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언트 OST - Pursuit of Tragedy
경성 비밀결사대 11
written by 스페스
정국은 길을 걷는 내내 습관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평소처럼 걸어보려 했지만 몸이 굳은 것처럼 손발의 움직임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입안 가득 침이 고였다. 긴장이 몰려오는 탓이었다. 혹시 쫓아오는 이가 없는지 몇 번이나 뒤를 확인한 후에야 정국은 후다닥 코너를 돌았다. YMCA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자 건물 뒤로 좁은 골목이 이어졌다. 행선지는 막다른 골목 가장 안쪽의 허름한 철물점이었다. 보통의 가게라면 이미 문을 닫을 만큼 늦은 밤이었다. 간판에 적힌 상호를 재차 확인한 그가 낡은 나무 문을 밀어재꼈다.
먼지 냄새와 쇠붙이 특유의 냄새가 훅 끼쳤다. 미닫이문을 조심스레 닫고 실내에 들어선 정국은 어둠 새로 계단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머지않아 구석에서 계단이라 부르기도 어려운 열악한 나무 사다리가 나타났다. 정국은 곧장 사다리를 붙잡고 올라섰다. 천장을 막고 있는 나무판자를 밀어재끼자 2층 공간이 드러났다. 일순 협탁에 둘러앉은 남자들의 이목이 바닥 위로 고개를 내민 정국에게로 집중되었다. 정국은 곧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며 다락으로 올라섰다.
천고가 낮은 다락방에 비장함이 흘렀다. 정국을 포함 도합 넷이었다. 비어있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정국이 긴장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렸다. 원래도 낯을 가리는 편이었으나, 쉽사리 녹아들기 어려운 분위기가 그를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고개를 숙인 채로 주변 사람들을 흘끔거리던 정국은 테이블 한가운데 비어있는 자리를 응시했다. 그때 1층에서 미닫이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정국이 침을 꼴깍 삼켰다. 이윽고 등장한 얼굴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깊게 숨을 내쉬었다. 석진이었다. 다락방에 발을 들인 이후로 가장 안심이 되는 순간이었다. 석진이 가운데 의자에 착석했다. 비로소 시작이었다.
"다 모였으니까 시작해 볼까요?"
석진이 책상 위에 도면을 펼쳤다. 거사가 진행될 연회장의 건물 도면이었다. 복잡한 그림이 누런 갱지를 어지럽게 뒤덮었다. 도면으로 손을 옮기다 말고 석진은 정국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 긴장이 묻어났다. 곧 자리에서 일어난 석진이 정국 곁으로 걸어갔다. 정국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가 입을 뗐다.
"막내 인사해."
다시금 사람들의 눈길이 정국에게로 향하자 얼떨떨한 얼굴로 목례를 하는 정국이었다.
"전정국입니다."
"갑작스럽게 합류했지만 믿을만한 녀석이에요. 도주로를 확인해 줄 겁니다."
곧 정국의 오른편에 앉은 남자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갑다. 잘 부탁한다."
내민 손을 맞잡자, 석진이 덧붙였다.
"이 분은 만주에서 사격 훈련을 받고 두 달전에 경성에 오셨어. 이번 거사의 대장님. 이쪽은 역마살 동지. 별명이 좀 그렇지만 여기선 다들 그렇게 불러. 상해에서 지난달 부산으로 들어왔고 사제폭탄을 맡아주실 거야. 마지막으로 이쪽은 별칭 오발탄. 지금은 명사수로 거듭났지만."
석진이 정국의 오른쪽 남자부터 소개하자 그들이 차례로 막내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제야 긴장이 다소 누그러지는 정국이었다. 모두 멀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자, 그럼 다시."
석진이 도면을 응시하며 다시 입을 뗐다. 그리고는 거사 계획을 읊기 시작했다.
"총독부 신임 인사들의 취임 기념 축하연이에요. 아쉽게도 총독은 그날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겁니다. 따라서 우리의 타케트는 경무국장과 조선 주둔군 사령관, 그리고 새로 취임하는 고위 관료들입니다."
