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de : 누군가의 짝사랑이 짝사랑을 할 때
나는 정여주를 좋아한다. 초등학교 때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가 예뻐서, 아니, 중학교 때 쭈뼛대며 자기소개를 하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그것도 아니면 고등학교 야자 시간에 세상 모르고 자는 게 예쁘고 귀여워서. 모두 이유가 될 수 있지만 언제부터인지도, 무슨 이유인지도 모를 정도로 오랫동안 그 애를 좋아해 왔다. 초등학교 때는 머리를 땋아 예쁘게 내린 그 애의 뒤통수가 동그래서 좋았고, 중학교 때는 친구에게만 보여주는 다정한 웃음이 부러워서 애꿎은 그 애의 친구에게 시비를 걸기도 했고, 고등학교 때는 그냥 정여주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갖은 이유를 댔다. 내가 내 감정을 인정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너무 더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낯을 가리던 성격도 부러 더 활발한 친구들과 어울리며 이를 악물고 고쳤다. 그 애의 옆모습을 힐끔대는 대신 말이라도 한마디 더 건네고, 장난이라도 한 번 걸어보기 위해서. 내 성장 과정의 전부는 정여주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하도 많이 봐서 익숙한 뒤통수를 찾아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나조차도 내가 얼마나 기쁜지 실감이 안 났을 정도니까.
"정여주. 여기 앉아도 되나."
청소년기에 접어들며 이성을 알게 될 무렵, 내 주위에서는 여자친구가 한 번도 끊인 적이 없었다. 누군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서 왜 애먼 사람과 연애를 하냐며 따지고 들면 할 말이 없겠지만, 사람의 감정을 내치는 게 어렵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연애는 하면 할수록 익숙해졌지만, 짝사랑은 하면 할수록 자꾸만 엇나가고 서툴렀다. 정여주는 그저 보고만 있어도 좋은 사람이었다. 굳이 손을 잡거나 같이 데이트를 하지 않아도 그냥 존재 자체가 내게 힘이 되는 사람. 그게 바로 정여주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다른 아이들과 영화를 보면서도 정여주를 생각했고 맞잡은 손이 그 애의 손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바라는 게 많아지기 시작했다. 자꾸만 그 애에게 말을 걸고 싶었고, 친해지고 싶었고, 그 애가 이따금 보여주는 옅고 부드러운 웃음도 보고 싶었다. 짝사랑은 바라는 게 많아지는 순간 힘들어진다. 나에게 잔잔한 산들바람 같던 그 애가 폭풍이 되기 시작했다.
"형."
"왜?"
"나 정여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빨대를 잘근잘근 씹던 호석이 켁켁거렸다. 호석의 자몽에이드와 정국의 레몬에이드가 태풍이라도 만난 것처럼 빨갛고 또 노랗게 출렁였다. 진심이냐고 물어오는 눈빛에 정국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추운 날씨에 빨개진 코끝이 한층 더 화하게 물들었다. 호석은 탁자를 넘어올 기세로 침까지 튀기며 덤벼들었다.
"언제부터?"
"... 초등학교 때?"
"왜?"
"좋으니까요."
"그럼 다른 애랑 연애는 왜 하냐?"
"... 모르겠어요."
이거 골 때리네? 호석이 들이밀었던 몸을 눕히며 혀를 끌끌 찼다. 제 옷자락을 붙잡고 종이 칼을 휘두르며 해사하게 웃던 꼬맹이가 종이 칼 대신 오지 않을 연락을 기다리는 휴대폰을 꼭 쥐고 선이 굵직해진 채로 제 여동생을 좋아한다고 말해온다. 호석은 눈치가 전능자까지는 아니었지만 인간 중에서는 꽤 빠른 축에 속한다고 자부했음에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고 있던 일을 알아채지 못한 제 자신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사실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번번이 실패하는 정국의 연애를 보며 따로 마음에 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짐작은 했었지만 그게 제 동생이었다니. 역시나 사랑은 접점이 없는 곳에서도 발생하기 마련이라고 생각하며 호석은 느긋하게 뻐근한 목을 돌렸다. 자칭 연애 박사 정호석. 친한 동생이 친동생을 좋아한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
"야, 정국아."
"예?"
"너 이번에 몇 반이냐?"
"3반요. 그건 왜요?"
호석은 여주가 1학년 때도 3반이었는데 또 3반이 되었다며 투덜거리던 것을 곱씹었다. 의아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정국에게 굉장히 중요한 말을 할 듯 뜸을 들였다.
"야, 정국아."
"예?"
"무조건 들이대."
