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You Make My Life Colorful (도쿄출장 下)
사실 그날 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아주 잠시만 저를 안아달라던 과장님의 목소리와 표정이 계속 생각났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그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기에 조금 혼란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엉겁결에 그의 품에 안겨버린 나도 내가 잘한 건지 못한 건지, 선뜻 답을 내리기가 어려웠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후에는 서로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예전과 똑같았다.
종종 그때의 그 목소리와 표정이 생각나긴 했지만 나에게 옹과장님의 본모습이란 밝고 젠틀한 것이었으니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과장님 또한 그 때 그 순간은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행동해주셨고.
"출국하는 날이 오긴 오네요, 과장님."
"그러게요. 고생 많았어요, ○사원."
"아이, 고생은요. 과장님이 훨-씬 더하셨죠..."
첫날이 유독 길었던 거지, 다음 3일은 금방 흘러갔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일도 바빴고 일정도 빡빡했기 때문이다.
거래처와 지사 사람들을 만날 때는 한껏 긴장했다가, 또 호텔에 오면 훅 풀린 긴장에 노곤해져 푹 자고 나면 다시 아침이었다.
그렇게 사흘을 반복했더니 벌써 금요일,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 오고야 만 것이다.
"그래도 도쿄까지 왔는데. 너무 일만 하면 질려버릴까봐 오후 일정은 좀 빼놨어요."
"오- 역시 과장님! 최고최고!!"
속 시원히 다 말할 수 없는 상황과 일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서 그 부분은 둘만의 비밀로 남겨야 하는 게 맞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장 기간 동안 과장님과 더 가까워지고 친해진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좋으신 분이 맞았다. 최소한 본인의 일에 대해서 책임감을 갖고 임하시는 분이었고 그 만큼 프라이드도 높은 사람.
내가 충분히 본받고 배울 수 있을 만한 멋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여러 번 하게 되는 순간들이었다.
어쨌든 오후 일정은 없다고 해서 호텔 체크아웃을 먼저 한 다음, 짐을 차에 실었다.
못했던 도쿄 관광이나 조금 해볼까 싶어서 이리저리 과장님을 따라 좀 놀러다니기로 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사원이 하고 싶은 거 하나,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나씩 하는 거 어때요?"
"저는 좋습니다, 과장님!"
"그럼 ○사원은 뭐 하고 싶어요?"
"저는 쇼핑을.. 하고 싶은 건 아닌데 해야 할 것 같아요.
도쿄까지 왔는데 선물 안 사가면 혼날 것 같아서.... 하하."
"오케이. 그러면 일단 쇼핑부터 하고.
나는... 오락실 가고 싶어요."
오.... 오락실이라니 제법 구미가 당기는 곳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나다닐 때 오락실이 참 많았는데 제대로 들어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왕년에 총게임으로 좀비 좀 잘 죽인다고 학과에서 유명했는데... 취준에 입사에 이것저것 치이다 보니 오락실의 '오'자도 꺼내지 못한 세월이 얼마인지.
원래 쇼핑을 길게 하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니 후다닥 살 것만 사가지고 오락실을 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과장님을 향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쇼핑의 이유는 하나였다. 출장 내내 신세를 많이 졌던 터라 옹과장님한테 뭐라도 하나 해드려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끼니는 매번 법인카드로 처리했기 때문에 따로 내가 사드리고 어쩌고 할 게 없었고,
그래서 선물을 사드리지 않고서야 내가 달리 옹과장님께 감사함을 표할 거리가 없었던 거다.
"한 시간 반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과장님."
"한 시간 반? 살 거 더 있는데 너무 서두르는 건 아니고요?"
"아, 아뇨아뇨. 저 쇼핑 길게 하는 걸 싫어해서..."
"흐음.. 알겠어요. 그러면 한 시간 반 뒤에 여기에서 봐요."
충분히 생각하고 고르려면 조금 떨어져서 있는 게 좋겠다고 나를 배려해주신 과장님 덕분에 더 쉽게 쇼핑을 할 수 있게 됐다.
옹과장님의 선물은 대충 생각해 두었다. 어두운 색 와이셔츠.
왜 하필 어두운 색이냐면, 지난 번에 보니까 어두운 색 와이셔츠도 잘 어울리시던데 은근 밝은 색만 자주 입으시는 것 같아서 좀 아쉬웠기 때문이다.
밝은 색이 유하고 순해보이는 건 있지만서도... 어두운 색이 좀 더 프로페셔널해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나름 고민한 결과였다.
"으음....."
남색과 검은색 중에 고르다가, 왠지 검은색이 더 스타일리시하게 잘 받으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이즈도 눈대중으로 대강 확인해뒀으니 따로 거칠 것 없이 바로 계산대로 직행했다.
셔츠까지는 뿌듯한 마음으로 사들고 나왔는데, 계속 고민을 해도 영 답이 안 나오는 문제가 좀 있었다.
"아, 진짜.. 뭘 사줘야 해."
강과장 선물을 진짜 못고르겠는 게 문제였다.