석진이 꼬깃꼬깃한 매일신보를 펼쳤다. 곧 취임할 고위 인사들의 얼굴이 빼곡히 나타났다. 다섯 사람의 시선이 한 곳에 모였다. 정국은 신문 속 타케트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나머지 넷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들의 결연함에 정국마저 입이 바싹 말랐다. 뒤이어 석진이 거사의 계획을 상세히 설명했다.
"초청장 세 장을 입수할 겁니다. 정국이는 직원으로 위장해서 먼저 잠입할거고요. 도면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외부로 연결된 진입로는 딱 세 군데 입니다."
석진이 도면 위 출구를 가리켰다. 나머지 네 사람의 눈길이 석진의 손 끝을 따랐다.
"오발탄 형님이 여기 2층 발코니. 대장님이 1층 제일 구석. 여기가 사각지대라 몇 발 쏠 동안은 시간을 벌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역마살 동지는 여기. 우측 끝에서 사진기에 탑재된 폭탄을 던지면 됩니다."
석진의 말에 턱을 쓸던 한 사람이 번쩍 손을 들었다. 사제폭탄을 담당할 대원이었다.
"이쪽은 멀어서 제대로 터져도 몇 놈 못 죽일 텐데."
"폭탄을 던지고 나서 대피하기 가장 용이한 지점이에요."
"도주 못해도 되니 제대로 던집시다."
석진이 남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남자가 두툼한 손가락으로 연회장 한가운데를 가르쳤다. 여기에서. 좁은 다락 안에 적막이 흘렀다.
"안 돼요."
석진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남자가 씩 웃으며 덧붙였다.
"지난번에 다 죽은 목숨 마음대로 살려 놓은 게 누군데. 의사 양반. 이번만큼은 내 뜻 좀 따라주시죠. 어차피 이 거사, 우리 셋 모두 살아남을 확률이 희박하다는 건 다 각오하고 있는 거니까."
남자의 말에 정국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한참이나 침묵하던 석진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반드시 살아돌아옵니다."
"거참. 이제 좀 솔직해집시다. 처음부터 각오하고 덤벼든 일인데. 연회장에 깔린게 일본군이요. 여기서 총질을 하든 폭탄을 던지든 살아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거, 우리도 잘 아오."
나머지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국은 차마 그들의 표정을 살필 수가 없었다. 가슴께가 싸했다. 그때 대장이 정국을 향해 말했다.
"그니까 막내. 도주로 확보한답시고 괜한 행동하지 마."
그리고는 여유롭게 웃으며 덧붙였다.
"너라도 우리 모습 두 눈으로 똑똑히 담았다가, 언젠가 기억해줘야 하지 않겠냐."
정국은 차마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석진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이윽고 석진이 단호한 투로 말했다.
"보이는 진입로는 이 세 곳이 전부지만, 여기 작년에 건물을 보수하느라 임시로 막아둔 곳이 있어요. 세게 차면 뚫릴 겁니다."
네 남자가 석진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모았다.
"폭탄을 던지면 아수라장이 될 겁니다. 형님이 도주하는 동안 2층 발코니에서 오발탄 동지 뒤를 봐주시고요, 대장님은 오발탄 동지가 도주로 앞으로 올 때까지 총으로 방어해주시면 됩니다. 정국이는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각 출입구에 몇 명이 지키고 있는지만 알려주면 임무 끝. 밖에서 다른 대원들이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 * *
"아이고, 막내 무슨 일이냐."
벌써 삼 일째였다. 평소 죽은 듯이 잠을 자던 정국이 새벽에 몇 번이고 소리를 지르며 깨어난 것은. 정국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눈을 뜨자, 머리맡에 앉아있던 그의 어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정국을 응시했다. 식은땀이 흥건했다. 그의 친모가 가제수건으로 정국의 얼굴을 닦아냈다.
