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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락비/피코] 인사 05 |
지호가 끙끙 앓는 모습을 목격한 뒤로 좀처럼 지훈은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하루 종일 지호에게 정신이 팔려 일을 하는 와중에도 실수 연발, 종종 카톡을 보내 지호의 안부를 물었다. 부담스러워하는 지호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가 없었다. 꼼꼼히 지호의 안색을 살피며 지호가 좋아할만한 음식을 해 먹이고, 그마저도 잘 소화시키지 못하는 지호를 보며 돌아서서 노심초사하기를 보름째였다. 헬쓱해진 그 얼굴이 안쓰러워 잠이 든 지호의 곁에 다가가 앉으려하면, 돌아눕는 마른 등에 지훈은 손을 뻗지 못하고 머쓱한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허나 요즘은 지호가 더 이상 제 입에 떠난다는 이야기를 올리지 않는다. 그것에라도 만족하며 지훈은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자신의 사랑은 그저 자신만의 사랑으로 가슴에 묻어야 하겠지만, 지호가 곁에 머물러준다면 얼마든지 기꺼이 그렇게 하겠노라고. 지훈은 다짐했기에, 전보다 거리를 두려하는 지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곁을 떠나지 않는 지호가 고마울 뿐이었다.
[지호야 뭐해?]
[나 그냥 집에서 TV보지. 아직 일하는 중 아니야? 일이나 해 곰탱아-ㅋㅋ]
[일도 열심히 하고 있지ㅡㅡ! 밥은 먹었어?]
[아니]
[벌써 8신데 왜 안 먹었어?]
[그냥. 밥맛이 없어서. 과자나 먹었지 뭐.]
버릇처럼 말미에 ㅋㅋㅋ를 붙이면서도 지훈의 얼굴에 미소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세상 모든 근심걱정을 짊어진 듯한 눈빛으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자판을 두드린다. [우지호 오늘 피자나 먹을까?]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괜스레 던져본 말에 지호의 반응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니가 사올거냐.] 행여 지호의 생각이 변할세라 [응 내가 들어가면서 사갈께! 아홉시 땡 하면 퇴근할게!] 자판을 누르는 손놀림이 빨라졌다. [그래. 리치골드로 사와!] 메시지와 함께 지호가 보낸 찡긋거리며 웃는 이모티콘에 그제야 지훈의 미간이 펴진다. 그래, 그래. 리치골드 패밀리로 사갈게!
. . .
짙게 어둠이 깔린 겨울밤은 공기가 차다. 피자를 들고 있는 덕에 주머니에 넣을 수 없는 손도 차다. 하지만 집으로 향하는 지훈의 발걸음은 가볍다. 지호가 말한 리치골드 피자를 패밀리 사이즈로 사들고서 집으로 향하며 콧노래를 불렀다. 이 모습을 본다면 지호는 분명 누가 다 먹으라고 이 큰 걸 사왔냐며 타박하겠지. 그런 지호의 잔소리마저도 지훈에겐 달았다. ‘무식하게 왜 패밀리 사이즈를 사왔어 멍청아!’ 애정이 담긴 말투가 아닌들 어떠하리. 전처럼 행동하는 지호의 모습이 그리운 지훈에겐 그마저도 달디 달게 느껴질 것을. 골목을 돌아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점점 조급해진다. 빨리. 빨리. 피자를 보고 좋아할 지호의 얼굴이 보고 싶다.
“다녀왔어!”
현관문이 열고 닫히는 짧은 순간 지훈과 함께 따라 들어온 찬 공기가 지호의 몸을 감쌌다. 움찔- 짧게 몸을 떤 지호가 고개를 돌려 지호를 바라보았다. ‘어, 피자다.’ 지훈의 손에 들린 피자를 보고 지호가 말했다. ‘응. 니가 말한 리치골드.’ 식탁 위에 피자를 내려놓으며 지훈이 목에 두른 머플러를 답답하다는 듯 풀어냈다. TV를 보고 있던 지호가 바닥을 짚으며 끙- 하고 일어섰다. 피자를 보며 좋아하는 지호의 모습에 지훈은 내심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슬금슬금 피자를 향해 식탁으로 걸어오는 지호. 피자 포장을 풀어내는 희여멀건한 손목이 가느다랗다. 고무줄 추리닝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지가 골반에 걸쳐진 모습이 그동안 지호가 얼마나 살이 빠져 버린 건지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큼, 큼. 지호로부터 떨어지지 않는 눈길을 애써 돌리며 지훈은 신경 쓰지 않는 체 했다. 그런 지훈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호는 어서 와 의자에 앉으라며 지훈을 재촉한다.
“야, 근데 이거 왜 이렇게 커? 패밀리 아니야?”
“맞아. 패밀리. 리치골드 패밀리.”
“헐, 돈이 어디 있다고. 너 이 큰 거 누가 다 먹으라고 패밀리를 샀어!”
