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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서류와 시말서를 겨우다 작성하고 출력한 태일은 벌써 몇번째인지도 모를 한숨을 버릇처럼 내뱉었다. 아까 컴퓨터 전원을 끄기전에 봤던 시계는 PM도 아닌 AM 01 : 54를 가리키고 있었기에 정말 할 말 다했다. 팀장이 넘긴 서류는 다음 프레젠테이션 때 참고자료로 들어갈 것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다못해 작은 그래프까지 꼼꼼히 분석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등 다른 때보다 신경써서 작업하다보니 의외로 소요되는 시간이 많았다. 그것만 해도 벅찼는데 더불어 시말서라니... 말그대로 중노동을 뛰고 온 기분이었다. 분명 턱 끝까지 내려와 있을 다크서클이 몇 시간 뒤의 아침을 걱정하게 만들었다. 내일은 또 지각해서 시말서 쓰는 건 아닐까.
본체의 하드 작동이 멈추고 늘어지게 하품하며 기지개를 키던 태일은 감기려는 두 눈에 힘을 주고 양 볼을 착착 때렸다.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부서 내에서 잠드는 일은 없어야 했다. 지금이야 좋겠지만 내일 아침 출근하는 사람들과 대조될 꾀죄죄한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자 소름이 돋았다. 성실...하고 일처리 확실하고 지적인 이미지를 고수하고 있는 마당에 막 잠에서 깬 추태를 보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책상 옆 옷걸이에 걸어두었던 정장 마이를 팔에 꾀고 책상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려있는 종이컵과 서류 초본들을 한곳에 대충 정리 해 둔 다음 스탠드를 껐다. 그러자 부서 내부가 완전히 어두워졌지만 조금 있으니 어둠에 눈이 익숙해져 조금씩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브리프케이스의 끈을 길게 빼내 어깨에 매고 문쪽으로 발을 떼는 순간,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아, 맞다."
부리나케 책상으로 달려가보니 액정에는 빛이 들어온채로 핸드폰이 부르르 떨고 있었다. 하마터면 두고갈 뻔한 핸드폰을 머쓱하게 웃으며 집어든 태일은 액정을 확인했다. 그러나 액정에 쓰여진 것은 이름이 아닌 낯선 번호.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태일은 한참의 고민 끝에 통화아이콘을 길게 잡아뺐다.
"여보세요?"
[이..태일씨? 맞으십니까?]
"예, 그런데 누구신지...."
[건물 관리자 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지금 건물 주차장에서 딱 한대가 안 빠져나가서요. ]
"아, 죄송해요. 제가 오늘 야근이라서 아직 건물 안에 있거든요."
[그럼 언제쯤ㅡ]
곧 건물의 출입구를 닫아야 하니 서둘러 차를 빼달라는 관리인의 말을 듣고 태일은 아까보다 좀더 서둘러서 사내를 빠져나와 자신이 주차해 놓은 차에 올라 시동을 켜고 집으로 향했다. 어휴...하마터면 집까지 걸어갈뻔 했네.
그리고 태일은 핸드폰을 습관처럼 브리프케이스 가장 안쪽에 넣어 둔체 그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더불어 진동이라는 것도.
**
[고객님이 통화중이오니, 잠시만 기다ㅡ]
태일의 전화를 받고 진작 집에 도착해 샤워까지 마친 지훈은 TV를 틀었다. 무표정의 앵커가 나와 딱딱한 뉴스를 진행하고 마칠 때까지 소파에 앉아 묵묵히 보던 지훈은 벽에 걸린 시계 쪽으로 눈을 돌렸다. 벌써 한시를 넘기고 두시를 향해 가는 시곗바늘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야근이라고 하더니. 오늘은 정말 늦는 모양이었다. 보통 때라면 야근이어도 지금쯤 집에 들어와 소파에 엎어져있곤 했는데 아직도 감감 무소식이니, 협탁 위에 던져 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태일의 번호를 찍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들려오는 것은 고객이 통화중이라는 기계음. 이에 지훈은 미간을 좁히며 통화를 끊고 버튼을 다시 눌렀지만 기계음이 반복되어 나올 뿐, 태일은 받지 않았다. 이 늦은 시간에 누구랑 통화를 하길래 두번이나 해도 안받고... 짜증이 밀려오려는 것을 참으며 3분 가량을 기다렸다가 다시 통화버튼을 눌렀다. 이번엔 신호가 갔다. 새로 바뀐 태일의 컬러링이 들렸다. 금방 받겠지. 싶어 부엌에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스피커를 귀에 댄체 소파에 눌러 앉았다. 그러나 노래가 한곡이 끝나고 다시 시작할 때까지, 태일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금은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사오니, 잠시 뒤에ㅡ]
또 기계음이었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통화버튼을 누른것이 벌써 세 번이었다. 세 번.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렇게 많이 통화를 시도한 적이 있었던가. 이젠 화가 나기보단 슬슬 불안이 덮쳤다. 설마 오는 길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만약에 납치라도 당한 것이라면...ㅡ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고개를 좌우로 절래절래 흔든 지훈은 빠른걸음으로 방안에 들어가 마이를 챙겼다. 그리고 혹시 몰라 태일 모르게 숨겨 둔 옷걸이 바로 뒤의 붙박이장을 열어 피스톨도 안주머니에 챙겨넣고 차키와 핸드폰도 집었다. 솔직히 지금 당장 나가 태일을 찾을 수 있는 확률은 극소수였지만 집에서 제발로 귀가하는 태일을 기다리는 것 보다 차라리 나을것 같았다. 벗어둔 그대로 놓인 구두를 억지로 구겨 넣고 마이를 팔에 꿰면서 집을 나서려는 순간, 삑ㅡ삑, 거리는 전자음이 현관을 울렸다.
