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형은 보호가 필요한 신생아 같았다. 그 애를 위한 보호와 그 애로부터의 보호, 두 가지 모두에 해당되는 말이었다. 그것은 내가 처음 이민형을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단 하나였다.
추출
– 정재현의 순간들 –
구질구질한 아파트는 크리스털로 된 샹들리에가 정수리 위에서 빛을 내는 직장과 매우 대비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묘한 안정감이 들기도 했다. 말하자면, 단단한 유리조각이 두개골을 위협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었다.
차이점을 찾자면 끝도 없었지만 그 중 유일한 공통점은 두 군데 모두 술과 마약의 향으로 꽉 차 있다는 점이었다. 화려한 밤이 지고 나면 나는 꼬마전구로 온 몸을 치장한 개가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귀소본능 같은 거였다. 나의 낮은 침묵이고 도피였다. 한낮의 해는 매일같이 엉망이 되어 버린 나를 노골적으로 비추어 냈으니까. 다 지워져 버린 화장처럼.
익숙하고, 그 익숙함만큼 도통 적응이 되지 않는 통통한 여자들의 사이에 억지로 끼어 앉아 웃음을 팔았다. 내 허벅지를 의식적으로 쓸어 내리는 하얀 손가락의 마디에는 꽉 끼어, 손가락을 괴사시키기 일보 직전으로만 보이는 반지가 몇 개씩이나 걸쳐져 있다. 오늘은 초록색이었다. 에메랄든가. 말도 통하지 않는 아줌마들과 앉아 몇 시간씩 수다를 떨어야 하는 오늘 같은 날이면 나는 하릴없이 반지들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머릿속으로 생각해 보곤 했다.
반지에 박힌 보석이 푸른색인 날은 시끄럽게 대화하기를 좋아하는 주책 바가지 아줌마들이 오고, 보석이 은색인 날은 사치와 허영을 좋아하는 맞춰주기 힘든 아줌마들, 보석이 빨간색인 날은 어린 아들 뻘 되는 나 같은 남자를 밝히는 아줌마들이 온다. 뭐 이런 생각들이었다. 가끔씩 여러 가지 색이 섞인 반지들이 나타나면, 그럼 셋 다인 걸까. 말도 안 되는 추측이었지만 어느 정도는 맞아 떨어지곤 했다.
신기한 일이지, 하등 근거 하나도 없는 일반화를 마치고 나면 그들에게 대응할 방법을 깨달은 느낌이었다. 억지로 안정감을 취하려는 거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그 소름 끼치고 부담스러운 소파를 박차고 일어날지도 몰랐다.
“재현, 오늘은 왜 계속 웃고만 있어?”
“미안해요, 누나. 몸이 좀 안 좋아서.”
“여기 실장 언니는 뭐 하길래 우리 에이스가 아프다는데 몸관리도 제대로 못 해주지? 아프다면 약이라도 먹였어야지.”
“아뇨, 제가 거절했어요. 약이 잘 안 받는 체질이라. 그러지 말고 얘기라도 좀 할까요?”
“무슨 얘기야, 얘기는. 어디가 아픈데? 자기?”
“아, 몸이 좀 냉해서.”
“몸이 냉하다? 그럼 특효약이 있지.”
제기랄, 역시 내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오늘따라 새빨간 보석을 주렁주렁 달고 들어왔을 때부터 쎄한 기분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포동포동한 손가락이 고급스럽게 세공된 유리병에 감겼다. 병에 살짝 부딪힌 번쩍이는 금과 은들이 차례로 실로폰 같은 소리를 냈다.
투명한 병목을 타고 흘러나오는 황금빛 액체, 와인을 따르듯이 병을 타이밍 좋게 비틀어 거둔 여자 덕분에 술이 내린 폭포가 꽈배기처럼 꼬였다.
“열을 올리는 데는 이게 최고지, 그치?”
자연스러움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인위적인 색상의 붉은 립스틱이 귀에 닿을 듯이 올라간다. 조명 아래서 더 하얗게 질렸을 얼굴로 그 여자를 마주하고, 그와 똑같은 웃음을 짓는다. 입꼬리를 올려, 귀까지.
“그럼요.”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려가는 약은, 아니 술, 아니 약이다.
