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못 한다니, 무슨 소린데요?"
"그게 규칙입니다. 처음 왔을 때 남편의 영상에서도 설명드렸던 부분입니다."
과거의 사람이 어떻게 될 지 모른다.
미래의 정보가 누설되고, 그게 과거에 퍼져서 미래가 바뀌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 있을 지 모르는 일이다.
사실을 알고 있는 과거 사람도 언제 입막음을 위해 미래로 끌려와 죽을 지 모르는 일이다.
위법 행위.
과거 사람이 미래 사람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을 위해서 입니다."
과거에는 미래 사람이 방문했다는 어떤 흔적도 남아서는, 안 된다.
미래 대학 리포트.
-타임머신을 타고 자신의 전생을 찾아, 일주일간 그의 생활방식을 기록 및 사진 첨부하여 과제로 제출한다.
-역사를 바꾸거나 악용하는 일이 없도록 전생의 자신과는 250m 이내로 붙어 있을 것. 그 이상 떨어질 경우 학점은 F.
-일주일이 지나면 과거에 머물렀던 자신의 기록은 전부 지우고 돌아올 것.
-과거의 전생인 외에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자신이 미래에서 왔음을 알리지 말 것.
-최대한 많은 공부를 해서 미래의 정보가 들키지 않도록 과거 사람인 양 행동할 것.
"…그럼 우리 기억은 어떻게 되는 건데요? 조작이라도 되는 거야?"
"자연스럽게 사라질 겁니다. 제가 처음 왔을 때 뿜어진 연기는 괜히 나온 게 아니니까요."
일주일. 딱 그만큼의 효과다.
겨우 이틀 남짓이 지났는데, 정이 든 모양인지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에 대해서 멤버들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뭐 어때. 겨우 일주일이고. 우리가 기억하면 안 된다잖아."
"누나는 우리 기억할 거 아니에요. 그럼 됐죠."
지민이는 웃고 있었다.
그 웃음에 나도 따라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전 기억하니까요. 꼭 여러분 모두가 멋진 전생이자 아이돌이였다며 추억하겠습니다."
"황당하네. 본인은 다 기억하는 거고."
"우린 그쪽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게 되고."
그게 뭐야.
윤기가 중얼거린다. 맨날 센 척 싫은 척 하더니, 그런대로 나랑 정이 들긴 한 모양이다.
투덜대는 모습 그거, 좀 귀여운데.
"됐어, 뭐하러 그렇게 아쉬워하냐."
"전골 해 줄 테니까 나가서 재료나 사 와 둘이."
"예?"
"둘이라고 하시면…."
"윤기랑, 너."
"ㅈ,저 말씀이십니까? 저는 정국 씨하고 떨어지면 안,"
"집 앞 슈퍼 30m 이내야. 그럼 상관 없는 거잖아."
"…."
"...알겠습니다."
어쩐지 싸해진 분위기에 나는 힘없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뒤돌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윤기도 한숨을 푹 쉬며 따라 일어났다.
신기한 게, 매번 틱틱대고 툴툴거리고 귀찮아 하는 사람이면서도,
윤기는 유독 석진이의 말을 잘 따랐다.
먼저 앞서가는 윤기를 보며, 나는 급하게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를 따라 나섰다.
-
"가요. 저쪽이니까."
윤기는 앞장 서 걸었다.
키가 그렇게 커 보이지도 않았는데, 뭘 그렇게 바쁘게 빨리 걷는지.
걷는 보폭이 넓어 나는 거의 뛰어서 쫒아가야 할 판이었다.
"조, 조금만,"
"…."
"천천히 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숨이 찼다.
성질 급한 녀석.
윤기는 몇 걸음 앞에서 날 보며 한숨을 푹, 쉬더니
저 원래 이 속도로 걷는데요. 했다.
아니, 그걸 물은 게 아니라
조금만 맞춰 걸어달라고.
새삼 같이 다녔을 때의 정국이가 얼마나 날 배려해 주고 있었는지 깨닫게 됐다.
잠시나마 기억을 지우는 것에 대해 미안해 했던 내가 미워졌다.
"아닙니다. 그냥 제가 맞춰 걷ㄱ..."
"손 잡아요. 거 넘어지지 말고."
윤기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덥썩, 비어있던 내 손을 붙잡고는 또 성큼성큼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번엔, 좀 느리게.
"가, 감사합니다."
"빨리 걸어요. 추워."
걸어가면서 꼭 잡힌 손을 내려다 봤다.
추워지는 날씨 치고는 제법 손이 따뜻했다.
한쪽 귀도 붉어진 게, 괜히 미안해서 그랬다는 걸 알게 된 것 같아
꾹 눌러 참은 입술 새로 웃음이 삐죽 흘러나왔다.
표현할 줄 참 모른다.
이렇게 금방 미안해 할 거면서.
"다시다랑, 버섯하고..."
슈퍼에 들어서더니 냅다 손을 놓은 윤기는 바구니를 들어 내 손에 들려주었다.
그러고는 또 그 큰 보폭으로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주워담기 시작했다.
이걸 내가 왜 드는 지는 모르겠는데. 양반?
점점 무거워지는 바구니에 인상을 찌푸리자, 힐끗 돌아보더니 다시 제 할 일을 찾아 코너를 돌아다닌다.
와, 난 또 들어주는 줄 알았지.
아무튼, 사진을 찍어오라는 남편과 재료를 사오라는 석진이 덕분에
나는 오늘 21세기의 백화점과 슈퍼를 동시에 구경해볼 수 있었다.
