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와서 곰곰이 생각 해보니 아차 싶은게 한 두가지가 아니다. 나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끌어당기며 지나간 일들은 찬찬히 떠올렸다. 왜 여자를 안 만나냐고 물어보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던 정재현. 여자라고는 안 했다고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더니 그때 말하던 좋아하던 사람이 나였어? 참나. 그리고 또, 걔 지갑에 유치원 때 사진도 넣어다녔잖아. 내가 자기 볼에 뽀뽀하는 거. 나는 입을 떡 벌리며 쥐고있던 이불을 다시 내렸다. 퍽 소리와 함께 침대가 작게 진동했다. 결혼 어쩌고 얘기 나올 때 아무 말 안 하고 웃고만 있던 것도. 자기는 언제 좋아해줄 거냐고…. 와, 그것도 진심이였어. 장난이라고 넘겼던 게 다 진짜였나봐. 뭐야, 정재현 엄청 티냈네. 내가 바보였네. …(할말잃)
“아 나 왜 몰랐지?”
지금 잠깐 생각해서 나온게 이정돈데. 발길질을 했다. 흔히 말하는 이불킥이였다. 혼자 얼마나 삽질을 했는지 한 번 더 깨달아버렸기 때문이다. 눈을 질끈 감으며 한숨을 푹푹 내쉬다 문득 떠오르는 정재현의 얼굴에 다시 눈을 떴다.
아, 나 진짜.
진짜 잘해야겠다 정재현한테.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네.”
“이제 다음 수업 때 보자고 못하네.”
아쉽다~. 문제집을 만지작 거리다 맞은 편에 앉은 민형이를 보며 말했다. 민형이는 내 말에 사프를 한 번 딸깍이더니 하나도 안 아쉬운 말투라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아냐, 진짜 아쉬워. 내가 또 말했다. 멀게만 느껴졌던 수능이 다음주였고, 오늘은 마지막 수업 날이었다. 시작은 민형이네 본가였는데 끝은 민형이네 외가. 어쩌면 제일 힘들었을 민형이는 끝까지.. 이민형다웠다. 밤 새서 공부한 티가 다 나는데도 항상 멀쩡한 척이었다. 수능 어떡해요 걱정돼요 같은 말들은 꺼내지도 않았다. 마지막이라는데 아쉽다고도 안 해주고.
“마지막으로 궁금한 거 있어?”
테이블에 펼쳐둔 문제집과 자료들을 정리하며 물었다. 물론 밤이 되면 몇 쪽에 몇 번 문제 헷갈려요 등의 메세지가 폭풍으로 날라올 걸 알지만 옆에서 짚어줄 수 있는 건 지금이 마지막이니까. 내 물음에 민형이는 손에 쥐고있던 샤프를 내려놓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게임장 좋아하세요?”
잠시 사고가 멈췄다.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갸우뚱해보였다. 게임장? 네, 게임장이요. 저 입에서 나온 단어를 못 믿겠다는 듯 몇 번 더 물어보니 민형이가 미간을 좁혔다. 모르는 문제 물어보라고 한 건데…(긁적) 근데 그걸 이민형이 모를리 없잖아. 의아한 채로 목울대를 만지작 거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등학교 때 몇 번 갔었지…? 근데 왜?”
“수능 끝나면 놀기로 했잖아요.”
“어?”
“까먹으신 거 아니죠?”
어어…? 앞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침을 꿀꺽 삼키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기억 안 난다고 하면 영영 안 보겠다고 말하는 것 같은 눈이였다. 당연히 기억나지이~! 나는 말꼬리를 늘리며 계속 생각 했다. 언제냐, 언제. 언제 그랬어. 그러다 번쩍 하고 겨우 기억이 났다. 그때, 나 술 취해서 민형이네 학교 간 날. 그날 그랬다 참. 집 들어가는 조건으로 약속한 거.
“우리.. 하루종일! 하루종일 놀기로 했잖아.”
“그날 게임장 가요 선생님.”
기억나는대로 재빨리 말을 뱉자 민형이는 의심하는 눈초리를 거뒀다. 게임장을 가자는 말에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다 괜찮아. 이민형과 게임장을 가는 날이 올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지만 일단 그렇게 답했다.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짧게 진동하며 화면을 빛냈다. 정재현이 메세지를 보낸 탓이였다. 끝났어? 라고 묻는 내용에 씩 웃으며 핸드폰을 가져왔다. 끝날 때 맞춰서 데릴러 온다더니 밑인가보다.
