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파의 증거
W. 청설
0-1
나는 봄이 싫다. 하지만 어김없이 일년은 가고 약올리듯 봄은 돌아온다. 만물이 소생되어 사람들은 저마다의 설렘에 부풀고 나에게는 그저 만병의 원인인 스트레스가 도지는 그런 계절이었다. 그러니 내가 봄을 반겨 할 리가 없었다. 차라리 찌는 여름과 칼바람의 겨울이 좋았다. 더위와 추위를 피한답시고 집에 박혀있는 것은 나름 괜찮은 변명이 아닌가.
겨울방학의 끝은 역시나 제 기도로 막을 내렸다. 사실 방학이라고 별반 다른 생활은 안 했다만, '새학기'라는 압박감은 저를 내리누르다 못해 압인을 만들 기세였다. 남들은 설레하는 3월 2일이 나는 왜 소름이 돋을까. 주택가는 한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새벽 1시를 막 달려 2시로 안착하고 있었다. 가끔 술에 쩔어 휘청이는 아저씨와, 그 아저씨를 마중 나온 파마가 다 풀려가는 아줌마의 실랑이가 들려오고 저 근처에 있는 대학으로 인해 자취를 막 시작한, 혹은 자취의 고수가 다 되어가 안면이 어느 정도 트인 언니 오빠들이 서둘러 골목을 지나간다. 침대로 쏟아지는 불투명한 달빛이 시려 창문을 닫았다. 창문을 등지고 앉으니 언제 방을 연 것인지 모를, 문턱을 밟고 간신히 서 있는 엄마의 주름이 달빛에 비춰져 더욱 깊어보였다. 엄마가 손을 들었다. 분명 걱정이 그득한 한숨일 것이다. 새학기를 앞둔 밤이면 잠을 좀처럼 자지 못하는 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내일 3월 2일이라서 잠이 안 오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얼른 자야지.
그렇게 상기시켜주지 않아도 알아요. 저도 따라 휘적거린 손을 이불 안으로 집어넣었다. 방문이 닫히고 어둠 속에서 아무 연락 없는 핸드폰을 뒤적였다. 벌써 새벽 2시 18분을 달리고 있었다. 학교에 도착하려면 늦어도 아침 7시에는 일어나야 했다.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해가 뜨기 전의 새벽, 어쩌면 가장 어두울 새벽 가운데에 덩그러니 남고 싶었다.
00. 청각[聽覺]
소리를 느끼는 감각
0-2
아침이오지 않길 바랐다. 오더라도 최대한 늦고, 또 느리게. 그러나 오고야 말았다. 흔들리는 느낌에 눈을 뜨니 역시나 엄마가 제 몸을 흔들고 있었다. 골이 울린다. 눈을 감은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아, 도로 눈을 꾹 감고 상체를 일으켰다. 모순적이게도 옷장 손잡이에 걸어둔 교복을 심술궂게 침대로 던졌다. 욕실로 몸을 욱여넣어 얼굴에 물을 묻히고 이를 닦으며 와이셔츠를 팔에 끼웠다. 거품을 뱉고 입을 헹궜다. 우유보다 조금 더 투명한 액체가 구멍으로 빨려 들어간다. 나도 저렇게 없어졌으면 좋겠는데. 치마를 입고 양말을 신자 방에서 아빠가 넥타이를 들고 나온다. 그리고는 바로 현관으로 직행한다. 저도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메고 나왔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것이 꼭 학교 가는 것을 재촉하는 듯 했다. 신발을 신고 엄마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대문을 열고 나와 마이 주머니를 뒤적였다. 늘상 넣어두던 이어폰이 잡히질 않는다. 엊그제 외출하고 돌아와 책상에 두었던 게 이제야 생각나 작게 탄식했다. 핸드폰을 확인했다. 오전 7시 23분. 현관에서 나오며 켰던 버스 알림 어플에서는 버스가 3분 후 도착이라는 글자를 띄고 있었다. 한마디로 집에 다시 들어갈 시간은 없다 이거다. 골목 끝에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발을 놀렸다. 헥헥거리며 무릎을 짚었을 땐 미리 나와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버스에 줄지어 올라타고 있었다. 개미떼 같다. 마이 안 쪽에 있는 교통카드를 찾으며 버스에 올랐다. 학교에 도착하면 근처 편의점에 들러 물이라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갈증은 오래갈 것 같지 않았지만. 교통카드를 단말기에 가져가자 바로 인식한 기기는 교통카드의 잔액을 띄우더니 이내 다른 사람의 교통카드를 반길 준비를 했다. 그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제 등을 밀며 올라 타는 할머니에 인상을 찌푸리며 안 쪽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미 버스는 서로 출근이다 등교다 하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이 정도면 좀 그만 타라고 해야하는 거 아닌가.
