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지만 많은 의미를 내포한 웬디의 말이었다. 웬디의 말이 끝나자 박수를 치는 사람은 보아 혼자였다. 들고있던 샴페인 잔을 잠시 내려 놓고, 웬디가 처음 동경했던 그 미소와 그대로 웃고있었다. 그런 보아를 말 없이 쳐다보던 윤호는 자리를 박차고 테라스로 나갔다. 이외의 아무런 반응도 없었고 변화도 없었다.
강단에서 내려 온 웬디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슈퍼주니어를 보면서 씩- 웃기만 했다.
"이웬디 포스 아직 안 죽었네."
"그럼, 오빠들 동생인데. 벌써 한 물 가면 어떻게해?"
"힘내 웬디 이 자식아. 우리가 있잖아."
바라만 보고 있어도, 곁에 없다한들 생각만 해도 든든한 사람들이었다. 하나같이 유독 정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징어와 웬디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곁에 두고 서로 예뻐하고 챙겨주기 바쁜 사람들이라, 더군다나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라 더욱 그랬다. 잠시 위축됐던 웬디의 마음이 정수와 한경, 기범 세 사람의 빈 자리를 느끼면서 다시 곧게 다잡아졌다.
모퉁이를 돌아 웬디가 본격적으로 연회장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제 전쟁을 선포했으니, SM 주식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투자자들 사이에서 수 많은 말들이 오갈 것이다. 저희들끼리 물고 뜯으며 웬디 자신처럼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신중한 선택을 할 것이다. 아직 그 사람들을 건드르기엔 너무 섣부르고 이르다. 웬디가 먼저 손을 쓰지 않아도, 어떻게든 달려들 사람들이니 일단 지금은 지켜보는 편이 나았다.
지금 공략할 수 있는 최대의 선은 가장 가깝지만 어려운 SM 소속 아티스트 들이었다. 저마다 매니저와 리더의 말을 들으며 이야기에 빠진 아티스트들을 둘러보던 웬디가 응원의 말을 건네는 슈퍼주니어를 뒤로 한 채, 엑소에게 다가섰다. 자신도 모르게, 종인을 보자마자 옮겨진 발걸음이었다.
"다들 오랜만이네. 내가 떠날 때만해도, 으르렁으로 막 인기몰이 할 때였는데 말이야."
"웬디, 잘 지냈어?"
"새삼스럽게 뭘. 엑소는, 다들 잘 지낸거죠?"
갑작스런 웬디의 등장에 놀란 엑소가 꾸벅 인사를 건네왔다. 엑소 역시 오랜 연습 생활 끝에 데뷔를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기에 누구하나 할 것 없이 구면이었지만, 가장 늦게 EXO Planet 프로젝트에 박탈되어 오디션을 합격한 종대와 경수, 백현은 조금 어색함 감이 있었다. 경수에 비해 비교적 사교성이 좋은 종대와 백현 역시도 심상치 않은 회사 분위기를 짐작한 것인지, 웬디의 등장에 더욱 군기가 들어가 굳어있는 모습이었다.
웬디는 준면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웬디 자신의 편에 서달라고 부탁하기에도, 염치 없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크리스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약간 보수적인 준면과는 달리 크리스는 관대한 편이었다. 자신의 일과 꿈에 관해서는 조금 엄하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몸에 벤, 대한민국 정서와는 다른 외국인인건 사실이었으니깐.
준면보다는 크리스 쪽이 훨씬 빠를 것이라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들었다. 우려했던 두 리더 체제가 이럴 때 도움이 될줄은 몰랐네.
"우리 쪽보다 선배님들 한테 가는게 더 효과적이지 않아?"
"꼭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야겠어? 아직 움직일 생각 없어. 생각 할 시간을 줘야지 나도."
"…진짜 할 생각이냐."
"언제는 내가 한 번 실행한거 무른 적있었어? 알면서 물어봐."
"알다시피 굳이 나한테만 결정권이 있는 건 아니야. 나랑 크리스는 최대한 멤버들 결정을 따를 거고ㅡ, 또"
"나는 그런 멤버들을 뒤흔들어놔야 된다는 이야기인가?"
"이웬디ㅡ."
"농담이야. 그럴 생각 없어. 회사에서 제일 막내인 팀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힘들거란건 잘 알고 있으니깐. 그리고, 김준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물론 잘 알고있고."
