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기는 확실히 보여줬으니 그쪽도 당분간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겠지?"
방금 내온 거품 가득한 모카치노의 향을 음미하며 찻잔을 테이블에 내렸다. 느즈막한 아침이 가져다 주는 여유라도 즐기는 듯 진한 갈색을 띄는 눈동자가 조간 신문을 넓게 펼쳐 천천히 훑어내려갔다. 그와 더불어 뱉어낸 음성은 온화했지만 강단이 느껴졌다. 마찬가지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피오도 평소 즐겨마시는 에스프레소를 한모금 넘겼다. 쓰고 쓴 가운데에서 느껴지는 강한 커피향. 지독히 그 다운 취향이었다.
"방심하기에는 아직 일러."
"어째서?"
"피해를 입은만큼 갚으려고 드는게 그 놈들의 본성이니까. 만약 제대로 된 지도자를 갖추지 않았다면 지금쯤 감정에 휘둘려 일을 저지르는 멍청한 짓거리를 계획하고 있겠지."
"이런, 난 안토니오를 믿어. 그가 멍청한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지는 않겠지?"
모카치노를 입에 갖다 댄 남자가 빙긋 하고 웃었다. 미묘하게 움직이는 피오의 입꼬리 와는 달리 고운 호선을 그리는 그것은 피오의 앞에 앉은 남자를 앳되어 보이게 했다.
-
사흘 전, 카포라보로는 최근 성행하고 있는 미국과의 '마약 밀거래' 를 미끼로 DIA의 수사관과 전경들을 인적이 드문 폐공장으로 끌어들였다. 그들이 폐공장 안으로 모두 발을 들인 순간, 어딘가에서 날아오는 총알에 의해 그들은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하나 하나, 바닥에 힘없이 쓰러지기 시작했고 그 중 절반 가량이 제대로 된 반항도 못해보고 숨을 거두었다. 작전상 후퇴라며 건물 밖으로 도망치려던 이들은 아까 닫히면서 잠긴 문 때문에 꼼짝없이 피비린내 가득한 공장 안에 갇혔고 이 것이 함정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새파랗게 질려 덜덜 떨다가 하나 둘, 이미 죽어버린 동료들의 곁에 마찬가지로 쓰러졌다. 게 중에서 용케 자신이 가져온 피스톨을 꺼내 손에 쥐고 반항을 한 이는 있었지만 그의 운명 또한 별다를 것이 없었다. 어차피 목표는 전원 말살이었다. 뜸 들일 필요도 없이 숨어있던 암살자는 그의 목에 있는 경동맥을 조준했다. 단 한발로 심장이 꿰뚫려 죽어간 동료들과는 달리 고통스럽게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그의 모습은 마치 물밖으로 내놓아진 물고기와 같았다. 시간이 흘러 그 움직임이 멎자,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자가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딱 봐도 고급스러운 수트를 차려입은 그가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이 엉켜 죽어있는 그 참혹한 현장으로 발을 내딛을 때마다 구두소리가 고요한 폐공장을 울렸다. 그 시체들을 곁눈질로 흘끗 보고는 여분으로 가져온 탄창을 갈아끼웠다.
일부러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들 말고도 죽여야 할 사람은 많았다.
"왜 이렇게 조용해? 아직 도착하지 않았-"
"..."
"...뭐야, 이거..."
미리 잠금쇠를 풀어둔 공장 문이 열리면서 동시에 재잘대던 말소리가 끊겼다. 뒤이어 당황한 음성이 들리고, 문 바로 옆 공간에 몸을 숨긴채 사람들의 동태를 살피던 피오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피가 흥건한 바닥에 쓰러져있는 이들의 신원을 확인하는 인원 셋. 그 사이에 들어와 공장 내부를 살피는 인원 일곱. 그리고 가만히 서있는 하나.
지금 주머니에 있는 탄환으로 충분했다. 총 열 한명.
철컥ㅡ 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피비린내 올라오는 공간을 울렸다. 그와 동시에 터져나오는 단말마의 비명.
"억!!"
"누구냐!!!!!"
순식간에 장정 셋이 쓰러졌다. 쓰러진 사람은 신원이 DIA임을 확인하고 보고하던 이들 중 하나와 내부를 탐색하던 이 둘. 갑작스레 피를 토하며 목숨을 잃은 동료를 허망하게 바라보던 조직원들은 이내 모두가 안주머니에서 나이프며 피스톨이며 꺼내들고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고 동시에 피오의 입가엔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
남은 여덟의 처리는 어렵지 않았다. 말 그대로 손쉽게 임무를 마치고 늦은 시각 본부로 돌아온 피오의 보고를 기다리고 있던 카포라보로의 보스는 집무실 데스크에서 결재 서류를 들추어 보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었어도 여전히 미미한 피냄새가 풍겼지만 개의치 않고 그 앞에 다가 선 피오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끄집어냈다.
"보고서는 내일 오전 중으로 제출하지."
"천천히 해도 돼. 보다시피 밀렸거든."
"...한심하긴."
와, 진짜 너무한다.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ㅡ 투덜거리는 말은 가볍게 무시하고 몸을 틀었다. 얼굴을 비췄으니 돌아가기 위해 발을 옮기려는 순간, 펜촉이 종이 위로 바쁘게 움직이며 사각 거리는 소리가 잠시 멈췄다.
"향수 빌려줄까?"
"향수는 갑자기 왜."
"혹시 다 썼나 해서."
"..."
"임무 마치면 항상 뿌리더니 오늘은 그 향기가 안나네."
자연스레 걸음이 멈췄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오히려 미소를 띤채 말을 꺼낸 장본인을 향해 돌아 선 피오의 표정이 살짝 경직되어있었으나, 얼마 안 있어 본래의 페이스로 돌아왔지만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잡아낸 카포라보로는 미소를 더욱 짙게 하며 말을 이었다.
"왜? 빌려줘?"
"..."
태일이 늦는다고 했었다. 그의 말대로 평소 임무를 나갔다 들어오면 그에게 들키기 않도록 귀가 하기 전에 항상 향수를 뿌려 지워지지않는 피냄새를 덮었다. 그러나 오늘은 집에 있지 않다. 어차피 이 비린내야 집에 가서 샤워하고 나면 사라지기 때문에 매번 돌아와서 향수를 뿌리던 것을 오늘 만큼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느새 양손으로 깍지를 끼고 턱을 받치고 있는 눈앞의 작은 악마는 자신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부분까지 알아채는 그의 눈치가 제법이었다.
잠시 후, 피식 웃으며 천천히 그의 곁으로 다가선 피오는 손을 뻗어 그의 마이 칼라 부분을 움켜쥐었다. 반대쪽 손 또한 뻗었지만 남자는 눈하나 깜빡 하지 않았다.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다.
"냄새 구려. 니 향수."
피오는 손에 쥐여있는 작은 병을 데스크 위에 올려놓았다. 겁도 없이 남자의 안주머니를 뒤져 빼낸 것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헛 생각 할 시간에 서류 결재나 하나 더해."
"그러지 말고 도와 달라니까?"
"꺼져."
이번에야 말로 진짜 집무실을 나갈 생각이었다. 저 꼴보기 싫은 얼굴을 더이상 상종하기 싫어 아까보다 걸음을 더 빨리 하는 피오의 등 뒤에서 작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있는대로 찌푸려진 미간을 하고서 집무실의 출입문을 연 피오는 맨 처음 왔을 때 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호기심은 그쯤에서 접어 둬."
"...쓸데없는 호기심?"
"...건들릴 생각 접으라고."
+) 제목은 랑데뷰라고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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