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남자 OST - 흉터
경성 비밀결사대 13
『지민의 이야기』
written by 스페스
지민은 손에 열차표를 들고 초조하게 승강장을 서성였다. 보통학교를 갓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한 열넷의 얼굴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절망적이었다. 거의 초 단위로 승강장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던 지민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졌다. 곧 울음이라도 터질 것 같은 소년이 눈물을 삼킨 것은 제 친구의 다급한 음성 때문이었다.
「박지민!」
승강장에 선 사람들의 시선이 숨을 헐떡이며 뛰어온 까까머리 중학생에게로 향했다. 지민이 아끼는 벗이었다. 지민을 붙잡은 채로 숨을 몰아쉰 소년 또한 지민과 똑같은 검정 교복 차림이었다. 얼마나 뛰어왔는지 까맣게 그을린 얼굴 위로 때 구정물 섞인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소년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너희 부모님 늦으신다고 너 먼저 가래.”
순간 지민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얼굴이 새하얗게 변한 지민이 넋이라도 놓을 새라, 옆에 선 소년이 그를 흔들며 덧붙였다.
“그리고 이거. 네 어무이가 네 주라캤다. 걱정 말고 열차 타라고 하셨다.”
말을 마친 친구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을 꺼내들었다. 지민이 망설였다. 기어코 지민의 손에 돈을 쥐여준 벗이 줄곧 지민의 얼굴을 응시했다. 소년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마침 열차가 승강장으로 서서히 진입했다. 지민은 손에 든 표를 한 번 바라보고는 소년에게 물었다.
“왜 늦으신대?”
“뭐 할 일이 있다꼬만 하셨는데…….”
“그럼 내도 기다렸다가 같이 갈래.”
지민의 말에 소년이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안 된다.”
“니 와그라는데.”
“어무이가 니는 꼭 가야된다고 했다 안하나.”
지민이 의아한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끼익 소리를 낸 검은 열차가 두 소년의 등 뒤로 멈춰 섰다. 부산은 출발역인 탓에 내리는 승객은 없었다. 승강장에 서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기차에 탑승하자, 소년이 지민의 등을 떠밀었다.
“네 여행간다케서 부러워 죽겠는데, 와 니는 울상인데. 빨리 안 타고 뭐 하노. 곧 출발할 기다.”
소년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기차가 경적소리를 냈다. 곧이어 탑승을 재촉하는 역무원의 목소리가 역 안을 가득 울렸다. 엉겁결에 기차에 올라탄 지민이 그의 친우를 내려다보았다. 짧게 깎은 머리칼이 햇살에 반짝거렸다. 분명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또 교모를 어딘가에 두고 왔거나, 잃어버렸을 테다. 지민은 오랜 친구에 대해 잘 알았다. 늘 어딘가 헐거운 구석이 있는 녀석이었다. 기차 계단에 선 지민이 제 모자를 벗어 소년의 머리 위에 씌웠다. 승강장에 선 소년이 얼떨떨한 얼굴로 지민을 올려다보았다.
"또 놓고 왔지? 쌤한테 혼나면 어쩌려고 매번 잃어버리노."
지민의 다정한 음성에 소년이 머리를 긁적였다. 소년이 뭐라 뭐라 말하려는 찰나, 기차가 서서히 움직였다. 지민의 모습이 시야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소년은 승강장을 뛰며 주머니에서 꺼낸 종이를 지민에게 건넸다. 편지는 아슬아슬하게 지민의 손에 닿았다. 기차가 점점 속도를 내고 지민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까까머리 소년은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꾹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우짜노, 지민아.”
차마 하지 못한 말이 입안을 맴돌았다.
'네 어무이 아부지 끌려가셨다.'
진실을 함구했기에, 지민에게는 두고두고 용서를 구해야 할 터였다. 허나 일본군에게 끌려가기 직전 제게 부탁하던 여인의 간절한 목소리를, 소년은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모두 지민을 위한 일이라는 여인의 말이 귀에 맴돌았다. 지민 어머니의 처절한 부탁을 되뇌며, 소년은 자신의 머리 위에 놓인 검은 교모를 벗어 품에 꼭 안았다.
“지민아, 언젠가 우리 꼭 다시 만날 기다.”
