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수업만 되면, 창가인 자신의 옆자리에 앉으라던 이태용은 지금 내가 제 친구인 정윤오 때문에 자신의 뒷자리에 앉아 있는 줄도 모른 채, 창문으로 들어오는 봄의 여린 햇살을 받으며 쿨쿨 자고 있다. 이태용의 옆자리는 내 전용석이나 다름 없었는데. 오늘은 화장실 갔다가 늦게 오다 보니 이 자리라도 감지덕지 해야 하는 위치였다. 순수하게 저기 내 대각선 자리에 앉아 수업을 열심히 듣고 있는 정윤오 탓을 할 수도 없고..그저 나는 자는 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원망만 할 뿐이었다. 큰일이다. 고등학교 올라와서 아직 중학생 티를 벗어나지 못했을 때 이태용과 친해졌고, 2학년이 되면서 반이 아예 갈려 버려서 이제는 볼 수 있는 시간이 이동수업 때 뿐인데.
이렇게 저놈이 쿨쿨 자 버리면 같이 하교할 때밖에 못 보는데, 요즘은 그마저도 잘 안 된다는 거다. 이태용이 갑자기 축구부 선배들한테 인기가 많아져서. 매일 나는 그가 뛰는 모습을 보며 혼자 하교하고는 했다. 오늘도 그럴지도 모르지.
'너 어디야?' 이태용과의 카톡 채팅방에는 4개의 이태용의 카톡이 도착해 있었다. 어디긴. 나 집이지. 짧게 답장을 하고는 폰을 엎었다. 분명 작년까지만 해도 안 그랬는데. 겨울 방학 때 애가 갑자기 키가 훅 크더니 젖살도 싹 빠져버렸다. 친구여서 하는 행동인지, 아니면 그도 정말 나에게 호감이 있어서 하는 행동인지 모를 그의 행동은 나를 설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화이트 데이도, 발렌타인 데이도, 빼빼도 데이도 심지어 체육대회 날에도 남자애들을 마다하고 둘이 붙어 있었는걸. 물론 난 그러면 꽤 많은 종목에 참가하는 그를 보며 벤치에 앉아 응원하기에 바빴지만. 그래, 나는 그를 좋아한다. 이태용이 점점 내 마음에 차기 시작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이동수업 시간이었다. 중국어. 내가 제일 힘들어 하는 과목이었다. 무슨 한자가 외워도 외워도 끝이 없어.. 뜻을 외우면 또 말하는 법을 알아야 되고. 그냥 거의 포기한 과목이었다. 어제 나는 결심했다. 그에 대한 마음을 접기로. 만약 그가 나를 친구로만 생각한다면, 내가 하고 있는 짓은 거지같은 친구짓에 동참이나 하며 마음을 숨기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오늘도 차라리 이태용이 자기만을 기다리며 조용히 이태용네 교실을 들어갔다.
아, 차라리 자기만을 바랐는데. 웬일로 이태용이 중국어 전 쉬는시간에 똘망똘망하게 깨어 있었다. 그리고는 뒷문을 쳐다보고 있다 내가 들어오니 이리 오라며 손짓을 한다. 어이고 친절하게 자신의 옆자리 의자까지 빼주며 앉으라고 탕탕 치기까지 한다.
"뭐야?"
"아니 어제 눈 떠보니까 정윤오가 내 옆에 있잖아. 네가 아니고."
아, 어제의 다짐이 무너질 뻔 했다. 무심코 던진 그의 말에 심장이 또 나대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태용과 6교시 중국어 시간을 알리는 종이 시작됐다. 수업이 시작됐고 그에게 시선을 팔지 않으려 열심히 중국어 수업을 들으려는데, 사람 마음이 원래 하던 일도 다짐을 하면 되지 않듯이 점점 눈이 감겨온다. 아, 아까 5교시 쉬는시간에 좀 자 둘걸.
