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10
그때 이후로 달라진 게 있다면 도영이와는 눈만 마주쳐도 웃음이 나는 사이가 된 것 그리고 또 달라진 것은 그때부터 이태용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이태용 무슨 일 있어? 아무렇지 않게 물어본 내 질문에 도영이는 내 시선을 피하며 말을 얼버무린다. 언제 한 번 정재현한테도 물었었는데 돌아오는 답은 똑같았다.
"이태용? 글쎄."
"몰라?"
"어… 모르겠는데."
이태용 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다소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무거운 감정은 한숨과 같이 빠져나가질 않는다. 옆자리에 앉은 정재현은 그런 내 머리를 작게 헝클었다. 무슨 생각해. 장난기 섞인 녀석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힘이 없었나 보다 정재현의 걱정 어린 시선이 내게 닿았다. 나는 그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시민아 어디 아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고개를 드니 걱정 가득한 얼굴로 날 내려다보는 네가 보였다. 정재현은 어디로 가고 없어진 건지 비어 있던 옆자리에 앉아 너는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뻑뻑한 양 눈가를 두 손으로 꾹 눌렀다. 엎드렸다 일어나서 그런 가 시야에 가득 들어찬 빛이 눈부시다.
"아픈 건 아니지?"
"… 응."
"그럼 다행이고."
"응?"
"걱정했어 나한테 감기 옮았으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된다는 너의 말에 나는 무슨 표정을 지었더라. 달아오르는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휙 돌린다. 어느새 홧홧 해진 얼굴에 두 손을 갖다 댔다.
6월, 아주 더운 여름 날이었다.
"어우, 둘이 뭐냐?"
"뭐가."
눈살을 팍 찌푸리며 우리를 쳐다보는 정재현의 모습에 도영이는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되려 당당하게 맞받아쳤다. 정재현이 어깨를 으쓱거린다. 뒤에 있던 시계를 잠시 쳐다본 도영이는 의자를 끌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따 다시 올게. 도영이는 그 말을 끝으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 아니 그렇게 가면 어떡해…? 옆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진다. 슬쩍 쳐다본 정재현은 두 손을 얼굴에 받쳐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게 꼭 호기심이 가득한 아이 모습 같아서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너네 뭐 있지."
정재현이 내 어깨를 제 큰 손으로 잡아 돌린다. 녀석과 시선이 딱 마주쳐버린 나는 이번엔 피할 수 없었다.
"화해는 했고?"
응. 짧게 끄덕인 내 고갯짓에 너는 얼굴이 환해지다가도 곧 얼굴이 어두워졌다. 내 어깨를 잡은 손을 스르르 놓는다. 그땐 몰랐다. 그 이유가 누구 때문이었는지.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이 곧이어 울렸고 선생님이 들어오시는 바람에 나는 그 이유를 묻지 못 했다. 흘끔 쳐다본 네 옆선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복도를 지나가고 있는데 저 멀리서 이태용의 모습이 보였다. 이민형과 같이 웃으며 걸어오는 녀석은 맞은편에 있던 나를 보고 일순간 걸음이 뚝 멈췄다. 그에 당황한 건 옆에서 걷고 있는 이민형이었다. 이민형은 고개를 몇 번 좌우로 갸웃거리고는 맞은편에 서 있는 나와 눈을 맞추더니 제 왼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와 똑같이 오른손을 들어 흔들거렸다. 이민형과 그럴 동안 태용이 너는 표정이 어두웠다. 요즘 들어 어두운 표정을 많이 본 것 같았다. 사실 많이 보지도 못 했다. 화해하기 전 도영이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어느새 내 앞으로 걸어온 이민형이 살갑게 말을 걸었다.
"김시민 어디 가?"
"어? 그냥…… 뭐…."
그 이후로도 별 영양가 없는 대화가 오갔다. 그때 동안 내 시선은 자꾸 이태용 너에게 향했다. 너는 아무 표정 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이민형과의 대화가 끝나고 너는 반으로 들어가려 했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나는 네 손목을 소리 나게 붙잡았다. 후회하진 않는다. 내게 잡힌 손목을 한 번, 내 얼굴을 한 번 본 녀석은 뿌리치지 않았다. 나는 그 반응에 자신감을 얻어 두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입을 열었다.
"잠깐, 잠깐 얘기 좀 해."
"…."
"잠깐이면 되니까."
싫어, 미안 따위의 부정적인 대답이 나오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너는 그래라고 했다. 그래, 짧게 내뱉어진 네 목소리가 어딘가 슬프게 들린다.
우리는 운동장 스탠드 한구석에 나란히 앉았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에도 불구하고 많은 아이들이 운동장에 나와 축구를 하고 있었다. 야! 패스! 어렴풋이 들리는 남자아이들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삼으며 나는 신발 끝으로 작은 돌멩이들을 툭툭 찼다. 아, 어색해. 이태용과 내 사이를 휘감는 어색한 기류가 불편했다. 무슨 말을 먼저 하지. 나는 속으로 곰곰이 생각했다. 왜 나 피해? 이 질문이 먼전가 아니면 무슨 일 있어? 라고 물어야 할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있잖아. 하고 네가 먼저 말문을 틔웠다.
"도… 영이랑 어떻게 됐어?"
"응?"
"화해했어?"
응. 고개를 끄덕거리는 내 모습을 보던 녀석은 살짝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잘 됐네. 나는 그 말에 환하게 웃었다. 그러게 잘 됐지.
"그럼… 이제 어떡할 거야?"
