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라더니 하루만에 전화하는 건 뭐지?”
“전화했더니 한 명 더 달고 오는 건 뭐지???”
전문 용어로, 멘붕이었다. 그 소란스런 아침에 코 앞에서 잔망을 떠는 정재현을 밀친 내가 내뱉은 말은 무려 집에 갈래! 였다. 밑도 끝도 없이 집에 간다면서 현관문으로 달려간 내가 얼마나 황당했을까. 부정하고 또 부정했던 마음을 끝끝내 인정하는 순간 정재현은 나한테 마냥 친구가 아니였고, 그건 정말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다급히 정수정에게 저녁에 나 좀 보자 SOS를 요청했는데.. 난 몰랐지..
“야, 서운하다? 달고 오다니?”
김동영이 딸려올 줄은..(주먹)
“넌 왜 왔어?”
“내가 뭐 못 올 곳 왔어? 둘이 나 없으면 무슨 얘기 하려고?!”
이를 바득 갈며 정수정을 쏘아봤다. 내가 왜 보자고 했는지 다 눈치 챘으면서 김동영을 데려와? 정수정은 내 날 선 눈빛을 피하며 어깨를 으쓱인다. 꽤 오랜만에 만난 김동영이 펄쩍 뛰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우리 사이에 불청객 취급은 있었던 적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 ‘우리’ 가 꾸준히 지켜오던 친구 사이를 내가 오늘 아침에 깨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녀석이 불청객일 수 밖에 없다. 정수정한테 털어놓는 것도 쪽팔려 죽겠는데 이렇게 되면 김동영한테까지 까야되잖아(ノ`Д´)ノ
“야야. 우선 주문부터 하자.”
정수정은 나와 김동영을 동시에 입 막기 위해 메뉴판을 들었다. 뭐 마실래? 묻는 말에 망설임 없이 도수가 높은 칵테일을 선택했다. 오늘 터는 잔에 정재현도 털어버리기~! 좋아하게 된 것도 나름 한 순간이었으니 마음을 접는 것도 분명 쉬울 거라 생각한다. 텐 오빠! 치타폰 분위기 비율에 60퍼는 먹고 들어가는 재즈 음악 위로 정수정의 목소리가 겹쳤다. 카운터에 있던 텐 오빠가 예쁘게 웃으며 다가왔다.
“셋 다 오랜만이네? 재혀니는?”
“아, 정재현은 동기들이랑 약속 있대요.”
“동기? 그게 무야?”
“대학교 친구요! 대학교 친구들 만나러 갔어요.”
귓구멍을 파고드는 이름 석자에 몸이 움찔했다. 같이 없어도 사방이 정재현이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원래 같았으면 정재현 스케줄은 내 입에서 나와야 하는 건데 오늘은 그 담당이 김동영이다. 저거저거 딱 보니 정재현한테 먼저 연락했다가 까여서 정수정한테 연락 한 거구만? 정재현이 동기들을 만나러 간 건 이틀 후에 개강을 하기 때문이겠지. 개강 전 광란의 파티, 뭐 그런 거라도 하나보다. 주문을 받은 텐 오빠는 금방 가져다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돌아갔다. 방금까지 싱글싱글 잘만 웃던 김동영이 비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말해봐. 뭔데.”
“웃겨. 너부터 말해.”
지금부터 눈치 싸움이였다. 분명 김동영도 나만큼 어마무시한 일이 있는 거다. 그러니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거라고 나는 확신했다. 내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자 내가 뭐..! 를 시전하는 모습이 너무 어색해 딱 티가 나기 때문이다. 정수정은 기본 안주로 나온 땅콩 과자를 입으로 가져가며 나와 김동영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다. 누굴 속이려고? 그러자 김동영이 두 눈을 꾹 감으며 땅이 꺼져라 숨을 내쉰다.
“주문한 거 나오면 말해줄게.”
“정수정 넌 알아?”
“알지. 김여주 너가 무슨 말 하려는지도 대충 알아.”
...얄미워ヽ(`Д´)ノ 김동영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제 옆에 앉은 정수정을 흘겨본다. 주문했던 칵테일이 테이블 위에 놓여진 건 그로부터 몇 분 후였다. 김동영은 도대체 무슨 일인 건지 텐 오빠가 칵테일을 내려놓자마자 원샷을 해버렸다. 미친놈아, 소주냐? 옆에서 정수정이 경악을 했지만 그에 개의치 않고 빈 칵테일 잔을 호탕하게 내려놨다.
“나 헤어졌다!!!”
