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둘은 딱히 티를 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애들 모르게 비밀 연애를 하기로 했고, 누가 봐도 친구 같던 우리는 학교에서 지내던 것처럼 지내기로 했다. 여전히 박우진은 나를 미치도록 좋아했고, 나도 그만큼 박우진을 좋아했다. 학교에선 친구처럼 지냈고, 학교를 마치고는 가로등만 비치는 곳에서 안고 있거나 순수하게 뽀뽀도 해봤다. 그런 생활을 한 지도 2달이 지났을 때, 나는 처음으로 남자친구에 대한 불안감을 느꼈다. 정확히는 제 남자친구를 노리는 그 눈빛들을.
* * *
"진짜 나갈 거야?"
"어, 진짜 나가야지."
"아니... 안 나가면 안 돼?"
"갑자기 왜 그러노. 내 이거 친구들이랑 약속해서 안 된다."
찢어진 청바지에 얇은 흰 티를 입은 채로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박우진을 노려봤다. 제 시선을 느꼈는지 쳐다보더니 웃으며 머리를 헝클어 뜨린다. 얘가 내 맘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알면 진짜 나쁜 놈이고, 모르면 진짜 눈치없는 새끼다. 계속 눈을 가늘게 뜨고 있으니 손으로 제 눈을 가려주고는 자기 손 위에 입을 맞추더니 잘 하고 오겠다며 마저 머리를 정리하고 나갔다. 입술을 비죽 내밀고있다 짜증스레 한창 공연 중일 강당으로 가면 곧 박우진이 나올 무대인지 옆에 있던 여자애들이 난리를 치며 소리를 지른다. 아니꼬운 듯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로 보고 있으니 박우진 외 남자애들이 나와 춤을 추기 시작하는데, 원래 춤을 잘 추는 건 알았지만 저렇게 잘 출줄은 몰랐다. 여자애들이 환호성을 지르는데, 솔직히 나도 반했다. 넋놓고 보고있다 이내 노래가 끝나고 무대에서 내려가는 박우진을 눈으로 쫓았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자애들은 이미 박우진한테 홀린 뒤였다. 내가 이래서 올라가지 말라고 했던 거라고...
강당을 나가 학교 뒷 편에 가만히 서있으면 땀에 젖은 얼굴로 박우진이 달려왔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실실거리며 다가와 잘했냐며 묻는다. 저 얼굴이 알 리가 없지... 대답없이 가만히 있으면 제 어깨를 흔들며 대답을 재촉하자 짜증스러운 얼굴로 손목을 놓고는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래, 잘 했다. 잘 해서 반한 애들이 몇 명인데. 내가 왜 이러는지는 이해가 안 됐지만 좀, 짜증났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늘 같이가던 집도 오늘은 혼자 갔다. 박우진, 나쁜 놈...
그 뒤로 며칠을 쌩깠다. 박우진이 나한테 올 기미가 보이면 바로 피했고, 요새는 잘 지내던 박지훈이랑 어울려 다녔고 박우진은 분명 그게 아니꼬왔다. 너도 당해봐라. 그렇게 피해다닌지 일주일 째, 밥을 먹고 나오니 축구를 하는 건지 애들이 운동장 주위로 몰려있기에 나도 친하게 지내던 여자애 옆에 서서 구경했다. 그 사이엔 박우진도 있었고, 얘는 박우진을 좋아하는지 두 손까지 모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뜬 채로 박우진을 보고있었다.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보고 있으면 절 툭툭 치는 손길에 옆을 돌아봤다.
"야, 박우진 쟤 진짜 멋있지 않냐."
"...뭐래."
"춤도 잘 추고, 축구도 잘해. 못 하는게 뭐야. 아, 진짜 이게 사랑인가봐..."
"저런 애가 뭐가 좋다고..."
