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학기는 누군가에겐 설렘, 다른 누군가에겐 걱정이 될 수 있다. 어떤 친구를 만날지, 어떤 선생님을 만날지 기대감을 잔뜩 갖고 오는 반면에 나는 어떠한 설렘도 걱정도 없었다. 될 대로 되라, 라는 식의 생각을 갖고 있던 나는 오히려 새학기의 걱정보다는 지각은 하지 않을까의 걱정이 더 컸다. 걱정하던 것과 맞아 떨어지게도 30분이나 늦게 일어나 허겁지겁 준비해 학교로 달려갔다. 운 좋게도, 선생님은 오시지 않았고 친구인 예진을 찾아 두리번 거리는데 웬 걸, 그 옆엔 남자애 하나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예진이가 내 자리 잡아 준댔는데. 남은 책상으로 걸어가니 떡하니 가방이 놓여있었고, 그럼 내 자리는 저... 남자애가 앉은 곳이 맞다. 멀쩡한 지 자리 놔두고 왜 굳이 저기에 앉아있는지. 아, 예진이가 예쁘긴 예쁘다.
하품을 한 번 하고는 제 자리라고 추정되는 곳으로 걸어가 섰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깔깔대며 웃는데 아니 꼬울 수 밖에 없었고, 나는 모르는 남자애가 앉아있는 의자를 발로 툭툭 쳤다. 갑자기 표정을 굳히며 쳐다보는데, 살짝 쫄긴 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턱 짓으로 자리를 가리켰다.
"거기 내 자린데."
"......"
"나 앉을 데 없으니까 좀 비켜."
몇 초 동안 정적이 흐르더니 이내 기분 나쁜 듯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나 자기 자리로 가기에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자리에 앉으니 뒤 쪽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살짝 고개를 돌리니 다리를 꼬은 채로 날 바라보는 게 보이기에 누군가 싶어 가슴 쪽에 달린 명찰로 시선을 옮겼다. 박우진. 지나가다 들은 이름 같기도 하고. 아무튼 저런 녀석이랑 다시는 안 엮이겠지, 하며 가방을 베개 삼아 잠을 청했다.
그게 박우진과 나의 악연의 시작이였다.
[ 사랑은 의도치 않은 곳에서 Ep.1 ]
Wrtten By. 더기
* * *
박우진과 엮이지 않았으면 하는 나의 바램과 반대로, 오히려 박우진과 부딪히는 일이 잦아졌다. 박우진과 나만 과제를 내지 않아 단 둘이서 교무실에 불려간 일이나, 둘이서 남아 잡일을 도우는 등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되는 상황이 많아졌다. 꼴도 보기 싫지만 나중에 다 잘 되려고 이러는 거다, 생각하며 꾸역꾸역 일을 했다. 하는 도중에도 말 한 마디 오가는 건 전혀 없었고, 며칠을 해도 가까워지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저 녀석이랑 농담을 나누는 사이는 절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오늘도 늦잠을 잔 탓에 지각한 벌로 음악실을 청소하고 오는데, 박우진은 또 내 자리에 앉아 예진이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답지 않게 여자애와 이야기를 나누는 꼴이란... 하품을 한 번 하고는 자리로 가 열심히 떠들고 있는 박우진을 툭툭 쳤다. 박우진은 날 올려다봤고, 나는 비키라는 듯 쳐다봤다. 아니, 주인이 왔으면 비켜줘야 하는 게 예의 아닌가. 보고만 있는 건 무슨 심리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아쉬운 듯 박우진은 예진이에게 또 오겠다며 웃어준 뒤 나를 보고서는 바로 표정을 굳혔다. 저 새끼, 진짜...
"야, 예진아."
"응?"
"너 쟤랑 무슨 사인데? 맨날 와서 얘기 하고. 설마, 사귀냐?"
"에이, 그냥 친구야. 우진이 저래봬도 진짜 재밌어."
재밌긴 개뿔... 저렇게 날라리 같은 애가 재밌다니. 어이가 없기도 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예진이도 취향 참 특이해. 어떻게 저런 애한테 호감을 가지지? 박우진을 흘긋 돌아봤다 다시 봐도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 * *
움직이기 싫어하는 나는, 과목 중 체육을 제일 싫어했다. 공 하나 던져주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재밌다고 노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체육은 맨날 아프다며 빠지기 일상이였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짝피구를 하자며 난리다. 흥미 없다는 얼굴로 방방 뛰는 아이들을 보다가 순간적으로 박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의도치 않은 아이컨택에 급하게 얼굴을 돌렸고, 하기 싫다는 듯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이때, 달갑지 않은 목소리와 함께 내 이름이 들렸고 나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야, 김여주도 넣자."