나와 대화하는 동안 내내 허벅지 위를 배회하던 손. 그 반대편에서 내가 모르도록 은밀히, 황갈색 액체 속에 마치 그 빛과 꼭 같은 색의 가루가 독처럼 스며든 것을 모른 척한 나는 목구멍으로 뜨거운 액체가 지남을 느끼며 그르릉, 하는 웃음을 뱉어낸다. 주둥이를 붙잡힌 짐승의 목울음과 같은, 화려한 잔에 입을 틀어막힌 나의 울음을. 술잔에서 미처 걸러내지 못한 약 대신 마땅히 추출되어야 했을 진부한 감정을.
김도영은 항상 말했다. 너는 그래도 새끼야, 그 잘생긴 얼굴로 비싼 양주 마시면서 여자들 좀 상대해 주면 되잖아. 돼지 새끼들한테 웃는 게 낫냐, 여자들한테 웃는 게 낫냐. 부러움인지 위로인지 모를 말이었다. 어떤 부분이 부러운 건지도 의문이었다. 잘생긴 얼굴? 비싼 양주? 혹은 여자들?
맨들거리는 얼굴짝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비싼 양주라고 해 봐야 쓰고 단 뽕의 냄새를 숨기기 위한 독해 빠진 알코올일 뿐이고, 이 여자들이나 돼지 새끼들이나 다를 게 뭐가 있냐는 말이 입안을 맴돌았다.
하지만 그 말을 할 때의 김도영은 아주 흔치 않게 삶과 세상에 대해 긍정적인 것처럼 보여서 그 간만의 생각을 뭉개버릴 수가 없었다. 안 좋은 걸 좋게 포장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좋게 보고 있는 걸 구태여 망칠 이유는 더욱이 없었으니까. 특히 김도영에게는 더 그랬다. 이럴 때는 그냥 나 혼자 이 삶도 구정물 같고 냄새 난다는 것을 알고 말아 버리면 되는 거였다.
잭 다니엘, 흔해 빠진 양주였다. 김도영이 그토록 맛보고 싶어하던 비싼 술의 맛. 그 끝에는 아무 것도, 별다른 멋진 세상도 없다는 것을 눈치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여자의 말대로 목 아래부터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무중력 상태에 빠지는 것 같은 기분도.
“누나 말이 맞았네. 좀 낫네요.”
쓰디쓴 술에 젖은 입술로 말했다. 턱을 괴고 내 안색의 변화를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던 여자의 얼굴에 짙은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여자는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약에 취해 가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누구보다 이 약의 맛을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고 그 덕에 다행히, 영문도 모르고 몸이 달아오르는 척도 어렵지 않았다. 다행히도.
새벽 별이 떠오를 즈음이 되면 파란 조명을 받아 하늘색으로 보이는 셔츠를 벗어던질 수가 있다. 아직 하늘은 새카맣지만 곧 주홍색으로, 그리고 아주 잠깐동안 이 셔츠처럼 밝은 하늘색으로, 끝에는 회색 빛으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반나절 동안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줄을 서서 차례로 룸에 들어가, 뾰족한 손끝에 의해 추출되기를 기다리는 일로부터의 일시적인 방목이다. 뽑아져 나온다는 것이 항상 좋은 일만은 아니니 추출이라는 표현은 퍽 적당했다. 그 손이 내 온갖 기운과 맥까지 뽑아갔으니 확실했다.
실장의 손을 지나 공들여 세웠던 머리를 마구 흩어내며 골목을 빠져나왔다. 중심가에 있는 가게에서 나올 때마다 괜시리 낯이 뜨겁곤 했다. 그래서 매일같이 새벽이 채 가기 전에 나오려고 안달을 했던 건데, 오늘은 유독 욕심 많은 아줌마들이 많이 꼬여서 퇴근이 늦어지고 말았다.
한낯의 시장 앞은 벌써 북새통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인파가 몰려 있는 것은 내게도 나쁠 것 없는 일이었다. 따가운 눈총을 조금이라도 남에게 돌릴 수 있었으니 오히려 좋았다. 하지만 이런 경우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허공을 오가는 시끄러운 중국어들 사이로 들린 한 마디에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린 게 어쩌다가.
