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E, 오직 당신만의.
W. JPD
03
아니, 나를 제외하고 말이다.
-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문제를 풀고 나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냥 멍했다, 멍하고 또 멍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그냥 깜깜한 공간에 혼자 남겨진 느낌, 그게 다였다. 학교를 나서는 걸음도, 내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 내 앞에서 나를 반겨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자리에서 항상 나를 응원해주는 부모님이 떠오르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오늘 나는 내 인생을 말아먹었다.
'왜 그렇게 힘없이 걸어.'
문자 알림음에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그 남자가 지금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급하게 눈가를 닦아냈다. 핸드폰 화면만 뚫어져라 바라보다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그냥 그 남자가 볼 수 없는 그런 곳으로, 지금은 너무 창피하니까. 지금은 그 어떤 이야기도 할 수가 없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렇게 뛰다가 넘어지면 다친다.'
'도망가지 마.'
'너한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거야.'
'수고했어, 그 누구보다 너는 알 거 아냐.'
근처에 보이는 지하철역으로 들어가 화장실로 향했다, 작은 칸 안에 들어가 눈물만 뚝뚝 흘리는데 앞으로 내게 주어질 공간이 이렇게나 작을 거라고 생각하니 또 눈물이 났다. 수능 일주일 전부터 몸 상태가 안 좋다 싶더니 결국 오늘 제대로 아파버렸다. 아픈 것도 이렇게 서러울 일이냐며 속으로 온갖 안 좋은 말들만 떠올리며 자책했다. 끝도 없이 울리는 알림음, 외면하려고 했지만 외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나를 안아줄 사람이 필요했다, 내 위치가 너무 낮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자책하지 마, 수능이 판단할 순 없겠지만 넌 괜찮은 사람이니까."
-
한참을 울다 대충 세수를 하곤 화장실을 나왔다. 나오자마자 보이는 건 익숙한 뒷모습, 그리고 그 사람일 거라는 느낌.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뒷모습의 남자가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받았다. 동시에 내가 전화를 걸었던 상대방도 전화를 받았다.
"어디예요."
"네 곁."
"그니까 어디요."
"네가 볼 수 있는 곳."
"..."
"내가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 오래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인데, 이렇게 오래 세워둔 소감은?"
뒤를 돌아 나를 향해 걸어온다. 모자에, 마스크에, 얼굴을 보이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보이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나를 계속 기다렸구나, 내가 혼자라고 생각한 순간에도 함께였구나. 계속 곁에 있었구나.
"오늘 하고 싶은 건?"
"... 없어요."
"그럼 영화 보자."
"영화관 못 가잖아요."
"왜, 영화관 가고 싶어?"
"..."
"그럼 가."
그래도 노력하는구나, 나를 위해서. 이 남자를, 조금은 더 믿어도 될까. 나 너무 힘든데, 이 남자의 손을 잡아도 괜찮을까. 좋아한다는 감정이 아니니까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그냥 영감을 주는 사람으로, 그냥 그렇게, 그 정도만이라도.
-
"이게 영화관이에요...?"
"어, 왜?"
"... 아니, 영화관..."
"팝콘 있고, 콜라 있고, 의자 있고, 화면 있고."
"컴퓨터 화면이잖아요..."
"나중엔 스크린으로 보게 해줄게, 연습실에 설치하라고 해서."
"..."
남자를 따라온 곳은 어떤 작은방, 그러니까 이 방은 연습실로 추정되는 곳에 있는 여러 개의 방들 중 하나였다. 설명하길, 자신의 작업실이 더 큰 곳에 만들어졌는데 아직 이 방의 분위기와 느낌이 더 좋아서 이곳을 자주 찾는다고. 사람이 높은 곳에 올라가도 과거의 것이 그리울 때가 있다는 게 맞는 말이라는 걸 느꼈다. 그러면, 이 사람도 외로울까. 이 작은방에서 이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할까, 내가 아까 화장실의 작은 칸에서 했던 생각들을 할까, 아니면 더 큰 꿈을 꿀까. 그것도 아니면, 이곳에서 힘을 얻는 걸까.
"어떤 장르 좋아해? 난 추리."
"어, 저도요."
"역시, 내가 사람을 잘 봤네."
"고작 영화 장르 가지고 뭘 잘 봐요, 잘 보긴."
"왜, 다른 것도 잘 맞을 것 같은데."
"근데 저 이런 곳 막 들어와도 돼요?"
"사람만 없으면 상관없어, 그리고 기자들만 좀 조심하면 되고. 정 그러면 여기 연습생이라 하지 뭐."
생각이 없는 건지, 여유로운 건지, 그냥 제멋대로인 건지. 무슨 연예인이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 이러다 큰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근데 이 남자는 사고를 쳐도 뭔가 잘 해결하게 생겼다, 그냥 생긴 게 그렇다. 그래도 할 일에 있어선 꽤 체계적이고 섬세한 것 같다. 방이 꽤나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고, 화면을 응시하는 눈에서 뭔가 집중할 때 나오는 아우라가 있다. 될 때까지 밀어붙이겠다, 뭐 이런 거.
"그런 태도 좋아."
"네?"
"나랑 있을 땐 다른 생각 안 하는 거."
그리고 이 남자,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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