그러더니 그런 말을 외친다. 뭐? 놀란 마음에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다 안다던 정수정은 혀를 끌끌 차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게 무슨 소리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페북에 사랑해 어쩌고 너밖에 없어ㅎㅎ 그러더니? 내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해보이자 입을 쩝 다신 김동영은 또 한 번 깊게 한숨을 쉬며 빈 칵테일 잔을 높게 들었다. 형, 저 소주 한 병만요..
“양다리더라.”
“헐.”
“아, 열이 확 오르네.”
김동영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나는 입을 떡 벌린 채 그런 김동영을 바라봤다. 왜 왔냐고 구박했던 과거의 나 머리 박아야 할 것 같은데.. 어마무시가 아니라 그냥 무시무시였네..; 김동영 옆에 앉아있는 정수정에게로 잠시 시선을 옮겼다. 정수정은 어쩐지 처음 봤을 때 느낌이 안 좋은 여자애였다며 땅콩 과자를 으드득 씹었다. 그 말에 칵테일을 한 모금 넘겼다. 자세히 말 해봐. 분위기가 꽤 심각하게 돌아갔다.
“어제. 같이 점심 먹자고 연락했더니 선약이 있다는 거야. 그래서 그냥 혼자 먹어야 겠다 하고 나갔거든?”
“어어.”
“근데 걔가 딴 남자랑 팔짱을 끼고 지나가더라.”
오늘 만나서 얘기했는데, 자기 양다리였대. 미안하다면서 울더라고. 울고싶은 건 난데. 말을 마친 녀석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때 텐오빠가 소주와 소주잔을 들고 왔다. 고맙다며 어설프게 웃어보인 김동영이 고개를 떨구며 빈 잔에 소주를 가득 채웠다. 약 한달 전 드디어 솔로 탈출 이라며 신나게 자랑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나는데 양다리라니. 여자를 실제로 만난 적은 없지만 김동영이 많이 좋아했다는 건 알았다. 여자친구가 별로 안 좋아한다고 우리랑 노는 것 까지 줄였던 놈이니까. 근데 양다리라니. 양다리라니..!
“야, 됐어. 내가 걔보다 백 배 예쁜 애들 소개 시켜줄게.”
정수정이 김동영의 어깨를 팡팡 두들겼다. 강도는 때리는 수준이였지만 위로용 팡팡이니 두들겼다고 해주자. 김동영은 작게 어깨를 들썩이곤 채운 잔을 단숨에 넘겼다. 그 모습이 남 일 같지 않아 목을 만지작 거리며 칵테일 잔을 들었다. 내 이별도 평범한 이별은 아니였으니까. 머릿 속을 스쳐 지나가는 얼굴에 술이 조금 더 쓰게 느껴졌다.
“경험자로서 말하는 건데.”
“..”
“이럴 땐 술이 최고야.”
마셔 마셔. 나도 그렇고 김동영도 그렇고, 오늘이 마시고 죽는 날이라는 직감이 빡 왔다. 칵테일 잔과 소주 잔이 명쾌하게 부딪혔다. 조합이 영 이상했지만 굳이 따질 필요는 없었다. 건배 한 번에 모든 위로가 담겼다. 결국 벌써 바닥을 보인 칵테일 잔을 옆으로 치운 후 김동영과 마찬가지로 소주 잔을 쥐었다. 이 눈물나는 의리 진짜. 정수정이 고개를 작게 젓는게 보였다. 나 너네 버리고 갈 거야. 안 챙길 거니까 알아서 해! 말은 저렇게 해도 항상 챙겨서 나가줬으니 패쓰~!
“야, 소주도 텐 형 가게에서 마시니까 더 맛있다. 그치?”
“오빠가 잘생겨서 그래.”
김동영은 그래도 오래 만난 사이는 아니라 다행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난 술만 마시면 울었는데 쟤는 울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양다리를 걸친 전 여자친구를 욕 하는 것도 아니였다. 그건 정수정이 대신 해주고 있다. 거의 말로 뺨을 후려치는 수준..(코쓱) 그렇게 한 잔, 두 잔. 어느새 정수정까지 소주 파티에 합류해 빈 소주 병이 하나 둘씩 늘어갔다. 안주로 속을 달래가며 계속 잔을 넘겼다. 취기가 오르는게 느껴졌다.
“김여주. 넌 마음 정했어?”
“..”
“무슨 마음을 정해?”