둥글게 원을 그린 사람들 사이가 벌어진 틈새는 아주 작았고, 이 동네에서 오래 지낸 나는 그 틈새를 여러 번 봐 왔다. 누군가 쓰러져 죽어갈 때였다. 다쳐 죽어가는 사람을 구할 생각도 없이 그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는 전혀 느끼지 못하면서 피를 보면 꺼림칙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틈은 그래서 생기는 것이었다. 강물처럼 흐르는 피를 외면하며 발을 피하기 바쁠 때. 채무가 밀려 맞아 죽는 경우도 많았고, 차에 치여 죽는 경우도, 심지어는 총을 맞아 죽는 경우도 봐 왔지만 가장 흔한 것은 오토바이가 뒤집힌 경우였다.
오토바이, 오늘 아침에 집에서 누군가 오토바이를 끌고 나왔다면. 그래서 사고가 났다면. 확률적으로 그랬다. 가장 높았다.
경사진 비탈을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흘러 내려오던 한 줄기의 피가 구둣발을 적셨다. 앞코에 닿은 그것을 바라보던 시선을 들었을 때는 여전히 웅성대는 사람들 사이의 작은 틈새로 이민형의 얼굴을 보았다. 오토바이에 깔린 익숙한 얼굴, 고통도 모르는 듯한 얼굴로 무상히 하늘을 향해 머리를 대고 누워서 눈을 감고 있는. 사랑해 마지않는 이민형의 얼굴이었다.
돈이 뭐라고, 속이 탔다.
마구 경련을 일으키며 꿈틀대는 이민형의 손에 거의 구겨지듯 쥐어진 지갑이 보였다. 그리 비싸 뵈지도, 돈이 많아 뵈지도 않는 평범한 지갑이었다. 확실히 김도영의 말이 맞았다. 이민형이 아스팔트를 굴러 가며 낚아챈 지갑에 든 돈은 내가 주둥이로 립스틱을 한 번 뭉개서 얻는 돈보다 적을 것이 분명했다. 아무하고나 살을 문대는 것과 피를 철철 흐르며 구경거리가 되는 일 중 어느 것이 더 유쾌할까. 김도영은 이럴 것을 전부 예상하고도 애들에게 오토바이 타는 법을 가르친 것이었다.
혀를 내어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고 피가 흐른 길을 따라 걸었다. 구둣발 아래에 빨간 물이 스며드는 것을 개의치 않고 틈새를 파고들었다. 아직도 멈추지 않고 빙글빙글 돌고 있는 바퀴에서 타는 내가 났다. 다른 사람과 하나 다를 것 없이 피를 피해 꽤나 멀찍이 서 있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분명 저 여자가 지갑의 주인일 터였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유독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이 일에 깊이 관계된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분명했다. 융통성도, 참을성도, 그다지 이성적으로 보이지도 않는 여자였다. 오히려 잘 됐지.
“누나, 진정해.”
오르락내리락하는 어깨에 손을 올렸다. 돌아보지도 않고 쳐 내려는 여자의 손을 붙잡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내 동생이 그게 좀 있어.”
화를 삭이지 못하는 뒷모습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비틀고 귓가에 속삭였다.
“뭐라더라… 도벽?”
도벽은 무슨, 나는 이민형을 세상 무서운 거 모르는 멍청이로 만들고 그 대신 빠져나갈 쥐구멍을 내었다.
사람들은 늘 자신보다 나약한 위치에 있는 치기 어린 어린애에게는 관대하니까. 아마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을법한 하얀 얼굴을 한 번 쳐다봤다. 그래서인지 아주 여유로운. 아니, 여유로운 게 아닐지도 몰랐다. 그 애는 이제 팔뚝으로 눈을 아예 가리고 있었다. 설마 아예 빠져나갈 생각이 없었던 건가.
최대한 부드럽게 말한다고 한 건데, 제대로 먹히지 않았는지 새된 여자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귀를 파고들었다. 목소리도 엄청 큰 여자군, 생각하며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가장 매력적이도록, 내게 돈을 찔러주었던 여자들이 좋아했던 표정과 목소리와 손길로. 땀에 젖어 끈적거리는 여자의 목과 뺨을 손끝으로 건드렸다. 도통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여자들은 전부 나와 살을 맞대는 것을 좋아했다.