* * *
열차가 속도를 냈다. 사람들을 비집고 열차 칸을 몇 번이나 옮긴 끝에 지민은 비로소 제 자리를 찾아 착석했다. 기차의 종착지는 경성이었으나, 지민이 내려야 할 곳은 대구였다. 열차 밖 풍경이 빠르게 흩어졌다. 지민은 손에 쥔 꼬깃꼬깃한 종이를 펼쳐들었다. 구겨진 종이 위로 익숙한 이름과 주소 하나가 적혔다. 경성에 있는 큰아버지 성함과 집 주소였다. 휘갈겨 쓴 글씨체가 상황의 급박함을 짐작케 했다.
답답한 마음에 목 끝까지 채운 단추를 풀며, 지민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오늘 낮 수업이 파할 무렵 교실에서 듣게 된 소식을 떠올렸다.
모든 수업이 끝나고 종례만 남긴 시간이었다. 곧 집에 간다는 기대감에 빽빽한 교실 안이 제법 왁자지껄 해졌다. 그 때, 갑작스레 교실에 들어온 소년 하나가 소리쳤다.
"오늘 부산 경찰서에 폭파 사건이 일어났대!"
학생들의 이목이 일순 소식을 전한 소년에게로 집중되었다.
"폭파 사건?"
"그래서 지금 경찰서장 병원에 실려 가고 난리 났다 안 하나."
한 학생이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쳤다. 누군가의 용기에 대한 칭송이었다. 그러자 옆에 앉은 짝꿍이 그의 옷깃을 잡아 내리며 눈짓을 주었다. 일본인 경찰서장의 피습 소식에 반 전체가 웅성거렸다. 지민 또한 교실에 앉은 소년 중 하나였다. 지민은 순간 불안을 느꼈으나 애써 감정을 지워냈다. 콩나물시루같이 빽빽한 교실 안에서 소년들의 대화 주제는 오로지 폭파 사건뿐이었다.
"근데 누가 그랬는데?"
"그건 내도 모르지."
"에이 뻔하지 않노, 독립투사겠지."
잔뜩 흥분한 소년들의 목소리가 교실 밖으로 흘러나왔다. 복도를 거니는 선생의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교실에 앉은 학생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소식을 전하던 소년이 낡은 교탁을 짚은 채로 쉿 하고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댔다. 교실 안으로 적막이 감돌았다. 고요해진 교실 안을 훑은 소년이 속삭이듯 말했다.
"소문에 의하면 그 독립투사 무역상으로 위장했다 캤다."
지민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불안이 현실로 바뀐 순간이었다. 어떻게 해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연필을 쥔 손이 달달 떨렸다.
“그럼 그 독립투사는 어떻게 됐는데?”
교실 한구석에 앉은 소년이 소리쳤다. 지민 또한 묻고 싶던 말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교실 한가운데 선 소년을 차마 보지 못하고, 지민이 고개를 숙였다. 그가 대답하기까지의 시간이 영겁처럼 흘렀다. 친우들과 해운대 앞 백사장을 내달렸을 때보다, 심장은 더 빠르게 뛰었다. 제발. 지민은 속으로 간절하게 빌었다. 제발.
“서장이랑 같이 앉은 자리에서 투척한 거라, 아마 다쳤을 기다.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안 하나.”
소년의 목소리가 끝내 지민의 귀를 타고 흘러왔다. 처참해진 얼굴을 가리려 지민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다문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언젠가 이러한 상황을 마주할 것을, 지민은 어릴적 부터 알고 있었다. 허나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어젯밤 그리도 다정하게 가족들에게 기차표를 건넨 형의 거사가, 오늘 일 거라고는.
* * *
실로 오랜만이었다.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무역 회사에 취직한 후로 형이 집에 들어온 날은 손에 꼽았다. 어느 날인가는 상해에 갔다고 했고, 또 어느 날인가는 멀리 신가파(新嘉坡)에 갔다고 했다. 짧으면 일 년에 한 번, 길면 이삼 년에 한 번씩 집에 들르기 일쑤였다. 아주 드문드문 이긴 하지만 집에 돌아오는 날이면 신기한 외국 물건을 잔뜩 들고 오는 통에 지민은 형이 돌아오는 날을 학수고대했다. 어제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상해에서 형이 사온 최신식 필기구로 시험 삼아 종이를 끼적거리던 지민에게 그의 형이 말했다.
"박지민 언제 이래 컸대, 이래이래 조막만 했는데."
"내도 이제 중학생이거든."
