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링킹요구르트 :: 드링킹요구르트
- 그래서요, 누나. 제가 어디 배정됐는지 알아요?
" 아, 모른다고."
짜증스런 목소리로 수화기 반대편에서 기대에 찬 녀석에게 쏘아붙였다. 아침 댓바람부터 모닝콜을 때려주신걸로도 모자라, 자꾸 답이 뻔한 질문을 연신 물어대던 차였다. 이렇게 들뜰 이유도 빤하고, 알만해서 ㅇㅇ고, 라고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 이름을 말하자,
' 아, 누나가 말하면 어떡해요!! 다시, 다시. 누나 제가 오늘 고등학교 배정받았거든요?'
… 씨발. 도돌이표를 몇번이나 찍었는지 모르겠다. 오늘이 왜 토요일인데. 오후 2시까지 늘어지게 낮잠자고 여유롭게 브런치를 즐기라고 있는 날이잖아, 이제 갓 중딩 졸업한 햇병아리야. 전화만 끊긴다면 바로 잠에 들 태세로 침대에서 전화 받던걸, 한상혁 이 자식때문에 관뒀다. 솟구치는 짜증에 잠이 달아난건 오래였다. 관두고 방에서 나오는데 마주한 시계는 10시를 향하고 있고. 아오, 꼭두새벽부터 깨웠구만, 이자식?
- 누나도 알텐데?
" 모른다고!! 몰라!!"
" 이별빛, 조용히 안해?"
엄마의 호통소리에 난 입을 꾹 다물었다. 수화기를 타고 넘어오는 녀석의 웃음소리가 유난히 재수가 없었다. 뭐, 비웃냐? 나즈막히 중얼거리자 돌아오는 말은 더 가관이다.
- 그러니까, 나랑 결혼하면 장모님 잔소리 들을 필요도 없잖아요. 요새 난방비는 또 얼마나 많이 나오는데, 한 집에 같이 살면 돈도 아끼고 어?
상종을 말아야지.
안그래도 방금 자다 일어나서 목아파 죽겠구만, 이 자식때문에 속도 탔다. 곧장 냉장고 도어바를 열었다.
" 헐. 아 내 드링킹 요구르트 누가 먹었어!!"
내가 그걸 피같은 용돈으로 사서 1.5L짜리를 한모금도 안마시고 어제 고이 모셔놨는데. 웬수같은 동생새끼는 빈 우유곽을 달랑거리며 들고 와선 재활용 쓰레기통에 버렸고, 니 데시벨이면 소음공해라며 엄마의 등짝 스파이크는 덤으로 받았다. 욕도 많이 먹고 오래 살겠네, 나.
-
- 진짜 우연의 일치죠? 대박!!
" 내가 처음부터 말했잖아, 병신아."
- … 누나, 첫 멘트부터 다시 시작할까요?
아, 끈질긴 새끼. 진짜. 기어코 대답은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인데 그렇게 바람을 넣냐. 같은 고등학교 안 떨어지면 지네 집 18층에서 떨어져 뒤질거라고, 부엌에서 물떠다놓고 절 올리던게 일주일 전일이다. 퍽이나 우연의 일치네. 그나저나 등하교길도 모자라 이제 학교에서도 이 놈한테 시달려야 하다니. 앞날이 깜깜하다.
- 그럼 이 기쁨을 누나가 몸소 표현해봐요.
" 우리 좀 만나서 몸의 대화로 풀까?"
- … 야해.
평소에도 이랬지만 오늘따라 유난하다. 이 새끼 열뻗치게 하는 화법 학원이라도 다니나?
" 용건 끝났으면 끊어라. 누난 피같은 요구르트 사러갈거니까."
- 누나, 차라리 변비약을 사서 먹어요. 그게 더 빠르겠네.
" 맛있어서 먹는거라고."
- 어허, 왜 서방님한테까지 그런걸 숨겨요? 누나 변비인거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미래서방님 이 한상혁님이 아는데?
" 아, 나 변비 아니라고!!"
띵- 7층입니다. 씨발, 나 요구르트랑 같이 로또라도 사야될려나 봐.
" 아. 안녕하세요."
" … 네, 안녕하세요. 아, 날씨 정말 좋죠? 제가 좀 바빠서."
왜? 대체 왜? 왜 내가 이틀간 감지도 않은 머리 대충 치켜묶고 회색츄리닝 차림인데 저런 훈남이랑 아이컨택을 하는거지? 심지어 첫 멘트가 변비 나부랭이였어! 후들거리는 다리탓에 손잡이에 체중을 의지하며 깊은 한숨을 뱉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1층을 누르고 아무리 생각해도 불쌍한 나에게 애도를 표하기 위해 거울을 보고, 스스로 충격을 받곤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더 절망스러웠던건, 날씨가 좋긴 커녕, 겨울임에도 비가 내리던 중이였다. 비. 눈도 아니고 비. 씨발. 되는 일이 없으려니까. 우산을 가지러 되올라가는 발걸음엔 통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
몇분 새에 초췌해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집에 들어섰다. 미성년자라 로또도 못사고. 하여간 정말 되는 일이 없다. 내가 진심 오늘 운수 개똥이니까 오늘같은 날 로또사면 수지 맞을건데. 아빠나 꼬셔볼까. 1.5L 요구르트 두팩은 봉지에 넣고, 수혈받듯 작은 팩은 빨대 꽂아서 곧장 집으로 들어섰다.
" 아싸, 시루떡 득템."
곧장 티비앞에 앉아 떡 봉지를 뜯고 있자니 엄마가 말을 건넸다.
" 그거 옆집사는 분이 주신거야."
" 어? 왜? 이사 오신지 오래 되셨잖아."
" 아니, 그 집 조카가 여기서 같이 살게 됐다나봐. 대학 문제도 그렇고, 해서. 이웃사촌인데 얼굴정도는 알고 지내야 되지 않겠냐구."
젊은 총각인데 참 예의도 바르지. 요새 이웃집에 떡 돌리기가 그렇게 쉽니? 아까 보니까 키도 훤칠하니, 얼굴도 멀끔하고. 어?
얼이 빠진 내게 들릴리 만무했지만 엄마는 계속 말을 이어 덧붙이셨다.
언뜻 들으니까 뭐,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 …뭐?"
" 잘생겼다구. 이름도 홍빈이라던데. 뉘 집 아들인지 참 잘나선."
" 아니 그 전에!"
" 너랑 같은 고등학교라고?"
조용해진 집 구석엔 동생새끼가 개그프로를 보며 쪼개는 소리와, 엄마의 설거지소리뿐이였다.
" 엄마. 나 전학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안돼?"
아님 코팅 잘된 철판이라도 구해주던가.
방학 내내 이렇게 암울했던 적은 또 처음이네. 한숨 자꾸 쉬면 땅 꺼진다 그랬는데, 땅이라도 꺼졌으면 좋겠다. 마침 재방송 하는 영화에선 이따위 대사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 알 이즈 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