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 님의 시 '인연설' 에서 모티브를 따온 소설입니다.
因緣說
인연설
下
헤어질 때 돌아보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헤어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돌아보면 혹여나 님이 나를 보고 있을까 그것이 두려워 돌아보지 못합니다
님의 얼굴을 보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발걸음을 떼지 못할 미련한 나를 알기에 나는 돌아보지 못합니다.
-
창호지 문을 열자 맨 먼저 보이는 것은 익숙한 붉은 도포 자락이었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하이얀 님의 얼굴이 있습니다.
놀라 꾸벅 고개를 숙이자 님이 말 없이 발걸음을 옮기십니다.
왜일까요, 님의 무심함이 마지막이 될 것이란 걸 알고 나니 너무나 이 무심함이 그리워질 것 같은 이 심정은.
님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마루에서 내려와 짚신을 구겨 신고 님의 반댓방향으로 걸으려는데,
「…떠나느냐.」
역시나, 바깥에서 마님과의 대화를 들으신 듯 합니다.
찬바람 소리가 귀를 에워싸는 와중에도 그 자그만 목소리는 귀를, 그리고 가슴을 울렸습니다.
「…예.」
「언제, 떠나느냐.」
「내일 해가 뜨기 전에… 떠날 예정입니다.」
님은 한동안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특유의 자박거리는 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아 나 또한 가만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얼마가 지났을까요. 얼기설기 엮은 짚신 사이로 파고들어오는 눈 때문에 발의 감각이 거의 없어질 즈음,
「잘 가거라.」
이 한 마디를 남겨두시고 님은 발걸음을 옮기십니다.
빠르게 희미해져가는 님의 걸음 소리에, 나는 그대로 못 박힌 듯 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잘 가거라. 잘… 가거라.
님의 목소리를 되뇌이며 멀어진 님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곱씹습니다.
고개를 돌려 가시는 뒷모습을 돌아보려 하였으나 그것마저 쉽지 않습니다.
첫째는 그 수려하고 처연한 뒷모습을 보면 쉬이 이 집을 나설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요,
둘째는… 그 날 이후로 한 번도 보여드린 적 없는 눈물을 님께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떠날 때 우는 것은 잊지 못하는 증거요
뛰다가 담벼락에 기대어 울면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감히 내가 님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
쌀 것도 없는 짐을 주섬주섬 챙겼습니다.
다 해진 보자기 안에는 헝겊 같은 여름옷 한 벌과 말라 비틀어진 동백 하나가 전부입니다.
보자기를 한 손에 움켜쥐고는 밖을 나옵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검푸른 빛이 고요한 마을을 덮었습니다.
대문을 조심조심 소리내지 않고 나서려는데 웬 검은 인영이,
멈칫했습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은, 믿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각보다 늦구나.」
「도련님…」
님이 천천히 내게 다가옵니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살결이 희미하게 빛납니다. 나를 살짝 올려다보는 님의 눈가가 촉촉했습니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깝습니다. 서로 간에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시간이 무심하게도 흘러갑니다.
님이 살짝 발꿈치를 들었습니다. 하얗고 차가운, 하지만 보드라운 손으로 내 뺨을 가볍게 쥐는 님이, 문득, 그날 내 손을 잡던 아이의 모습과 겹칩니다.
입술이 닿았습니다.
너무도 갑작스러웠고, 너무도 놀란 나머지 몸이 굳어 버렸습니다.
입술은 따뜻했으며, 촉촉했고, 또 슬펐습니다.
감긴 님의 눈 위에 살포시 얹혀진 속눈썹은 우아하게 위로 올라가 있었지만, 잡힌 새마냥 파르르, 떨리고 있었습니다.
천천히 입술을 뗀 님이 옷소매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내 손에 그것을 꼭 쥐어줍니다.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던 님이 조용히,
「꼭, …간직해 주련.」
그 말을 남기고서는 님은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부르고 싶었습니다.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합니다.
꽉 쥐고 있던 손을 폈습니다.
붉은 동백 한 송이.
대문을 나서고, 저잣거리를 걸을 때도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해가 떠오르자 소매로 눈가를 열심히 훔쳤습니다. 추하게 우는 꼴을 세상에 들키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고,
…이 눈물에 님의 추억이, 님의 이름이, 님의 향기가 지워질까봐일지도, 모릅니다.
-
봄입니다.
하늘은 푸르고 공기는 따스하며, 꽃들이 만개한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마루를 쓸다 잠깐 감상에 젖어 대문 밖을 멀찍이 바라봅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침부터 저잣거리가 시끌벅적합니다.
「날씨가 참 좋지?」
「예? 아, 예. 정말 좋습니다.」
새 주인마님은 인자한 분이셨습니다. 그것으로 위안이 되었다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어디 가십니까?」
「아, 윤 대감네 댁에.」
「윤 대감네요? 그 댁에 무슨 일이라도…」
「모르고 있었느냐? 그 댁 둘째딸과 정 대감 댁 외동아들의 혼인날이 아니냐.」
「……예?」
「큰 잔치라 볼거리도 먹을거리도 많을 텐데, 일을 끝내면 너도 한번 가 보거라. 그럼 다녀오마.」
그대로 문을 나서는 대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하늘을 담은 색을 띈 도포자락이 펄럭이며 사라집니다.
님이 계신 곳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요리 냄새와 풍악 소리가 귀와 코를 자극합니다.
그 입맞춤의 의미는 무엇이었더란 말입니까.
-
수많은 구경꾼들 틈새로 고개를 조금 들이밀었습니다.
여자들의 시끄러운 수다와 가야금 소리가 섞여 귀를 찌릅니다.
옷 속에 넣어 놓았던 시든 동백을 손에 꼭 쥐었습니다.
님이 나옵니다.
님은 아름다웠습니다. 흰 얼굴에 웃음기가 돌아 한층 물이 오른 듯, 그렇게 아름다웠습니다.
사모관대를 차려입은 내 님의 앞에 화려하게 수놓인 예복을 입은 여인이 섭니다.
향기롭고, 단아하며, 고운 여인이었습니다.
거무죽죽하고, 투박하고, 거친 나와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내 님과 너무나도 잘 어울려, 그것이 오히려 더.
넋을 놓고 님을 바라보고 있는데, 님이 살짝 고개를 듭니다.
눈이 마주쳤습니다.
님이 웃었습니다.
흰 종이에 물을 떨어뜨리면 천천히 종이를 타고 물이 연하게 번지듯,
그렇게 님이 웃었습니다.
내게는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그 누구보다도 따사로우며 그 누구보다도 사랑스럽게, 님이 웃었습니다.
그래요, 이것으로 된 겁니다.
님이 웃었습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미련 없이 웃을 수 있습니다.
-
함께 영원히 있을 수 없음을 슬퍼 말고
잠시라도 같이 있을 수 없음을 노여워 말고
이만큼 좋아해 주는 것에 만족하고
나만 애태운다 원망 말고
애처롭기까지 한 사랑 할 수 없음을 감사하고
주기만 하는 사랑이라 지치지 말고
더 많이 줄 수 없음을 아파하고
남과 함께 즐거워한다고 질투하지 말고
아플 수 없는 사랑이라 일찍 포기하지 말고
깨끗한 사랑으로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나는 당신을 그렇게 사랑하렵니다
나는, 당신을.
나는 당신을 그렇게 사랑하렵니다.
-
안녕하세요, 돌쇠입니다 :)
인연설 下 편이에요!
여기서 끝이 아니라 택운이 번외도 한 편 나올 예정입니다!
늘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시는 독자분들께 너무너무 감사하고 사랑합니다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