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일이십니까?"
"대뜸없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달이 뜨고 있는데, 어찌 저를 안 보내시냐는 말입니다. 매번 칼같이 보내시더니."
아이가 정곡을 찔렀다. 당황한 정국이 벌써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더니 한참이나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얼마 같이 있지 않은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아쉬워진 정국이었으나 제 구레나룻을 매만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일어난 정국을 따라 아이도 함께 움직였다. 오늘따라 잠잠한 달빛이 그들을 비추어 마치 이 지구에 둘만이 존재하는 듯했다. 아무 말도 없이 여름의 뜨뜻미지근한 산속의 분위기와 정국과 아이, 그들간의 오묘한 기류를 체감하며 천천히 걸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런 둘의 앞에 윤기가 섰다.
"이 밤에 어딜 가느냐."
"어, 저 집에 갑니다."
"늦은 시간에도 가는군. 밤중의 산은 조심하거라."
"예? 예."
아이에게 말을 하던 윤기의 눈빛은 정국에게 선명히 꽂혀있었다. 슬쩍 입꼬리를 올려 웃는 윤기를 본 아이는 그렇게 떠나고 둘은 그대로 자리에 남았다. 구미호와 흡혈귀, 얼마나 황당하고 기묘한 만남인가. 정국은 혼자 떠나는 아이가 걱정되었지만 제 앞의 구미호를 먼저 어떻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아이와 윤기는 이미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었다지만, 정국과 윤기는 처음이었다. 아이로 인해 오래전 서로의 냄새를 확인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저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윤기가 대놓고 귀찮다는 표정을 드러냈다.
"갈 길 그대로 가시오."
"뭐라는 건지 모르겠군. 그 전에 네 갈 길은 여기가 아니다. 남의 영역을 마음대로 드나들다니."
"뭐, 동물들처럼 오줌이라도 싸놓았소? 기왕 요괴들끼리 만난 거 서로 양보하면서 사는거지. 지금은 말하기도 귀찮으니 난 먼저 물러가겠소."
"…어이가 없군."
정국을 지나쳐 윤기가 산으로 올라갔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자야. 뒤를 돌아 터벅터벅 걷는 윤기를 팔짱을 끼며 바라보는 정국이었다.
*
아무리 생각해도 그 자는 이상했다. 저가 아이를 먹잇감으로 노리는 것을 다 안다는 듯 정국에게 날카로이 향해있던 윤기의 눈빛이 찝찝했다. 무엇보다도 지금 이 시각에 오두막에 편히 누워있는 윤기가 가장 찝찝했고. 저가 머무는 곳에 구미호를 들일 줄 몰랐던 정국이 윤기의 앞에 서서 인상만 찌푸렸다. 벌써 며칠 째였다. 이쯤되면 목적을 알려주거나 뭐라도 해야했는데, 예상 밖에도 윤기는 정국의 오두막에서 잠만 청하거나 정국에게 한심스런 농담 따먹기만 하더라.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던 정국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니, 여기에는 왜 자꾸 발을 들이는 것이오?"
"그 조그마한 아이도 매일 오더만, 나는 오면 안 될 이유라도 있소?"
"…상식적으로 구미호와 흡혈귀가 같이 이리 평화롭게 있는다는 게 말이 안 되지."
"그 상식을 내가 깨뜨리면 되지, 그렇지 않소?"
"허, 나참…"
결국 정국이 유치하던 말장난에서 졌다. 오두막에 털썩 앉은 정국이 윤기를 바라보았다. 저리 태평한 자가 아이를 노릴리가 없지. 윤기는 예전에 아이로 변하여 정국에게 해를 입힌 일이 미안할 뿐이었다. 그 외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정국에게 더욱 미안한 마음이 컸다. 몇 년 동안 아이를 노리는 것은 참으로 망측한 짓이었지만 저도 다를 게 없기에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아무렴, 요괴들끼리 돕고 사는 거지. 이곳에서는 처음 본 요괴인데.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려던 정국이 윤기의 희고 풍성한 털이 달린 꼬리를 밟았다. 짧게 비명섞인 욕을 읊조린 윤기가 정국을 보더니 숨빠지듯 웃었다.
"고의였소."
"알고 있다만, 부러운 걸로 알고 넘어가겠네."
"말도 안 되는 소리. 저 크기만 한 털이 뭐가 부럽다고."