“우지호가 다 먹지!”
결국 제 예상대로 반응하는 지호가 귀여워 지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네가 다 먹으면 돼- 라는 지훈의 말에 뒤따르는 툴툴거림 역시 지훈의 기대를 빗나가지 않았다. ‘표지훈 돼지. 표지훈 바보 멍청이. 돼지 바보 멍청이.’ 중얼중얼 대면서도 지호의 얼굴 역시 싫지만은 않아보였다. 어느새 식탁 의자에 앉아 옆에 놓인 자리를 두드린다. ‘빨리 와서 앉아, 곰탱아.’ 옷걸이에 코트를 걸어놓던 지훈은 지호를 돌아보며 웃었다. ‘네네- 갑니다. 가요-’
그동안 잦았던 구토와 식욕부진으로 볼이 푹 패여 보일만큼 말라버린 지호의 양 볼에 피자가 가득 찼다. 우물거리며 신나게 피자를 먹는 지호를 지훈은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함께 피자를 먹으며 가끔씩 지호의 컵에 콜라를 따라주기도 하면서. 평소 같았으면 설거지 두 배로 하기 싫다며 굳이 컵 두 개를 쓸 필요가 뭐가 있냐던 지호였는데, 요즘엔 같은 컵을 쓰는 것조차 거부했기에, 서로 다른 컵에 콜라를 나눠 따르는 지훈의 모습이 조금은 어색해보였다. 아무렴 어떠하겠나. 종종 새벽녘에 자다 깬 지훈은 달빛에 비친 지호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한 시간 정도를 말없이 깨어있는 경우가 있었다. 혹여 제가 잠이 든 동안 또 다시 지호가 아파질세라 걱정스런 맘에, 마음 편하게 깊이 잠들지도 못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점점 지호가 통증을 호소하는 날들이 줄고 있었고, 잃었던 식욕도 점차 돌아오는 듯 했기에 둘 사이에 생긴 조금의 거리쯤이야, 지훈에게는 별것이 아니었다.
“지훈아.”
“응?”
“그냥…….”
‘왜- 뭔데 말을 하다 말아?’ 궁금한 듯 눈을 크게 뜨며 묻는 지훈에게 지호는 그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응,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니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수백 번씩 지호의 마음속에선 이기적인 욕심이 자라나 이성과 반목했다. 일부러 지훈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있지만, 지호의 눈은 어느 샌가 식탁위로 비치는 지훈의 얼굴로 향했다. 제 작은 욕심이었다. 욕심내선 안 되는 지훈을 열망한다. 유리에 비치는 지훈의 모습을 보며 꼭 지훈과 저 사이에 그만큼의 벽이 존재하는 것만 같아 지호는 문득 슬퍼졌다. 저가 앓고 있는 병이 그 유리벽을 만들었고, 자신의 두려움이 그 벽을 더 높고 견고하게 만들었다. 그게 사실이었기에 지호는 슬픔을 말할 수 없었다.
형광등에 반사되는 유리위로 혈색 좋은 지훈의 모습이 비치고, 그와는 대조적인 창백한 얼굴의 자신이 비친다. 헬쓱한 모습에 눈가에 짙게 내려온 다크서클이 저를 더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아 지호는 끝내 고개를 돌렸다. 그런 저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지훈에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그러자 지훈은 거 참 아무것도 아닌게 많다며 웃었다. 지호는 지훈의 웃는 얼굴이 좋았다. 그랬기에 입을 꾸욱 다문 채 열지 않았다.
그래.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나중에 니가 너무 많이 보고 싶어졌을 때. 그때엔 나 혼자 어떻게 할까 싶어서. 응... 그냥 그게 전부야.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
패밀리사이즈 피자를 배가 터져라 꾸역꾸역 쑤셔 넣고는 바닥에 대자로 뻗어버린 지호. 배불러 죽겠다고 툴툴대며 한손으로 배를 쓸어내린다. 피자를 먹고 난 뒤의 뒷정리를 맡아 하던 지훈은 우돼지라며 지호를 놀렸다. 그런 지훈을 얄밉다는 듯 흘겨본 지호가 ‘그래도 내가 너보다 날씬할걸!’ 이라며 한마디 했다. 자신이 장난스럽게 뱉은 그 말을 들으며 욱신거렸을 지훈의 마음을 지호는 알 리가 없다. 지훈 역시 모처럼 행복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기에 장난으로 맞받아쳤다. ‘올 해부턴 다이어트 할 거거든?’ 그런 지훈의 반응이 재밌다는듯 지호가 깔깔 웃었다.