그러던 중 탁, 하고 잔을 내려놓은 정수정이 내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입꼬리가 곡선을 그리는 걸 보니 거짓말은 씨알도 안 먹히겠구나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김동영은 어리둥절해 하며 미간을 좁혔다. 그런 김동영과 정수정을 번갈아 쳐다보다 잔을 아슬하게 채우고 있는 소주를 또 한 번 입에 털었다. 어딘가에서 나처럼 술을 마시고 있을 정재현을 잠시 떠올렸다.
“..”
“….”
“나 정재현 좋아하는 것 같아.”
사고가 둔해져 말부터 툭 튀어나왔다. 푸웁. 김동영이 마시던 술을 뿜었다. 아 드러.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정수정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럴 줄 알았다며 박수까지 치며 좋아한다. 김동영은 여전히 상황파악이 안 되는 것 같았다. 눈을 크게 뜨며 입술을 벙긋 거린다.
“아니 잠깐만. 이게 무슨 소리야? 너가 정재현을 좋아한다고?”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지 좋아하는 것 같아는 뭐야.”
“아 쪽팔리니까..”
“야 너 정수정이랑 이 얘기 하려고 아까 막 그런 거였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이미 말한 걸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연신 대박을 중얼 거리는 김동영의 목소리가 정수리를 쿡쿡 찔렀다. 그래, 너가 생각해도 말이 안되지?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돼(TДT)ノ울상을 지었다. 귀 끝까지 열이 오른게 느껴졌지만 술 때문에 이미 붉어져 있을테니 티는 안 날꺼다. 그래도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였다. 나는 반 쯤 남은 소주병을 들고 그대로 입으로 가져갔다. 얘 또 이러네. 몇 모금 마시지도 못하고 금방 정수정에게 뺏겼지만.
“아 왜! 왜 뺏어!”
“너는 꼭 무슨 일 있으면 병나발부터 불더라.”
“오늘 딱 마음 정리 할 거야. 나 정재현 안 좋아할 거야.”
너네 이거 무덤까지 가져가라. 정재현한테 말하면 진짜 절교야. 테이블을 쾅쾅 내리쳤다. 쉬울 거라고 했지만, 물론 감정이 내 마음대로 이랬다 저랬다 되지 않는다는 건 안다. 하지만 노력이라도 해야 했다. 그만큼 절실했다. 내 앞에 앉아있는 얘네 둘 처럼 정재현도 끝까지 친구여야 하니까. 내가 정재현을 좋아하면 많은 것들이 뒤틀리게 된다. 그건 정말 겁이 난다고. 내가 잘못 행동해서 나와 정재현의 관계 뿐만 아니라 우리와 이어진 다른 사람들까지 좋은 인연을 잃을까봐 무섭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냥, 정재현을 잃는게 싫다.
“야, 나 믿고 고백해.”
“미쳤어?”
“아니야. 그냥 먼저 키스해.”
“..”
나만 조용히 마음 정리하면 다 원래대로 돌아간다. 근데 쟤들은 내 마음도 모르고 저런다. 고백 하면 까일 확률 백 퍼센트고, 그렇게 되면 고통 받게 될 사람들 1순위가 너네야..(바득)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정수정이 뺏어갔던 소주병을 다시 가져왔다. 야! 하이톤 목소리가 귓가를 찔렀다. 정수정이 손을 뻗었지만 두 번은 안 당한다는 집념으로 요리조리 피해 병 채로 소주를 넘겼다.
“미쳤네 미쳤어.”
정재현을 좋아하는 게 그렇게 고통스러워 할 일이야? 김동영이 새 소주병을 까며 혀를 쯧 찼다. 정수정은 골이 울리는지 이마를 꾹 누르더니 여전히 내 손에 들린 빈 소주병을 낚아챘다.
“너 또 친구 어쩌고 하면서 마음 접지 마. 넌 내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겨.”
“그래 김여주. 솔직히 정재현 괜찮잖아. 남자로서 정재현 인정.”
술기운이 올라왔다. 큰일났다. 세상이 막 돌아. 애써 눈에 힘을 주며 정수정과 김동영을 바라봤다. 너네 징자.. 자꾸 나 부추길래? 엉? 나도 모르게 발음이 꼬였다. 무거워진 고개를 손으로 받쳤다. 마음 접을 거야. 안 좋아할 거라고. 눈을 꾹 감았다. 그러자 정재현이 보인다. 아침에 가까이 마주하던 얼굴이 또 눈 앞에서 둥둥 떠다닌다.
“너네는..”
“..”
