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열
05
야, 너 그 소식 들었어? 뭐 말이야. 임영민 옆에 여고 애랑 사귄대. 근데 그게 왜? 왜냐니! 김여주는 어떡하냐 그럼? 아 김여주는 생각했다. 화장실에는 정말 좆같은 기억밖에 남지 않구나, 하고.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이 화장실에서 임영민과 키스를 나누고 손가락을 더듬었는데. 이번에 들리는 소식이라는 건 듣고싶지도 알고싶지도 않았던 임영민에 관한 소식이라는 것이. 영민이 사귀든 말든 여주와는 무관한 얘기였다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으며 어떤 감정도 솟구치지 않았다. 단순히 저 치정극에 휘말린 게 본인임을 깨닫고 나서야 밀려오는 짜증에. 문을 열고 나가면 그제야 입을 잘못 놀린 걸 안 여자애 둘이 급히 화장실을 나간다. 김여주는 손을 씻고 세면대에 침을 뱉었다. 화장실을 나가면 자신의 이름이 들리면서 무성한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있을게 뻔하니까.
손을 씻고 두어 번 물기를 털고서야 화장실을 나선 여주를 잡아챈 건 아까 전에 만났던 그 여자애 둘이었다. 한껏 미안한 표정을 입에 다물고 눈치를 보는 게 좀 귀엽긴 했는데, 그렇다고 김여주 제 기분이 좋아질 건 아니었다. 그 뜨거운 손목을 잡았다는 것부터 김여주에겐 아웃이라 아무리 귀여운 똥강아지처럼 굴어도 용서해 줄 마음은 없었다.
"저기, 여주야 …"
"혹시 사과하려는 생각이니."
"어? 으응. 아깐 우리가 너무 말을 막 한 것 같아서 …"
"사과는 잘 하네. 근데 미안 용서 해 줄 마음이 없어서."
평소처럼 웃는 낯짝으로 저 따위의 말을 뱉어낸 김여주는 마지막으로 손목에 올려진 뜨거운 열기를 떼어냈다. 기분이 한껏 나빠진다. 푹푹 찌는 이 더위에 불쾌지수는 상승하고 뭘 하든지 간에 더러운 눈길로 훑어보는 사람들이 생각나면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런 식으로 남에게 회자 되는 건 싫은데, 여기서 벗어나려면 임영민과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사실을 김여주는 잘 알고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긋지긋한 일상을 수십 번이나 반복한 건 아직도 김여주는 제 마음을 잘 모른다는 사실이겠지.
"아 여주야."
생글생글거리는 얼굴로 멀리서 여주를 알아본 영민이 큰 소리로 여주를 불렀다. 복도에 있는 모든 아이들의 이목이 찰나에 집중되었고 김여주의 속은 퍼렇게 물들었다. 그 찰나의 순간이 싫은 건데. 차라리 뭘 하든지 간에 간섭을 받는 거라면 모든 걸 놓고 살 텐데. 사람들의 눈이란 꽤 그런 거였고 상당히 김여주를 옥죄어왔다. 영민을 한 번 흘깃 본 여주는 잽싸게 교실로 들어섰고 영문을 알 리 없는 영민의 낯이 굳었다.
김여주는 본인의 마음은 몰랐지만 제 위치는 꿰고있는 편이었다. 본인은 성격도 예민하여 아이들이 좋아하는 편은 못 되고 비실대며 공부만 죽어라 하는 범생이로써, 임영민이 아니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다. 임영민에 의해서 수면 위로 올라온 한 마리의 열대어 같은 느낌.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여주는 무의식적으로 영민을 동경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참했다. 임영민은 늘 제게 죽고 못사는데 …
"김여주"
"어깨 잡지 마. 아파."
"… 왜 무시해."
내가 뭘 … 말을 흐렸다. 무시한 게 뻔했고 어떻게 봐도 무시한 거였다.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여주가 의심스러웠다. 이런 애가 아닌데, 늘 영민의 앞에서는 세상물정 모르는 공주같이 굴던 애였는데. 언제 이렇게 의기소침해져서는 애처럼 굴까. 임영민은 김여주가 새침하게 굴든 애처럼 굴든 평범한 여자애처럼 굴든 뭐든 좋았다. 그게 김여주였고 김여주는 자기가 없으면 안 되니까. 어떻게 보면, 임영민은 김여주를 은연 중에 길들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의기소침해진 여주의 볼을 손가락으로 두 번 치고는 여주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다. 왜 그럴까 우리 여주.