보일러를 틀어놓은 집안이 따뜻해지자, 배가 부른 지호는 바닥에 누워, 지훈은 침대 헤드에 기대 나란히 TV를 시청했다. TV에선 그렇고 그런 흔해빠진 로맨스와 이별이야기가 나오는 드라마가 한창이었다. 집안 좋고 학력 좋은 무엇 하나 꿀릴 것이 없는 남자주인공과, 그런 남자주인공에 비해 너무나 모자란 조건,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 집안을 가진 여주인공의 이야기. 그녀가 가진 것이라곤 남자주인공을 향한 헌신적인 사랑뿐이었다. 꼭 같은 제목이 아니더라도 어디선가 한번쯤은 접해보았을 이야기였다. 두 사람이 눈물 흘리며 이별하는 장면은 다음의 재회를 위한 극적인 요소일 뿐이었다.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전형적인 신데렐라이야기를 본 딴 시나리오에 언젠가 두 사람은 반드시 만나게 되어있다. 지훈도, 지호도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나,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거짓말 하지 마. 마음에도 없는 소리...-」 「아니, 진짜예요. 이제 더 이상 날 찾지도, 그리워하지도 말아요.」
진부한 대사가 배우들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이윽고 냉정하게 뒤돌아선 여자주인공의 눈에선 눈물이 고여 흘러내린다.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을 그녀를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체 하는 건지 남자주인공은 바라만보다 뒤돌아선다. 돌아서서 걸어가는 남자의 발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리고, 냉정히 이별을 말하던 그녀가 입을 틀어막은 채 주저앉아 주체할 수 없이 펑펑 눈물을 쏟는다. 흔하디흔한 드라마 속 이별장면이었다. 그런데 왜 자꾸만 제 속이 울컥하는지 지훈은 알지 못했다. 마치 자신이 그 드라마의 남자주인공이 된 것 마냥, 아파하는 누군가를 두고서 다가가 보듬어 줄 수 없음에 가슴이 아팠다. 여자의 눈물연기에 몰입하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왠지 코끝이 찡해지는 것 같아 잠시 TV에서 눈을 떼고 TV 앞에 무릎을 모아 앉은 동그란 뒤통수를 응시했다. 어깨가 움찔거리며 훌쩍이는 콧소리가 나는 게 지호가 울고 있는 것도 같았다. 뭔가 말을 걸기도 애매한 상황에 지훈은 그저 등에 받쳐놓았던 베개를 바로잡고만 있었다.
드라마가 끝나고 다음화 예고편이 재생될 때에 지훈을 부르는 지호의 목소리. ‘지훈아 나 휴지 좀…….’ 코가 막힌 듯 약간은 맹맹한 목소리였다. 우지호 울었네. 속으로 생각하며 지훈은 휴지를 전해주었다. 두루마리 휴지를 둘둘 풀어내더니 손에 야무지게 감은 지호가 흥! 하고 코를 푼다. 허- 눈물 닦는 줄 알았는데 코푸는 거였어? 지훈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풉! 그러자 지훈의 웃음소리를 들은 지호가 홱- 하고 고개를 돌려 지훈을 째려본다. ‘야 왜 웃어-’ 하지만 지훈의 눈엔 그마저도 귀엽게 보이는 것을.
“우지호 눈 부었다. 운 거 다 안다.”
“아니거든!”
“에에이- 구라 즐!”
“헐, 이 정신 빠진 놈.”
드라마를 보고 운 것을 들킨 게 창피했는지 놀려대는 지훈을 피해 지호는 등을 돌려 잽싸게 자리에 누웠다. 그런 지호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지훈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잘 거야? 불 끈다?’ 대답이 없는 지호를 슬쩍 돌아보곤 자리에서 일어난 지훈이 스위치를 끄고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TV도, 형광등도 모두 꺼져 어둡고 조용한 방. 똑딱거리며 움직이는 시계의 초침소리만이 또렷이 들려온다. 천장을 보고 똑바로 누운 지훈이 문득 지호에게 말을 걸었다. 자냐고. 그러자 곧 대답이 들려온다. ‘아니- 아직.’ 등을 돌려 누운 지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분명히 눈가가 발갛게 젖어서 콧물을 훌쩍이겠지. 어둠속에서 지훈은 눈을 감고 지호의 얼굴을 그린다. 이토록 가까이에 있지만, 또한 너무나 멀기만 한. 꼭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꾸는 것만 같은 느낌에 정말 저와 지호 사이의 거리가 우주만큼이나 아득한 것 같았다.
“지호야.”
“응?”
“잘 자.”
피식, 지호는 바람이 새는 듯 웃었다. ‘그래. 너도 잘 자.’ 말하는 지호의 목소리와 함께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골목길에 놓인 가로등 불빛이 밝아서 지훈은 눈을 감은채로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가로등 조명이 마치 눈물에 젖어 붉어진 지호의 눈가를 생각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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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끝이 보이는 것 같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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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만하고 그냥 가면 마지막 화는 그냥 내가 먹고 잠수탈거예요 흥!<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