"응? 뭐가?"
"… 고백."
"…."
"할 거야?"
"글쎄 나도 모르겠어."
잘 됐으면 좋겠다. 너는 그렇게 말했다. 잘 됐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네가 날 피하는, 나는 그 이유가 듣고 싶었다.
"미안해."
"… 어, 어?"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이번에도 너는 곤란한 나를 대신해 먼저 말을 꺼내주었다. 태용이가 꺼낸 말은 사과였다. 나는 그 말에 당황함을 감추지 못 했다. 내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녀석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피해서 미안, 짧게 내뱉어진 말에 줄곧 녀석을 쳐다보던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땀을 뻘뻘 흘리며 축구하는 남자애들의 모습이 보인다. 점심시간의 흔한 풍경이었다. 흔하지 않은 건 너와 나 그리고 그 주위를 어색하게 휘도는 공기였다.
"이젠 안 피할 거니까."
"…."
"너도 피하지 마."
"야 당연하지! 내가 널 왜 피하냐?"
당당한 내 말에 너는 고개를 돌려 나를 빠안히 쳐다봤다. 나는 너를 제대로 쳐다보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그러지 못 했다. 두 귀가 발갛게 타올랐다. 나는 따갑게 내리쬐는 햇볕 때문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작게 속삭이듯 말하는 너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서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이제 교실로 갈까? 덥네. 손을 흔들며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며 우리는 교실로 돌아갔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무슨 말을 들어도."
“… 나 피하면 안 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여름방학이 가까워지고 있어 그런가 학교는 지금 상담기간으로 되게 바빴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선생님들의 모습이 자주 보인다. 밤 10시가 다 돼서도 끝나지 못한 학생들이 여럿 있었다. 선생님들은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티를 내지 않기 위해 한층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20번부터는 내일 다시 하는 걸로 하고, 시간 늦었으니까 조심해서들 가. 그 말을 끝으로 선생님은 손에 든 출석부를 몇 번 흔드시고는 사라지셨다. 내 번호가 20번 내에 있음을 하늘에 감사하며 기분 좋게 가방을 고쳐 들었다. 옆에서 걷는 정재현과 김도영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둘은 번호가 21번 그리고 24번이었다.
"내일도 10시까지 학교에 있어야 된다는 말 아니야 저거."
아아악! 이건 아니지! 제 머리를 쥐어잡으며 정재현은 소리쳤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도영이는 가볍게 웃어넘겼다.
"어째 너는 표정이 밝다?"
"내가? 아닌데."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정재현은 의심하는 눈으로 김도영을 째려보았다. 그에 김도영은 어깨를 으쓱거리고 만다. 그 둘을 뒤에서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같이 하교하는 건 처음이었다. 이 조합은 다름 아닌 선생님의 말이 끝나고 창밖을 가만히 바라보던 도영의 말에서 비롯되었다. 바래다줄게. 도영이의 그 말은 교실 밖을 나서려던 내 걸음을 멈추기 충분했다. 원래 집 방향이 같은 정재현도 함께 가게 된 건 예상 밖이었지만.
"조심히 가."
"너도 잘 들어가."
둘의 대화는 간결했다. 그 모습이 이상하다거나 어색해 보이진 않는다. 김시민 너도 잘 가. 정재현은 제 왼손을 높이 들며 좌우로 방방 흔들어댔다. 참 해맑다. 해사한 웃음이 녀석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정재현의 뒷모습만 가만히 바라보다 몸을 틀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무슨 할 말 없나, 아 너무 어색한데. 영화를 보던 날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때도 걷자던 네 말에 이렇게 둘이 걸었었는데. 벌써 그게 추억이 되었나 보다.
무슨 생각해? 앞만 보고 걷던 도영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나는 그에 답했다. 별로? 짧게 떨어진 내 목소리에 녀석은 작게 웃었다.
"있잖아 도영아."
"응?"
"… 음, 아니다."
아까 낮에 있었던 일을 말할까 싶었지만 도영이는 모르는 게 낫겠다 싶어 다시 입을 꾹 닫았다. 그런 내가 이상했는지 동영이는 궁금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계속해서 뭔데? 하며 물음표를 퍼부었다. 그에 나는 괜히 시선을 피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태용이 말이야. 내 입에서 나온 태용이의 이름에 밝았던 네 얼굴이 아주 잠깐 굳었던 것 같다.
"아까 낮에 태용이랑 얘기했는데."
"… 무슨 얘기?"
"그냥 뭐…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줄 알았는데 오히려 태용이가 먼저 사과를 하더라. 피해서 미안하다고."
"그게 끝이야?"
"응 그게 끝. 왜? 뭐 더 있어?"
아니 없어. 고개를 가로로 젓는 동영이의 모습에 입술을 쭉 내밀었다. 아 뭐야 뭐라도 있는 줄 알았네. 싱겁긴. 내 말에 바람 빠진 웃음을 짓던 도영이의 얼굴이 슬퍼 보인다. 괜찮은 건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대놓고 묻지 못하는 소심한 내게 핀잔을 퍼부었다.
어니언's
안녕하세요 독자님들 저번 댓글 하나 하나 읽으며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항상 감사합니다 독자님들 T^T
다음은 태용편으로 따로 써서 올려볼까 봐요. 딱 태용편까지만 슬프고 다음 편부터는 다시 스트로니하게!
오늘 나온 도영이 태일이 태용이의 학교2017 다들 들으셨겠죠?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진짜 반복 재생 중입니다ㅠㅠ. (앓는다)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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