"꿈에 네 아버지라도 나오셨냐. 왜 이리 놀라서 깨누."
정국이 여인의 시선을 피했다. 곧 여인이 아들의 머리맡에 놓인 주전자에서 보리차를 따라 아들에게 건넸다. 정국은 대접에 담긴 물을 꿀꺽 꿀꺽 삼키고는 소매로 입을 닦았다. 자신을 걱정하는 여인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돌이라도 얹은것 마냥 답답한 마음이었으나 여인에게는 한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그냥. 요즘 꿈자리가 사나워서. 엄마 걱정말고 들어가서 자."
아들이 등을 떠미는 탓에 여인이 마지못해 주전자와 가제수건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국은 이부자리에 앉은 채로 꿈을 곱씹었다. 일본군 하나가 제 머리에 총구를 겨누는 상황. 며칠째 같은 꿈이었다. 정국은 늘 같은 지점에서 깼다. 일본군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이었다.
"막내야. 내 말 기억하지?"
어미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난 정국이 여인을 바라보았다. 친모가 여전히 그의 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멀거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국이 고개를 들어 여인을 쳐다보자, 그녀가 한참 끝에 입을 뗐다.
"네 몫은 아버지랑 형들이 다 했다고."
여인이 말을 마치고, 정국의 방을 빠져나갔다. 정국은 여인의 굽은 등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어슴푸레한 새벽녘이었다. 정국은 그녀가 나간 뒤, 베개 밑을 뒤적거렸다. 다행히 그대로였다. 차가운 금속을 매만지며, 정국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었다. 미안해. 엄마.
정국이 곧 베갯잇에 감춰둔 것을 꺼내들었다. 제 아버지의 손길이 묻어있는 연식이 오랜 소총. 차가운 금속에 아직 제 아비의 혼이 남아있는 듯했다. 정국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곧 동이 텄다. 바야흐로 결전의 날이었다.
* * *
단상 뒤로 대형 일장기가 벽면을 가득 채웠다. 정국은 애써 다른 곳으로 시선을 두었다. 연회장은 취임행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직원 하나가 단상에 올라가 마이크를 점검했다. 행사 준비가 마무리될 무렵, 정국이 왼쪽 벽면에 걸린 대형 괘종시계로 시선을 두었다. 행사까지 삼십여 분이 남았다. 사람들의 움직임이 점차 분주해졌다. 나이 든 직원이 시간을 확인한 뒤 준비,하고 소리치자 직원들이 각자 자리를 찾아갔다. 정국 또한 연회장 뒤 직원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자꾸만 옷 안에 감춰놓은 낡은 총기가 걸리적거렸다. 셔츠 위로 넥타이를 차고 조끼까지 갖춰 입은 탓에 외관상 전혀 티가 나지 않았음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스스로 의식한 탓이기도 했다. 정국은 다락방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세 사람에게 사제 총기와 카메라 모형의 폭탄이 지급되었다. 정국의 몫은 없었다. 괜히 총기를 소지하고 있다가 휘말렸다간 그대로 형무소 행이라 판단한 석진의 만류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정국은 아버지의 유품에서 오래된 총기를 꺼내들 수밖에 없었다. 제 곁을 둘러싼 세 남자의 눈빛이 정국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기에.
연회장 밖으로 검은 차량이 줄줄이 멈춰섰다. 동시에 차량 전면부에 걸린 작은 일장기의 나부낌도 잦아들었다. 경무국장의 뒤를 이어 총독부 고위 인사들이 하나둘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정국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제 앞을 지나가는 수뇌부의 얼굴을 살폈다. 신문에서 보았던 이들이 줄지어 정국의 눈앞을 지나쳤다. 심장이 놀랍도록 빠르게 뛰어댔다.