“나 이제 가야겠다 민형아.”
답장을 하는 대신 문제집과 자료들을 하나로 모았다. 엘레베이터를 기다릴 때 즈음 지금 내려간다고 연락할 생각이었다. 빠르게 짐을 챙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나를 따라 민형이도 일어났는데, 녀석은 선생님, 하고 짧게 나를 부르더니 정작 눈을 마주하자 아니라며 입술을 다물었다. 뭐야~ 내가 싱겁다는 듯 말했다.
“민형아, 편하게 연락하고.. 수능 잘 보고!”
“..네.”
“그동안 수업하느라 고생했어.”
가방을 어깨에 걸쳐 멘 나는 잠시 멈칫하다 곧 다시 손을 뻗어 민형이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민형이는 그런 내 손을 짧게 곁눈질하더니 이내 픽 웃었다.
“선생님도요.”
“응?”
“수능 잘 볼게요.”
이쯤되서야, 민형이가 웃음을 터뜨리고 나서야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라는게 확 실감이 났다. 그렇다고해서 이제 못 보는 것도 아닌데 괜히 서운함이 밀려왔다. 모르는 사이에 민형이에게 정이 많이 들었나보다. 과외 때려친다 술주정했을 땐 언제고 이젠 열아홉이 웃었다고 말문이 막히고 있다. 그래도 보기 드문 웃는 모습 한 번 더 보고 과외 끝낸다고 따라 입꼬리를 올리고 있다. 나는 조금이라도 부담이 될까 싶어 아무 말 없이 어깨만 두어번 더 두들겼다.
“야아. 어떡해. 지금 수학 끝났다.”
점심을 먹다말고 말했다. 열두시 십 분을 가리키고 있는 식당 벽걸이 시계에 심호흡을 하며 정재현을 바라봤다. 정재현은 그런 나를 보며 혀를 한 번 차보였다. 수능은 시험장에 있는 사람들이 치는데 왜 너가 더 호들갑이냐는 표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숟가락까지 내려놓고 두손 모아 민형이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민형아 잘 봤지? 잘 봤다고? 알았어.
“아무튼 뭐? 내일 뭐?”
“내일 민형이랑 게임장 간다고.”
회전초밥 집이라 내 옆에 나란히 앉은 정재현은 레일을 타고 다가오는 연어 초밥으로 손을 뻗으며 물었다. 아, 몇 번을 얘기 했는데 또 물어봐. 다 알면서 일부러 저러는 거다.
“걔가 수능을 쳤는데 왜 너가 놀아줘?”
역시나. 그럼 그렇지. 안 갔으면 좋겠다는 눈치다. 민형이가 남학생이라 신경이 쓰이는 걸까? …그래, 그렇겠지. 입장 바꿔서 정재현이 과외 해주던 여학생이랑 하루종일 놀러간다고 하면 나같아도 싫을 것 같다. 근데 어쩔 수 없었다. 사귀기 전에 약속한 거란 말이야. 이제와서 남자친구가 싫어해서 못 놀 것 같아 미안! 할 수는 없잖아.
“민형이랑 약속 했으니까.”
“그러니까 왜.”
“저번에 민형이 집 나왔을 때, 집 들어가는 조건으로 약속 했었어.”
정재현은 연어초밥을 내 앞으로 내려놨다. 그러면서 눈을 흘긴다. 마음에 안 들어 김여주.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나는 대꾸도 못하고 입술만 삐쭉이다 젓가락으로 연어초밥을 집을 뿐이었다. 집은 걸 곧바로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는데 팔을 내리다 실수로 테이블 위에 있던 정재현의 지갑을 팔꿈치로 쳐버렸다. 지갑은 툭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에이씨. 나는 입을 움직이던 걸 잠시 멈춘 후 지갑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그런데 지갑 틈으로 익숙한 사진이 삐져나와있었다.
“야 너 이거 아직도 갖고 다니냐?”
몇 달 전 우연히 발견했던 유치원 때 사진이었다. 사진 속 나는 여전히 정재현의 볼에 뽀뽀 중이었다. 지갑을 들어올리며 성급히 물었는데, 벙찐 채 나를 보는 정재현의 모습에 아차 싶었다.
“아직도..?”
“…아 그게..”
“너 내가 그 사진 들고다니는 거 알고있었..어..?”
