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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 & Moon 02
w. 2젠5
이동혁은 내가 귀신을 본다는 걸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애 중 하나였다. 그 애의 손을 붙잡고 돌아다니다, 내가 갑자기 눈을 질끈 감으면, 이동혁은, 그 애는, 제 체취 가득한 후드집업 안으로 날 넣어 숨겨주곤 했다. 괜찮아?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정수리 위에서 웅얼거리는 그 애의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마시멜로 처럼 몽글몽글해지곤 했다. 이민형 같은, 그러니까 혼들은 누가 자신을 볼 수 있고, 자신을 볼 수 없는지 아주 잘 구분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주 심각한 몰골이 아닌 이상 나는 인간과 혼령을 잘 구분할 수 없다. 길에서 누군가 갑자기 내게 윙크를 하거나 손 키스를 보낸다면, 그건 십중팔구 귀신이지만. 갑자기 내가 흠칫 놀라면 이동혁은 괜히 두리번 거리곤 내 어깨에 손을 얹곤 했다. 집에 데려다 줄까? 나는 정말 괜찮은데.
"오늘 공강이지?"
이민형이 창문 위에 걸터앉아 말했다. 저러다가 또 뒤로 넘어갈라, 얼른 내려와. 이불 밖으로 나가지 못한채로 그렇게 웅얼거리면 이민형은 걱정 말라며 손을 내젓는다. 이민형은 내 수많은 귀신 친구들과는 다르다. 몇 년 전에, 태용이라는 애가 있었는데 걔는 이민형과 다르게 살아있을 때 기억이 있는 애였다. 달이 뜨는 밤이면 이태용은 내 창문을 두드리곤 했는데, 이태용을 기다리던 내가 창을 열면, 이태용은 내게 들꽃 몇송이를 꺾어다 주곤 했다. 넌 왜 성불 안 해? 이태용은 절대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아서 항상 창가엔 의자가 있었다. 창문 앞에 쪼그려 있는 이태용에게 그렇게 물으면, 이태용은 비밀, 이라고 말하며 손을 흔들곤 했다. 내일 또 올게, 잘 자. 그저 내 안부를 확인하고 제 하루를 나와 나누던 이태용과 다르게 이민형은 나를 졸졸 따라다니고 내 집을 휘젓고 다닌다. 나는 죽어서까지 민폐끼치고 싶진 않아. 제 머리색과 닮은 보라색 제비꽃을 건네며 그렇게 말하던 이태용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민형이 우리 집에 정착하고 난 이후, 이태용의 왕래가 아예 없었던건 아니지만, 얼굴 본지 오래된건 사실이다. 나랑 본게 몇년인데, 나한테 말도 없이 성불한 건 아니겠지.
[김시민 오늘 동아리 모임인데 안 올거지? 그럼 나랑 이제노 둘이라 심심한데]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배게 아래가 밝아졌다. 문자왔어 시민. 이민형이 또 귀신같이 알아차리곤 창문에서 내려와 터벅터벅 걸어온다. 황인준이네? 내 핸드폰을 들고 이민형이 문자를 읽는다. 갈거야? 고개를 갸웃, 하는 이민형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인준, 이동혁, 그리고 이제노. 시민 대학교 문예 동아리 친구들이었다. 문예 창작과인 나와 이제노 그리고 국어 국문학과인 이동혁과 황인준. 우리 넷이 즐거웠는데, 괜히 나랑 이동혁때문에 애들끼리 서먹해질까 걱정이다.
[김시민, 황인준한테 들었어. 괜찮아?] 침대에서 비척비척 일어나 양치를 하고 있었다. 아직도 내 핸드폰을 쥐고 있었던건지 이민형이 큰 소리로 문자를 읽었다. 제노잼한테 문자 왔어 김시민! 오늘은 이민형이랑 같이 시민대 병원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절대 안 되지. 황인준한테는 미안 이라고 보내고 이제노한테는 괜찮다고 보내줘. 이렇게 우물거리자 이민형이 Okay라고 말하곤 콧노래를 불렀다. 사실 귀신이 휴대전화 들고 다니는게 좀 웃기기도 하고, 자기 이름 밖에 모르는 애 명의로 휴대전화를 파줄 수도 없어서 이민형은 휴대전화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문자 답장이나 알람 끄는 것 같은 사소한 일들을 이민형에게 자주 시키곤 했는데, 그럴때마다 이민형은 제 갈매기 눈썹을 으쓱거리며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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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형이라는 환자 있나요?"
