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 이게 아닌데
"다니엘이랑 만나고 있다는 거 알아요.
....근데 내 맘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
"......."
"나도 좀 봐달라는 뜻에서 말하는 거예요.
내가 부담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
"한 번이라도, 기회 줄 수 있다면.
...잘할 수 있으니까."
과장님의 고백이 이어졌다. 좋아한다고, 진심이라고 말하는 것부터 숨이 턱 막혔는데,
그 뒤에 이어진 말들은 그렇게 막혀진 숨통을 잡아채서 뒤흔드는 느낌이었다.
그 어떤 말도 꺼낼 수 없는, 말을 꺼내긴 커녕 숨조차 함부로 들이쉬거나 내쉴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해 힘들었다. 회의실의 공기와 분위기는 나를 짓눌러 왔다.
짓눌리는 이 기분을 피하기 위해서는 당장 어떤 말이라도 해야 했는데 그럴 수가 없어 답답할 뿐이었다.
존경스러운 나의 상사. 나의 첫 사회생활, 첫 직장에서 만난 고맙고도 감사한 내 과장님.
멋지고, 능력 있고, 뛰어나지만, 겸손하고, 젠틀하고, 친절하고, 다정하기까지 한 남자.
이런 남자는 누굴 좋아할까, 어떤 여자와 사귀고 결혼을 할까, 하고 생각했던 것도 여러 번.
대단하기 그지없는 그에게서 들려온 나를 향한 고백은 가히 혼란스럽고도 난감했다.
고백의 내용 뿐 아니라 그 고백을 전하는 표정과 시선, 말투까지 나를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는 뜻이다.
무어라 대답을 해야 했기에 혀를 내어 입술을 축인 게 몇 번인지. 도저히 목소리를 낼 수 없어서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너무 늦었다. 답은 다음에 하고 얼른 자야겠어요."
"....."
"못 자게 잡아둬서 미안해요. 얼른 누워서 눈 감는 게 좋겠어."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맥주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버리더라도 내일 아침에 버려야겠다.
나는 신발을 벗고 침대에 몸을 뉘였다. 과장님은 그 사이에 부서 캐비닛에서 담요를 가져오셨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그래도 자는 척이라도 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억지로 눈을 감으려 노력하던 내 위에 담요가 덮였다.
과장님이 회의실 불을 끄니 창 밖의 건물들에서 나오는 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밤인데도 꽤 밝은 것 같아 살며시 눈을 떴는데, 내 앞에,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과장님이 있었다.
"굿나잇."
그의 입술이 내 이마에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나는 그의 인사를 끝으로 눈을 감았다.
물론 잠은 하나도 오지 않았고, 단 한 숨도 잘 수 없었지만,
눈을 감지 않고서야 그와 같은 공간에서 이 밤을 함께 보낼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처럼 그도 잘 수 없을까. 아니면 마음을 내려놓은 후련함으로 더 잘 잠들 수 있을까.
내 속도 모르고 맘도 모르는 밤은 깊어만 갔다.
-
"으음......"
창 밖으로 들어오는 쨍한 햇볕 덕분에 쉽게 눈을 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살풋 잠들긴 한 모양이다.
하지만 머리는 맑았다. 긴장을 해서인지 오히려 정신이 말똥하게 들어있었다.
시간을 확인하려고 손을 뻗어 휴대폰을 봤다. 부재중 전화가 다섯 번. 모두 강과장에서 온 연락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 경황이 없었다. 집에 안 들어가고 사무실에서 잔다고 카톡을 보낸 후로 어떤 연락을 못 했다.
왜 굳이 사무실에서 잠까지 자야 하는지 궁금했을 법하고, 그래서 전화를 한 걸 텐데. 옹과장님의 이야기를 듣느라 휴대폰을 들여다 보지도 못한 거다.
하.... 분명 걱정했을 텐데. 괜히 나까지 못 잔 것에 더해서 강과장까지 잠 못 들게 만든 게 아닌가 해서 괴로워졌다.
"...일어났어요?"
부스럭거리는 나 때문에 깬 옹과장님이다. 간밤에 제대로 못 자서 수척한 얼굴인데도 수려한 이목구비는 그대로다.