“너네는 나한테 정재혀니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
씨잉.. 입술을 퉁 내밀었다. 내 말에 김동영이 제 가슴팍을 퍽퍽 두들기더니 야 김여주, 라며 나를 부른다. 나는 뭐냐는 듯 눈을 또 한 번 끔뻑였다. 너가 몰라서 그러는데, 정재현은 너 옛..,. 김동영이 딱 거기까지 말 했을 때, 정수정이 녀석의 입에 땅콩 과자를 한 움큼 쑤셔넣었다.
“머하냐..?”
“얘 그냥 무시해. 아무튼 나는 너랑 정재현 잘 됐으면 좋겠어.”
..그냥 너부터 무시할래.
알딸딸했다. 쭈쭈바를 입에 문 채 신발코를 바닥에 쿡 박았다. 현재 시각 아홉시 오 분. 정수정과 김동영한테는 바로 집으로 갈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사실 나는 지금 민형이를 기다리고 있다. 집에 들어가라고 설득해야지 생각하자마자 택시를 잡고 민형이네 학교로 왔더랬다. 이 충동적 인생, 오늘도 정말 보람찬 하루다. 팔목에 걸친 비닐봉지가 바람에 스쳐 구겨지는 소리를 냈다. 비닐봉지 안에는 민형이 몫으로 산 쭈쭈바가 들어있다. 나만 쪽쪽 빨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사는 김에 하나 더 샀다. 찬 걸 먹으니 술이 좀 깨는 것 같았다. 아, 술 냄새 엄청 날텐데. 그 생각을 하며 마중 온 걸 아주 조금 후회했지만 곧 생각을 날려보냈다.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하나둘씩 교문 밖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어, 민횽이다.”
저 멀리 걸어오는 잘생긴 남자애는 딱 봐도 우리 민형이네. 그 옆에는 저번에 봤던 친구인가보다. 이름이 뭐였더라. 이.. 뭐였는데. 미간을 슬쩍 좁히며 민형이 친구의 이름을 기억해내려 애쓰는데 어떤 여학생이 민형이를 툭툭 치는게 보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민형이 활짝 웃는다. 그 모습을 보는데, 하마터면 쭈쭈바를 떨어뜨릴 뻔 했다. 와 이민형.. 학교 친구들한테는 저렇게 잘 웃어주나보네.
“나랑 얘기할 땐 맨날 무표정이면서.”
입술을 씰룩이며 애꿎은 쭈쭈바를 잘근 씹었다. 민형이는 이런 나를 발견하지 못한 채 계속 교문 쪽으로 걸어왔다. 남자애들이라 그런가 걸음이 굉장히 빨랐다. 녀석이 얼추 가까워졌을 때, 나는 민형아! 하고 녀석을 불렀다. 그러자 민형이의 고개가 내 쪽으로 향했다. 민형이 친구도 같이.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떠보이는 모습에 어색하게 웃었다.
“어! 선생님 안녕하세요!”
“아하하, 친구도 안녕하세요~”
이름이 생각이 안 나니 일단 친구라고 했다. 좋았어, 자연스러웠어. 민형이가 먼저 입을 열기도 전에 민형이 친구가 내게 인사를 하며 내 쪽으로 민형이를 끌었다. 나는 쭈쭈바를 쥐고있던 손을 소심하게 흔들어보였다. 민형이의 눈썹 끝이 올라간다.
“야자 잘 해써?”
“네. ..저 기다리신 거에요?”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너 말고 누구 기다렸겠어. 하마터면 입 밖으로 내뱉을 뻔 했지만 꾹 참았다. 나는 비닐봉지부터 팔목에서 빼냈다. 녹기 전에 줘야겠다 싶어서 쭈쭈바를 꺼냈긴 했는데, 당황한 건 그 직후였다. 민형이 친구는 생각도 못했네.. 쭈쭈바 하나밖에 없는데..(먼산)
“어떡하지? 내가 모르구 쭈쭈바를 두 개 밖에 안 샀는데..”
“에이, 선생님 괜찮아요~! 민형이는 원래 이런거,”
“완전 좋아해요.”
해맑게 웃으며 쭈쭈바 쪽으로 손을 뻗는 민형이 친구의 행동을 민형이가 냉정하게 쳐냈다. 그에 벙찐 건 나였다. 아이구 어떡해. 힘 없이 내쳐진 손이 그렇게 가냘퍼 보일 수가 없었다.
“이동혁. 너 안 가?”
“..가. 가야지.”
아 맞다. 친구 이름이 동혁이였지 참. 뒤늦은 깨달음에 입술을 살짝 벌렸다. 쭈쭈바를 가져간 민형이는 포장을 까며 동혁이에게 얼른 가라고 손짓 했다. 나는 또 한 번 어색하게 웃었다. 동혁이가 아기 강아지처럼 입술을 삐쭉 내밀었기 때문이다. 아아, 슈퍼 가서 쭈쭈바 하나 사주고 싶다..T^T 나는 왜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쭈쭈바를 두 개만 샀을까.
