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angle
01
드르륵, 드르륵. 캐리어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를 배경으로 삼으며 걷고 또 걸었다. 아니 대체 어디 있다는 거야. 나만 안 보여?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긴다. 왼손에 쥔 종이를 대충 주머니에 꾸겨 넣었다. 지나가는 사람 있으면 물어봐야지. 고개를 두리번 거렸는데 어떻게 지나가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까…
인적이 드문 길 한가운데서 혼자 덩그러니 있는 기분이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그때였다.
"김시민 맞아요?"
내 눈앞에 서 있는 곱게 생긴 이 남자는 또 누군가. 누구지? 대뜸 날 보고하는 말이 김시민 맞냐니. 예, 제가 김시민인데요?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앞에 서 있던 남자는 내 옆에 놓인 캐리어의 손잡이를 잡는다. 지금 뭐 하세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자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나를 돌아본 남자는 말했다. 하숙집에서 왔어요. 간결한 어조였다. 왜 오셨는데요? 하는 내 물음에 남자는 또 짧게 답했다. 그 시선에 약간 귀찮음이 섞여있는 듯했다.
"누가 너무 늦길래요."
지금 말하는 누구가 나 말하는 거 맞지? 악의는 없는 듯한 표정으로 앞에 서 있던 남자는 묵묵히 캐리어를 끌었다.
"네가 시민이구나? 오는데 힘들진 않았고?"
"아, 네. 안 힘들었어요!"
눈 깜빡할 사이 하숙집에 도착했고 문을 연 남자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남자가 사라지자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나를 맞이해주셨다. 주인아주머니보다는 엄마 친구라고 불러야 되나? 학교 가는 통학이 너무 불편해 엄마한테 1년 동안 애교 아닌 애교를 부려댔고 그 덕분에 나는 왕복 3시간이 넘는 집에서 나올 수 있었다. 3시간이 뭐가 머냐며 엄마는 제 의지를 굽히지 않았지만 결과는 내 승리였다. 자취는 아니지만 하숙집이 어디야? 버스 하나만 타면 바로 학굔데, 지하철 신세에서 벗어난 게 어디야…. 집은 생각보다 더 넓고 깨끗했다. 2층으로 된 주택, 결혼하면 이런 집에서 살고 싶었는데.
"시민이 방은 2층 계단 옆에 있는 방이고, 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저녁 먹기 전까지 좀 쉬어."
"네. 감사합니다."
아주머니도 생각보다 더 상냥하셨다.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낑낑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2층에 올라가 보니 계단 옆에 방 하나가 있고 그 방을 마주한 채 또 하나의 문이 었었다. 그리고 가운데에는 화장실까지… 드라마에서 종종 나오는 집 구조와 비슷했다. 나는 대충 집 구경을 끝내곤 방으로 들어갔다. 허얼 너무 좋잖아? 적당한 방 크기에 침대와 책상 그리고 옷장 등등 다 너무 예쁘게 꾸며주신 거 같았다. 우리 집보다 훨씬 더 좋은 방의 모습에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엄마 미안. 집이 너무 좋은 걸 어떡해……. 침대로 달려가 그대로 점프해버렸다. 푹신한 느낌에 금방이라도 잠이 쏟아질 거 같았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저녁 먹기 전까진 좀 쉬라고 하셨으니까 좀 잘까?
"여보세요?"
했는데, 베개 옆에 놓인 핸드폰이 밝은 빛을 내뿜으며 울리는 것이 아닌가.
ㅡ 왜 내 톡 안 봐!!!
"야 좀 진정…… 귀 떨어지겠다."
ㅡ 하숙집은, 도착했고?
"좀 전에."
집에서 출발하고 핸드폰을 킬 정신이 없었나 보다. 전화를 받자마자 유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때렸다. 아오 하여튼 나유타 목소리 하나는 세계 최고네. 도착했으면 이 오빠한테 톡 한 번 날렸어야지. 오빠는 무슨? 나유타는 그러니까 대학교에서 만난 친구인데 본래 성격이 소심하고 낯도 가리는 나와 달리 나유타는 사교성도 좋고 애교도 많았다. 자칫 잘못하면 아싸가 될 뻔한 나를 구해준 구세주기도 하고. 이런 애가 왜 나랑 다닐까 궁금해서 단지 순수한 마음으로 물어봤던 적이 있는데 그때 녀석은 해맑은 표정으로 너 친구 없잖아? 라며 내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ㅡ 이제 우리 이웃이네.
"뭐?"
ㅡ 몰랐어? 나도 해찬동 살잖아.