네... 잘 주무셨어요? 하면서 의미 없는 인사를 건넸지만, 서로가 잠 못 드는 밤이었다는 걸 안 이상 정말이지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버렸다.
과장님은 덮고 있던 담요를 내려놓으며 마른 세수를 하셨다. 몇 시지... 하며 휴대폰을 확인하시곤 눈을 꾸욱 감았다 뜨셨다.
씻고 와요, ○사원. 출근시간 전에 아침 먹으러 가자. 이어지는 과장님의 잠긴 목소리.
나는 아직 여덟시가 채 되지 않았다는 걸 자각하며 알겠다는 소리를 냈다. 잠자는 자세가 영 불편했던 건지 허리가 아팠다.
어제 편의점에서 산 세면용품을 가지고 화장실로 향했다.
-
"양식? 한식? 뭐가 더 당겨요?"
"...양식이요."
"그래요. 브런치 잘 나오는 곳 알고 있어요."
사실, 일어난 직후에 과장님은 나보다 조금 더 피곤해 보이셨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니 금방 활기를 찾으셨다.
내 머릿속에는 어제 강과장에게 연락해두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가득 찼다. 전화라도 한 통 했어야 했는데,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아무리 경황이 없었어도 그렇지, 전화 한 통 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자책을 해도 남는 건 한숨 뿐이다.
그렇다고 당장 전화해서 어찌 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일단 강과장이 출근한 뒤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게 맞아 보였다.
지금 당장 식사는 해야 했다. 한시라도 빨리 먹고 들어가서 강과장에게 연락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크로크무슈."
"저도요."
"음료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네."
"여기 주문할게요-"
억지로 어젯밤 일을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중간에 잠을 자긴 했지만, 짧게나마 잠든 그 시간이 아예 없었던 것 같다. 단 몇 분 전에 일어난 일인 것처럼 선명했다.
과장님은 그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읽었는지 어떤 말도 붙이지 않으셨다.
원래 이렇게 침묵을 길게 가져가시는 분은 아닌데, 지금은 어떤 이야기를 해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란 걸 아신 거다.
나는 괜히 입이 말라 냉수만 벌컥벌컥 들이켰고, 과장님은 차분히 메뉴판을 읽으며 음식을 기다리셨다.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 먹어요."
서먹하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서먹해진 건 어쩔 수 없다. 애초에 이런 상황에서 뻔뻔하게 행동하는 걸 잘 못한다, 나는.
그렇다고 들었던 걸 못 들은 걸로 할 수도, 보았던 걸 못 본 걸로 할 수도 없는 일.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공적인 관계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받는 일이었다.
"...어젯밤에 이야기한 거 말인데,"
"...쿨럭, 아, 네. 과장님."
"괜찮아요? 물 마셔요, 물."
갑자기 어제 일을 말씀하시는 바람에 음식이 넘어가다가 컥, 하면서 걸렸다. 아니 이게 뭔.... 민망한 짓은 혼자 다 한다.
물을 쉼 없이 들이킨 뒤에야 상황이 좀 나아져 과장님께 계속 말씀하시라고 이야기했다.
"내 마음이야 사적인 건데,
○사원과 나는 계속 공적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사이니까,"
"......"
"그 사적인 이야기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꺼내도 돼요."
"......."
"다만,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건,
그 또한 내 사적인 바람."
싱긋, 웃어보이는 과장님의 말을 끝으로 어느 정도 상황은 종료됐다. 지극히 '사적'이었던 그 시간과 공간, 그리고 우리가 나눴던 대화는 일단 마무리가 된 거다.
난 아주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스위치를 켜고 끄듯 공적 모드와 사적 모드를 나눈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쨌건 내가 과장님께 내 마음을 솔직히 이야기해야 한다는, 그의 고백에 대한 답을 명확히 내려줘야 한다는 과제는 있었지만
그래도 당장은 일로 맺어진 관계에 충실해야 했다. 그게 그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나에게는 편한 쪽이었다.