“선생님, 먼저 가볼게요. 안녕히 가세요.”
“미안해요.. 다음엔 꼭 더 맛있는 거 사줄게요!”
“선생님이 쟤한테 왜요. 빨리 가요.”
야, 너는 이거 물고 가. 민형이가 쭈쭈바 꽁다리를 동혁이 손에 쥐어줬다. 민형이 너.. 그렇게 매정하게 쳐냈으면서..(말잇못) 눈 앞에서 펼쳐진 병주고 약주고 모먼트에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 동혁이는 말 없이 꽁다리를 만지작 거리더니 세모눈으로 민형이를 쳐다보며 입으로 가져간다. 그런 동혁이에게 다시 한 번 손을 흔드는데, 민형이는 또 쌩 하니 먼저 등을 돌린다. 어우 이민형. 동혁이가 작게 중얼 거렸다.
“집에 조심히 가요!”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한 후 얼른 민형이를 쫓았다. 동혁이는 어쩌다가 민형이의 친절 리스트에서 빠지게 된 걸까..(측은)
“민형아 같이 가..!”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며 말하자 민형이가 짧게 나를 돌아본다. 얼른 그 옆까지 도달해 걸음을 맞춰 걸었다. 거의 다 먹은 쭈쭈바를 다시 물며 민형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민형이도 쭈쭈바를 물고 있었다. 폼이 영 어색하긴 하지만.
“술 마셨어요?”
“..냄새 많이 나..? 아 어떡해.”
민형이의 물음에 나는 미간을 좁히며 양 팔을 코로 가져갔다. 킁킁 냄새를 맡았는데 역시는 역시였다. 술 냄새가 아주~! 머쓱한 마음에 괜히 입술을 깨물며 슬쩍 녀석에게 다시 시선을 옮기자, 쭈쭈바를 입에서 뗀다. 왜 마셨어요? 밤하늘이 잔잔하게 울렸다. 아무 표정 변화 없이 저런 질문을 던지니 나는 또 시선을 떨굴 수밖에 없었다. 정재현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구냥.. 친구들이랑 마셨어.”
“왜 왔어요. 술 취했으면 집에 가지.”
“나 안 취해써..”
“또 거짓말.”
쩝, 입맛을 다셨다. 정재현을 애써 머릿 속에서 떨쳐냈다. 쪼금 취했다고 하자..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민형이는 그런 나를 가만히 보더니 바람 빠진 웃음을 내뱉으며 쭈쭈바를 입으로 가져갔다. 저기서 버스 타면 돼요. 곧 손가락으로 앞 쪽을 가리킨다. 곧게 뻗은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앞으로 놓았다. 가을 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온다.
“민형아.”
“네.”
“너 어제 그렇게 전화 끊구.. 너무해.”
바람에 머리카락이 낮게 날렸다. 다 먹은 쭈쭈바를 두 손으로 쥐며 입술을 퉁 내밀었다. 술의 위력은 정말이지 대단하다. 평소라면 속으로 삭였을 말을 이렇게 쉽게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도록 도와주니 말이다.
“선생님이 미아내..”
“뭐가요.”
“너 많이 힘들텐데 내가 위로 하나도 제대로 못해주구..”
다 먹은 쭈쭈바를 쥔 손에 꾹 힘을 줬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 아, 또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 나왔어. 하지만 자책 할 틈도 없이 이민형 역시 걸음을 멈춰버려 우린 가던 길을 멈추고 시선을 나눴다. 나는 잠시 눈을 굴렸다. 어떻게 말을 해야되지. 막상 하려니 뭐부터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할 말은 엄청 많은데.
“음..”
“..”
“아버님이랑 싸웠다고 했잖아.”
일단 생각 나는대로 뱉었다. 나름 발음도 정확히 하려고 애썼다. 아버님 이라는 단어 때문인지 민형이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그에 흠칫 했지만 곧 민형이의 어깨를 약하게 두들겨줬다. 어제 팔이 안 닿아서 못 해줬던 토닥토닥 늦게나마 해준 셈이다. 이민형은 입을 꾹 닫은 채 내게 시선을 뒀다. 쥐고 있는 쭈쭈바가 엄청 녹아있는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냥 너 과외 해주는 사람이라 함부로 무슨 일이냐, 자세히 말해봐라 할 수는 업써..!”
“..”