시선이 나도 모르게 내려갔다. 눈을 아래로 두며 몇 번 깜빡이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살짝 열었다가.. 봤지…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정재현이 야무지게 쥐고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지갑을 가져가더니 반대쪽 손으론 제 머리를 쓸어넘겼다. 와 김여주. 공기가 잔뜩 섞인 채로 짧게 말을 내뱉더니 곧 다시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예전에 이걸 보고도 내가 널 좋아하는 걸 의심조차 안 했다고?”
“…당연히 그런 쪽으로는 생각을 안했지..”
“…심각한데?”
아 뭘 또 심각까지. 진지한 눈초리로 나를 보는 녀석의 옆구리를 퍽 때렸다. 지갑을 쥔 정재현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제서야 웃으며 알았다고 하는데, 눈치 없었던 과거에 한 번 더 찔려버린 나는 괜히 씩씩거렸다. 안그래도 혼자 삽질하던 거만 생각하면 민망해죽겠는데. 순간 후끈해진 분위기에 손으로 부채질을 하다 눈을 돌려 정재현을 쳐다봤다. 녀석은 보조개가 파인 채로 또 다른 초밥을 향해 손을 뻗는 중이였다.
“아무튼 정재혀언.”
“뭐어.”
한 번 작게 심호흡을 한 후 초밥에 정신이 팔려있는 정재현의 왼쪽 볼에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사진 속 포즈 현재 버전이었다. 밀려오는 부끄러움을 꾹 참고 짧은 거리를 유지한 채 뚫어져라 정재현을 바라봤다. 허공에 있던 정재현의 팔이 천천히 내려갔고, 녀석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했다. 방금 뭐 한 거냐? 잔뜩 당황한 목소리였다.
“딱 내일만 놀게. 약속은 약속이니까. 응?”
고개를 비스듬히 움직이며 눈을 깜빡였다. 내 말에 정재현은 한동안 미간을 좁히다 곧 어이가 없다는 듯 바람 빠진 웃음을 내뱉었다. 내가 생각해도 꽤나 여우같은 짓이였다. 방심한 틈을 노렸으니 말이다. 그래도 편한 마음으로 민형이를 만나고 싶었다. 어설프게 끝내면 내일 신경쓰일 것 같아서.
“너 진짜.. 대신 빨리 와. 알았지.”
정재현은 끝끝내 완벽한 허락을 내렸다. 아 진짜, 갑자기 그러면 반칙이지. 그러는게 어딨어 갑자기. 갑자기 막 뽀뽀하고. 갑자기.. 어? 갑자기. 사람 놀라게. 그러더니 혼자 궁시렁 거리며 내가 입 맞췄던 뺨을 만지작 거렸다. 중간 중간 눈을 흘겨 나를 보는데 나는 눈이 마주칠 때마다 눈꼬리를 접었다. 녀석은 그런 내 뺨을 감싸쥐곤 재차 강조했다.
“빨리 와 진짜.”
그에 고개를 끄덕이자, 너를 어떻게 말리냐며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진다.
“민형아!”
뛰던 걸 멈췄다. 저 앞에 서서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던 민형이가 고개를 들었다. 아이고. 나는 겹친 숨을 고르며 터벅터벅 걸음을 내딛있다. 녀석은 흰색 면티에 청자켓, 무릎 쪽이 찢겨져있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놀러간다고 평소보다 신경 써서 옷을 입고 나온게 다 보여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어쭈, 꾸밀 줄도 알고? 민형이는 내가 제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마자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안녕하세요.”
“안녕.”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자 목구멍엔 시험 어땠냐는 질문이 차올랐다. 불수능이였다고 하던데. 민형이는 덤덤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정을 전혀 읽을 수 없었다. 어제 밤 별다른 말 없이 수고했다고 메세지를 보냈었는데, 감사하다고만 답장이 왔었다. 아직 가채점을 안 했나? 짧은 시간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곧 그 모든 생각을 접었다. 논다고 만난 날에 성적 얘기 하지 말자는 결론이었다. 뭐 알아서 잘 했겠지, 이민형인데.
“점심 뭐 먹을래? 내가 살게.”
“맨날 자기가 산대.”
“그럼 내가 사야지. 뭐 먹고 싶어?”
점심부터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줄곧 민형이를 보던 시선을 내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어딜 가도 사람이 바글바글 할 시간이였다. 어제 반나절 내내 고생했으니 비싸고 맛있는 걸 사줄 생각에 지갑도 두둑히 채워서 왔는데, 잠시 눈가를 만지작거리던 민형이의 입에서 나온 건 떡볶이였다. 떡볶이.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미간을 좁히곤 뭐? 물었더니 녀석은 재차 강조했다. 그, 체인점에서 하는 거 있잖아요. 주먹밥이랑 같이 주는 거.
