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환아. 정신은 꿈 속에 있는 것 처럼 몽롱한데, 이상하게 온 몸의 감각은 살아나는 기분 알아?
있지, 그거 정말 기묘한 기분이야.
내가 존재하기는 하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데, 이상하게 온 몸의 감각이 곤두서는 거야. 마치 아득해진 정신을 대신해서 내 몸이 내가 살아있다, 하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 동원해서 알리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내가 저항 할 틈도 없이, 그 순간 나에게 가해지는 자극을 온 감각을 통해 하나하나, 온전하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거야.
나에게 '거부'라는 선택지는 없는 것처럼.
재환아, 좋아해
B
누군가 지난 고등학교 3년을 뒤돌아 봤을 때, 가장 기억나는 순간이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마 망설임 없이 말할 거야. 뒷통수에 축구공을 맞은 직후일거라고. 아마 누군가는 웃겠지? 고등학교 3년을 통틀어 가장 기억나는 순간이 겨우 그런 순간이었냐고. 그럼 나는 아마 그 사람을 따라 웃으면서, 정말 아팠거든요, 하고 대충 둘러 댈거야.
아니, 그렇잖아. 솔직히 어떻게 말하겠어.
뒷통수에 축구공을 맞고 아득해진 정신을 애써 붙잡던 그 순간이라고. 어지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를 네가 붙잡았을 때라고 말할 순 없잖아.
엄청 조잡해. 그리고 심지어 약간 변태같아 보이기까지 해.
근데 있지,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어.
사실은 말야, 비밀로 해 두고 싶어서야.
첫 눈에 반한 순간 느꼈던, 그 아찔하도록 강렬했던 감각은 나만 알고싶거든.
*
재환아. 너는 기억해?
네가 내 어깨를 붙잡고 내 몸을 돌려세웠던 그 순간 말이야.
어디서부터 뛰어온건지, 잔뜩 숨을 몰아 쉬던 너는 당황스러움과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우물쭈물거리다 나를 와락 끌어안았었어. 그리고 어설프게 내 뒷통수를 쓰다듬으며 나를 달랬었지.
너는 아마 평생 모를거야.
너의 그 어설픈 행동이 나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
네가 내 어깨를 잡았을 때 쯤, 나는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었어. 막 긴 잠에서 깬 것 마냥 머릿속은 몽롱했고, 눈 앞은 온통 뿌옇게 변해 있었어.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세상이 온통 뿌예서 이 사람이 누구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겠는거야. 애써 흐릿한 시야를 붙잡으려 몇 번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갑자기 온 몸의 촉각과 후각이 살아나는 기분이었어.
살랑이는 바람에 흔들리는 내 뺨의 솜털이 느껴졌고, 그 다음으로는 내 어깨를 붙잡고 있는 커다란 손바닥의 온기가 느껴졌어. 언뜻 느껴졌던 손의 온도가 생각보다 뜨겁다는 걸 인지하게 될 즈음에는 은은한 아카시아 꽃 향기와 함께 훅 끼쳐오는 보송한 섬유유연제 향기를 맡을 수 있었어. 난 있지, 살면서 처음 알았어. 은은하고 보송보송한, 그런 섬세한 향기가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걸 말야. 정말 향기에 취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했어.
지금 생각해도 그렇지만, 그건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어. 내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극이었어. 평소라면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을 살랑이는 바람이, 코 끝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향기가 그렇게 위험한 것일 줄은 그 전까지는 꿈에도 몰랐었어. 정말 처음이었어. 자극이 물 밀듯이 강렬하게 밀려 들어온다는 느낌을 받은 건 말야.
아찔한 감각에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나는 흐릿한 시야를 바로잡기 위해 몇 번 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어.
그러니까 안개처럼 흐리던 시야가 차츰 또렷해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선명해진 시야에서 나는 너를 봤어.
눈부시게 푸른 하늘과 뽀얀 구름, 살랑이는 바람에 흔들리는 살짝 젖은 네 검은 머리카락, 잔뜩 상기 되어 발갛게 달아오른 네 분홍색 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네 갈색 눈동자.
재환아,
그건 정말 마법같은 순간이었어.
재환아, 좋아해
"어우, 어떻게 하냐…. 미안해, 진짜 미안…."
아득히 사라졌던 정신이 돌아왔던건, 네 목소리 때문이었어.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너에게 안겨있었고, 너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한 목소리로 나에게 사과를 하고 있었어. 어설프게 내 뒷통수를 쓰다듬으면서. 지금도 기억나, 그 날 내 머리를 쓰다듬던 네 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조심 내 머리를 쓰다듬던 네 손 말이야.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파르르 떨리며 내 머리를 조심히 쓰다듬는데, 정말이지 어설프고 서투르기 짝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설레더라. 그래서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손길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어.
웃기지. 처음 만난 남자의 손길이 계속되기를 바랬다니.
"여주야!! 김여주!! 괜찮아?"
"와, 김여주, 소리 대박이었는데 너 괜찮아?"
"여주 보건실 가야하는 거 아냐?"
친구들의 걱정섞인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할 때 쯤, 너는 나를 끌어안던 손을 풀고는 주춤거리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어. 사실 좀 아쉬웠어. 보송보송한 섬유유연제 향기가, 따뜻했던 온기가 한 순간에 사라지니까 뭔가 허전하더라구.
근데 있지, 그것도 나쁘지는 않더라.
![[워너원/김재환] 재환아, 좋아해 B | 인스티즈](http://file2.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7/08/15/20/519f78fdebfb1893b05effbf42038436.gif)
"…미, 미안."
안겨있을 때는 잘 보이지 않던 네 얼굴이 잘 보였거든.