"영민아 왜 니 일에는 내가 꼬리표처럼 붙어다녀?"
"무슨 말이야 그게."
"니가 여자친구가 있는데 왜 그때마다 내 이름이 오르내려?"
"또 어디서 시덥잖은 소문 들었구나 여주야."
"너무, 너무 힘들고 싫어."
인상을 찌푸린 여주는 제 귓바퀴를 만지작대는 영민의 손을 떼어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남들에게 김여주는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이 너무 싫었다. 그 사람들에게 대단한 임영민은 자기가 없으면 죽어버릴 텐데, 이 먹이사슬의 위치는 좀 삐걱대고 있다. 영민이 살풋 웃음을 짓는다. 아- 김여주는 정말 날 죽이려드는 걸까, 아니면 하늘에서 나를 벌하러 온 악마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김여주는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임영민은. 그래, 흑심을 품고 있었고 사심을 갖고있었다. 걔는 언제나 김여주를 그런 눈으로 바라봤기에 김여주가 이럴 때마다 가만히 등을 토닥여 주는 것밖에 할 줄 몰랐다.
"미안 여주야, 그런 일 없게 내가 했어야 했는데."
"속 아파 영민아. 벌써 일어난 일이잖아."
"미안해, 미안해 응?"
"모르겠어. 당분간 말 안 할래."
툴툴대는 말도 잠깐, 무심한 눈으로 영민을 보던 시선을 책상으로 옮겨 책을 꺼내는 여주였다. 철저히 무시하기로 했다는 뜻이다. 이제 니가 뭘 했든 간에 당분간 말도 안 할 테니 두고봐라, 라는 의미의. 영민의 얼굴이 어두워졌지만 그것도 잠깐. 임영민은 어찌 됐든 간에 여주에게 화를 낼 입장도, 화를 내어서도 안 되니 말이다. 알겠어. 여주의 어깨를 두드리곤 임영민이 일어섰다. 김여주가 앞니로 아랫입술을 물었다. 넌 아무렇지 않지 그래. 여주의 심사가 뒤틀리면 둘의 사이는 틀어진다. 몇 년 만의 일방적인 다툼이었다.
*
등하교 때를 제외하고선 영민과 여주가 붙어있는 날을 보지 못한지도 언 일주일이 넘었다. 심지어 식사 시간 마저도 영민과 밥을 먹던 여주는 빠르게 식판을 비워내고 먼저 일어나기 일쑤였으니까. 김여주를 귀여워 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어야지, 영문도 모른 채로 한껏 무시를 받던 영민의 속도 그리 좋진 못했다. 일단 임영민 역시 여주와 마찬가지로 태초부터 그렇게 성질머리가 좋지는 않았으므로 여주와 떨어져 지낸 일주일 동안의 태도는 그리 좋지 못했다고 가히 말 할 수 있겠다. 아이들 사이에서도 영민과 여주의 뒤틀린 사이에 대해서는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 누구도 임영민 앞에서 김여주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여주에게 먼저 시비를 거는 일도 없었다. 임영민과 김여주가 만난지 칠 년만의 첫 공허함이었다.
"야 영민아 근데 너 그거 사실임?"
"뭐가?"
"여고에 누구랑 사귄다던데. 새끼 깨진지 얼마 됐다고."
"아, 그거."
"박희진이 뭐라고 하진 않든?"
이어폰을 뚫고 들어오는 웃음소리가 싫었다. 거칠게 이어폰을 귀에서 뜯어낸 여주는 한껏 울상인 채로 책을 붙들고있었다. 아무리 볼륨을 높여도 임영민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옆 짝궁이 여주의 눈치를 한 번 보면 김여주는 그제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책장을 넘겼다.
"걔가 나한테 뭐라고 왜 해. 벌써 헤어졌는데."
"글치? 그래서 진짜 사귀어?"
"아니 난 여고에 아는 애 없는데."
"아 뭐야. 또 헛소문? 잘생기니까 이런 소문도 쉽게쉽게 나고 너도 힘들겠다 야."
하하하하. 반 애들의 절반이 호탕하게 웃었다. 아니 김여주를 제외한 모든 애들이 웃었다. 임영민의 눈꼬리도 휘어졌으며 둥근 입도 크게 벌려졌다. 즐겁지 못한 건 김여주 혼자였다. 뭐가 그렇게 재밌다고들. 그런데, 김여주는, 나는 지금 도대체 왜 화가 났더라.