배를 깔고 누워 종이에 어제 배운 알파벳을 그리던 지민이 발끈했다. 그의 형이 웃으며 지민을 바라보자, 지민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내 이제 겁쟁이도 아이다."
"누가 언제 네보고 겁보라 했노?"
"내 형 때문에 맨날 겁쟁이 소리 안 들었나. 허구한 날 비교 당하고."
"내 눈에는 네도 대장부다. 박지미이. 네는 지인짜 크게 될 기다."
지민은 필기구를 보는 척 시선을 피했으나 슬금슬금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길 수가 없었다. 지민에게 형은 늘 존경해 마다않은 인물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지민은 자라는 내내 형과의 비교에 시달렸다. 그런 말을 뱉는 누구도 의도치 않았으나, 지민만은 주변의 사소한 평가를 마음에 담아두었다. 그러나 마음에 움튼 질투를 차마 드러낼 수는 없었다. 부러워 하기에, 형은 너무도 멀리 있었다.
어릴 적부터 지민의 형은 남달랐다. 공부에 두각을 나타냈던 것은 물론 사내다운 과단성도 있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조국해방에 뜻을 둔 이들과 교류했던 형은 왜관에 있는 무역회사에 취직하기 전까지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했다. 방 한구석에 쌓여있던 등사판 독립 잡지나 보통학교용 역사서는 그런 형의 자취이자 역사였다.
반면 지민은 다정하고 따뜻했으나, 겁이 많은 편이었다. 일본군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오장 육부가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형과는 달리 몸집도 왜소한 편이었다. 지민은 그 점이 가장 억울했다. 형처럼 살아보겠다는 일념 하에 역이나 번화가에 몰래 독립잡지를 뿌리고 오던 밤이면, 지민은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누가 쫓아오지는 않을까, 항상 숨을 헐떡거리며 집으로 전력질주를 했다. 어떻게 해도 형처럼 의연해질 수 없다는 것을 지민은 진작 깨달았다.
어머니가 걱정하시니 자주 집에 들어오라고 형을 다그치는 것이 그나마 지민이 어깨에 힘을 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온화한 성품으로 평소에도 부모를 잘 보필하는 지민이었으나, 형을 대신한 효자 노릇이 그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열등감의 발로이기도 했다.
학교에서 배운 수학공식을 끼적이던 지민이 재차 헛기침을 하며 형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다시금 그에게 물었다.
"…….내 진짜 크게 될 것 같나?"
"당연하지. 형이 무역일 하면서 사람 마이 만나봐서 알지 않나. 네는 딱 크게 될 상이다."
"내 겁보 같지는 않고?"
"겁보는 무슨. 네는 사근사근하고 다정해서 좋은 일 마이 할기다."
"그런 거 말고. 착하고 다정하고 이런 거 내도 싫다. 다른 거 없나?"
"그럼 니 독립투사라도 될 기가?"
"내라고 못할 법 있나."
형은 미소를 지으며 지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누가 뭐라케도 내는 믿는다. 내 동생."
지민이 형을 바라보며 웃었다. 씽긋 눈을 접으며 웃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의 형이 갑자기 외투 안주머니에서 기차표를 꺼냈다.
"형만 이래 멀리 구경하고 오니까 억울하지? 너랑 어무이, 아부지 큰 아부지 댁 다녀오라고 내 기차표 예매 했다."
형의 말에 한껏 신이 난 지민이었다. 기차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지민은 곧장 형에게서 건네받은 기차표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곧 그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어? 이거 내일 출발인데?"
지민이 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형이 지민의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 하지 않나, 내일 가서 놀고 온나.”
“내 학교는?”
“네 학교 끝나고 출발이니까 주말 동안 잘 놀다 오면 되지.”
표를 매만지던 지민이 형을 향해 다시금 웃었다. 붉게 홍조가 핀 지민의 볼을 잡아당기며 그의 형이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는 지민이 쓴 수학 공식을 고쳐 적으며 지민에게 말했다.
“어무이, 아부지 잘 보살펴 드리고, 네도 건강하고, 우리 지미이 훌륭한 사람 돼야 안 하나.”
그때 지민은 미처 몰랐다. 미제 필기구와 손에 쥔 표에 정신이 팔린 사이 형이 했던 말의 속뜻을. 그 말이 거사를 앞둔 형의 유언 같은 바램이었음을. 그리고 손에 쥔 티켓이 여행이 아닌, 도피의 목적으로 제게 쥐어준 것임을. 열넷의 지민은 알지 못했다.