박우진 저 미친...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니 핼쭉 웃는다. 나를 골릴려고 한 게 분명하다. 나는 싫다는 듯 손을 내젓는데 억지로 날 끌고가는 손목에 어쩔 수 없이 짝피구를 하게 되었다. 짝이 정해지며 하나 둘 씩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고있는데 무슨 일인지 예진이가 날 아닌 다른 친구를 뽑아갔다. 미친, 그럼 난 어떡하라고? 예진이를 보니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한다. 아, 망했다. 그럼 난 누구랑 하지... 하며 지켜보는데 남은 사람은 둘 뿐이다. 그것도, 내가 정말 같이 하기 싫었던 사람.
"그럼, 박우진이랑 김여주 짝하면 되겠다."
인상을 찌푸리며 박우진을 보는데 몸서리치는 나와는 다르게 덤덤한 척 자리로 가 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쟨, 나랑 짝 된 게 아무렇지도 않는 걸까. 나는 싫어 죽겠는데.
어찌해서 시작된 짝피구에 어색하게 박우진 옷자락을 살짝 잡았다. 수다나 떠는 줄 알았는데 공을 잡으려고 이리저리 다니는 거 보면 운동에 영 관심없는 애는 아닌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박우진의 옷자락을 잡은 채로 따라가려니 좀 버거운지 자꾸만 손에서 옷을 놓쳤다. 그걸 느낀 박우진이 나를 한 번 돌아보더니 내 손을 잡아 자기 허리 위에 놓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놀란 내가 눈을 크게 뜨고 보니 박우진이 날 흘긋 쳐다봤다.
"니 그러다 공에 맞으면 어쩌려고 그러는데."
"...어, 어, 야!"
이때, 박우진의 머리 위로 공이 날라오는 것이 보였다. 다급하게 소리를 지른 나는 눈을 꾹 감았고 박우진은 공을 보더니 나를 안 쪽으로 밀어 대신 맞아주는 것이다. 조금 지나 눈을 뜨니 다시 경기는 시작하고 있었고 괜히 밀려오는 쪽팔림에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박우진의 옷자락을 소심하게 잡았다. 움직임을 느낀 박우진은 나를 한 번 돌아보고는 날라오는 공을 잡았다.
"호들갑은. 꽉 잡아라, 니."
고개를 끄덕이곤 아까처럼 박우진의 허리를 꽉 붙잡았다. 분명히 다짐했었다, 난 박우진이랑 한 마디도 섞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 * *
"박우진, 김여주. 또 너네 둘만 과제 안 냈어. 오늘 안에 가져와."
고개를 숙이며 머리를 헝클어 뜨렸다. 또 박우진이다. 나는 그렇다쳐도 쟤는 왜 과제도 안 내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수업을 듣는데 자꾸 신경쓰여 죽겠다. 왜 자꾸 박우진이랑 부딪히는 거지. 난 쟤가 너무 싫은데...
절 지켜보던 예진이는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도와줄까, 라고 묻는다. 사실 친구에게까지 도움을 받으며 해야하는 과제는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고개를 젓는데, 박우진을 한 번 바라보더니 요새는 우진이가 자기한테 안 온다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데 예진이한테는 미안하지만 나에겐 오히려 다행 중 다행이였다. 이제 박우진이 내 자리에 앉을 일이 없다니. 마주치는 일이 줄었다는 생각에 속으로는 예스를 외치며 예진이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줬다.
"괜찮아, 뭐. 잠시 그러는 거겠지."
"그래도, 맨날 나 찾아와서 재밌는 얘기도 많이 해줬는데..."
"차라리 다행이지 않아? 박우진 저런 애랑 잘 지내는 것 보다..."
"나 우진이 좋아한단 말이야."
어?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예진이를 보는데 잔뜩 속상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다. 어떡하지, 하며 머리를 긁적이니 내 손을 잡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도와달라고 말하기에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친구라지만, 쟤랑은 정말 엮이기 싫은데... 되물어오는 예진이에 입술을 꾹 깨물다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웃으며 고맙다고 말하는 예진이를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살짝 돌려 박우진을 바라봤다. 순간 눈이 마주쳤고 박우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정말 엮이기 싫었는데... 나는 어쩔 수 없이 예진이를 위해 한 몫 희생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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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가 또... 우진이의 글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이번엔 좀 길게 연재해볼 생각이구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ㅠㅠ!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