“아버님이랑 무슨 일인지 너가 굳이 말 안해주면 물어보지도 않을 거야.”
“선생님.”
“집에 가, 미녕아.”
끝내 민형이를 계속 보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적막이 흘렀다. 이것마저 주제 넘는 소리 아닌가 싶어 목이 바싹 타들어갔다. 너무 다짜고짜 집에 가라고 했나. 아, 술까지 깨는 것 같아. 이민형은 한참 대답이 없었다. 싫다고도 안 하고 그냥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다시 눈을 들어 그런 민형이를 힐끔 바라봤다. 여전히 나를 보고있다. 시선이 맞물려 뜨거워진 침을 꿀꺽 삼켰다.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도통 알 수가 없다.
“아니 내가 막 너를 막 억지로 집에 보내려는 게 아니구..”
“..”
“어머님이 많이 걱정하셔 민형아. ..너 집에 오면, 같이 외가로 가실 거래.”
“..엄마가요?”
어머님 얘기가 나오자 굳어있던 얼굴이 서서히 펴지는게 눈에 들어왔다. 조심히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그랬잖아. 어머님 걱정된다구. 내 말에 민형이가 고개를 돌리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내일 집에 들어가야 겠다며 머리를 헝클인다. 나는 헉, 소리와 함께 손으로 입을 막았다. 썩 좋은 표정은 아니였지만 일단 집에 간다는 게 중요했다. 역시.. 외가가 한방이였어..(,,Ծ‸Ծ,, )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새끼 손가락을 민형이 쪽으로 내밀었다. 마무리까지 꼼꼼하게 해야지.
“약속 하자.”
“네?”
“빨리 너두 손가락 이케 해. 손가락 걸어.”
내 얼굴을 한 번, 손을 한 번 쳐다본 민형이가 어정쩡하게 새끼 손가락만 핀 손을 들었다. 약속 하구. 손을 거둘까 무서워 얼른 새끼 손가락을 걸었다. 도장 쾅 찍구. 엄지 손가락끼리도 꾹 눌러줬다. 복사~ 싸인~! 민형이의 하얀 손바닥에 야무지게 이름 석자를 쓰고 난 후, 나는 히히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싸, 약속 했당. 이민형 내일 집에 간당.
“제가 집에 가는게 그렇게 좋아요?”
“그럼. 너 집 나왔다고 했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대신 저 소원 하나 들어주세요.”
나는 쓰레기가 된 쭈쭈바를 비닐봉지에 넣었다. 뭔데? 그렇게 물으며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민형이는 잠시 고민하는 건지 거의 다 녹은 쭈쭈바를 입으로 가져가 잠시간 질근 거리더니 곧 다시 나를 바라봤다.
“수능 끝나면 하루종일 놀아주세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게 소원이야? 묻자, 민형이가 네, 라고 짧막하게 대답했다. 아~ 그런 소원이면 완전 자신있지ㅋ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런데 갑자기 녀석이 내 손을 잡았다. 놀래서 고개를 돌리자 더 단단히 손을 쥐며 대뜸 달리기 시작한다.
“저거 타야 돼요.”
나는 민형이가 이끄는 대로 같이 달렸다. 버스 한 대가 정류장에 도착하기 일보 직전인 게 보였다. 그걸 보자마자 나는 자의로 뛰기 시작했다. 허얼, 빨리 가자 미녕아! 바람이 더 시원하게 얼굴을 스쳤다. 그에 눈을 반 쯤 감았는데, 얼핏 본 이민형이 옅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선 민형은 눈 깜짝 할 새에 혼자가 됐다. 취기에 양 볼을 붉게 물들인 여주가 앞서 걸어가던 재현을 보자마자 먼저 간다며 자신의 동으로 후다닥 달려갔기 때문이다. 미처 잘 가라는 말도 못한 민형은 아쉬운 마음으로 여주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다 재현의 뒤를 따라 마저 걸었다. 동 안으로 들어가자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는 재현이 보였다.
“둘이 어떻게 같이 와?”
재현은 돌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물었다. 동기들과 헤어진 후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던 중 나란히 걸어가는 민형과 여주를 차 안에서 이미 봤었다. 지금 민형과 얼굴을 마주하면 표정 관리가 힘들 것 같았다. 민형은 그런 재현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방을 고쳐 메며 덤덤히 말했다. 선생님이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어요. 말이 끝나자 재현이 미간을 좁혔다.
“왜?”
“그것까진 말씀드리기 싫은데요.”