“더 비싸고 맛있는 거 먹어도 되는데..?”
“더 비싸고 맛있는 거 저는 매일 먹어요.”
“헐.”
“엄마가 별로 안 좋아셔서 한 번도 안 먹어 봤어요.”
그래서 먹어보고 싶었어요. 이동혁이 맛있다고 했는데. 진지했다. 백퍼센트 진심이었다. 나를 배려하는게 아니라 쟤는 지금 그 떡볶이가 진짜 먹고싶은 거야. 오늘 자기 나름의 일탈을 다 하려는 건가. 일단 알았다고 답했다. 먹으러 가자. 핸드폰을 꺼내 제일 가까이 있는 체인점을 찾았다. 다행히 걸어도 되는 거리였다.
“근데 너 매운 거 잘 먹어?”
“왜요?”
“그거 엄청 매워. 진짜.”
“못 먹는 건 아니에요.”
지도가 알려주는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는 동안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다. 선생님 총게임 잘 하세요? 완전 대박이지 나. 너는 인형뽑기 잘 해? 해본 적 없어요. 뭐 그런 대화. 민형이 나이다운 대화.
“선생, 님, 저 물 좀. 빨리요.”
“내가 맵다고 했잖아ㅋㅋㅋㅋ”
큰 그릇에 그렇게 먹고싶었다던 떡볶이가 한가득 담겨서 나오자 민형이는 잘 먹겠다는 말과 동시에 떡 하나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어떠냐고 묻자 그냥 떡볶이 맛이라는 당연한 소리를 하더니 시간이 좀 지나자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매운맛이 뒤늦게 온 거다. 녀석은 컵에 담긴 찬물을 벌컥 들이키더니 주먹밥까지 먹으며 혀를 달랬다. 못 먹는 건 아니라더니 못 먹는 것 같았다. 처음 보는 민형이의 모습에 소리내 웃자 녀석은 입을 오물거리며 나를 세모눈으로 쳐다봤다.
“웃지마세요.”
“알았어 알았어. 귀여워서 그랬지!”
“아, 뭐가 귀여워요.”
징그럽게. 이민형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혀를 식히듯 자꾸만 스읍, 따위의 소리를 내서 나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그래도 잘 먹긴 먹었다. 말라서 먹는 양도 적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먹고 먹고 또 먹는 이민형이였다. 나는 배가불러 젓가락을 놓았을 때도 녀석은 한창 먹는 중이었다. 떡볶이 한 입, 주먹밥 하나, 계란찜 한 입. 이 패턴을 계속 반복했다. 매워서 입술은 빨개진 채로.
“선생님.”
그러다 다 먹었는지 젓가락을 내려놓고 휴지로 입가를 닦아낸 민형이가 나를 불렀다. 입이 심심해 계란찜만 깨작거리던 내가 응? 하고 답하자, 민형이는 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사진 한 장 찍어요.
“사진? …셀카??”
“뭐 그런 거요.”
떡볶이 먹다가 갑자기 무슨 셀카..(황당) 꼭 떡볶이를 먹지 않아도 이민형이 할만한 요구는 아니였다. 내가 했으면 모를까. 사실 오늘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을 핑계로 사진 한 장 찍을까 했는데 이렇게 먼저 찍자고 해주시니 나로서는 고맙지만 어안이 벙벙한 일이었다. 찍는 것도 자기 핸드폰으로 찍을 건지 기본 카메라 어플을 꾹 누르는 모습에 나는 황급히 거울을 꺼내 얼굴을 확인했다. 이, 하고 입술을 벌려 치아도. 다행히 깨끗했다.
“너가 사진 찍는 거 좋아하는 줄 몰랐어 민형아.”
“안 좋아해요.”
“엥. 근데 왜 찍어?”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어놨던 립스틱을 꺼내 대충 한 번 덧발랐다. 민형이는 내 물음을 못 들은 건지 카메라가 켜진 핸드폰 화면을 위로 들 뿐이었다. 각도를 잡는게 딱 아마추어였다. 쯧쯧. 나는 혀를 차며 녀석에게서 핸드폰을 가져왔다. 선생님이 들게. 비록 내 얼굴이 더 크게 나와도! 바닥을 보인 떡볶이 그릇이 살짝 보였고, 이민형은 무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더니 내가 하나 둘 셋 카운트를 세자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손을 브이자로 들어보였다. 그 순간 찰칵, 하고 사진이 찍혔다.