넥타이나 넥타이 핀을 사주기에는 너무 아빠 생일선물 사는 것 같아가지고 좀 그렇고..
그렇다고 또 와이셔츠를 사기에는 옹과장과 같은 아이템을 고르는 건 더 아닌 것 같고...
뭔가 다른 거를 고르려고 해도 뭘 좋아할지 모르겠어서 너무 어려웠던 거다. 취향 같은 걸 딱히 아는 것도 아니라서..
내가 강과장에 대해서 너무 몰랐나, 하면서 무심했던 나에 대해 반성을 해보긴 해봤지만 그렇다고 마땅한 선물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라 머리가 아팠다.
그렇게 정처없이 걷다 보니 향수가 눈에 들어왔다.
향수... 향수? 괜찮을 것 같은데. 내가 맡았을 때 강과장이랑 잘 어울리는 거 사다 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거다.
평소에는 살짝 섬유유연제 비슷한 향이 났던 것도 같은데. 맡아보고 괜찮은 향이 있으면 사야겠다는 생각으로 향수 코너를 좀 둘러봤다.
이런저런 향을 맡아보니 조금씩은 비슷한 것 같다고 느껴졌는데, 그중에 유독 좀 달큰하니 사람을 끌어당기는 향이 하나 있었다.
강과장과 찰떡까지는 아니더라도 강과장한테서 이 향이 나면 너무 좋을 것 같았다.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딱 적당한 느낌.
너무 많은 고민을 하면 결국 못살 것 같아서 일단 사기로 마음먹고 계산을 마쳤더니 얼추 한 시간 반이 다 지나 있었다.
혹시라도 과장님이 기다리실까봐 걸음을 서둘러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로 향했다.
"뭐 좀 샀어요-?"
"네에, 과장님. 아, 백화점이 은근히 넓네요..."
운동부족이다. 이럴 때 티가 난다. 백화점이 좀 넓다 싶었더니 그것 좀 걸었다고 이렇게 헥헥대고...
이러니 등산할 때 그렇게 힘들었지. 헥헥거리는 나를 보며 과장님이 소리내어 웃었다.
그래... 웃길 만도... 이렇게 체력이 저질이어서야...
"○사원 오락실 다녀오면 뻗는 거 아니에요?"
"그럴 것 같아요, 과장님...
그래도 괜찮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자면 됩니다!"
쓸 데 없이 해맑은 내 대답에 시원하게 웃어 보인 과장님이 앞장을 섰다.
나는 과장님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고, 머잖아 오락실에 다다랐다.
-
"오오!!! 아뇨!!! 과장님, 왼쪽!! 왼쪽!!! 아!!!!"
늘 느끼는 거지만 오락실은 사람의 텐션을 아주 업시키는 재주가 있는 공간이다.
사무실에서는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아마 이런 나의 모습은 처음이실 텐데...
놀라서 혀를 내두르면 어쩌나 생각하면서도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저 스크린 속의 좀비... 너무 그리웠고... 너무 보고 싶었고... 너무 쏘고 싶었고...
"○사원, 솔직히 말해요.
학교 다닐 때 오락실 엄청 다녔죠?"
의미심장하게 귓가에 속삭이는 과장님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요, 과장님... 일주일에 다섯 번 오락실에 왔던 사람입니다...
차마 그렇게 이야기할 수는 없어 대충 웃음으로 무마하긴 했지만 부정할 마음은 없었다.
오락실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진짜 이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야.
○사원 다시 봤어요.
좀비 떨어져 나갈 때마다 얼마나 멋있던지. 나 반했잖아."
뿌듯한 마음에 입꼬리가 스리슬쩍 올라갔다.
인형뽑기나 뭐 다른 것도 있긴 했는데 역시 내 구미를 당기는 건 철권.
오락실에 와서 총으로 좀비 쏘기와 철권을 안 해주면 약간 치킨 닭다리를 덜 뜯은 느낌이라...
그런 느낌은 또 참을 수가 없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대뜸 철권 기계 앞에 자리했다.
"과장님, 저 봐주지 마세요."
의미심장한 내 한 마디에 빵 터진 과장님이 배가 터져라 웃으셨다. 나는 진지했는데...
알겠어요, 알겠어요. 하시는데 영 봐주실 것 같은 목소리라 첫판부터 좀 세게 나갔다.
첫판부터 한 4연타를 맞으시더니 진짜 봐주면 안 될 것 같았는지 자세를 고쳐잡고 진지하게 임하시는 과장님.
"과장님, 승부의 세계는 냉정합니다.
봐주지 마시죠."
...과장님.... K.O.
벙 찐 표정으로 과장님이 나를 바라보시고, 나는 승자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와.... 하는 탄식이 귓가를 울리자 내 가슴 한 켠에서 뿌듯함이 몽글몽글 피어났다.
학과 남자사람 다 이기던 철권 실력이 어디 가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아, 뿌듯해.
한참을 그렇게 놀다 보니 공항에 가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손에 쥐고 차를 탔다.
