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양아치_02
w.서화
주인을 잃은 호패는 내 소매 속으로 들어왔다. 반궁으로 돌아가 얼른 드려야지 싶은 마음으로 집어 들었건만 그 호패는 몇 주 째 내 손을 벗어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의녀 주제에 감히 유생들의 처소를 들여다 볼 깡은 없던 나이기에 경연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명륜당 근처를 기웃거려보았지만 죄다 허탕이었다. 도대체 어딜 돌아다니기에 유건 끄트머리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인지.
오늘도 역시 보이지 않는 그의 흔적에 나는 손에 쥐여있는 호패를 내려다보았다. 강의건. 그 세 글자가 내게 스며든 것도 오늘로써 한 달 째 되는 날이었다. ‘오늘은 꼭 돌려드려야지’ 하며 성의원을 빠져나왔는데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가려니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얼른 성의원으로 돌아가야 제 업무를 해 낼 터인데, 오늘따라 유독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난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한 유생의 발목을 붙잡고 말았다.
“저, 나으리. 말씀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될 런지요.”
“말 해 보거라.”
“혹, 강의건 유생이란 분 못 보셨습니까?”
강의건. 그 석 자가 내 입을 통해 나오자 유생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하지만 윗사람을 대한답시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내가 그 표정을 볼 리 만무했다. 나는 그저 유생의 목소리가 이어지길 기다릴 뿐이었다.
“아아, 강 유생?”
“예.”
“글쎄다. 근데 넌 그 자를 왜 찾는 것이냐. 네 밤도 강 유생에게 바치기라도 했나 보지?”
어딘가 비꼼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이어 들려오는 것은 그 유생의 뒤를 따르던 신참 유생들의 낄낄대는 소리뿐이었다. 제 밤이라. 이는 분명 나를 희롱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상식적으로 머리도 올리지 않은 의녀에게 첫날밤이고 자시고 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고개를 쳐들고 받아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천한 기생의 딸이자 무수리와 동급 취급을 받는 의녀였으며 나를 희롱하고 있는 그들은 조정에서 한 자리씩 맡고 있는 관리들의 자제들이었으니. 내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뿐이었다.
“입을 열지 않는 것을 보니 맞나 보구나. 그래서, 네 첫날밤은 얼마나 황홀했는지 들어나 보자. 반촌의 기생들은 난리던데 네게도 차냔 말이다.”
내 입술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유생의 희롱과 이를 따르는 비웃음은 커져만 갔다. 이런 취급도 20년 넘게 받아오니 익숙해져버린 것일까. 나는 그저 입술을 꾹 깨물며 할 말을 꾸역꾸역 삼킨 채 흙바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바람에 힘없이 날리고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모습이 나와 별 다를 바 없었다.
“어쭈, 이 년 보게. 지금 상전이 말씀 하시는데 그리 꾹 다물고 있을 셈이더냐. 강 유생이 무얼 얼마나 잘 해줬냐고 물었다.”
“사형, 말씀이 과하십니다.”
“넌 뭐, 어..강 유생.”
강 유생? 땅에 처박혀 있던 고개가 나도 모르게 슬며시 올라갔다. 내가 그토록 찾아다니던 그였다. 한 달 만에 마주한 그는 여전히 하얀 피부와 깊게 파인 입동굴을 자랑하고 있었다. 웃는 낯이었지만 어딘가 칼을 지닌 듯한 미소에 내게 희롱을 퍼붓던 유생들의 입이 굳게 닫히고 말았다. 그의 눈동자가 조용해진 유생들을 지나쳐 내게 도착하자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냈다. 내 시야가 다시 바닥으로 한정된 후 잠시 정적이 흐르다 흙이 쓸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신 두 짝이 내 눈동자에 담겼다. 몇 번이나 맡았다고 벌써 익숙해진 향기가 물씬 다가왔다. 그리고 그 향기는 곧 나를 감싸 안았다. 그의 큰 손이 내 손목을 잡아 당겨 제 뒤로 숨겨낸 것이었다.
