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오지 마세요.
억지로 내뱉은 목소리에 잔뜩 억눌린 화가 담겨 있다. 어머니는 잠시 추스르지 못한 표정을 내보이더니 곧 방문을 소리 나지 않게 닫았다. 주먹을 꽉 쥐었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뒤섞여 뛰는 심장의 떨림이 여실히 머릿속을 울렸다. 몇 번 걸음을 내딛다 이내 쓰러지듯 침대로 몸을 뉘였다. 향내가 났다. 그립고 애달픈 향내. 나는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머릿속을 헤집는 어지러운 상념들이 역겹다. 눈을 질끈 감고 안정하려 애를 써본다. 안정은 커녕 속을 더 뒤집어 놓을 뿐이었다. 실타래처럼 엉킨 정신이 머릿속을 방향도 모른 채 굴러다닌다. 뭉개어 다 어그러진 감정들이 하나 둘 씩 떼어지고 흩어져갔다. 결국 길고 뜨거운 숨을 한 차례 뱉어냈다. 곧 가슴 가득 밀려오는 감정에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 내고 싶어졌다. 변..백현.
너, 나 좋아해? 왜 그렇게 맨날 쳐다보냐 너? 말은 한 마디도 안걸면서. 장난기 가득한 그의 음성이 정확히 귀를 파고 들었다. 그리고는 살풋 미소 지은 그가 나풀거리는 발걸음으로 진 벚꽃들을 밟으며 빙그르 뒤돌아 걸어간다. 말 없이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는 곧 그가 스쳐지나간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동그란 뒷통수, 가벼운 걸음걸이, 잔상이 남는 웃음기 어린 얼굴. 그리고 내 가슴은 한 없이 일렁이고 있었다. 변백현. 나의 첫사랑이었다.
나는 변백현을 좋아했다. 그리고 백현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 또 왜 시작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느순간부터 제법 울하게 만드는 미묘한 백현의 얼굴이, 멀리서 보이는 귀여운 뒷모습이, 투정 부리듯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하나 되어 심장에 조그마한 바람을 일으켰을 뿐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다고 단정지었을 뿐이었다. 점점 그를 볼 수록, 가까이 할 수록 제 심장에 일고 있는 것은 바람이 아닌 커다란 태풍이라는 사실을 아주 뒤늦게 안 것은 아니었으니.
난 꽤나 거침없었다. 원래같았다면 묻어버리고 말 것들도 백현의 앞에선 잘 되지 않았다. 그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있고 싶었고, 더 자세히 보고 싶었고 더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것을 백현에게 망설임없이 드러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하는 사랑고백은 하루 세 번 밥 먹는 것과 엇비슷한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것이 되어버릴 정도였다. 그런 날 백현은 지겨워했다. 짜증 섞인 말로 내게 뱉어대는 것들엔 꽤 많은 것들이 함축돼있었다. 지루함, 당연함, 그리고 열등감같은 것들. 나는 그런 백현이 가엾고도 좋았다. 거창한 이유따윈 필요없이 그저 백현이기 때문에 그의 모든 것이 좋았다.
백현아 사랑해.
나는 그에게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고백하곤 했다. 가로등 아래 올곧게 저를 향해 서 있는 나를 한 번 돌아보고 말 없이 다시 시선을 거둔 뒤 집으로 들어가는 것. 그것만이 나의 고백에 대한 미미하고 유일한 반응이었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했다. 대답은 바라지 않았다. 그저 가끔 어딘가 모르게 상처받은 눈을 내보이곤 하는 백현이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주길 바랐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반복속에서, 내 예상과는 다르게 지겹고 일상적인 고백에 역정을 내며 싫은 티가 역력하던 백현과 시나브로 가까워지고 있음을 나는 곧 알아챘다. 백현은 모르는 듯 했지만.
백현은 비뚤어졌다. 백현을 좋아하지만 내가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와 가깝지 않았을 땐 느끼지 못했던 것이 같이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나를 내보일 수록 극명하게 다가왔다. 오직 내게만이었다. 백현이 날 선 눈빛으로 짜증 어린 투정을 하는 상대는, 또 매일 받아주는 상대는 오로지 나였다. 그의 속을 다 들여다볼 순 없었으나 그저 그 사실에 만족했다. 알 수 없었지만 행복했다. 비뚤어진 그가 자꾸만 아닌 척 기대려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또 그런 모습은 정말, 아주 어쩔 수 없이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그래서 난 '비뚤어진 그'에게 더 깊게 파고들었다. 끝을 모르고 돌진하며 침투했다. 그의 속마음이 바닥까지 드러날 때까지.