외부에서 초대받은 손님들은 다른 출입구를 사용했다. 대부분 경성에 거주하는 일본인 명사들과 작위를 받은 친일파 조선인이었다. 출입구에 대기한 사람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초청장이 들려있었다. 윤기와 숙부도 그들 중 하나였다. 윤기는 굳은 표정으로 숙부에게서 건네받은 초청장을 내밀었다. 그가 곧 게이트를 통과하여 행사장 내부를 살폈다. 서구식 건물 안으로 3층짜리 대형 홀이 펼쳐졌다. 윤기는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 위를 걸으며,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숙부의 종용에 행사 시작 이십분 전에 도착했건만, 연회장은 벌써부터 북적거렸다. 윤기는 헛웃음이 났다. 도대체 조선총독부 신임 인사 취임이 뭐라고 이 많은 조선인들이 득달같이 달려온 건지. 그때 곁에선 숙부가 윤기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표정 좀 펴라. 오늘 잘 해야 작위도 받고, 우리 가족도 다 잘 풀리지 않겠니."
그런 숙부의 말에 윤기는 일부러 더 표정을 굳혔다. 숙부의 이름이 적힌 팻말을 향해 걷던 그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동시에 상대 또한 윤기를 알아보고 가까이 다가왔다.
"이런 데서 또 보네요."
웃으며 손을 내미는 남준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 행사가 못마땅했는데 이제는 남준까지 등장한 탓에 윤기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아니, 이게 누구야. 김남준 편집장님."
떨떠름하게 남준을 보고 있는 윤기를 앞질러 숙부가 먼저 남준의 손을 맞잡았다. 남준이 웃으며 목례했다. 두 사람은 구면이었다. 윤기와 남준이 처음 마주쳤던 식사 장소에서 였다.
"늘 기사 잘 보고 있습니다. 동경제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시라더니, 역시 글 솜씨가 훌륭합니다."
"과찬이십니다."
남준이 잡은 손을 풀며 웃었다. 곧 남준의 시선이 윤기에게로 옮겨갔다. 숙부가 줄지어 들어오는 친일 인사에게 안부를 묻느라 바쁜 사이, 남준이 윤기에게 물었다.
"나름 축하연인데 표정이 영 안 좋으시네요."
"뭐 나를 위한 축하연도 아닌데, 내가 꼭 웃어야 하나."
"아니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신 가 해서요. 가령 애인과 헤어졌다거나."
남준이 덧붙인 말에 윤기가 피식 웃었다. 제 속내를 꼭꼭 감추는 것 같은 남준에게 빈틈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원래 기자들은 이렇게 호기심이 많나? 아님 김남준씨 개인적인 습관인가?"
"호기심이야 말로 기사의 원천 아닐까요?"
"그럼 그런 궁금증은 접어두는 게 좋을 텐데. 그 쪽이 우려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남준은 윤기의 말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방어적이고 예민한 모습. 설렁탕을 먹으며 태형이 했던 말에 더 신뢰가 갔다. 저렇게 까칠하게 받아치는 거라면, 정말 헤어진 건가. 남준은 곧 가볍게 미소를 짓고는 자리를 떴다.
윤기는 뚫어져라 남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야에 들어온 또 다른 얼굴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윤기의 눈이 가늘어졌다. 직원 복장을 갖춰 입은 채, 연회장 뒤편에 서있던 얼굴. 식장을 둘러보던 소년의 시선이 곧 윤기와 맞닿았다. 윤기는 재차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분명 쌈닭 집에 처음 갔던 날 담벼락에 숨어서 봤던 얼굴이었다. 밀서에서 등장했던 그 남동생.
갑작스레 소년 또한 가늘게 눈을 뜨고, 윤기를 응시했다. 그러나 그가 다른 곳을 바라보는 탓에 두 사람의 시선이 흩어졌다. 소년에게로 다가간 남준이 시야를 가린 탓이었다.