민형의 말에 결국 재현이 고개를 돌렸다.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그 잘난 얼굴을 보니 속에서 불이 났다. 여주가 오직 민형 때문에 아침 일찍 일어나 요리를 한 것도 질투나 죽겠는데 학교까지 마중을 갔다니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고등학생을 상대로 이러는 자신이 참 유치하다고 생각했지만 폭발하는 질투심은 어쩔 수 없었다. 재현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김여주한테 관심 꺼.”
“싫어요.”
삐딱한 건 민형도 마찬가지였다. 재현을 보는 눈빛에 날이 서있다. 평소 성격대로라면 먼저 이름을 부르고 방방 뛰었을 여주인데 재현을 보자마자 도망가던 걸 생각하니 오늘 술은 재현 때문에 마신 것 같다고 어렴풋이 짐작했다. 왜. 이 형이 뭘 했길래.
“선생님한테 고백 하셨어요?”
민형은 아침에 분명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학교에 가야하는 학생이란 신분에 처음으로 불만을 가졌다. 재현과 단 둘이 놔두는 건 역시 싫었다. 아침에도 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썩 내키지 않았었다. 내일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거 없던 일로 할까 고민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약속 하나 하는데 애처럼 싸인에 복사까지 하던 여주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나도 말해주기 싫어.”
“난 했는데.”
“뭐?”
“좋아한다고 했어요.”
선생님은 다른 쪽으로 이해하셨지만. 꽤나 당돌한 발언에 재현의 미간이 더욱 더 좁혀졌다. 그때 엘레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문이 열렸다. 띵, 소리가 작게 근방을 울렸지만 아무도 엘레베이터에 타지 않았다.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재현은 문득 몇 달 전 민형이 저를 좋아한다고 해줬다며 싱글벙글 기뻐하던 여주가 떠올랐다. 열렸던 엘레베이터 문이 다시 닫혔다. 그러자 주위가 더욱 어두워졌다. 재현은 신경질 적으로 제 머리를 쓸어넘겼다. 술을 마셔서 이성적으로 행동하기가 어려웠다.
“너가 자기 안 좋아하는 것 같다고 엄청 속상해 했었어.”
“..”
“그래서 김여주는, 끝까지 너 학생으로만 볼 거야.”
도발이었다. 재현의 말에 민형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속상해 했다는 말에 할 말이 없었다. 초반에 못살게 군 건 사실이니까. 그리고 그때의 말과 행동들은 이미 수십 번도 넘게 후회했다. 민형은 주먹을 꾹 쥐며 재현을 바라봤다. 저보다 키도 더 크고 골격도 남자다웠다. 저와는 다르게 아주 옛날부터 꾸준히 여주를 다정하게 챙겨왔다는 것도 안다. 제일 오래된 친구 라고, 여주가 그랬다. 친구, 라고.
“선생님은 형을 친구로만 보는 것 같던데요.”
민형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진짜 한 마디를 안 지네. 재현이 고개를 돌리며 숨을 내쉬었다. 화를 삭이는 행동이었다. 여주가 저를 친구로만 보는 건 저가 더 잘 알고있다. 아침에, 나름 용기내서 한 말에 잔뜩 굳어서 그대로 집을 나간 여주가 아직까지 신경 쓰이기도 했다. 1 대 1. 사이좋게 한방씩 먹인 두 사람은 그제서야 다시 버튼을 눌러 엘레베이터에 올라탔다. 재현은 민형을 자신의 집에서 쫓아내버릴까 생각했지만 꾹 참았다. 빌어먹게도 재현 자신이 먼저 우리 집에서 자라고 제안 한 여주의 학생이었으니까.
“저 진짜 선생님 좋아해요.”
“야, 나도 김여주 엄청 좋아해.”
“수능 끝나면 제대로 고백 할 거에요.”
“난 그 전에 할 거야.”
차분하게 주고 받는 말에 기류가 잔뜩 흐트러졌다. 엘레베이터는 간혹 덜컹이는 소리를 내며 빠르게 움직였다. 공기가 참, 건조했다.
이틀이 정말 후딱 흘렀다. 민형이는 약속대로 어제 야자까지 빼며 집으로 돌아갔다. 같이 가주겠다는 걸 몇 번이나 거절하며 토요일에 보자는 말만 남기고 쌩 사라졌다. 정재현은.. 어제 한 번도 못 봤다. 아, 안 봤다는 말이 적절할 것 같다. 어제 같이 점심 먹자는 연락을 모르는 척 했으니까. 그렇다고 녀석이 우리 집을 멋대로 찾아오지도 않았다. 개강을 한 학교는 크게 달라진 것도 없었다. 지루한 전공 수업이 끝난 후 다음 수업까지 대략 두시간 정도 남은 시점에서 몇 없는 여자 동기 성경이가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너 오늘도 점심 네 친구랑 먹어? 그, 정재현?”