너는 새빨개진 얼굴로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내 눈을 마주보며 사과했어. 양 손은 공손히 모은채로 말이야. 대꾸없는 나를 쳐다보며 어색하게 웃던 네가 다시 한 번 눈을 도르륵 굴릴 때 쯤, 갑자기 네가 억, 하는 짧은 신음소리를 내며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어.
갑자기 훅 들어온 네 얼굴에 깜짝 놀라 눈을 깜빡거리고 있는데, 네가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면서 뒤를 돌아보더라. 아이씨, 왜 때려, 하는 너의 목소리에 네가 맞았다는 사실을 깨닳았을 무렵, 나는 네 뒤에 서 있던 다니엘과 눈이 마주쳤었어. 근데 나랑 눈이 마주치니까 다니엘이 눈을 땡그랗게 뜨더라. 그리고는 잔뜩 당황한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널 쳐다보는 거야.
"미친 새끼야. 내가 공 잘 보고 차랬잖아."
지금 생각해도 다니엘은 엄청 놀란 표정이었어.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아무튼 네가 엄청 당황한 표정으로 다니엘을 쳐다보는 동안, 나도 정말 당황했었어. 갑자기 분위기가 심각해지니까 무섭기도 했고.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는 미묘한 상황에서 먼저 입을 연 건 다니엘이었어.
"머리 괜찮아? 진짜 미안하다."
"…어, 어, 맞아. 진짜 미안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는 눈동자로 다니엘을 보던 너는 다니엘의 사과에 당황한 표정으로 나와 다니엘을 번갈아 쳐다봤고, 나에게 또 한 번 사과했어. 처음에 나는 상황파악이 되지 않아서 눈을 깜빡거리고만 있었는데, 네 표정이 갈수록 시무룩해지는 거야. 안그래도 쳐진 눈꼬리는 더 쳐지고, 나를 쳐다보던 눈동자는 어느새 아래를 쳐다보고 있고. 딱 사고치고 혼나니까 시무룩해진 강아지 한마리 같더라.
"어, 아냐, 괜찮아. 난 멀쩡해."
"……."
"운동장을 같이 쓰는데 그럴 수도 있지, 난 괜찮아."
그래서 나는 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웃었어. 워낙에 돌머리라 괜찮다고, 하나도 안 아프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몇 번 말을 덧붙이니까 네 표정이 점점 살아나는데, 아, 그거 진짜 귀여웠어. 온 몸으로 나 시무룩해요, 라고 말하던 네가 어느새 초롱초롱해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데, 진짜 뒤통수의 통증이 사라지는 기분이었어.
*
미안하고 고맙다며 몇 번 허리 숙여 인사 하는 너희를 서둘러 돌려보내니까 체육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리더라. 나는 괜찮냐며 내 주변으로 몰려든 친구들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체육선생님을 도와 뒷정리를 했어. 다친 애가 왜 이런 걸 하냐며 도와주는 고마운 친구들과 함께 뒷정리를 하고 교실에 들어가려는데, 교실 뒷문 앞에 네가 서 있더라. 여자 반 앞에서 서있는게 조금 부끄러웠던 건지, 너는 어색하게 바닥만 보고 있었어.
너는 몰랐겠지만, 나 그 때 엄청 고민했었다?
나를 찾아 온 건가, 그렇다면 내가 아는 척을 해야하는 걸까, 근데 나를 보러 온게 아니면 어쩌지.
어떻게 해야할지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만 하고 있는데, 바닥만 쳐다보고 있던 네가 마법처럼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어.
네 눈이 나와 마주치는데,
정말 머리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었어.
나라는 걸 확인하고 씨익 웃은 네가 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데, 순간 정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더라. 홀린 것처럼 네가 걸어오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는데,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온 네가 내 손에 뭔가를 쥐어줬어. 그리고 유치원생에게 말하는 것처럼 내 눈을 보며 또박또박 말하더라.
"맛있게 먹어."
아, 그 표정 아직도 생각나. 너는 마치 자기가 할 일은 다 했다는 것처럼 뿌듯한 얼굴이었어. 입가에 미소를 띄운채 나를 한번 더 빤히 쳐다본 너는 나에게 손을 흔들더니 7반쪽으로 걸어갔어.
"와, 너한테 이거 주러 왔나봐."
"근데 진짜 주고만 가네. 완전 바람같다."
네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쳐다보던 내가 정신을 차린건 키득거리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였어.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키득거리는 친구들을 따라 대충 웃으며 교실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더라. 그제서야 나는 내 손에 들린 커피를 발견했어. 네가 손으로 들고 있어서인지, 여전히 따듯한 온기를 가지고 있는 커피에는 컴퓨터 싸인펜으로 눌러쓴 듯 한 글씨가 적힌 노란색 포스트잇이 하나 붙여져 있었어.
아, 그 날 그 포스트잇에 적혀있던 삐뚤빼뚤한 네 글자는 절대 잊지 못할거야.
'아프지 마'
재환아,
내 친구들이 틀렸어.
너는 바람이 아니라, 태풍이었어.
-
안녕하세요, 누네띠네입니다!
제가 손이 느린 편인데 여러분을 빨리 만나려고 정말 열심히 썼어요 8ㅁ8
그래서 글이 약간 매끄럽지 않을 수도 있습니댜 8ㅅ8
천천히 다듬을테니 나중에도 또 보러오시면 됩니당 (찡긋
첫 글인데 이렇게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ㅠㅠ
저번화부터 달려주신 분들 너무너무 감사드려요!
댓글 달아주신 분들은 더더 감사드려요!! *u_u*
암호닉 완전 환영합니다!
마구마구 들이 대 주세요!
재좋 읽어주신 모든 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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