“오만원.”
“미쳤어요?”
“우리 오늘 하루종일 여기서 놀 거 아니였어?”
게임장엔 사람이 많았다. 특히 민형이처럼 어제 막 수능을 본 고3 학생들이 많았다. 최근에 새로 생긴 큰 게임장이라 그런지 시설도 깨끗해보였다. 점심에 못 쓴 돈 여기서 써야겠다는 생각에 과감히 오만원권을 꺼냈더니 민형이가 나를 정신 나간 사람 취급 한다. 선생님이 돈이 어디있다고.. 작게 말했지만 다 들렸다. 물론 내가 민형이처럼 갑부는 아니였지만 민형이보다는 더 많이 놀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이 정도 스케일의 게임장이면 오만원이야 세시간 안에 뚝딱이라는 걸 체감적으로 알았다. 아니 그냥, 인형뽑기에 다 쓸 수도 (먼산)
결국 내 고집에 민형이가 두 손을 들었다. 오만원권을 천원과 오백원으로 쪼갠 후 사람이 없는 총게임 앞으로 갔다. 고등학교 때 이런 거 많이 했었지. 그래도 2학년 때까지는 가끔씩 정재현이랑 와서 한바탕 놀고간게 생각난다. 선생님 진짜 잘 하는 거 맞죠? 민형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당연하지, 선생님이 다 죽여줄게. 나는 큰 포부를 안고 천 원짜리 지폐를 투입구에 밀어넣었다. 총으로 좀비들을 쏴 죽이는 게임이였다. 게임이 시작하기 직전 너는 이런 거 해봤냐고 묻자 중학교 때 몇 번 해봤단다. 오랜만이라고. 녀석은 총을 잡으며 눈에 살기를 띄었다.
“야야, 민형아. 어떡해. 나 죽을 것 같아!!”
“아 그냥 쏘지 말고 조준을 하세요.”
“조준 했지! 근데 쟤들이 막 몰려온다니까?”
게임은 내가 생각하던 것과 정반대로 흘러갔다. 분명 자신있었는데 마음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뭔 놈에 좀비들이 떼거지로 달려들어? 큰소리를 그렇게 쳤는데 현재 내 목숨줄은 빨간색을 띄며 간당간당함을 알렸다. 열심히 총질을 하던 이민형은 힐끔 내 상태를 확인하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잘 하신다면서요! 게임장 내부가 시끄러워서 그런지 민형이는 소리를 빽 질렀다. 나는 방아쇠를 미친듯이 당겨봤지만 역부족이였다. 화면 속 좀비들이 징그럽게 달려들더니 곧 게임 오버가 시야에 가득 찼다.
“아 뭐에요 진짜.”
“나 진짜 억울해. 나 이거 진짜 잘하거든? 억울해!”
민형이가 미간을 좁혔다. 그래도 자긴 아직 목숨이 붙어있다고 눈은 여전히 화면에 고정시킨 채였다. 민형이는 침착하게 제 쪽으로 오는 좀비를 하나씩 조준했다. 가끔씩 공격이 빗나갈 때마다 아이씨, 중얼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공부가 아니라 오락에 집중한 이민형이라니. 그 순간 녀석의 모니터에도 게임 오버 자막이 크게 띄워졌다.
“아 선생님, 다시 해요 이거.”
잔뜩 흥분해서 천 원짜리 지폐를 찾는 모습이 영락 없는 고딩이였다. 나는 웃으며 천원을 또 한 번 투입구에 넣었다. 이번엔 진짜 이긴다.
날이 어두워졌다. 결국 오만원에 이만원을 더 써버렸다. 그 큰 게임장에 있던 모든 게임을 다 한 것 같았다. 한 손에는 민형이가 뽑아준 포켓몬 인형이 들려있었다. 나오기 직전에 우리는 서로에게 편지를 썼다. 계획에는 없었던 건데 카운터 옆에 느림 우체국이 있길래 내가 열심히 졸랐다. 정확히 1년 후 기재한 주소로 편지를 보내주는 서비스였다. 민형이가 뭐라고 적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적었다. 그동안 정말 수고했고 1년 후에는 너가 생각하던 미래를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우리 그때도 연락하고 있겠지? 살짝의 바람을 추가해 편지를 부쳤다.
게임장 밖으로 나오자 비가 내려 우산을 써야했다. 다행히도 민형이와 나 둘 다 우산을 챙겨와 급하게 우산을 구할 일은 없었다. 우린 나란히 빗 속을 걸었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이였다. 민형이가 타야할 버스는 802번이였고, 내가 타야할 버스는 323번이였다. 버스 어플을 확인하니 802 버스가 오 분 정도 더 빨리 도착할 예정이었다.