나름대로 좋은 경험이었다. 궁금한 것도 물어보고,
특히 슈퍼에 있는 물건들을 보고 윤기에게 물어볼 때는 좀 무섭긴 해도 다양한 설명을 들을 수 있어서 재밌었다.
의외로 알려줄 땐 친절한 녀석이네.
계산을 다 마치고 나서 그 모든 재료들이 검은 봉투에 들어가고 나서야,
민윤기는 바구니가 아닌 봉투를 받아들고 슈퍼를 나왔다.
그러더니 봉투 안을 막 뒤적이다가, 기다란 포장지가 있는 걸 하나 꺼내고는 내게 들이밀었다.
"아이스크림. 먹을래요."
아이스크림... 이게?
나는 얼떨결에 포장지를 받아들었다. 어떻게 생겨먹은 아이스크림이길래 이렇게 길다란 거지.
일단 차가운 건 맞는 것 같았다.
아까는 춥다면서 차가운 걸 잘도 골랐네.
나는 속으로 그 말을 삼키며 봉지를 조심스럽게 뜯었다.
연두색 빛깔을 뽐내는 네모난 바가 나무 막대기에 달려 있었다.
아니, 붙어 있다고 하는 표현이 맞는 건가.
어떻게 먹어야 하는 건지 잘 몰라 아이스크림과 윤기를 번갈아 바라봤다.
윤기는 그런 내 행동이 웃겼는지, 실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그냥 물면 돼요, 뭐 어렵다고 다 녹을 때까지 보고 있대."
"…아."
민망함에 얼른 한 입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었다.
차가움에 시린 이가 아려왔다. 입 안에 퍼지는 메론 향이 익숙한 맛이라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맛있죠. 윤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참 다양한 경험을 해본다. 21세기의 아이스크림은, 이렇게 생겼구나.
하나하나, 다 눈에 담고 기록해놓고 싶었다. 두 번은 겪지 못할 경험일 테니까.
결국 그렇게 사이좋게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누나 왔어? 배고파 죽는 줄 알았잖아요, 왜 이렇게 늦은 거야."
"맛있는 거 사 왔지?"
"뭐야, 나도 아이스크림! 둘만 먹었어요?"
어째 나갈 때랑은 다르게 분위기가 또 시끄러워져 있다.
이게 무슨 일이래. 나는 현관 쪽에 봉투를 놓고 가는 윤기를 보고 따라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새 몰려들어 아이스크림을 찾아 하나씩 뜯는 두 사람.
그리고 밥 먹고 먹으라며 재료를 가져가고는 호통치는 석진이.
"수고했어, 무거웠지."
본인도 입에 커피 하나 물고 있으면서.
다시 돌아온 분위기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윤기가 다 들고 와서 괜찮았습니다.
거실로 들어서니 남준이랑 호석이는 나란히 앉아 게임을 하고 있었다.
태형이와 지민이도, 아이스크림을 나눠 물고서 게임에 동참했다.
정국이는 소파에 앉아 그 네 명을 구경하다가, 내 쪽을 돌아보며 왔어요? 하고 자연스럽게 물었다.
아, 내가 집에 돌아왔을 때 태연하게 반겼던 남편과 똑같다.
처음엔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똑같이 생긴 건 반칙이잖아.
"팔찌에, 빨간 빛 들어올까 봐 계속 보고 있었어요."
심장아. 남편 두고 여기서 이렇게 설레지 말자.
난 고개를 돌렸다.
차마 점심 내내 날 바라보던 정국이 눈빛을 지우기가 어려워서
잘 다루지도 못하는 부엌에 들어가 석진이 요리를 도왔다.
처음엔 남편이 보고 싶었는데.
지금은 남편이 여기 있는 것 같다.
-
혼동하지 말자.
저건 아이돌 전정국이고,
이미 죽은 인물이다.
혼동하지 말자.
내 남편은 미래에 있고,
지금 과제를 하러 내려온 거다.
백 번이나 머릿 속에 집어넣은 문장이다.
그래, 지금이야 뭐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워서 따로 잔다고 하지만,
첫날에는 무려 같이 잠자리를 했을 정도로 아무렇지 않았으니까, 그렇게만 보면 된다.
아무렇지 않게. 남편이지만, 남편이 아닌 사람으로. 익숙하게.
그런데,
"누나, 왜요...? 아직도 잠을 안 자고..."
내가 진짜 남편 전정국을 사랑하긴 하는가 보다.
"오,오늘은 다른 분 방에서 자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한참을 뒤척이다 보니 결국 정국이가 신경쓰여 몸을 일으켰다.
미안해서라도 같은 방에서 자기가 어려워 결국 방을 나왔다.
심장이 계속 뛰었다.
이렇게까지 남편, 아니 남자의 품이 그리웠던 적이 있었던가? 내가 너무 남편한테 지나친 사랑을 받아서 그런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우선은 다른 방에 신세를 잠시만 지자.
내일까지는 어떻게 마인드 컨트롤을 해 보기로 약속하고.
누가 어느 방을 쓰는지도 모르는데,
결국 나는 그냥 무작정 아무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저, 하루만, 이 방에서 재워주시겠습니까."
"잠이 안 오는데 정국 씨가 불편해 하시는 것 같아 나왔습니다."
NEXT. 한밤 중의 고민상담.
P.S: 여행 중으로 인해 업로드가 늦어진 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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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별 tvn말고 kbs 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