"그래도 너 하난 알아줘서 다행이네"
"..."
"진짜 뛰어내리고 싶었는데"
백현이 제 모든 것을 털어놓았던 것도 그때즈음이었을 것이다. 웅얼거리며 무어라 말을 더 내뱉고는 눈물을 뚝뚝 흘려대는 모습이었다. 백현의 말들을 들으며 나는 그때서야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비뚤어진 백현의 날 향한 열등감을. 마구 솟아오르며 퍼져나오는 감정은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가여웠다. 그리고 사랑스러웠다. 나는 백현을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대신 그의 축 처진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그리고 습관처럼, 하지만 진심을 담아 힘을 실어 말해주었다. 나를 믿으라고. 너를 사랑한다고.
응. 그리고 처음으로 그의 대답을 받아내었다. 나는 예상치 못한 백현의 대답에 벙쪄 그를 눈 한번 깜빡이지 못하고 쳐다보았다. 곧 백현이 고개를 살짝 들어 쳐다보는데 어딘가 부끄러운 구석이 있는 얼굴이었다. 무언가 간질간질거렸다. 백현의 대답이 단순한 것이 아닌 무언가 의미 있는 것으로 다가왔기에. 그 오묘한 기류에 입을 떼기 전에 백현이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숨을 가득 들이켰다.
나 지금
대답해준거야.
그가 확인사살했다. 그리고는 제대로 알아차리기도 전에 침대 언저리에 걸터앉은 몸을 일으켜 세운 그가 뒤돌아 보지 않고 방을 빠져나갔다. 남겨진 난 한참이나 머리가 댕댕 울렸다.
백현과 발을 맞추어 걷고 있었다. 가끔 돌아보면서, 무심한 척하는 그의 귀여운 얼굴도 살피면서 손을 맞잡고. 그리고 자주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사랑해. 그러면 그는 당연하게 입을 꾹 다물고 짐짓 무표정을 짓곤 했다. 일부러. 귀여워. 볼을 꼬집어 주려고 손을 가져다 대면 얼굴을 확 구기며 손을 쳐냈다. 진짜 얼음공주 같아. 살풋 웃으며 내뱉으면 백현은 또 입을 굳게 다물고는 날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축 쳐진 눈꼬리가 몰래 날 향해있을 때면 꼭 사랑한다고 말해달라 애원하는 것 같아 몇 번이고 말해주었다. 사랑한다고. 헌데 그는 답이 없었다. 나는 그런 백현이 모순적이라 생각했다.
백현과의 첫 키스는 꽤나 이르고 달콤한 것이었다. 그저 평소답지 않게 먼저 집에 말도 없이 제 발로 찾아와 문을 열어달라고 하였을 때부터 나는 어느정도 눈치를 챘다. 무언가를 저지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는 말이다. 평소 그가 먼저 연락하기를 자처한다거나 날 찾는다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할 만큼 드물었기에 갑작스러운 백현의 방문은 충분히 설렐만 했고 그가 예뻐보일만 했다. 애써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확인받는 존재감이라던가, 그에게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나라는 것을, 아니 정말 내가 맞다는 것을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은 백현의 방문으로 말끔히 해결됐다. 말하자면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내 말은 그렇게 사람을 잔뜩 설레게 해놓고선 새침하게 소파에 앉아 눈만 흘깃거리는 모습이 너무 참을 수 없었다는 말이다.
어느 순간 자연스레 맞닿은 시선에 나는 기습적으로 백현에게 입을 맞추었다. 백현은 거부없이 오히려 목에 팔을 감으며 적극적으로 내게 매달려 왔고 점점 농도 짙은 키스로 변해갔다. 그 때 나는 백현에게 처음으로 소유욕을 느꼈다. 그러니까, 감히 엄두도 못내던 귀한 공주님같은 분을 잠시나마 가진 듯한 느낌에 조금의 욕심이 밀려왔다는 말이다. 원래 백현이 내게 그런 존재였다. 퇴짜라고 표현해야 할진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그에게 여럿 거절을 당하면서 항상 들었던 생각이었다. 백현은 그 말을 싫어했지만 뭐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그랬던 백현에게 처음으로 소유욕을 느낀 게 백현과 처음으로 키스했을 때였다. 그래서 백현과 키스했다던 그 여자애가 죽도록 싫기도 했고. 첫 키스가 아니라 아쉽다는 말에 진실을 토로한 백현에 사실 욕심이 더 부푼 것도 사실이긴 했다.