“민형아 오늘 재밌었지?”
“네, 뭐.”
“너 재밌게 노는 거 보니까 내가 다 좋더라.”
“선생님이 왜요.”
“항상 공부하던 것만 봤으니까.”
정류장엔 버스를 기다리는 줄이 길게 늘어져있었다. 때문에 우린 계속 우산을 쓰고 있어야 했다. 민형이는 검정색 우산을 쓴 채로 나를 바라봤다. 내 말에 잠시간 입을 열지 않았다.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나보다 싶었다. 오늘 이민형은 누가봐도 십대 고등학생이였으니까. 그동안 봤던 모습 중에 제일 신난 모습이였다. 문득 인형 뽑기에 성공하자마자 주먹을 쥐며 좋아하던 모습이 떠올라 키득 웃었다.
“종종 연락해. 선생님이 맛있는 거 사줄게.”
혹시나 빗소리에 묻힐까 원래보다 큰 소리로 말을 했다. 녀석은 여전히 나를 보고있었다. 대답 없이.
“선생님.”
그러다 입을 열었다. 나직하게 나를 불렀다. 응? 눈을 크게 떠보였다. 우산 끝에 가려져 얼굴이 잘 안 보이길래 우산을 뒤로 젖혔다. 그러자 민형이와 올곧게 시선이 맞물렸다. 왜 불렀냐는 듯 쳐다보는 나를 또 한참 바라보던 민형이는 아주 조용히 말을 이었다.
“좋아해요.”
한동안 안 그러더니, 또 저 말이다. 나는 픽 웃었다.
“알지~ 나도 이제 다 알아.”
너가 아닌 척 틱틱거리고 밉게 말해도 날 싫어해서 그러는게 아니라는 거 알아. 몇 번이나 말해줬는데 그걸 모를까. 그래도 이제는 전처럼 자주 못 본다고 제딴에 예쁜 말을 해주는 건가 싶었다. 입꼬리를 올리며 발끝을 작게 들었다 놨다 반복하는데, 민형이가 어깨를 들썩이며 옅게 웃음을 뱉었다.
“아뇨.”
“어?”
“선생님은 아무것도 몰라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저 학생으로만 생각하시잖아요.”
건너편 우산 밑에 선 녀석이 그 비 사이를 채운 기류를 흔들었다.
“진짜, 좋아한다구요.”
순간 목구멍이 막혔다. 분명 우산을 쓰고 있는데 빗방울이 머리 위로 쏟아지고 온 몸을 적시는 기분이였다. 그래서 머릿속이 하얗게 물드는 것 같았다. 당황스러웠다. 내가 생각하던 의미와는 달랐다. 이민형이 말하는 감정은, 그러니까, …나를. 느릿하게 눈꺼풀을 감았다 떴다. 민형이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는게 보였다. 쓴내가 나는 것 같았다.
“선생님 덕분에 멈춰도 보고, 숨도 좀 쉬고, 주위도 둘러보고. 그랬어요.”
“민형아.”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저 멀리 802번 버스가 보였다. 급하게 손을 뻗었는데, 이민형은 그런 나를 피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더 크게 귓가를 채웠다. 나는 허공에서 멈춘 손을 내리며 우산 손잡이를 더욱 꽉 쥐었다. 이것도 계획에는 없는 일이였다.
“저 때문에 마음 고생 많이 하셨을텐데.”
“..”
“..끝까지 이기적이라 죄송해요.”
민형이가 타야할 버스가 큰 소리를 내며 정차했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한 두명씩 버스에 올라타는게 시야 끝에 걸렸다. 민형이는 제 앞에 있던 사람이 버스에 올라타기 전까지 나와 눈을 마주했다. 아무 말이라도 꺼내고싶은데 말문이 막혀서 입술만 달싹였다. 이민형은 내가, 다른 사람과 연애 중이라는 걸 알고있다. 그 사람이 정재현이라는 것도 아마 알 거다. 그래서 제 고백을 이기적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았다. 민형아. 빗소리에 묻히더라도 다시 불렀다. 다시 불러서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민형이는 대답 대신 그 담담한 고백의 마지막 문장을 내뱉고는 먼저 등을 돌렸다. 비가 더 세차게 내렸다.
“집에 조심히 가시고,”
우리 이제 보지 마요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