몰랐으면 좀 실망인데. 장난기 섞인 나유타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니까 네가 해찬동에 산다고? 왜? 대체 왜? 원래 나유타 집이 해찬동이었나?
ㅡ 뭔데 그 목소리?
"어? 뭐가?"
ㅡ 되게 싫어하는 눈치다 너?
"싫어하다니? 내가? 에이~ 싫기는 너무 좋아서 그러지."
아닌 거 같은데? 나유타는 의심 가득한 목소리로 집요하게 물었다. 하지만 곧 저녁 먹으라는 아주머니의 목소리에 나유타와의 통화는 끝이 났다.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나는 끊어진 핸드폰을 가만히 바라보다 침대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곤 방을 나왔다. 계단으로 내려가는데 여기서부터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겼다. 부엌으로 내려가니 아주머니는 정말 식탁을 휘어놓을 기세로 여러 가지 음식을 내놓으셨다.
"먹다가 부족하면 말해~ 밥 많이 있어."
산처럼 쌓인 밥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들리는 아주머니의 목소리에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 정도 양이면 먹다가 죽어도 모를 거 같은데…. 아주머니는 밖에서 저녁을 먹고 오셨다며 내게 얼른 먹으라며 손짓하셨다. 민형아 너도 얼른 와서 밥 먹어! 아주머니는 2층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셨다. 터벅- 얼마 안 가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고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아까 그 남자애였다.
"아, 시민이랑 아까 봤지?"
내 맞은 편에 앉은 남자는 대충 고개를 끄덕거린다. 아주머니의 말씀에 나도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민아 얘는 민형이라고 우리 집 아들, 너 누나한테 인사는 했어?"
네? 누나요? 하마터면 씹고 있던 밥알이 목에 턱 걸릴 뻔했다. 어쩐지 조금 앳되 보이더라. 아주머니는 컵에 물을 따르시며 말씀하셨다. 인사는 천천히들 해~ 아, 시민아 설거지는 하지 말고 그대로 놔둬 아줌마가 할게. 그 말을 끝으로 아주머니는 어안이 벙벙한 나를 놔두고 그대로 사라지셨다. 아주머니 그렇게 가시면… 안 돼요…… 안 되는데….
"안녕하세요."
"…?"
한참 동안 어색하고 불편한 기류가 흐르고 있는데 그 정적을 깬 건 다름 아닌 그 남자애 아니 민형이었다. 빈 그릇을 싱크대에 갖다 두는 이민형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밥 진짜 빨리 먹나 보네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전화할 때 원래 그렇게 시끄러워요?"
"… 응?"
"친구분이 목소리가 크신 가봐요."
저거 나 저격한 거 맞지? 아니 나랑 나유타를 같이 공격한 건가? 이민형은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툭 던지고 그렇게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나 방금 뭐…… 누구랑 있었던 거지? 괜히 먹지도 않을 가지볶음을 젓가락으로 뒤적거렸다.
Triangle
"하숙집 어때?"
내 손에 든 전공 책으로 맞고 싶지 않으면 그 입 닥쳐라…. 휴학하겠다고 술에 취해 큰 소리를 떵떵 지르던 내 모습이 아직도 이렇게 생생하게 떠오른다. 휴학은 무슨, 과제 때문에 바빠 죽겠구만 시바… 게다가 하숙집 아들은 또 어떻고! 으아악!! 가던 걸음을 멈추고 벽에다 머리를 콩콩 박아댔다. 그에 나유타는 오른손 검지를 제 머리에 다 대고 빙빙 돌렸다. 너 돌았어? 또는 미쳤어? 이 뜻이었다.
"야 진짜 말도 마. 하숙집에 내가 고딩 하나 있다 그랬나?"
"어어, 그랬지. 왜?"
왜 못생겼어? 덧붙여지는 나유타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못생기긴 무슨, 생긴 건 진짜 잘 생겼는데.
"잘 생겼는데 뭐?"
"아아 모르겠다 나도."
왜 뭔데, 걔가 너한테 뭐라 그랬어? 옆에서 자꾸만 물어대는 나유타의 머리통을 손으로 밀었다. 빈자리에 앉으면서도 끊임없는 나유타의 질문에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성격이 이상한 거 같긴 한데, 시끄럽게 통화했던 내 잘못도 있고 뭐… 아직 걔랑 친한 사이도 아닌데, 어제 한 마디 했다고 이상한 놈 취급하기도 그렇고. 뭐 됐다. 책상에 박고 있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조잘거리는 나유타의 입을 때리는 시늉을 했다. 그렇게 한참을 웃고 떠들고 있었는데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온 낯익은 얼굴 하나가 내 시야에 들어찬다.