식사는 맛있었다. 마주보고 밥을 먹는 게 사실 좀 어색하고 불편했는데, 과장님은 그런 분위기를 그저 내버려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여러 번 느꼈고, 또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특유의 여유로움과 당당함, 자신감과 같은 것들이 그가 그렇게 행동할 수 있도록 만드는 듯하다.
이왕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나는 강과장에게 지난 밤을 설명하는 데 집중하기로 한다.
식사를 마치고 들어가는 즉시 연락을 해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정했다.
"잘 먹었습니다, 과장님."
"저도요.
제대로 못 자서 피곤할 텐데, 밥이라도 잘 챙겨 먹어요. ○사원."
"네... 감사합니다. 과장님도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과장님을 보니 마음이 한 결 더 편해졌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사 건물 1층에 도착해서 우리 팀으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여덟시 사십분쯤 됐다. 밥을 먹고 와도 시간이 넉넉히 남으니, 문득 회사 근처에 사는 분들이 부러워졌다.
아마 내가 우리 집에 계속 사는 이상 아침에 이런 여유는 꿈도 못 꾸겠지... 하면서 부른 배를 통통 두드렸다.
"와... 배불러요. 과장님."
"뿌듯하네... 난 ○사원 배부르다고 하는 게 제일 듣기 좋더라."
"..저 살 찌우시려고..."
"그런가?"
장난스럽게, 그리고 짓궂게 웃어 보이는 과장님이다.
나는 우리 층에 올라가자마자 강과장에게 전화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휴대폰을 꼭 붙들고 있었다.
딩동,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춰 섰다.
열린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한 쪽 손에는 휴대폰, 다른 쪽 손에는 무언가 먹을 게 가득 담긴 큰 봉지 하나를 들고 있는... 강과장이었다.
"......."
"......."
"........."
순간적으로 세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흐른다. 나는 내가 보고 있는 사람이 강과장이 맞는지 내 눈을 의심했다.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사람은 강과장이 맞았다. 그리고 그는 나와 옹과장님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파랗게 굳은 표정으로 말이다.
옹과장님은 강과장을 뚫어버릴 기세로 날카롭게 시선을 고정했고, 이내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이 되었다.
"....타죠, ○사원."
옹과장님이 내게 타자고 이야기한 것과 엘리베이터에 있던 강과장이 걸어나온 건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강과장은 휴대폰을 반대쪽 손에 억지로 끼워넣곤 빈 손으로 내 손목을 잡았다.
따라오라는 어떤 문장도, 단어도 없었지만 내 발은 어느새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혼자 남겨진 옹과장님을 생각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강과장을 따라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사뭇 화가 난듯한 그의 발걸음은 비상구 지하 3층 계단에 다다라서야 멈췄다.
".....설명해. 이 상황."
"......."
나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차갑다. 내 말을 기다리는 그의 시선도 차갑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또한 강압적이다. 나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할지를 모르게 된다. 어제부터 생각회로가 단단히 막힌 느낌이다.
"왜 지금 옹성우랑 같이 있는지, 어젯밤에 전화는 왜 안 받았는지,
지금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설명해 보라고."
설명이 필요했다. 무언가 이야기를 해야 했다. 그런데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하는지 또 모르겠다.
아까도 그랬다. 어제도 그랬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런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나도 이런 내가 답답한데, 그렇다고 아무 말이나 뱉어버리기에는 또 싸움으로 번질까봐 두렵고 무섭다.
일단 그의 화를 가라앉히는 게 먼저일 거란 생각에 시간의 흐름대로 이야기하는 방법을 택했다.
"어제... 혼자 회의실에서 자려고 했는데... 과장님이 갑자기 본인도 자고 간다고 하는 바람에..."
"....왜 그걸 나한테 말 안 했는데."
"말하면 걱정할 거고.. 그러면 어떻게든 다시 데리러 올 거고.. 그렇게 되면 과장님은 나 챙긴답시고 쉬지도 못 하잖아요.
차라리 모르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옹성우랑 자는 걸 나한테 이야기를 안 했다고."
"......."
굳이 알리는 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한 말은 진심이었다.