여유롭게 샴페인을 넘기는 웬디의 모습에 오히려 졌다는 듯 웃음이 터진 건 준면이었다. 웬디는, 자신이 처음 일생을 받쳐 사랑했던 여자였고 또 존경하는 가수였다. 위태로운 상황에서, 어쩌면 서로 다른 길을 걸어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웬디는 한결같았다. 8년 전, 회사에서 처음 마주쳤던 그 모습 그대로.
변화는 없어도 변함은 있을 것이다ㅡ. 처음 웬디가 준면에게 한 말이 이제서야 이해가가는 준면이었다. 웬디는 변하지 않았지만 변했다.
풀어진 분위기와는 다르게 오히려 더 암울해진 것은 종인이었다. 종인에게 웬디는 준면과는 다른 의미로 꿈이나 동화 속에 존재할 것만 같은 환상 속의 사람이었다. 꿈 속에만 나올 것만 같은 요정, 피터팬의 그 웬디. 종인에겐 그런 사람이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자신의 뮤즈와도 같은 존재였던 웬디가 너무 낯설게만 느껴졌다. 웬디가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졌다. 그리고 평생 함께할 것 같았던 꿈이, 그 색이 바랬다. 지금 종인의 눈 앞에 있는 웬디는, 여태껏 자신이 알던 사람이 아닌 것만 같았다.
가벼운 인사와 농담으로 끝난 대화를 뒤로하고 테라스에 있는 윤호에게 발걸음을 옮기는 웬디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종인이 웬디를 따라갔다.
"웬디 누나."
"…종인이?"
"나한텐 인사 한 마디 없이 그냥 가네요."
"………."
"솔직히 나는 관심 없어. 이런 쪽에. 알잖아요, 그저 내가 춤 출수 있고 멤버들이랑 같이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늘 감사한다구요."
"종인아ㅡ."
"내가 언젠간 말한 적있지? 누나는 나의 꿈과도 같은 존재고, 그래서 누나가 좋다고."
"그래. 그랬었지. 서로 그런 존재가 되자고, 약속도 했었던가."
"맞아요. 기억하네요. 근데, 누나."
"………."
"징어 누나 죽었을 때처럼, 꼭 멀게만 느껴져요. 지금의 누나가."
"…종인아. 그래. 날 이해 못해도 좋아. 아마, 이해 못하겠지."
애써 담담하게 이어지는 웬디의 말에 먼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종인이었다. 꼭 사탕을 빼앗기는 어린 애 마냥 불안한 모습에, 웬디는 다시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바로 잡았다.
종인아, 지금 이 악몽이 끝나면ㅡ. 과연, 우리가 예전 같을 수 있을까? 날 올곧게 바라봐주는 그 따뜻한 눈빛이, 네 시선이. 달라지진 않을까? 나는 그게 제일 무서워.
종인아. 이제 너는 내게, 독일 뿐이야. 길고 지독할 악몽이 끝나면, 혹시 다시 내 손을 잡아준다면. 그 땐 우리가 진짜 다시 웃을 수 있을까ㅡ.
안녕ㅡ. 눈물을 그렁인 채 뒤돌아서는 웬디를 다시 한번 종인이 붙잡았다. 흔들리는 목소리가, 아직 앳된 그 목소리가 결국 웬디를 무너지게 만들었다.
"누나. 우린 늘 가까이 마주 앉았어도,"
"………."
"까마득히 먼 사람이었나봐."
"………."
"난 언젠가, 꼭 누나를 잡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어. 뜬 구름같고 하늘같은 사람이어도, 그럴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어."
"………."
"근데, 이것도 악몽이었나봐. 참 달콤한 꿈이라고 생각했었는데ㅡ."
"………."
"그래서 그런가? 지금도 그렇게 돌아서는 누나를, 붙잡을 수가 없네요."
안녕ㅡ. 종인아. 안녕, 나의 순수했던 꿈들아. 안녕ㅡ. 내가 너무나도 사랑했던 내 사람아.
상속자들
테라스에 느껴지는 인기척에 윤호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뒤를 돌다, 들어오는 웬디를 보곤 다시 표정이 굳었다. 윤호의 표정은 신경도 쓰지 않고 연회장 밖으로 나온 웬디가 아직 추위가 가시지않은 날씨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웬디의 행동에 작게 한숨을 쉰 윤호는 입에 여전히 담배를 문 채, 자연스레 턱시도를 벗어 의자에 앉는 웬디에게 둘러주었다.
"추운데 왜 나왔어."
"나랑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건 아니고?"
"…꼭 그렇게 정곡을 찔러야겠냐."