* * *
정국이 초조한 얼굴로 자신의 양손을 매만졌다. 축하연에 초대받은 이들이 줄지어 입장하자, 정국은 집요하게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곧 황갈색 양장을 입은 남자가 목에 카메라를 걸고 나타났다. 그가 연회장에 등장했다는 것은, 총독부 전담 촬영 기사가 포섭되었다는 뜻이었다. 순조로운 진행이었다. 곧이어 다른 두 대원이 장내로 들어섰다. 정국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상황을 곱씹을수록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듯했다. 꿈에나 있을 것 같던 결전의 날, 그날이 지금 이 순간임을 정국은 대원들의 얼굴을 보며 새삼 깨달았다.
고작 몇 번 만났을 뿐인데 벌써 정이 든 것 같았다. 어두운 다락방에서 무엇보다 반짝이던 대원들의 눈빛이 뇌리를 스치자, 정국의 가슴께가 뜨거워졌다. 정국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몇 시간 뒤에 일어날 일들과 그 결과를 . 맥박이 무서울 정도로 빨라졌다. 정국은 조용히 숨을 뱉었다.
괘종시계의 분침이 9시 50분을 가리키자, 정국은 찬찬히 실내를 살폈다. 대원 하나가 이제 막 2층 발코니에 올라섰다. 정국은 순간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중년 남성과 함께 원형 테이블에 앉아있던 남자의 미심쩍은 눈빛이었다. 정국이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곧 눈이 마주쳤다. 그 부근 테이블이 죄다 친일파 조선인들의 몫이니, 그 남자도 마찬가지일 테다. 정국은 자신이 아는 사람인지 떠올려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초면이었다. 자신을 예의주시하는 느낌에 정국은 점점 초조해졌다.
"전정국?"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정국은 화들짝 놀랐다. 익숙한 얼굴이 인파를 가르고 다가왔다. 정국은 그 자리에 얼어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연회장을 오갔지만, 정국의 눈에는 제게로 걸어오는 남준뿐이었다. 분명 자연스럽게 행동하자고 몇 번이나 다짐했으나, 정국의 안면근육이 미세하게 떨렸다. 남준은 정국 옆에 선 직원에게 물을 한 잔 달라고 부탁했다. 여자가 자리를 뜨자 남준이 다른 곳을 응시하며 들릴 듯 말 듯 말을 건넸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정국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이 꼴딱 넘어가며 목 울대를 지나쳤다. 남준이 재차 정국에게 물었다.
“정국아.”
“월사금 벌려고 일해.”
정국의 나지막한 말에 남준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곧 여직원이 개수대에서 물 한 잔을 가져와 건넸다. 유리잔을 받아든 그는 자리로 걸어가며 정국의 얼굴을 살폈다. 흔들리는 정국의 눈빛이 남준을 불안하게 했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팻말을 찾으며, 남준은 연거푸 물을 마셨지만, 불안감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시간은 초조하게 흘렀다. 곧 벽에 걸린 괘종시계가 딩, 소리를 내자 제복을 입은 남자가 단상 위로 올라왔다. 그가 인사말을 하고, 곧이어 장내에 기미가요가 연주되었다. 정국은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전방을 가득 채운 일장기가 정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몇 가지 기본적인 식순이 끝나자 곧이어 신임 인사들의 취임 연설이 이어졌다. 그들의 연설이 모두 끝나면 기념 촬영을 할테다. 그 때가 바로 폭탄을 투척할 시점이었다. 정국은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다. 슬쩍 자리를 옮겨 출구를 살피던 정국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세 군데의 출입구 모두 일본군이 진을 치고 앉았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석진이 말했던 비밀 출구. 초조한 마음을 대변하듯, 정국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외관상 막혀있는 문 앞에 선 정국이 세 사람에게 차례로 시선을 던졌다. 그들과 눈을 마주친 정국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정국에게 불안감이 엄습했다. 행사 시작 전, 자신을 바라보던 그 남자의 시선이 줄곧 자신을 따라오는 탓이었다. 정국은 애써 시선을 피했다. 어지러운 생각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정국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노골적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그 남자의 좌석이 비어있는 탓이었다.