급작스럽게 의구심이 든 여주가 느릿하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물병을 꺼내들고 교실 밖으로 몸을 이끌었다. 조금 구진 타이밍이었다. 임영민을 포함한 모든 애들의 시선은 여주에게로 닿았고 신경 쓸 새도 없는 여주는 평소와 같이 식수대로 향했다. 교실 내부와는 다른 공기가 짓누른 숨을 트이게 한다. 여주가 나가고서야 다시 분위기가 정리된 교실에선 영민이 뒤따라 나왔다. 표정이 영 좋지못한 게 화가 난 상태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여주야."
"어 …"
"솔직히 말 해 여주야."
"뭐가."
"왜 기분이 안 좋은지, 그것 때문에 기분 안 좋은 거 아니잖아."
"…"
식수대에서 받은 물은 이미 물병 입구 밖으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여주의 마른 손이 축축하게 젖어가고있었다. 그걸 본 영민이 여주의 손을 잡아 물병을 꺼내면 영민의 손도 물기에 젖어 번들거린다. 축축했지만 기분나쁜 축축함은 아니었다. 여주의 눈이 천천히 영민에게로 닿고서야 여주가 크게 숨을 쉬었다. 한숨과도 비슷한 거다.
"영민아, 넌 나뿐이지?"
"… 그거, 때문에 화가 났었어?"
"말 돌리지 마 임영민."
영민의 얼굴이 활짝 핀다. 웃음을 걸고 여주에게로 다가서면 여주는 무심한 얼굴로 영민을 올려다봤다. 걔에게 물러섬이란 없었다. 늘 다가서면 다가서는대로 물러나면 물러나는대로 먼저 도망치는 법이 없었다. 늘 같은 자리에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그렇게. 손을 여주의 목으로 갖다댄 영민이 천천히 뒷목을 쓸어내렸다. 일종의 신호 같은 것이다. 여주가 불안에 떨 때마다 괜찮다는 말 대신에 하는 임영민의 행동. 개를 기르는 듯했다.
"난 너뿐이고, 나는 너 없으면 죽어버려."
"그게, 그 말이 너무 필요했어."
"내가 그걸 몰랐네."
"너는 내가 없으면 안 되는데 왜 그렇게 잘 살아?"
여주는 질투라는 걸 느꼈다. 난생 처음 가장 친한 친구인 영민에게. 자신과는 달리 어른들에겐 싹싹하고 친구들에겐 늘 인기가 많아 사건의 중심이 되는. 일종의 치기 어린 어린애의 마음이었다. 영민아 …. 응 여주야. 넌 나만 옆에 있어야 해. 왜? 왜냐니,… 너 내 거잖아. 그거 되게 위험한 말인데 여주야. 우리 친구잖아 영원한 친구. … 그래 여주야. 그러니까 나만 보고 나만 옆에 둬. 그렇게 할게 미안해. 응….
축축하게 젖은 임영민의 손이 어느새 여주의 등허리를 연신 쓸어내리고 있었다. 둘은 안은 모양새였고 종은 울린지 오래였다. 영민의 품에 얼굴을 박은 여주의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영민의 입꼬리는 씰룩거렸고 간지럼을 타는 모양이었다. 영민의 목을 둘러싼 여주의 팔은 둥글게 말아섰고 호흡은 느리게,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눈은 한 번씩 껌뻑였고 여주의 등을 쓸어내리는 영민의 손은 멈출 줄을 몰랐다. 흡사 연인의 모습이었다.
"영민아 … 있잖아"
"말 해 여주야."
"너는 나 좋아하면 안 돼. 알겠지."
"…"
"왜 말이 없어"
"그렇게 할게."
영민의 턱이 김여주의 머리통 위에 얹어졌고 둘은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민의 눈은 이물질이 가득한 음료처럼 소용돌이쳤으나 여주의 눈은 이물감이 바닥 저 아래로 가라앉았다. 둘의 차이는 거대한 것이다. 조금이라도 엇물린다면 이 관계는 금세 깨질 것처럼 굴었지만 엇물리지 않았다. 그만큼 둘은 서로를 …
안녕하세요 오애오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는 제 글을 자주 서치하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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