내가 강과장에게 옹과장과 같이 회의실에서 잔다고 하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서,
죽어도 회사로 날 데리러 온다고 고집을 부리며 본인 쉬는 것도 마다하고 그럴 거라 생각해서,
그래서 숨긴 거였다. 거짓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게, 배려라고 생각했어요."
"......"
"굳이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과장님."
그가 다음 말을 해주기를 기다렸다. 당장은 화가 나 조금은 날카롭게 이야기하더라도,
내가 자초지종을 잘 설명하면 기분을 풀어주기를, 그렇게 바라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 그건 배려가 아니야."
"....."
"넌 나한테 사실을 숨긴 거야.
.....나한테, 거짓말한 거라고."
사실은 숨긴 건 맞았지만 거짓을 말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럴 만한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어젯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 오늘 얼굴 보고 이야기를 하려 했다. 그래서 타이밍을 기다렸던 거다.
마음이 아픈 와중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나라고 서운한 게 없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과장님은요."
"......"
"그러는 과장님은 왜,
과장님 입으로 옹과장님에 대한 건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는데요."
"......"
"두 사람이 원래 어떤 사이였는지,
지금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엊그제 어떤 일이 있었는지까지도.
왜 나는 다 옹과장님한테 들어야 하냐구요."
나는 지금까지, 강과장에게서 옹과장과의 관계에 대한 그 어떤 설명이나 이유, 서사를 들은 적이 없었다.
오로지 모든 이야기는 옹과장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지, 강과장은 단 한 번을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나는 티내지 않았지만 서운했다. 아니 서운한 걸 더해서 화가 났다.
나는 그에게 어떤 존재길래. 내가 그에게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이길래. 대체 나한테는 그런 언급이 한 번도 없었는지.
어쩌자고, 또 나는 어쩌라고 내게는 이야기하지 않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건 나랑 옹성우 둘 사이의 일이지, 너에 대한 게 아니잖아."
"그게 어떻게 나에 대한 게 아니에요.
두 사람 관계에 얽힌 모든 게, 그 하나하나가 나한테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데.
그리고 내가 과장님한테 뭔데요, 나는 대체 뭐길래 그걸 몰라야 하는데요.
사랑한다면서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왜 남한테 들어야 하는 건데요."
이 상황에 눈치 없는 눈물은 또 수도꼭지를 열어 콸콸콸 쏟아진다. 전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이런 소리만 나오니 답답했다.
마음 한 켠이 쿡쿡 찔리는 것 같은 느낌이 너무 아파 오른손을 들어 그 부근을 만졌다.
강과장은 아무런 말이 없다. 아마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일 거다.
"내 딴엔 배려였어.
네가 알아봤자 너한테 좋을 게 아무것도 없을 거라 생각했어."
"......"
"그걸 굳이 너한테 알려서,
네가 신경쓰게 하고 싶은 마음 없었어."
한 방울, 두 방울 흐르던 눈물은 어느덧 강을 이룰 기세다.
마음에 주룩주룩 비가 내린다. 이대로 지금의 상황이 종료될 것 같지가 않다.
오히려 종료된다면 더 마음 아프게 되어버릴 것만 같아서 무서웠다.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나았다.
".....우리, 너무 다른 것 같아요."
"....무슨 소리야."
"나, 과장님 이해하기... 너무 힘들어요."
"......"
"시간이 필요해요. 시간 좀 가져요, 우리."
우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해도 눈물이 나오고 있으니 목소리가 잔뜩 젖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속이 상했다. 사실 그를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런가 보다, 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치만 내가 너무 지쳐 있었다. 정신도 피곤했고, 몸도 피곤했고, 마음까지 피로했다.
도저히 더 이상, 그를 마주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시간은 무슨 시간.
네가 날 왜 이해 못 해.
말로 풀어가면 되잖아. 굳이 떨어져 있을 필요 없잖아."
"....제 마음이 너무 힘들어요.
좀 쉬고 싶어요. 저한테 시간 좀.. 주세요."
나를 붙잡으려는 그를 뒤로하고, 억지로 계단을 올랐다.
한 계단, 두 계단 오를수록 그와 멀어지고 있다는 게 실감났다.
밤 사이에 마음이 너무 지쳐버렸다.
지금 내게는, 도망치는 것밖엔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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