“이 아이가 한낱 창기도 아니고 어찌 하룻밤을 그리 쉽게 주겠습니까. 더군다나 궁의 여인이라면 주상전하의 여인임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
“한 번 만 더 그딴 식으로 혀를 놀리신다면 제가 직접 전하께 고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저를 총애하고 계신다는 건 잘 알고 계시겠지요.”
“...”
“사형.”
“..ㅇ, 왜 부르는겐가.”
“구멍이 뚫렸다고 해서 다 입은 아닙니다.”
날이 잔뜩 서린 그의 목소리에 유생들은 급히 줄행랑을 쳤다. 그는 그들의 뒷모습이 점이 되었을 쯤에야 내 손목을 살며시 놓아주며 나를 향해 몸을 틀었다. 예의대로라면 얼른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왠지 모르게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 사람은 도대체 무얼 하는 사람이길래 주상 전하의 신뢰를 받으며 내겐 왜 이리 잘해주는 것일까. 사실상 양반이라면 아까 전 그 유생들의 태도가 내겐 더 알맞는 옷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도대체 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다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뚝 끊겨 버리고 말았다.
“이젠 딱히 고맙지도 않은 게로구나.”
비꼼이 가득한 말투도, 날이 잔뜩 선 말투도 아니었다. 그저 장난기가 수더분한 목소리였다.
“예? 아니, 그것이 아니오라..”
“됐다. 저런 놈들 말은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거라. 애초에 신경 쓸 작자들도 아니었거늘.”
아니, 정정하겠다. 장난기에 다정함까지 더해진 목소리였다. 내가 상처 받을까 걱정이라도 되었던 것인지 그는 다리를 살짝 굽혀 내 눈치를 보며 말을 뱉어냈다. 분명 다 큰 남정네라고 생각했건만 지금의 모습은 반궁의 강아지라 해도 다름없는 귀여운 모양새였다. 나는 풉하며 웃음이 새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삼키며 답했다.
“예, 나으리.”
“그래서, 너는 내 행방이 왜 그리 궁금하였느냐.”
그를 찾아다니던 이유를 묻는 그에 나는 겨우 정신을 잡곤 소매 속에 감추어두었던 호패를 꺼내들었다.
“이거 전해드리려 했습니다.”
그의 시선이 내 손에 쥐여진 호패 한 번, 다 닳은 소매 끝자락 한 번을 거쳐 내 눈에 다다랐다. 아무 대답 없이 그저 내 눈만을 빤히 바라보는 그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을 내밀었지만 그의 시선은 미동 하나 없었다. 무슨 뜻을 담고 있는지 모를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그는 꽤나 매혹적이었다. 수많은 여인을 담았을 저 깊은 눈동자엔 내가 어떻게 비추어질까. 괜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때마침 들려오는 다른 유생들의 웃음소리가 마치 천한 것이 어딜 넘보냐며 꾸짖는 듯한 느낌에 나는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그래, 귀한 것만 보고 자란 양반 댁 처남이 무슨 나를. 어느 정도 복잡했던 머릿속이 정리 되어 다시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나를 향해있었다.
“나으리?”
다시 한 번 그를 부르자, 그의 진득한 시선이 겨우 걷혔다. 하지만 이내 장난기 가득한 시선이 도로 내게 향했다.
“갖고 있거라.”
“예?”
“호패, 네가 갖고 있으란 말이다.”
“아니, 나으리 필요하실 때 있지 않으십니까?”
“내 행동 반경이 어디 반촌을 벗어나겠느냐.”
“...”
“그리고,”
“그게 네 손에 있어야 널 보러갈 변명거리라도 있지. 가지고 있거라. 잃어버리진 말고.”
“나으리!”