쇼핑하랴, 오락실에 영혼을 바치랴, 나름 지치기도 하고 갈증도 났던 터라 말차 아이스크림이 너무너무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진짜 재밌었어요, 과장님.
한국 가면 또 생각날 것 같아요!"
"○사원의 새로운 모습을 봤어요... 진짜 대단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엄지를 내밀어 보이시는 과장님. 힘들고 피곤한 출장이긴 했지만 마무리가 좋으니 다 좋아보였다.
무엇보다 다행인 건 그래도 과장님과 어색한 사이로 출장이 끝나는 게 아니란 것이었다.
마지막 날 쇼핑과 오락실은 최고였어. 앞으로 몇 번의 출장을 와도 오늘은 꼭 다시 생각이 날 것 같았다.
그렇게 차는 우리를 공항에 내려주었고, 도쿄출장은 저물어가고 있었다.
-
비행기를 타고, 실컷 자다가 착륙해서 공항에 내리고.
입국수속 하고 짐 찾아서 옹과장님의 차를 가져오시는 것까지 기다리고 나니 정말이지 누우면 바로 잘 수 있을 만큼 피곤이 최대치를 찍었다.
출장을 자주 못다니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겨우겨우 잠을 참았다.
과장님도 열심히 피곤을 참아내면서 운전하는 중이실 텐데... 잠들면 너무 죄송하니까 말이다.
집에 도착하면 얼추 저녁 여덟시는 되겠구나 싶었다.
정말, 머리만 대면 12시간은 꼬박 잘 수 있을 것 같은 피곤함이었다, 이건.
"다왔다-"
"진짜진짜 고생 많으셨어요, 과장님."
옹과장님 차의 트렁크에 실어둔 캐리어를 꺼냈다.
이제 정말, 진짜, 리얼로 출장이 끝난 거구나 싶어 좀 시원하기도 하고 섭섭한 마음이 같이 들었다.
옹과장님 얼굴에는 피곤이 잔뜩 끼어 있었다. 아마 내 얼굴에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푹 쉬어요. 주말에 봅시다."
"네, 과장님. 과장님도 푹 쉬세요."
"......"
과장님이 입꼬리를 올려 웃으시며 손을 들어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셨다.
따뜻한 손길에 곧바로 이어진 건 그의 품에 안겨서 맡던 도쿄의 선선한 밤공기.
이제 도쿄는 안녕이고 다시 서울(사실은 일산...)이구나 싶어 짧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때 있었던 일은 비밀로 묻어두자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을 둘 만의 약속.
쓸쓸해 보이는 과장님을 향해 조금이나마 웃어 보였다. 과장님은 들어가 보겠다며 인사를 건네셨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는 옹과장님의 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제 정말 안녕이다. 나는 좀... 쉬어야겠어.
드륵, 드륵, 너무 피곤해서 힘이 죄다 빠진 손으로 캐리어를 끌어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캐리어를 잡은 내 손이 큼지막한 누군가의 손에 의해 잡혔다.
"......?"
놀란 것도 잠시,
이어지는 낯익은 목소리.
"보고싶었어."
강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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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ㅠㅠㅠㅠ주말에 두 번 다 왔어요ㅠㅠㅠㅠ 칭찬해주세여ㅠㅠㅠㅠ엉엉 사실 오늘 글 쓰고 싶었는데 밖에서 놀다가 들어와가지구 너무 피곤해서... 글 올릴 수 있을까 했지만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에 대한 감사함으로!! 그리고 오늘 안 올리면 또 언제 올지 모르니까...(눈물) 어쨌든 왔으니 글 재밌게 읽어주셨기를 기대해봅니다...ㅎㅎ
암호닉 글에 댓글 달아주신 분들 중 이런저런 예쁜 질문해주신 분들께는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꼭 답댓 꼬박 달아드릴게요! 관심 가져주시고 또 많이 사랑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ㅠㅠ 제 글이 현생을 살아가시는 여러분들께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기를 바라면서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다음편에 암호닉 정리해서 가지고 올게요. 암호닉은 이제 한 번 받았으니 당분간 좀 쉴게요ㅎㅎ
얼마 안 남은 월요일, 강과장과 옹과장이 여러분 삶의 활력소가 되기를 바라면서!! 저는 다음주에 야근을 덜하고 혹시라도 주중에 올 수 있을 기회가 생기기를 바라면서!! 가보겠습니당... 헤헤 보고싶을 거예요 다들ㅠㅠ! 댓글은 맨날맨날 읽고 있으니 좋은 댓글 많이많이 써주시길 바랄게용>.<
사랑하는 독자님들... 굳밤...
+) 아 맞당 아주 중요한 걸 이야기한다는 게 깜빡했어요! 드디어 도쿄출장 에피소드가 끝나고 새로운 에피소드로 찾아뵙습니다! 보고싶은 에피소드 있으시면 댓글로 말씀해주시고요~ 제가 생각해둔 게 있긴 한데 독자님들께서 좋은 소재를 주시면 그 소재도 흐름에 맞춰 꼭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진짜진짜 안녀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