잠시만요, 머리를 정갈하게 묶은 간호사가 컴퓨터 자판을 두드렸다. 제발, 제발 있어라-! 이민형이 내 옆에서 기도를 하고 발을 구르고 아주 난리가 났다. 귀신을 못 보는 일반 사람들한테는 이민형이 보이지 않겠지만, 프론트 위에 놓인 볼펜이 자꾸 이민형 팔꿈치에 치어 구르길래 모르는 척 하느라 혼났다. 죄송하지만 이민형이라는 환자 분은 안 계세요. 간호사가 날 안쓰러운 눈으로 올려다본다. 혹시 급한 일이시면 다른 병원에 문의 드릴까요? 생년월일이랑 혈액형 알면 금방 찾을 수 있어요. 간호사가 빨간색 볼펜을 딸깍 거린다. 이젠 프론트 위에 놓인 볼펜이 더 이상 구르지 않는다. 내가 나를 못 찾는다는 게 왜 이렇게 좆같지. 이민형이 프론트 위에 턱을 괴고 속삭인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김시민, 너 아까 병원 갔었다며. 어디 아픈거야?] 제노잼이 보냈어. 엘리베이터 구석에 구겨져있던 이민형이 큰 소리로 문자를 읽었다. 나재민이 의예과인걸 잊었다. 벌써 이동혁이랑 나랑 쫑났다고 소문이 난건가, 여튼 극성인 이제노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노랑 전화하다가 너보고 ] [시민이다, 했는데] [이제노가 아는 체 하지 말라더라] [무슨 일 있어?] 4번의 띠링, 거리는 소리 후 이민형이 문자를 크게 읽었다. 엘리베이터가 집 앞에 도착했다. 나나가 보냈어. 답장 할까? 열쇠를 현관에 꽂자 이민형이 또 신나서 묻는다. 이제노도 그렇고 나재민도 그렇고, 좋은 친구였다. 나를 이렇게까지 걱정해주는건 이태용 하나인 줄 알았는데.
"대답 안 하면 나 사랑한다고 답장할거야."
신발을 벗고 손을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가자, 이민형이 내 핸드폰을 흔들며 화장실로 따라들어왔다. 문에 비스듬히 서있는 그 애의 발치엔 그림자가 없다. 빨리 얘기해. 나나랑 제노잼한테 뭐라고 답장해? 이민형의 갈매기 눈썹이 들썩인다. 이동혁이 내게 분홍빛 문자를 보낼 때면, 내 목소리를 문자로 옮기던 이민형은 소리를 꽥꽥 지르며 방을 박차고 나가곤 했다. 그래서 이동혁이랑은 유일하게 이민형을 거치지 않고 문자했었는데. 아직 내게 이동혁이 너무 많이 스며들어있다. 베어내도 땅 속에 남아있는 나무 뿌리처럼 내 안에 너무 많이 들어있다고 이동혁 너. 재민이한테는 걱정하지 말라고 보내고, 이제노한테는 별일 아니라고 보내. 이민형이 콧노래를 부르며 기울였던 몸을 바로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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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봐 김시민."
그냥 길을 걷는 중이었다. 웬 할머니 한 분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멈춰서자, 이동혁이 왜? 하며 붙잡은 손을 고쳐잡았다. 아, 귀신이구나. 이동혁한테는 안 보이는구나. 별거 아냐, 할머니께 살짝 인사하고 지나가려고 했는데 그렇게 안 됐다. 할머니가 이동혁을 보며 자꾸 히죽이는 바람에 너무 무서워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동혁이 또 날 제 후드집업 안에 넣었다. 자길 보라는 그 애의 말이 또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거의 매일 나는 자리에 멈춰서서 눈을 질끈 감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이동혁은 내 옆에서 묵묵히 날 기다려주었다. 그렇지만 말야, 네가 없는 나는 바깥에 나가기조차 두렵다. 달이 지는 삭에, 이민형이 없는 그 이틀 동안에, 나는 이동혁조차 없이 잘 지낼 수 있을까, 벌써 반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