* * *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로, 지민은 눈을 감았다. 참아보려 애를 썼지만 쉴 새 없이 눈물이 났다. 꾹 다문 입술 새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간혹 흐느끼는 소리에 승객들의 시선이 지민에게로 멈췄다가 이내 흩어졌다. 그리고 차츰 슬픔은 걱정으로, 염려는 두려움으로 변했다. 형은 어떻게 되었을까. 혹시 어제 보았던 모습이 마지막이 되지는 않을까. 부모님은. 부모님은 언제 오실까. 두려움이 지민을 덮치자, 곧 눈물도 멎었다. 지민은 홀로 기차에 탑승했던 지난 순간을 후회했다. 그냥 기다릴 걸. 언제 올지 몰라도 부모님을 기다릴 걸. 생각 끝에 갑작스럽게 불안이 엄습했다. 굳이 제 벗을 보내 먼저 가라고 했던 연유가 무엇일지, 지민은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주소를 휘갈겨 쓴 필체가 말했다. 어쩌면 부모님이 역에 나타나지 못한 건, 보통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달리는 기차에서 내려 부산으로 뛰어가고픈 마음을 몇 번이나 다잡았을 때, 차체가 점점 느려졌다. 칙- 증기를 뿜으며 기차가 멈춰 섰다. 창문 새로 도착역을 알리는 문구가 보였다. 검은 철판에 하얀 페인트로 적힌 ‘대구’에 지민의 시선이 멈췄다. 지민이 손에 쥔 표를 펼쳤다. 대구까지 가는 삯을 지불한 표였으나, 어미가 제게 가라 한 곳은 경성이었다. 지민은 오랜 고민 끝에 자리에서 눈을 감았다. 검표의 순간보다는 부모님과 길이 엇갈리는 편이 더 두려운 열넷 소년이었다. 아무리 자는 척을 해보려 해도 쉽사리 잠은 오지 않았다. 몇 번을 뒤척이던 지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차 복도를 거닐었다.
오랜 시간 끝에 경성역에 도착했을 때 지민은 파김치 상태였다. 표를 검사할 때마다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화장실에 숨어 위기를 모면했다. 워낙 가슴을 졸인 탓에 완전히 지쳐버렸다. 같은 칸 승객들과 함께 기차에서 빠져나온 지민이 낯선 역사를 두리번거렸다. 마중 나온 가족들과 조우한 승객들, 둘 셋씩 무리지은 사람들이 흩어지고 역 안에는 오직 지민만 남았다. 저벅저벅 걷는 걸음이 무거웠다. 화려한 도시가 빛날수록 지민의 외로움도 커져갔다. 혹시나 잃어버릴까 오랫동안 손에 쥔 종이는 땀에 절었다. 사실 어딘가에 두고 왔다 해도 상관없었다. 읽고 또 읽은 탓에 주소는 외운지 오래였다.
경성역 앞에서 사람들을 흘끔거리던 소년은 오랜 망설임 끝에 인력거꾼에게 다가갔다. 밤이 늦은 시간이라 그마저도 많지 않았다. 인력거꾼은 검은 교복 차림의 지민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한참 끝에 지민이 들릴 듯 말 듯 짧게 주소를 말했다. 밤의 도시를 가로지르던 인력거는 오랜 주행 끝에 지민을 어두운 길가에 내려두고 사라졌다. 지민은 가로등 하나 없는 새카만 길에 서서 눈앞의 기와집을 보았다. 시간은 알 수 없었지만 아마 자정쯤이라 짐작했다. 지민이 침을 꼴깍 삼키고는 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답이 없었다. 초조해진 지민이 다시금 대문을 두드렸다. 그제야 발소리가 났다.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나온 여인이 문 앞에선 지민을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어머! 지민이니?”
큰어머니를 마주하고서야, 지민은 긴장을 풀었다.
그날 이후로 지민은 경성 큰아버지 댁에서 보냈다. 어쩐 일이냐는 숙부의 물음에도 곧 부모님이 오실 거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다음 날 숙부의 손에 들린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실렸다. 부산경찰서 마시모토 서장 피습사건. 형의 기사를 보고도 지민은 입을 다물었다. 한 주가 지나고 큰아버지가 소식을 들고 돌아왔다. 처참한 표정의 남자가 한참 끝에 입을 열었다.