하나는 몸 파는 새끼에, 하나는 도둑 새끼야? 저것들 인생도 안됐다. 선수니 제비니, 아까부터 들려오던 말들은 전부 모른 척할 수 있었다. 내 인생이 지겹고 혼잡스러운 것쯤이야 내가 감당할 문제였다. 지금껏 순응하지 않으려고, 다른 애들처럼 불행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으려고 바락바락 안간힘을 쓰던 모든 시간들을 한 순간에 부정한 남자가 팔짱을 끼고 서서 혀를 찼다.
“구경 났어요?”
“뭐? 나한테 하는 소리냐?”
비스듬히 이민형을 내려다보던 남자의 코앞으로 다가가서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여 시선을 맞췄다. 정확히 눈이 마주쳤음에도 되물어보는 저의를 알 수 없었다. 당연히 본인한테 하는 소리지, 답답한 사람이네. 황당하다는 듯 묻는 말을 무시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다 거기서 거기인 사람들이, 뭐가 그리 재밌다고 보고만 있는지 몰랐다. 영웅심리 같은 건가, 더러운 소매치기를 잡았다고 같잖은 우월감 따위에 빠져 있는 표정들이었다.
분위기가 싸해지자 슬슬 자리를 피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이민형의 위에 엎어진 오토바이를 들어냈다. 살도 없는 다리에서 피가 철철 뿜어져나왔다. 그러게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일렀건만. 이민형의 오토바이는 브레이크가 페달이 아닌 손잡이에 달려 있었다. 집은 코앞이니까, 나름대로 몇 년간 위험하게 오토바이를 몰아온 이민형이 다리 하나 때문에 또 엎어질 일은 거의 없었다. 혹시나 진짜 신고를 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 최대한 빨리 뒷정리를 하고 따라가야 했다.
아직까지 심통이 난 척 입술을 내밀고 있는 여자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끌어당겼다. 피에 젖어 아주 빨간 빛이 된 지갑을 등 뒤로 쥐고 목에 짧게 키스했다.
“내가 좋아?”
“뭐? 나쁘지는… 않네. 하지만 보상은 확실히 해 줘야 할 거야.”
“좋아하는구나. 고마워. 나도 누나가 좋아.”
여자의 작고 검은 눈이 반짝였다. 앞으로의 시간에 대한 기대감일까.
“이렇게 보니까 예쁘네. 아까 인상 썼을 때보다 훨씬.”
어려울 것 없었다. 익숙한 밤의 연장선이었다. 코너를 돌기 직전의 담벼락 앞에 기대어 섰다. 끌어안듯 여자의 어깨를 감싸 당겨 입술을 맞댄다. 매일같이 개처럼 훈련한 행동이었다. 무엇보다 간단한. 하지만 아마도 여자의 일생에서 가장 자극적인 키스가 될 것이었다.
몰입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달콤한 입맞춤을 선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 눈 앞의 여자들은 늘 입 안에서, 신경을 타고, 뇌에 도달할 때 즈음이면 사랑스러운 나의 연인으로 변모하곤 했다.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사랑스러운 연인.
이상하게도 언제나 모자이크처럼 뿌옇기만 했던 그 눈과 코와 입은 오늘따라 뚜렷하다. 왜지? 그 얼굴과 눈만 마주쳐도 쩔쩔매던 애들이 떠올랐다. 김여주, 그 어린애의 얼굴이었다. 애들이 흔들린다고 나까지 흔들릴 이유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금의 환상은 최근에 자주 마주쳤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게에서 마주치는 여자들이 더 많다는 것을 간과하며.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 들었다. 피에 젖어 축축해진 지갑은 잘 열리지 않았다. 여자에게 보이지 않도록 뒷짐을 진 손 안에서 지갑을 열고 그 안에 들어있던 몇 장의 지폐를 꺼냈다. 입술을 통해 열기를 주고받는 사람이 그 여자인지, 김여주인지, 과연 누구인지 정확히 정의내리지 못한 나는 어쩔 수 없이 끄트머리가 젖어든 지폐를 여자의 바지 뒷주머니에 꽂아 넣는다. 내 가슴팍을 쓸어내리던 손을 매끄럽게 펼쳐 빨갛게 젖은 지갑을 쥐어주며.
“고마웠어, 누나. 이건 스킨십 값이야. 원래는 내가 받아야겠지만, 스페셜한 서비스를 해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그럼 잘 가요.”