사랑해. 나는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이 말을 되뇌었다. 단 한 사람 오직 백현에게. 내가 진심을 담아 고백하면 그는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하게 말 없이 가만히 있기만 한다. 나는 어느순간부터 그런 백현을 보면 조금 불안했다. 욕심은 점점 커져만 가는데 백현은 쉽사리 손에 잡히질 않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조금 놓치면 금방 날아가버릴 것만 같은 존재였다. 그럴 때면 나는 백현이 처음으로 대답을 주었던 때가 생각나곤 했다. 응. 짧지만 깊게 파고 들었던 그 한 마디가 이젠 무뎌져 조금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응. 그냥 대답일 뿐인데. 아님 내가 너무 큰 의미부여를 했던걸까. 가끔 나는 우울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날 사랑한다고 말한 건 아닌데. 턱을 괴고 고뇌하다 인상도 찌푸렸다. 내가 지겨워졌나. 충동적으로 든 생각은 항상 금세 기분을 밑바닥까지 추락시키곤 했다. 그러다가도 고개를 세차게 저어댔다. 변백현은, 날 좋아해. 자기합리화하며 애써 기분을 풀어보았다. 무슨 근거로? 그러다 다시 추락. 그 끊임없는 반복속에 매일을 보냈다.
백현과의 관계가 변했다고 해서 백현의 사랑을 처음부터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백현이 대답을 주었던 것은 그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고 또 울분을 털어내며 울컥했던 순간이었으니 분위기에 취해 한 말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단지 백현을 좋아하는 것 자체가 행복했고 만족했다. 문제는 그 이후 소소한 백현의 변화에 기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백현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것에 만족했던 내가,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대답을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대완 달리 백현은 여전했고. 그럼 난 또 속을 앓았다. 악순환이었다.
그럼에도 나의 열여덟은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기쁨이 존재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온종일 즐거웠다. 틱틱대는 모습은 귀여웠고 몇 번씩 몰래 날 힐끔이는 모습은 사랑스러웠다. 그가 나와 같은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는 의심스러웠으나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라고 결론내렸다. 그저 그와 함께 있다면 행복했기 때문에. 옆에만 있어준다면 상관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감정을 억누르기를 일상 삼았다.
우리의 관계는 안정적으로 흘러갔다. 서로 안아주었고, 키스했고 또 항상 같은 하루를 보냈다. 나는 변한 것이 없었고 그 또한 그랬다. 변화는 우리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었다. 백현이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본 후 늦은 밤 집에 들어간 날이었다. 조금 기운 빠진 얼굴로 언제나처럼 방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건 어머니였다.
찬열아, 요즘 만나는 애 있니.
묵직한 정적이 거실을 잠식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고 망설였다. 어머니는 내게 괜한 것을 물은 적 없는 분이셨기에. 네. 하지만 그럼에도 난 올바르게 대답했다. 어머니의 마녀같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저, 들어갈게요. 일부러 급하게 걸음을 떼었다. 등 뒤로 어머니의 날 선 음성이 흘러왔다.
요즘 찬열이 너 성적 많이 떨어졌던데.
…어떻게 아셨어요? 아무렇지 않은 척 주스 한 모금을 들이킨 후 지나가는 말처럼 지껄였다. 어머니는 내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리모컨을 누르며 TV에 시선을 고정한 어머니는 무표정했다. 불편한 소음이 일순간 사라졌다. 어머니가 TV를 꺼버린 것이었다. 꽤 오래 됐지? 나는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아셨는데요. 내뱉지 못하고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는 유리컵을 쥐고 아무렇지 않은 척.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그 애 이름이 백현이니? 나는 쥔 유리컵을 떨어뜨릴 뻔 했다.
나는 내가 허점이 많았단 것을 깨달았다. 딱히 숨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었으나 밝힐 생각은 없었던 게 사실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백현을 집에 들인 적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난 조금 두려워졌다.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란 것이 있었다. 요즘 찬열이 너 성적 많이 떨어졌던데. 어머니에게 처음 듣는 말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성적이 급격히 떨어진 것이 처음이었다. 무관심한 듯 하다가도 어머니는 가끔 내게 물어왔다. 아직도 그 애랑 만나니? 나는 식은 땀이 흐를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물었다. 왜 물으세요. 그러면 어머니는 왠지 모르게 체념한 얼굴을 하며 고갤 돌리곤 했다.
* *
너무 늦어버렸네요..ㅠㅠㅠ
외전은 2화까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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