"돌려 말하는거 싫어하는거 알면서 뭘 그래. 새삼스레."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하는 웬디를 보곤 결국 윤호가 힘 빠지게 웃었다. 남은 담뱃재를 모조리 털은 후에야 웬디 옆에 윤호가 앉았다. 오늘따라, 맑기만 한 날씨에 별이 참 밝게떴다. 자신의 마음도, 저렇게 빛났으면 좋으련만, 하고 생각한 윤호였다.
한참의 적막을 먼저 깬건 이번에도 웬디였다. 종인을 보낸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모양인지, 말투에 쓸쓸함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오빠도, 내가 밉겠지?"
"난 지금 내가 제일 밉다."
"왜?"
"…그냥. 왜 너처럼 용기가 없었을까, 싶기도 하고. 아직도 용기 못내는게 한심하기도 하고."
"나라고 용기가 나서 한게 아니였잖아. 벼랑 끝에 몰아붙이니깐, 택할 수 있는 길이 이게 마지막이었던거지."
"웬디야ㅡ."
"응."
"언제…이렇게 컸냐.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도 어린 애 같았는데."
"이제 나도 스물 다섯이거든?"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됬나."
두 사람이 다시 말 없이 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시간은 무심하고 야속하게 흘러 열다섯의 앳되고 여렸던 소녀는 이제 스물 다섯의 덤덤한 어른이 되었고, 스물 하나의 당찼던 소년은 서른 하나의 나약한 어른이 되어 다시 마주했다.
"전역하자마자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조금, 여유가 생기겠지 싶어서 차근차근 정리 할 생각이었거든."
"오빠한테도 역시나 강요할 생각없어. 내 편에 서달라고 말하는거, 그리고 그 부탁을 실행에 옮기는게 오빠에게 있어서 얼마나 끔찍할지 잘 알아."
"………."
"용기가 없어서 세 명을 먼저 떠나 보낸 후에야, 자신이 살겠다고 발버둥친다. 그렇게들 떠들어대겠지."
"…아마?"
"스스로도 그런 자신이 싫을테고. 여전히 사람들이 무서운거고. 근데, 그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야."
"우린, 아직 덜 컸나보다."
"그러게ㅡ."
"웬디야. 시간을, 나한테 조금만 더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줘. 대신 절대 빗나가는 일은 없도록 할게. 내가 스스로 더 용기를 가질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줘."
"응. 그러자. 강요 할 생각 없다고 했잖아."
가만히 눈을 감으며 이어진 웬디의 말에 그제야 편하게 웃은 윤호가 웬디를 꼭 안았다.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웬디 너는, 어쩌면 나보다 먼저 어른이라는 경계에 용기를 냈을지도 모르겠구나.
한결 가벼워진 듯한 얼굴로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간 윤호의 뒷모습을 쫒던 웬디가 다시 까만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오빠, 그 때의 나는 할 수 있는게 고작 아무렇지 않은 척 웃는거였어. 하지만 지금의 오빠와 나는 그렇지 않으니깐, 조금만 더 빨리 용기를 내길 빌게.
상속자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연습실로 들어 온 종인이 웬디의 품에 안겼다. 팀장실로 불려간 아이들이 하나 둘씩 돌아올 때 좋지 못한 표정인걸 봐서는 아무래도 이번 데뷔도 엎어졌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은 웬디였다. 그래도 종인은 혹시나 했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오는 표정이 썩 좋지 못한 것을 보니 종인 역시 이번 데뷔조에는 포함이 되질 않았나보다.
"웬디 누나."
"괜찮아, 종인아."
"누나아ㅡ."
"…응."
"나, 최종 발탁됬대요. 이제, 데뷔한대 진짜로."
"진짜? 정말로? 확정된거야? 어떡해! 대박!"
가만히 종인의 등을 토닥이던 웬디가 웅얼거리 듯 던져진 종인의 말에 깜짝 놀라며 품에 안은 종인을 떼어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종인은, 감격스러운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웃고있었다.
"대박이다 진짜. 거봐, 임마! 내가 뭐랬어! 넌 될 놈이라니깐! 진짜 축하해. 진짜, 진짜로!"
"고마워요. 누나, 진짜 고마워. 누나 덕분이야!"
"야이씨, 또 내 덕분일건 뭐가있냐. 장하다, 김종인! 잘했어! 어이구, 내 새끼ㅡ."
쑥스러운 듯 종인의 어깨를 툭, 때린 웬디가 계속해서 종인을 칭찬했다.
오래 전부터 틈 없이 준비해 온 회사의 큰 신인 그룹 프로젝트에 드디어 종인이 선발되었다. 그게, 2008년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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