"…."
김도영이었다.
내 옆에 서 있던 나유타는 힐끔거리며 내 눈치를 봤다. 헤어진 지 5개월이 지났지만 너와의 만남은 내게 여전히 불편한 일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김도영의 두 눈이 가늘게 떨린다. 나는 그 시선을 먼저 피해버렸다. 나는 아직도 네가 불편하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일 거고.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모른 척 지나쳤다. 아까부터 옆에서 조잘대던 나유타는 답지 않게 말을 아꼈다. 왜 이래? 장난스럽게 팔꿈치로 나유타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그제야 나유타는 굳었던 얼굴을 풀며 끊었던 말을 다시 이어갔다.
"아 오늘 상환 선배가 모이라고 한 거 안 잊었지?"
"왜?"
"개강하고 한 번 모인다고 했잖아."
아 그랬었나? 그러고 보니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심드렁한 내 대답에 그냥 자라며 나유타는 내 머리를 꾹 눌러버렸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고 어느새 모이기로 한 저녁 8시가 되었다. 과파티에 내가 이 두 다리로 직접 올 줄이야. 누가 상상은 했을까? 학교 앞 고깃집은 어느새 우리 과 학생들로 꽉 차있었다. 근데 나유타 얘는 어디 있는 거야? 신발을 벗으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찾아도 보이지 않은 놈의 얼굴에 나는 한숨을 내뱉었다. 이 자식 오기만 해봐라. 대충 테이블 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 뭐야? 시민이 오랜만이네? 테이블 중앙에 앉은 다영 선배가 콧소리를 끼얹은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수업에서 매일 보잖아요. 라고 말하려다 그냥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모임이나 파티는 오랜만이었으니까. 과에 친한 사람이 별로 없다 보니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나 혼자 이방인처럼 가만히 앉아있었다.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나유타에게 톡을 날렸다. 왜 안 와 시X 안 오기만 해봐 이 XX야 따위의 욕이 절반이었다. 1은 금방 사라졌고 거의 도착이라는 나유타의 톡을 읽씹해버렸다. 거의 도착은 무슨 지금 출발했겠네. 나유타가 하는 거짓말은 익숙했다. 김이 빠진 사이다를 한 모금 들이켰다. 밍밍해. 사이다 옆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속이 답답했다.
마시지도 않을 술잔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고 있을 때 즈음 한 인물의 등장으로 안 그래도 떠들썩했던 분위기가 한층 더 시끄러워진다.
"안녕하세요."
정재현. 그래 정재현의 등장으로 선배들은 물론이거니 동기들과 후배 너 나 할 거 없이 표정이 밝아졌다. 속 보이는 사람들. 상환 선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손수 자기 옆자리에 정재현을 끌고 와 앉힌다. 휘어진 눈가에 깊게 주름이 패인다. 분명 오늘도 정재현이 쏘겠구나 생각했다. 혀를 쯧쯧 찼다. 정재현이라 하면 잘 생겼지 돈 많지 거기다 과 수석까지 차지하고 있는 놈이었다. 누구는 학비 버느라 죽어나가고 있는데 말이야. 그렇게 재미없고 불편하기만 한 과 파티가 한창 이어가고 있는데 또 한 명의 얼굴이 가게 안으로 얼굴을 비췄다. 김도영이었다. 어? 왔냐? 내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주혁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에 김도영은 웃으며 그쪽으로 가 앉았다. 하늘색 셔츠 달랑 한 장이라니 쟨 춥지도 않나.
"…."
가방을 한 쪽 옆에 놔두고 고개를 돌리는 찰나에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이번에도 먼저 시선을 피한 건 내 쪽이었다. 슬쩍 다시 쳐다본 김도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옆에 앉은 남주혁과 장난을 치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 기분은 뭐냔 말이야 꼭 찝찝한 게 진 것 같은 기분. 테이블에 놓인 술잔을 들었다. 한 잔이라도 마셔야 속이 풀릴 거 같은 마음에 술잔을 입에 갖다 대려는데 긴 팔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마시지 마."
김도영 너였다.
어니언's
안녕하세요 여러분들 생각보다 일찍 왔죠? 첫 편은 사실 조금 쓴 게 있었거든요.
어떻게 읽어주실까 걱정도 되면서 그르네요 모쪼록 재미있게 읽어주세용 :-)
연재 기간이 조금 느려질 수도 있어요. 면접 준비를 해야 되기 때문에. 흑ㅎ흐어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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