이태용은 그런 나를 보고 "웬일로 열심히 하나 했다." 하더니 꾸벅꾸벅 조는 내 볼을 쿡 하고 찔렀다. 6교시의 유혹과 창문 바로 옆인 이태용의 자리에서 느껴지는 봄바람이 따듯했다. 자려는데 햇빛 때문에 눈을 찌뿌리니, 이태용이 일어서서 하는 책상을 들고는 자신의 자리 옆에 놓는다. 그리고는 창틀에 앉아서 내 눈에 다가오던 햇빛을 가려준다. 허-, 이젠 진짜 미쳤나. 원래 잘 생겼다고 생각했던 이태용이, 창가에 앉아 옅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릿결에 적당히 내리쬐는 햇살까지. 미칠 것 같았다. 심지어 나는 얘를...얘를.. 이태용에게 잠이 다 달아났다고 했다. 그러니 그는 책을 다시 원래 제 자리에 놓고는 내 옆자리에 앉는다. 그냥 잔다고 할 걸 그랬나. 옆자리에 앉으니 또 혹여나 심장소리가 주체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들으면 어쩌지.
이태용이 그런 내게 쪽지를 내민다. 그래놓고 안 준 척 다른 짓을 한다. 我的. 서투른 글씨로 아까부터 열심히 뭘 적더니 이거였나 보다. 되게 조심조심 쓰는데 난 그림 그리는 줄 알았네. 이태용은 내가 무슨 뜻인지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내게 보낸건가? 미안한데 이태용 중국어는 내가 너보다 한 수 위야. 워더. 내 것. 내 것이라는 말이었다.
이 정도의 이태용의 장난질은 처음이라, 또다시 오묘한 감정들이 뒤섞여 갈 때 쯤 또 하나의 쪽지가 온다. 初めま..하지메 마시떼. 쓰다 모르겠으니 한글로 쓴 이태용을 보니 뭐. 하며 날 보고 있다. 이제는 영어인가. 세 번째 쪽지에는 알아보지 못 할 영어가 써져 있다. you .. come my class at after school.?..? ...ㅇ..암호문인가. 이따 끝나고 여기 교실에 오라고? 하며 말하니 그냥 끄덕이더니 엎드려 버린다. 그렇게, 작은 쪽지를 버리지 못하고 고이 접어 필통 속에 간직한 채 수업이 흘러갔다. 제 속도를 주체하지 못 하는 심장과 함께.
수업이 끝났고, 노을마저 없어져 버린 하늘에는 어둠이 찾아오려 하는 기미가 보였다. 아직 겨울이 가지 않은건지 어둠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아직까지 빨갛게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노을을 보며 이태용의 교실로 갔다. 그렇게 그의 교실에 갔는데 오라했던 그는 없고 그의 자리에 웬 작은 편지가 하나 있었다. '야 태용이야. ㅋㅋㅋ 아까 중국어 일본어 영어로 썼으니 이번에는 한글로 쓸 거니까 잘 알아들어야 돼.' 로 시작해서 쭉 써내려져 가는 작은 편지. 삐뚤뺴뚤한 글씨가 참 지렁이 같다고 생각했다.
사실 중간 내용은 이태용이 까부는 것이라 잘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마지막 한 단어만 눈에 들어올 뿐. 마지막 줄까지 내려가지 않았는데도 눈이 이미 거기에 맞춰져 있었다. '좋아해.' 몇 번이고 고민하고 쓴 듯, 좋아해의 ㅈ의 처음에 잉크가 뭉쳐져 있다. 그리고는 밑에서 기다리겠다고. 그리고는 제일 밑. 작게 아주 작게 그냥 지나칠 수 있을 정도로 작게 다른 글씨가 써져 있다. '너무 부담스러웠으면 문자로 먼저 가라고 해 줘. 네 얼굴 어떻게 보냐 ㅋㅋㅋㅋ. 갑작스러워서 미안. 난 평소에 티 냈다 생각했는데. 계속 친구 노릇 하면서 너한테 가까이 있으려 했던 것도 미안.' 편지를 몇 번이고 다시 보았다. 내가 본게 정말 맞는지. 이태용이 나보고 좋다고 한게 맞는지.
뭐, 결국 내 생각의 마무리는
밑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에게 달려가기로 끝이 났지만.
! 작가의 말 ! |
안녕하세요! ㅋㅋㅋ 애몽 말고 다른 글을 써 본 건 처음이네요!. 어제 새벽에 친한 동생에게 단어 몇 단어를 받고, 글이 떠올라서 끄적이다 여기에 올려 봅니다. 짧고 비루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 애몽 독자님 분들 이 곳에 계신다면 이따 또 봐요 우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