곧 마지막 관료가 연설을 시작했다. 오 분 가량 지루한 연설을 끝내고 남자가 단상에서 내려오자, 사회자가 기념촬영을 할 것이라는 멘트를 뱉었다. 테이블 맨 앞에 앉아있던 신임 인사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단상 위로 향했다. 정국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은 기분에 정국은 눈을 질끈 감았다.
카메라를 목에 건 대원이 식장 가장 가운데에 서 무릎을 굽혔다. 사진을 찍을 자세를 취하며 그가 외쳤다.
"さ~では撮りますね" (자, 그럼 찍습니다.)
" いち, に, さん" (하나, 둘, 셋)
정국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장내의 풍경과 대원의 움직임이 느리게 보였다.
「쾅-」
곧 굉음이 울렸다. 비명이 몰아치고, 연기가 장내를 뒤덮었다. 연회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변했다. 정국은 허연 연기 사이로 단상을 바라보았다. 몇몇이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곧 단상 곳곳에 화염이 일었다. 사람들의 울먹이는 소리와 고함치는 소리가 어지러이 공간을 뒤덮었다. 정국은 재빨리 제 앞에 있는 외벽을 걷어찼다.
연기 사이로 몇 발의 총소리가 울렸다. 정국은 연신 기침을 하며 연회장을 살폈다. 대원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곧이어 총소리가 빗발쳤다. 정국의 마음이 점차 다급해졌다. 석진의 말대로 임시로 막아둔 외벽은 쉽게 부서졌다. 곧 희뿌연 연기 새로 정국이 대원들을 찾았다. 한가운데서 폭탄을 던지던 대원에게로 일본군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그들이 대원의 손발을 묶었다. 그때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쏴. 날 쏘라고 오발탄."
순식간이었다. 멀리서 실탄이 날아들어 대원의 가슴팍에 박혀들었다. 정국이 입을 틀어막았다. 곧 군인들의 시선이 2층으로 향했다. 발코니에 선 대원이었다. 그가 복도를 달리며 차례로 적을 쓰러트렸다. 남자가 제법 정국이 선 곳에 가까워졌다. 정국이 앞서 부숴 트린 비밀통로로 걸어갔다. 도주로를 확보해야 했다. 어두운 공간에 이제 막 진입한 정국이 갑작스레 발을 멈췄다.
"止めて"(멈춰!)
낯선 일본어가 정국을 멈춰 세웠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정국 앞으로 총부리가 겨눠졌다. 일본 군인이었다. 숨이 콱 막혔다. 정국은 조끼 안에 숨겨둔 낡은 소총으로 손을 옮겼다. 정국이 총을 꺼내려던 찰나, 남자의 손끝이 방아쇠로 향했다. 순간이었다. 정국이 금세 옷 밖으로 총을 꺼냈다.
「탕」
얼굴로 뜨거운 기운이 몰아쳤다. 정국은 살며시 눈을 떴다. 제 앞에 피를 토한 채 축 늘어진 군인. 그리고 제 옷과 얼굴에 어지러이 튄 피의 흔적들. 정국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분명 자신은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꿈인가 싶었으나 총안에는 여전히 실탄 여섯 발 그대로였다. 연회장으로 이어진 복도를 내다본 정국의 눈이 커졌다.
자욱한 연기 사이로 정국은 순간 두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남준과 그 남자. 자신을 끈덕지게 따라붙던 그 눈빛의 주인.
From. 스페스 |
안녕하세요. 스페스입니다.
오늘은 전편과는 사뭇, 아니 완전히 다른 얘기예요.
꼬박꼬박 찾아와서 읽어주시고 댓글도 달아주시는, 소중한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사랑스런 암호닉들! * 암호닉 쭉 받아요, 신청은 최신화에서!, 혹시 누락되셨다면 댓글 달아주세요. :) 암호닉 신청하실 때 괄호[ ] 안에 넣어주시면 제가 더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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