테도 공항에서 미리 전화로 다 말씀드렸구요. 아, 물론 SM이랑 이 쪽 식구들한테는 말 안했네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지만."
"그렇게 날 세우지마. 어차피 같은 길 걸어가게 될 걸, 뭘 그렇게 망설이고 있어. 아직도 무서운 17살 어린 애 마냥."
조용히 찻 잔을 내려놓는 윤실장의 모습에 테이블 밑에 있던 웬디의 손이 붉어졌다. 자른지 얼마 안된 것 같았는데도 금새 길어진 손톱 탓에 피가 살짝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깨물던 입술을 풀고 애써 침착하게 심호흡을 한 웬디가 마른 침을 한 번 삼켰다. 자신을 얕보는 듯한, 아직 애송이로 보는 윤실장의 눈빛이 몸서리치도록 싫었지만 차마 티를 낼 수도 없었다. 왕관을 쓰려면 동지를 만들고 성벽을 세울 줄 알며, 때로는 적과 필요에 의한 손을 맞잡아야하기도 하니깐. 이 바닥은, 그렇지 않은면 나약한 지난 날의 자신으로썬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으니깐.
"갑자기 상의도 없이 일정을 먼저 앞당기시겠다, 일방적으로 통보하신건 우리 쪽이 아닐텐데요?"
"살다보면 변수도 생기는 법이지."
"그 변수가 오롯이 당신들을 위한 것이겠지만요."
"손을 잡으면, 자네의 것일 수도 있는거지않겠나."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생각에 잠긴 듯, 금테로 빛나는 자신의 명패를 한참을 바라보던 윤실장이 다시 차를 한모금 마셨다. 마치 그 순간이 슬로우 모션으로 천천히 이어지 듯, 길게만 느껴지는 웬디였다.
아까 로비에서 자신을 본 샤이니 멤버들을 통해 벌써 자신의 귀국 사실이 알려진 모양인지 핸드백 속에서 울리는 핸드폰 진동은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다. 신경질 적으로 핸드백에서 핸드폰을 꺼낸 웬디가 액정에 뜨는 메세지와 이름에 잠시 멈칫했다.
"자네는 정말 자신 스스로가,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보지?"
"그럼요. 그래서 꼬박 3년을 그렇게 보냈는걸요. 실장님께서도 잘 아실텐데요."
"…그렇지. 3년. 벌써 3년이나 흘렀구만."
"후회하기에도 늦었고, 후회하는 것도 우습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후회할 생각도 없구요."
"젊은 이들 패기는 그래서 좋아. 두려움이란게 없지."
"있어도 없게 만들어야 하는 거죠."
"………."
윤실장 명패의 금테, 웬디의 손에 끼워진 금색 반지가 함께 창문으로 들어오는 겨울 햇빛에 반사되었다. 그 기나긴 침묵과 신경전이 슬슬 지루해질 때쯤, 마침 두어번의 노크소리와 함께 사무실 문이 열리고 윤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볍게 목례를 한 윤호는 지난 날의 자신처럼 불안한 모습이었고, 위치가 뒤바뀐 듯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엉켜붙었다.
승리의 미소, 하지만 도전과 승부수를 알리는 웬디의 미소를 윤호가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좀 전과는 다르게 한층 도도해진 모습으로 핸드백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난 웬디가 여전히 문 쪽에 서 있는 윤호의 옆에 가 선 채로 전쟁을 선포했다.
"내일 오전 중으로 기사 나가도록 해주세요. 안된다면 되도록 빨리, 이 틀 이내에."
"………."
"기사 제목은 그게 좋겠네요."
"………."
웬디와 윤호의 시선이 이번엔 가까운 곳에서, 아주 위태롭게 마주쳤다.
"SM엔터테이먼트 상속자 이웬디. 대주주로 새 출발을ㅡ."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