코를 찌르는 향수를 비롯한 다른 냄새들을 들이쉬며 히히덕거리는 같은 교복을 입은 남고생 옆에 섰다. 이어폰…, 아. 그냥 버스 한 번 놓칠걸 그랬나. 바짝 말라 서로 엉켜있는 머리칼을 손으로 빗으며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나무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몇몇의 사람들이 물 빠지듯 버스에서 내렸다. 앞에 난 자리에 앉으며 가방을 안았다. 오늘은 일일히 바깥을 쳐다보지 않아도 되겠다. 옆에 있는 남고생들을 따라내리면 될거니까. 뻑뻑한 눈을 부릅 뜨며 잠을 참았다.
0-3
새학기. 새교실. 새친구. 그 무엇 하나 달가울 것이 없었다. 슬리퍼로 갈아신고 고개를 돌리자 바로 보이는 교무실로 처음 보는 키 큰 남자가 들어간다. 그 뒤를 젊지도 늙지도 않은 여자가 따라서. 이미 그 남자를 본 여자들은 저들끼리 무어라 호들갑을 떨며 계단을 오른다. 이어폰이 없으니 주의가 산만하네. 마저 신발 한 짝을 사물함에 넣으며 저도 계단 옆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금방 열린 문을 지나쳐 층수를 누르자 천천히 문이 닫기기 시작한다. 시간을 확인하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동시에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보았다.
뱀 같이 긴 눈과 제 눈이 맞닿았다. 좁아지는 문틈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눈은 이내 찡긋.
그리고 문이 닫혔다. 마이까지 꼭꼭 껴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름이 돋은 듯한 팔을 문질렀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눈이 마주쳤다. 그게 아니라면 왜 저를 보며 윙크를 날렸겠는가. 더구나 우리 사이를 지나가는 것은 없었다. …우리? 어울리지 않는 묶음에 실소를 흘렸다. 우리는 무슨. 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바로 보이는 새교실. 숨을 참았다. 뒷문을 한참 열까 말까를 고민하다 드륵, 열었다. 몇 십 개의 눈들이 내게 몰린다. 그 중에는 저를 탐색하려는 눈빛이, 다른 곳에선 나를 아는지 고개를 틀어 입을 손으로 가린다. 가방을 품에 안으며 앞자리에 앉았다. 앞에서 두 번째. 선생님의 입과 칠판이 잘 보일만한 자리다. 핸드폰과 손을 책상 위로 올렸다.
뒤에선 저를 보며 무슨 말을 나누고 있을까. 그냥, 그냥 버스를 놓칠걸. 두 번의 후회가 밀려온다. 아.
이렇게 새학기 속 무음(無音)이 저를 이렇게 고립시킨다. 그 고립에 허우적거리다 빠져버린 나는 도태되어 사라지겠지.
귀로 손을 움직였다. 그 흔한 웅,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숨을 크게 내쉬다 뱉었다. 괜찮다. 괜찮아. 금방 익숙해질거다.
눈을 감았다.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온전한 고립이었다.
저를 건드는 손길에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아마 소리가 들렸다면 삐걱거림을 알았을 정도로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턱짓으로 앞을 가리키는 아이를 따라 시선을 틀었다. 출석부를 옆구리에 낀 중년의 남자가 옆에는 못 보던 학생의 어깨를 치며 입을 들썩였다. 어? 아까 그 긴 눈의 소년이었다. 전학생이 맞았나보다. 다시 눈길을 돌렸다. 담임이라는 사내는 다행스럽게도 키가 작아 입은 잘 보였다. 그러나 말이 빨라 반은 그냥 흘려 볼 수 밖에 없었다. 담임운은 없네. 욕이 나올 것 같아 고개를 수그렸다. 하, 크지도 작지도 모를 한숨이 입술 틈을 비집었다.
그래, 나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새학기는 나에게 고립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시작은 학생들의 부산스러움이 되어 저를 반겼다.
괴롭다. 소리 없는 아우성만이 제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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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링크 거는 법을 몰라서 아직 브금은 넣지 못했습니다.
차츰차츰 넣을게요. 음악은 젬병이라 잘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요.
잘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