“어.. 그렇겠지?”
“야 오늘은 우리랑 먹자. 우리 저기 사거리에 새로 생긴 훠궈 집 갈거야.”
응? 으응? 팔짱까지 끼며 나를 꼬신다. 차암나, 예쁜 애가 애교까지 부리니까 거절을 할 수가 없잖아(코쓱) 점심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항상 정재현이랑 먹었는데, 안 그래도 오늘 점심은 어떻게 해야하나 내심 고민이었다. 정재현이랑 단 둘이 마주보고 밥 먹기가 괜히 혼자 찔렸기 때문이다. 나는 어차피 오케이 할 거 잠시 고민하는 척 흐음 소리를 내다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오늘 훠궈 한 번 조져보자٩(ˊᗜˋ*)و 나는 핸드폰을 꺼내 정재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받지를 않는다. 아, 다른 애들이랑 점심 먹는다고 말은 하고 가야되는데.
“야 성경아. 너 애들이랑 먼저 가있어.”
“왜? 문자 보내 놓으면 안돼?”
“안돼. 그럼 걔 또 엄청 칭얼 거려. 나 금방 갈게. 주소 좀 찍어줘.”
“알았어~ 빨리 와!!!”
결국 성경이와 다른 동기들을 먼저 보냈다. 이시간쯤 암묵적으로 학생 식당에서 만나니까 그 쪽으로 가봐야겠다. 가방을 어깨에 걸치듯 멘 후 강의실을 나섰다. 아니, 전화는 왜 안 받아서 사람을 괜히 걷게 하는 거냐고. 핸드폰을 작게 휘두르며 툭툭 거렸다. 학생 식당은 많이 멀지 않았다. 중간 중간 마주친 선배들한테 꾸벅 인사를 몇 번 하며 걸어가니 금방이었다. 식당 앞에는 당연하게도 이틀만에 보는 정재현이 서있었다.
“선배님, 밥 사주시면 안돼요?”
“맞아요~ 밥 사주세요!”
웬 여자 후배들과 함께.
“저건 뭐야..”
나도 모르게 인상을 팍 찡그렸다. 정재현은 밥을 사달라며 제 팔을 은근히 터치하는 것도 모르고 허허 웃어준다. 안돼, 나 같이 밥 먹을 사람 있어. 정재현이 그렇게 말하자, 여후배들이 누구냐며 난리다. 그 같이 밥 먹을 사람 여기있다..(바득) 심기가 불편했다. 쟤네랑 희희덕 거리느라 내 전화도 안 받은 거야? 손에 쥐고있던 핸드폰을 더욱 꽉 쥐며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래, 성경이 말대로 문자나 보낼껄 뭐가 걱정된다고.
“김여주!”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며 몇 걸음 걸었을 때, 등 뒤로 내 이름을 부르는 정재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못 들은 척 계속 걸어갔지만 얼마 안 가 내 팔목을 잡는 손길에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왜 왔다가 그냥 가? 밥 먹자. 배고파.”
고개를 돌렸다. 정재현의 등 뒤로는 여전히 그 여자 후배들이 있었고, 정재현은 또 눈치없이 어깨동무를 걸어온다. 나는 그런 정재현의 팔을 슬쩍 밀었다. 이러면 안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굳은 표정을 풀 수도, 멋대로 나가는 손을 통제 할 수도 없었다.
“나 오늘 너랑 밥 못 먹어. 전화 했는데 안 받더라?”
“아 무음이라 못 들었나봐. 왜 못 먹는데?”
“동기들이랑 먹기로 했어.”
너도 쟤네랑 먹어. 밥 사달라잖아. 나 간다. 말도 퉁명스럽게 나갔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다시 등을 돌렸다. 김여주. 정재현이 나를 한 번 더 불렀지만 계속 걸어갔다. 내딛는 발 끝이 저릿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 나는 건물 밖을 나오자마자 무거운 숨을 내쉬며 눈을 꾹 감았다. 아, 진짜 미쳤다 김여주. 조금은 벙찐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정재현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술을 털면서 정재현도 털어버리기는 개뿔.
“망했다..”
이래가지고 어떻게 마음을 접어. 내가 열을 받은 이유는 아마.., 질투겠지. 겁을 내던 게 현실이 됐고, 자꾸만 한숨이 터져나왔다. 나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다시 눈을 떴다. 진짜, 나 큰일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