빨갛게 물들었을 오른손을 계속해서 등 뒤로 숨긴 채 뒷걸음질치며 왼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를 보는 황당한 표정의 여자는 립스틱이 잔뜩 번져 있다. 정말 더럽게도 적극적이었다. 이제서야 입안을 맴도는 짙은 키스의 느낌에 허탈한 웃음이 난다. 난 어떻게 저런 노골적인 키스를 하면서 김여주의 허여멀건한 얼굴을 떠올린 걸까. 그 애가 저렇게 본능에 충실한 키스를 할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아까 시뻘건 반지를 잔뜩 끼고 나타났던 아줌마가 먹였던 술이 원인인 모양이었다.
나도 참, 병신같기도 하지. 옆의 하수구에 대고 침을 탁 뱉는다. 아직도 축축한 입안이 불쾌하다. 김여주를 만나면 그 눈을 바라보면서 그냥 웃고 떠들고만 싶은 기분이지, 이런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하실이 있는 골목은 시장과 도보 10분이 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정신 없이 걸어 도착한 골목 앞에는 걸어오는 내내 나를 헷갈리게 만들었던 아이가 서 있었다. 한쪽의 페인트칠이 전부 벗겨진 채 대강 세워진 이민형의 오토바이에 반쯤 걸터앉은 김여주였다. 차체에서부터 땅에 질질 끌려 이어진 핏자국은 보이지도 않는지 허망한 표정으로 앞만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다가가서 말을 붙여 볼까 하고 한 발짝을 내딛는 순간 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힘주어 쥔 작은 쪽지가 보였다. 모퉁이 너머의 담에 붙어 섰다. 나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쪽지를 들여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놓기를 반복하던 그 애가 눈을 감고 벽에 머리를 기대었다.
담에 등을 붙이고 기대어 있던 나도 따라 머리를 기댔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김여주는 거의 오 분이 지나서야 쪽지를 접어 품에 안고 있던 비닐 봉투 깊숙이 넣었다. 아무래도 구급상자로 보이는 큼지막한 박스가 들어 있었다. 이민형을 치료해 주려고 사 온 것인 모양이었다. 그럼 심란해 보였던 이유도 이민형 때문인가.
쪽지까지 써 줄 정도로 특별한 사이인 줄은 몰랐는데,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기분이 묘했다. 이동혁이랑 별 사이가 아니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지만 이민형 쪽은 아니었다.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시체처럼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김여주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다시 시장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뭐든, 이민형을 치료해 줄 사람이 있으니 잘 됐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둘이 벌써 사귀냐, 고. 내가 장난으로 이동혁에게 물어봤을 때 이민형은 정색을 하고 내게 말했다. ‘아니’라고. 둘이 안 사귄다고 말했지.
그 때 은근히 예감하긴 했었지만 진짜가 될 줄은 몰랐다. 뭐 좋은 일이지.이민형에게는 애정을 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 애는 지금 무너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니까. 항상 아슬아슬하던 그 애는 자신이 불행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했고, 오늘 또 한 번 그 의심을 증명할 만한 일이 일어났다. 아까 이민형의 얼굴을 봤다면 누구라도 달리 말할 수 없을 것이었다. 우리에게 생긴 변화는 아주 작았다. 김여주라는 작은 여자애가 우리의 세상 속에 마음대로 침범해 들어온 것. 그리고 그 파급은 컸다.
김여주는 이민형을 살릴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애에 의해 변화하는 만큼 그 애는 우리와 같이 변해 가겠지. 그 무엇도 원하지 않았는데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새에, 밤의 불빛이 빛나는 동안 이 공간 안에서.
오늘의 낮을 배회하고 나서 또 밤이 되면 나는 아름다운 치장을 하고 선택되길 바라는 반지처럼 진열될 것이다. 그리고 또 내가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나의 작고 평화로운 세상에서 추출되어 빠져나가는 일이.
가차없이 내 진심과 영혼이 빼내어지는 일들이.
나쁘지는 않았다. 내 자신을 지킬 뿐이었다.
-
독자님들 안녕하셨어요! 보풀 왔습니다 :D
요즘 현생 때문에 글 쓰기가 쉽지 않네요ㅠㅠ 그래도 최대한 빨리 업데이트 하도록 할게요~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고인 물은 아직 한~참 남았답니다ㅎㅎ 지루하...지는 않지요...? 허허...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엔시티 만세! 재현이 없는 한국 못생겼어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