"지금 구미호의 꼬리를 모욕한 것이오?"
정국과 윤기가 눈이 마주친 뒤 배를 잡고 웃었다. 아이에게 느끼는 것과는 다른 감정이라고 느낀 정국이다. 두 요괴들 사이에 해괴하게도 우정이라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
"멍청이. 그 인간 산신령 아니라니까?"
"아, 뭐라는 거야! 그럴 거면 네 집으로 가!"
"정호석, 내가 안다니까? 몇 년 전에 빈 얘 소원, 다 이뤄졌어."
"네 소원은? 네 소원은 하나도 안 이뤄졌잖아. 오히려 더 네가 바라지 않던 쪽으로 가기만 하고."
"…그건 맞지만."
태형과 호석, 아이가 모여 화목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갑작스레 정국의 이야기가 나왔다. 역시나 호석은 정국을 좋지 않은 쪽으로 아이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럴 분이 아니시라며 옹호하는 아이였지만 저도 모르게 흔들림이 있는 건 당연했다. 전에 본 정국의 빨간 눈동자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한숨을 쉰 아이가 벌떡 일어나서 호석의 집에서 나갔다. 아이의 복잡한 생각 속에서도 그 큰 생각은 단단히 자리잡고 있었다. 아, 산신령님 보고 싶다. 어쩔 수 없는 제 마음이었다. 축 처진 어깨를 감출 수 없었다. 그런 아이의 어깨를 누군가 잡았다. 어딘가 익숙한 향이 코를 찔렀다. 역겨운 냄새. 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오래전에 만났던 그 기생이었다.
"더 고와진 것 같구나? 그 자 옆에서도 이리 잘 살다니 신기할 따름이고."
"…절 보러 오셨습니까?"
"눈치는 빠르네. 언니가 긴히 할 얘기가 있거든."
***
정국이 살던 옛마을에서 제 먹이를 바치던 기생집이었다. 깊은 밤중에만 아무도 모르는 뒷문으로 드나들던 정국이라 기생집의 주인 빼고는 그를 보지 못했던 어느날, 아이를 품은 한 여인이 기생집 뒷간에서 헛구역질을 해댔다. 마침 정국이 피를 마시러 온 날이었다. 앳된 얼굴을 가진 여인이 아이를 품다니 동정심을 가진 정국이었다.
"아이를 품은 것이냐."
"…예."
여인은 처음 본 정국에게 홀렸다. 반듯하고 훤칠한 외적으로나, 이 차가운 곳에서 저를 걱정하는 심성을 가진 내적으로나 정국의 모든 것에 이끌렸다. 여인은 항상 뒷문 근처에서 정국을 기다리고는 했으며, 그와 웃으며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출산을 하고난 뒤 찾아온 정국은 더욱 반가웠다. 허옇게 질린 저를 찬 손이지만 따뜻한 마음으로 감싸주는 그였다. 허나 여인의 애틋한 마음은 갈수록 검게 물들었다. 차차 정국의 내면은 신경쓰지 않고 오직 저의 쾌락만을 탐하였다. 그것마저 정국은 애정으로 받아주었다.
"나으리, 얼른 이곳을 나가고 싶습니다."
"…네 딸은 어찌하고 말이냐."
"저 아이는 제가 원해서 낳은 것이 아닙니다. 이곳에 있으면 알아서 클 게지요."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고 정국은 느꼈지만서도 여인을 사랑하기에 모두 덮어주었다. 둘의 대화를 엿들은 기생의 딸은 잠자코 가만히만 있었다. 워낙 제 어미에 대한 정이 없었기에 배신감 따위는 들지 않았다. 그저 가슴에서 파도가 휘몰아쳤다. 내 부모가 천한 기생과 이름 모를 남자가 아니었더라면. 이후 기생의 딸을 챙겨주는 정국은 아주 다정했다. 여인은 바라지 않을 것임을 알았지만 정국은 여섯 살 먹은 딸과 기생을 데리고 나갈 생각이었다. 정말 서로를 사랑한다고 판단한 정국이 기생을 저만 가는 비밀스러운 방에 데려갔다.
"나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차, 어찌 그런 농을. 다과라도 내오겠습니다."