장난스러운 소년의 모습을 한 그를 애타게 불러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미련 없이 발걸음을 옮기며 손을 흔들어 보이는 그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지니고 내게 이러는 것인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떠오르는 답은 없었다. 그저 겨우 정리해놓은 머릿속을 더욱 헤집어 놓을 뿐. 엄지손가락으로 호패를 살짝 쓸어내리자 때마침 안녕을 속삭이던 햇빛이 판자에 새겨진 세 글자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나는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잡아당기며 호패를 꽉 쥐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과 나비가 함께 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
간질거리는 마음을 겨우 숨겨내며 지낸지 며칠 후, 항상 정숙을 유지하는 성균관이 오늘만큼은 시끌벅적했다. 아침부터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음식을 나르는 주방어멈들, 천막 치랴 공 만드랴 땀을 뻘뻘 흘리는 노비들, 그리고 항상 입던 청금이 아닌 서로 다른 두 색의 도포를 입고 잔뜩 신난 유생들. 바로 성균관 축국 시합의 날이었다. 동재와 서재로 나뉘어 공을 차며 땀을 흘리는 이 날은 성균관의 대대적인 축제나 다름없었다. 내내 서책만 들여다보는 이들에게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몇 없었으니. 이리하여 잔뜩 신난 반궁의 사람들과 달리 내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더워..”
누구 하나 다치기 쉽상인 축국 시합에 의원은 필수였다. 작년까진 반촌의 의원을 불러 대기시켰다 하는데 성의원이 생기고 그 곳에서 근무하고 있는 의녀가 떡하니 있는데 굳이 돈을 들여 부를 필요가 없었겠지. 뭐,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천막도 없는 구석에서 몇 시간 째 관람을 하니 안 지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해가 높이 뜰수록 점점 더워지는 날씨에 손 부채질을 해보았지만 별 효과는 찾아볼 수 없었고 결국 난 저려오는 팔을 내리곤 돌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툭. 내가 앉음과 동시에 내 머리 위로 무언가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뭐야,”
인상을 쓰며 주워든 것은 파란 빛의 부채였다. 그리고 푸른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급히 유생들 사이로 스며드는 그의 뒷모습. 자꾸만 웃음이 실실 새어나오는 것은 뒤늦게 알아챈 사실이었다.
“마마님, 헝겊 부족할 것 같은데 성의원에 다녀올까요?”
남은 약재들을 확인하던 어린 노비가 헝겊이 떨어졌음을 알렸다. 사실 ‘다녀올까요?’ 의 의미는 ‘다녀오겠습니다.’ 였지만 아침부터 이리저리 고생한 어린아이를 나까지 일을 시킬 순 없었다. 또한 사실상 그 아이와 내 신분은 같은 천민인데, 무슨 자격으로 부려먹겠나. 나는 아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내가 다녀 올 터이니 쉬고 있거라. 밑에 물병 있으니 목도 좀 축이고.”
“감사합니다!”
상냥한 내 말투에 아이는 함박웃음을 지어보였다. 티끌 하나 없는 순수한 미소에 괜히 내 피로까지 풀리는 느낌이었다. 아이의 순수한 미소, 파란 부채가 자아내는 시원한 바람, 괜시리 간질거리는 마음 한 구석. 참으로 기분 좋은 낱말들의 향연이었다. 나는 절로 나오는 콧노래를 막지 않으며 성의원으로 향했다.
헝겊과 부족했던 나머지 약재들을 챙겨 운동장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왜인지 내가 떠나기 전보다 시끌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점수라도 먹었나. 별 표정 없이 향하던 내 얼굴은 운동장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구겨져갔다. 그리 열심히 뛰어다니던 유생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이 어째 불길하다 싶더니, 그 사이에서 한 사내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내게로 오고 있었다.
“...나으리?”
그였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뛰어가던 사람이 왜 저리 절뚝거리며 오고 있는 것인지. 심지어 무릎 부근의 옷은 다 찢어져 너덜거리고 있었다. 피까지 뚝뚝 흘러내리는 와중에 나를 보자 방긋 웃는 그에 나는 혀를 내두르며 급히 달렸다.