“너희 형이 사형을 선고받고 서대문으로 이송되었단다.”
지민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부모님은요?”
“옥바라지하시느라 경황이 없으셨단다. 널 다시 부산으로 보내라셔.”
“형, 우리 형 보고 싶어요.”
* * *
지민은 떨리는 마음으로 어두운 복도를 가로질렀다. 서슬 퍼런 눈빛의 일본인 순사가 지민을 쳐다보자, 지민이 시선을 피했다. 간혹 형무소 안으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울릴 때마다 간담이 서늘해졌다. 내딛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곧 끼익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두세 평짜리 작은방에 들어선 지민이 낡은 나무 책상에 앉았다. 몇 사람이나 이 자리를 지나갔을까. 몇 사람이나 여기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을까. 지민이 길게 심호흡을 했다. 사형수에게 주어진 면회시간은 고작 십분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그토록 그립던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민은 입을 틀어막았다. 피골이 상접한 형의 얼굴에 말문이 막혔다. 호송 줄에 양손이 묶인 채, 수의를 입은 형의 모습이 지민은 낯설었다.
지민의 눈동자가 떨렸다. 낡은 나무책상을 두고 마주앉은 두 사람의 얼굴에 슬픔이 드리웠다. 차마 형에게 말을 건넬 수 없었다. 그때 야윈 손이, 책상 위에 놓인 하얀 손을 덥석 잡았다. 지민이 고개를 들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찬기에, 지민이 양손으로 형의 손을 맞잡았다.
“지민아. 형 보고파 왔나?”
볼품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그간의 고초를 짐작케 했다.
“....형.”
울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지민이 형을 응시했다. 달싹이던 입을 몇 번이나 다물었다. 서대문으로 오면서 몇 번이고 다짐했었다. 먼저 울기 없기. 절대 울지 말기. 지민이 숨을 멈추고 눈물을 참아내자, 그의 형이 애써 웃었다. 희미하게 웃는 입술 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밥은.”
“왜놈들이 주는 밥 먹고살기 싫다.”
교도관이 도끼눈을 뜨자 지민이 애원하듯 그를 바라보았다.
“.... 형.”
“어무이, 아부지는 네가 잘 지키고 있제?”
“건강하게 잘 지내셔.”
지민은 차마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큰아버지가 전한 소식에 따르면 집을 수색하러 온 일본군과 대항하던 아버지가 긴 몸싸움 끝에 몸져 누우셨다고 했다. 아들의 마지막을 볼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을, 지민은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지민아. 형이 몇 번이고 했던 말 기억하나.”
“.....”
“내는 우리 동생 믿는다고.”
“형.”
교도관이 딱딱한 목소리로 면회시간이 채 일분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지민이 초조한 얼굴로 형을 보았다.
“밥 챙겨 무라. 형.”
“괘안타. 안 묵어도, 네 보니까 내는 이미 배부르다.”
“형. 내는 형이 늘 부러웠다. 그치만 형이 제일 존경스럽고...”
지민이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거렸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고개를 들었으나 지민은 금세 형을 응시했다. 얼굴을 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민이 비쩍 마른 형의 손을 꼭 쥐었다.
“누가 뭐래도 박지민이. 네는 내 자랑이었다.”
형의 말을 끝으로 종소리가 울렸다.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하는 순간이었다. 한 귀퉁이에 선 두 교도관이 형을 일으켜 세웠다. 형은 끝까지 꼿꼿했다. 의연하게 지민을 보고 웃던 그의 형이 철문을 지나 사라질 때까지, 지민은 형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지민은 속으로 한참을 울었다. 그러나 끝끝내 형에게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다. 한참을 나무책상에 앉아있던 지민에게 교도관이 눈짓을 주었다. 지민은 형무소를 빠져나오며 그제야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비쩍 마른 형의 얼굴이 계속 눈에 아른거렸다. 지민은 속으로 몇 번이고 다짐했다.
‘형, 내가 자랑스러운 동생이 될게.’
From. 스페스 |
이제 완연한 봄이네요. 다들 따뜻한 봄날 만끽하고 계신지요. 경비대에는 봄이 오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소중한 댓글들 늘 감사하게 읽고 있습니다. 다들 여러모로 바쁘실텐데 힘내시고, 다음 편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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