마음 같아선 사랑이라며 지껄이는 입을 손으로 막아버리고 싶었다. 애써 표정을 감추고 축구가 한창인 운동장에 시선을 돌리면 저를 보고 있는 박우진과 눈을 마주쳤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이내 자리를 떴고, 급하게 교실에 가 앉아있으니 축구가 끝났는지 하나 둘 들어오는 아이들에 가만히 풀지도 않는 문제집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내 반장이 교탁에 서서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한다.
"야, 우리 박우진 덕분에 탄 상금으로 오늘 회식하러 가자."
여기저기서 콜을 외치는 아이들에 망했다 싶어 눈을 꾹 감았고 고개를 숙여 팔을 모아 그 위에 제 얼굴을 묻었다. 박우진은 여자애들의 사랑을 받을 것이 뻔했고, 나는 구석에 앉아서 그 광경을 바라봐야할 것이 안 봐도 비디오였다. 망했다, 진짜...
* * *
"야, 이거 다 박우진이 쏘는 거니까 박우진을 위하여 건배!"
각각 콜라와 사이다가 가득 담긴 컵을 들어 앞에 있던 애들과 잔을 맞췄다. 안으로 오기 전에 박우진은 분명 내 옆에 앉고 싶어했던 것 같은데, 여자애들의 이끌림에 저 여우들 사이에 앉아 온갖 사랑을 받고있었다. 애꿎은 박우진만 노려보다 이내 입 안으로 고기를 쑤셔넣고는 몇 분 뒤 못 참겠다는 듯 일어났다. 어디가냐는 물음에 화장실 좀 다녀와야겠다고 말한 후 밖으로 나가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렇게 몇 분을 앉아있으니 머리 위로 손이 올려진다. 뭐냐는 듯 올려보면 표정 없는 박우진이 절 보고있다. 놀란 듯 일어나면 이내 제 팔을 잡아 끌어 안 쪽으로 들어갔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들어가니 제 어깨를 힘주어 잡고는 말한다.
"니 나 왜 피하는데."
"...뭔 소리야, 갑자기."
"맨날 나 피했다이가. ...내 싫나?"
저한테 고백했던 그 날이 겹친다. 입술을 꾹 물고 있으면 재촉하듯 되물어온다. 내 싫냐고. 그런 박우진을 한참이나 보고있다 입을 비죽이고는 팔을 들어 박우진의 허리를 감아 안고는 어깨에 머리를 기대니 살짝 당황한 듯 하더니 박우진도 팔을 들어 날 감싸 안는다. 입을 달싹이며 아무 말 없이 있다 이내 서운한 듯 말을 꺼낸다.
"싫은 게 아니라..."
"그럼, 뭐 때문에 이러는데."
"...그게,"
망설이다 모르겠다, 하고 박우진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주고는 말한다.
"너 여자애들이 진짜 좋아한단 말이야. 그거, 질투나서, 짜증나서... 그러게 내가 공연 올라가지 말랬잖아. 짜증나..."
입을 비죽이니 이내 박우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내 머리를 헝클어 뜨리며 웃는다. 뭘 웃어... 혼자 중얼거리면 절 안은 팔에 힘을 주더니 꽉 안는다. 귀여워 죽겠다는 박우진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고는 노려보며 말했다.
"아, 그니까... 관리 좀 잘 하라고. 진짜 여자애들이 맨날 나한테 좋다고 그럴 때마다 진짜 짜증나는 거 아냐."
"아, 알겠다. 미안. 관리 잘 할게. 이제 내 안 피할 거제?"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박우진과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안고있던 팔을 떼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뭐 하냐는 물음에 어색하게 웃으며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박우진은 제 손을 세게 잡았다 놓았고 나는 웃으며 박우진을 쳐다봤다. 이내 눈을 마주치고는 절 보고 윙크한다. 저건 어디서 배워온 건지. 저 귀여운 새끼... 혼자 중얼거리며 다시 꾸역꾸역 고기를 먹었다. 그래도 내 돈 한 푼 안 내는 고기인데 많이 먹고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