"농이 아니다. 믿기 힘들 거라는 건 알지만 난 인간의 피를 마셔야 산,"
"나으리, 열이 나는 건 아니신지요. 얼른 들어가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여인의 반응은 정국을 실망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여인에게 다시 말해보려 꼬박꼬박 기생집을 찾아왔으나, 여인은 이미 정국의 정체를 안 뒤 마음이 멀어진지 오래였다. 매번 저를 기다리던 여인은 정국이 올 때면 다른 사내의 품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밝은 귀를 가진 정국이 다 들리도록.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렵게 마음먹어 자신의 정체까지 밝히면 모든 게 잘 풀릴 줄 알았다. 여인과 평생을 함께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입술을 꽉 깨물던 정국이 주인에게 제 먹이를 데려오라 소리를 버럭 질렀다. 다른 때보다 잔인하게, 살의가 넘치도록 집어삼킬 듯한 눈빛으로 목덜미를 물었다. 그 뒤에는 제 먹이에 눈물을 떨궜다. 반쯤 죽은 여인에게 입을 떼고 제 입가에 묻은 피들을 마구 닦아내었다. 더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때마침 문을 드르륵 열고 정국을 이 지경으로 만든 여인이 들어왔다. 울고 있는 정국을 보았으면서도 여인은 냉정했다.
"무섭습니다."
"무엇이 말이더냐."
"당신의 이름과 달리 당신 같은 괴물이 이 나라, 조선을 쥐어잡을까 두렵습니다. 바른 나라 대신 온 나라가 피바다가 되고, 하나 둘 죽어가고. 마침내 파멸에 이르겠지요."
"나는 그럴 생각이,"
"마을 여자들이 실종되어 갑니다. 당신 곁에 있다가는 조만간 저도 그리 될 것 같더군요."
"아니다! 아니라고 하지 않았느냐!"
"…지금 당신의 붉은 눈동자일 겁니다, 여인들이, 아니 내 벗들이 본 것은."
애석하게도 여인은 정국에게 비수를 꽂았다. 결국 정국의 감정이 폭발하고야 말았다. 저가 지극히 애정하던 여인의 목덜미를 물었다. 그때도 눈물은 멎지 않았다. 여인에 대한 화와 죄책감, 미안함이 가득했다. 이리 될 것이었으면 알려주지를 말 걸. 사랑하지 않을 걸. 인간에게 정을 주지 않을 걸.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어느 때보다도 뾰족한 송곳니와 희번득한 붉은 눈이 어딘가 울음에 찬 정국과, 죽은 제 어미를 지켜보던 딸이 있었다.
그렇게 그 날 뒤, 정국은 잊혀지지 않을 상처에 자신이 쓰게 곪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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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국이의 아이분들 ♥
찬란 / 정꾸꾸까까 / 만듀 / moonlight / 밤을 걷는 선비 / 뮤즈 / 뉸기찌 / 룰루랄라 / 데이지 / 침구 / 빵야
/ 인생은 욕망 / 링링뿌 / 서영 / 빅닉태 / 솔트말고슈가 / 밍기적 / 난나누우 / 마새 / 슈슈 / 밍뿌 / 까꾹
/ 흥탄♡ / 냉이 / 여니 / 고여비 / 우유(회원) / 빠기 / 오로롯히 / 우유(비회원) / 강낭콩 / 안녕하새오
/ 민군주짱짱맨 / 자몽쨈 / 담담 / 에구타르트 / 새싹 / 착한공 / 그대라서 / 찌밍지민 / 피망
/ 쿄이쿄이 / 복숭꾹 / 요를레히 / 븅딩 / 삐삐걸즈 / 삼다수 / 미묘 / 홍시 / 뚝아 / 새벽별 / 충전기
/ 효인 / 까꾹 / 키친타올 / 갤3 / 꾸꿍 / 뎅뎅이 / 캔디 / 바니
죄송해여 여러분... 늦게 왔으면서 이런 똥글을 싸지르고...(울먹)
저를 매우 치시옵소서!!!!!! 많이 쓴다고 썼는데 전이랑 다른 게 하나도 없지요? (털썩)
미안합니다 이제 와서
토요일에 거의 짜놨는데 갈수록 엉망인 것이다!!!!!!!!!
12화-13화 쯤에 완결이 날 것 같아요 큽 엄청난 단편...!
유에스비에 요즘 짤들이 없네여 옮기고 살아야지 ㅠㅠ
오늘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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