그 때는 호석이 형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몰랐지만 같은 반이라는 걸 알고 나니 그 숨은 뜻을 알 수 있었다.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말 한 번 제대로 못 붙여보고 속만 썩히지 말고 뭐라도 해 보라는 의미겠지. 그래서 노력했다. 그 애에게 말 한 번 더 붙여보기 위해 어젯밤 실컷 자서 오지도 않는 잠을 청했고, 내 집과 정반대 방향으로 가는 그 애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 걷기 위해 부러 걸음을 늦추다가 버스를 놓치기도 했다. 이미 떠나 버린 버스와 흩날리는 흙먼지만 보면서도 뭐가 그리 좋았는지 웃음만 나왔다. 다음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는 옆자리에 노을을 앉힌 채로 그 애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 애의 어깨 위에 살며시 내려앉던 벚꽃, 유난히 햇살이 맑던 날 포근한 갈색으로 빛나던 그 애의 머리칼, 한여름의 얼음물보다 시원하고 청량하게 내 주위를 메아리치던 그 애의 웃음소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하다 버스에서 내릴 때가 되면 노을은 항상 어깨를 다독여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내려앉는 따스함이 꼭, 그 애 같았다.
머릿속이 정여주로 꽉 찬 바람에 여자친구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겠다. 나를 깨우고는 눈을 마주칠 틈도 주지 않고 잠들어 버린 정여주가 귀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라보고 있었던 게 화근이라면 화근이겠고. 막무가내로 나를 끌고 나온 여자친구는 한눈 파는 거냐며 마구 화를 냈다. 웬만하면 좋게 달래서 풀어보려고 했지만 그 말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시선의 끝은 항상 정여주였는데... 그걸 고작 한눈 판다는 행위로 단정짓는 여자친구가 짜증났다. 그래도 꾹 참았다. 이 애는 나를 좋아하니까 서운한 게 당연하다며 이해하고 돌려보냈다. 자기 때문에 여자친구와 싸운 거냐며 걱정하는 정여주에게 괜찮다며 웃어보였다. 친구인 노을이 대신 채워주고 있던 옆자리를 자연스럽게 차지하고 들어갔다. 너를 보고 있었다는 말로 정여주를 흔들었다. 그 애가 흔들리기를 바라고 한 말이었는데 내가 흔들렸다. 자꾸만 욕심부리고 싶었다.
"내 이름 부르지 마. 네가 그런 식으로 나 부를 때마다 미칠 것 같아."
"......"
"웃기지? 몇 년을 같이 봤는데 갑자기 나쁜 말이나 해대고."
"......"
"그래. 나도 몰랐지. 내가 갑자기 이럴 줄 누가 알았겠어."
"......"
"네가 왜 고쳐? 내가 그냥 너 마음에 안 들어서 한 말이었다고 생각하고 넘기면 되는데 왜 고친다고 하냐고. 내가 너한테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야? 언제부터 내가 그렇게 중요했어? 너, 그냥 착한 척하려고 그러는 거면 작작해. 내 말 안 듣는다고 너한테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어. 애먼 사람 착각하게 만들지 말고 그냥 너 살던 대로 살라고."
여주가 화를 냈다. 그 애가 하는 말들은 억울할 정도로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정여주의 시선에 비춰지는 전정국은 이랬구나. 자신이 내게 애먼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구나. 내가 그 애에게 다가갈 생각만 할 동안 그 애의 마음은 문드러지고 있었다. 그간 많은 연애를 해 오면서 어느 정도 사랑에 대해 알아오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정여주는 여전히 내게 풋사랑이었다. 설익은 사과 같아서 깨물지도 못하고 애타게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나한테 그런 존재인 그 애가 나 때문에 운다. 그동안 이별 통보를 하고 돌아서던 수십 명의 여자친구들의 등을 보는 것보다 울며 뒤돌아가는 그 애 한 명의 등을 보는 게 더 아팠다.
"여주야."
"꺼져..."
울며 손을 쳐내는 그 애를 붙잡아 안았다. 그 애를 자꾸만 아프고 헷갈리게 만든 건 나였다. 내 감정도 서툴어서 주체하지 못하면서 남의 감정까지 생각한답시고 닥치는 대로 고백을 받아주고 연애를 했다. 가짜 마음을 만들기에 바빠서 진짜 마음을 방치하고 때로는 외면까지 했다. 그런데 정여주는 아니었다. 몇 년 동안 나조차도 어쩔 줄 모르던 그 감정을, 누군가를 혼자서 좋아한다는 시리도록 외로운 감정을 제가 다쳐가면서까지 껴안고 붙잡고 끝까지 지켜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땅한 감정을 요구할 줄 알았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줄 알았다. 채 말하지 못한 진심이 일렁이는 그 애의 눈을 마주하자마자 억눌렀던 감정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너도 나를 좋아한다는 안도감, 그간 마음고생한 것들에 대한 서러움, 앞으로 이 관계를 어떻게 이끌어 나가야 할지에 대한 막막함과 또다시 이 일련의 서툰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두려움.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혼자 겪느라 짓무른 마음을 정여주가 옆에서 보살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이고 가슴 떨리는 두근거림. 모든 게 다시 시작이었다. 내 짝사랑도, 그 애의 짝사랑도.
*
늦어서 죄송합니다... 기다리셨죠. 개연성이 터무니없긴 해도 정국이는 여주보다 훨씬 먼저 짝사랑을 시작했고 여주보다 몇 배는 더 서툴러서 자꾸만 헤맸던 걸로...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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