“그리 달려올 필요까진 없는,”
“뭘 어떻게 뛰셨길래 무릎이 이 꼴이 납니까!”
머리를 거친 말이 아니었다. 그저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진심이었다.
“아니, 사내들이 뛰다 보면 좀 다칠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리 호들갑이더냐.”
“조금이요? 다른 유생 나으리들은 안 다치시고 잘만 하시던데 왜 나으리는,”
“...”
또 나왔다. 저 눈빛. 다시 봐도 여인네 여럿 울렸을 달콤한 눈빛. 이젠 조금 익숙해졌다 싶었는데 오랜만에 마주해서인지 열이 올랐다. 애써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진득하게 따라붙는 시선은 어느새 옅은 미소까지 겸하고 있었다.
“너 지금.”
“...”
“내가 걱정이라도 되는 것이냐.”
“예?”
장난기가 수더분한 것은 진작에 알았지만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갑작스런 질문에 나는 그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걱정? 맞긴 하겠지. 하지만 딱히 별 의미는 없었다. 내 직업은 의녀고 심하게 다쳐온 그는 환자이니. 치료하는 사람이 다친 사람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나는 애써 합리화를 시키며 약초들을 챙겨들었다.
“농이 지나치십니다. 얼른 치료하게 바지나 올려주시지요.”
“바지를? 넌 어째 그런 말을 서슴없이..”
“나으리!”
“아, 알았다 알았어.”
계속해서 능글맞은 눈빛으로 장난을 걸어오는 그에 목소리를 높이자 그는 너털웃음으로 나를 반겼다. 퐁퐁 흘러나오는 피를 닦아낸 후 약초를 올리자 그의 미간과 함께 내 미간에도 같이 주름이 졌다. 으, 내가 다 아프네. 갈수록 깊어지는 상처에 내 인상은 끝도 없이 구겨졌다. 그는 그런 모양새가 웃긴지 주름은 어디가고 미소만을 가득 담은 채 나를 담아냈다.
“호패는 잘 가지고 있느냐.”
“..예. 안 가지고 가실 겁니까?”
“글쎄다-”
애매모호한 말만을 남긴 채 어깨를 으쓱이는 그였다. 한숨을 폭 내쉬며 고개를 내젓자 그의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어왔다. 고작 웃음소리일 뿐인데 왜 이리 열이 오르는 것인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고개를 푹 숙이자 그의 큰 손이 내 머리를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오늘 다친 게 다 나으면, 그때 찾으러 갈 테니 조금만 기다리거라.”
“...”
“아, 부채도.”
그는 치료가 다 끝난 걸 눈치 챘는지 멍해져 있는 나를 뒤로한 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는 다친 그가 운동장으로 향하는지, 처소로 향하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넋을 놓고 있었다. 그저 사내가 남긴 호패와 부채, 그리고 따스함에 스며들어 어쩔 줄 모르는 소녀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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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냐링 망한 것 같네요..여주한테 첫눈에 반한 능글능글 양아치미 뿜뿜 유생과 총명하지만 사랑엔 엄청나게 미숙한 의녀를 쓰고 싶었지만..예...망했네요..여주는 똑똑하지만 천민이라는 틀 안에서 자기를 한 없이 낮추는 그런 캐릭터에요! 자존감 만땅 다녜리 만나면서 점차 바뀌겠죠헿ㅎ
그리고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전 고3이랍니다하하핳 저도 빨리빨리 글 써서 오고 싶은데ㅠㅠㅠ현생이 자꾸 방해를 하네요 에잇 망할 현생 최대한 빨리빨리 들고 올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당!!!
아 그리고 한가지 더!! 브금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으셔서요!
0화 : 꽃바람 부는 길
1화, 2화: 꽃물
입니당! 그럼 진짜 안뇽!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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