"지훈! 어디 가게?"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밖으로 젖혀진 문틈 새로 비치는 낯익은 얼굴.
지훈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여태 나 혼자 뭐했니.
정말 누구에게 묻고 싶었다.
**
종이뭉치를 손에 든 지코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방금 아래에서 올라 온 보고서를 가득 매운 것은 사진과 인물의 상세 정보였다. 이름과 나이, 주소, 소속 기관에서 맡고있는 직책 등. 이를 하나하나 넘겨보는 지코 눈매가 가늘어졌다. 여기 있는 대다수의 사람은 오늘 오후 피오에 의해 이 세상과 억지로 하직했다. 그를 증명하듯 붉은 펜으로 일일히 그어진 이들이 한 페이지에 다여섯정도 되어 보였다. 별로 맘에 들지 않았다. 하필이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피오일까. 이쪽에 발을 담근 햇수는 피오가 몇년 앞선 것을 제외하고는 지코와 피오 조직 내에서 비슷비슷한 위치였다. 조직의 상임 고문과 고위 간부. 말이 상임 고문이지 실질적으로 피오가 카포라보로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보스의 바로 다음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따지고보면 언더보스급이었다. 지코는 정말 죽을 듯이 노력했다. 자신보다 우위에 선 피오를 짓밟고 올라서기 위해 남들보다 배로 열심히 했다. 그 결과 '에이스'라는 별칭을 얻고 고위 간부직에 올랐지만 여전히 피오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번 임무 또한 흠잡을 것 없이 완벽하게 처리해서 뒷처리에 나섰던. 토마스를 비롯한 조직원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칭찬하기 바빴다고 한다. 지코로선 배알 꼴릴 일이었지만 이제 이런 일 쯤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런 일에 하나하나 반응하기에 고위 간부라는 직위는 할일이 많았다. 남들은 이를 핑계로 여기겠지만 지코는 그 또한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 헛소문에 동요하는 것은 애송이들이나 하는 짓이었기 때문이다.
"...DIA라."
DIA. 반 마피아 수사기관. 현재 이탈리아 정부가 설립한 기관으로서 이탈리아 내의 마피아 조직의 동태를 살피고 감시하며 잡아들일 기회를 노리고 있는 마피아조직의 공공의 적이었다. 그를 여실히 보여주듯 이번에 올라온 명단에 기록된 이들의 소속은 거의가 DIA였다. 때문에 별 감흥 없이 보고서를 훑다가 마지막 페이지로 넘어간 지코는 이 중에서 유독 튀는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금발 가운데 유일한 흑발. 아시아계인 임을 증명하듯 매우 검은 머리였다. 평소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속의 그는 카페 창가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왼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27살. 나이에 비해 어려보이는 외모였다. 이름은.... 사진에서 눈을 돌려 프로필란으로 향했다. 이태일. ..한국인이군ㅡ. 특이사항을 살피는 지코의 눈매가 조금씩 누그러졌다. 미국의 UC버클리 공대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졸업도 수석. 인턴과정을 수료하기도 전에 정직원으로 스카웃. 현재 스물 일곱이라는 나이임에도 정보팀에서 가장 유능한 인재로 손꼽힘. 몇 개월 뒤 새로운 정보팀장 내정자 등. 이 외에도 수많은 것들이 이태일의 뛰어남을 입증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UC버클리 공대나 나와 이런 데서 일하는지는 의문이었다. 수석으로 졸업한 것이라면, 러브콜을 부르는 곳이 꽤 있었을 텐데... 턱을 괴고 조금은 뚱한표정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이런 자를 죽이기에는 좀 아깝지만, 그렇다고 살려놓기엔 위험부담이 컸다.
...차라리 포섭한다면?
편히 기대고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이 안주머니에서 느껴지는 묵직함에 잠시 위화감이 든 것도 잠시.
지코는 탁상위에 놓인 호출 버튼을 눌렀다.
"찾으셨습니까."
"이태일 사진이랑 프로필. 따로 가져와."
"알겠습니다."
포섭이나 사살이냐. 일단 그를 찾고나서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인사이동의 내정자라서 적어도 몇 개월간 타지로 발령이 나 떠나는 일은 없을 것이 분명하니 조금은 시간을 들이기로 했다. 원래 사냥이란 적절한 타이밍이 중요한 법. 지코는 다시한 번 사진 속의 인물을 유심히 살폈다. 이태일이라...
늘 차게 굳어있던 지코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무엇인 가에 흥미가 인것은 아주 오랜간만이었다.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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