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司의 相思
2
W.페리도트(前희희)
터덜터덜 힘이 죄다 빠진 몸뚱아리를 힘들게 끌고와 따듯한 욕조물에 몸을 담갔다. 신입이라 회사적응기라며 일을 조금 줘서 피곤하지않을 거라 하겠지만은 결코 그러지 않았다. 다들 상사의 눈치를 보느라 힘들다고, 상사가 너무 깐깐하다고, 상사가 너무 부려먹는다고 힘들어하지만 백현은 다른 의미로 힘들었다. 뭔 말만하면 이상하게 흘러가니 말도 못하고 눈치보느라 힘들었고 너무 깐깐하기는 무슨, 띵가띵가 놀면서 신입사원을 놀려먹는 상사에 힘들었다. 백현은 따듯한 물속으로 머리를 푹 담갔다. 에이, 잠수나 하자.
유라와의 대화를 곱씹었다.
"그, 도, 도 팀장님 대체 뭐예요?! 왜 조심하라 하셨는지 알 것 같아요!!"
"첫날부터 많이 깨지셨어요..? 무슨 일을 맡으셨길래.."
"일이요? ..일은 그냥 일했는데요? 아니 그나저나 그분 게ㅇ,"
"많이 무섭죠? 어떡해.."
"네?"
유라는 앞의 백현이 어디 다친 아이마냥 미간을 찌푸리며 걱정의 투로 말하고 있었다. 무섭다니? 아, 무섭긴 무섭지. 뽀이뽀이하면서 들이대는데 그게 안 무서울 리가. 백현은 네, 무서워요. 라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도 팀장님 그런 걸로 유명해요.. 어떡해요."
...게이스럽게 하는 게 유명하다고? 헐. 왜그래요 팀장님? 신성한 회사에서. 백현은 유라의 말에 더욱 부들부들 떨었다. 혹시 매니저님도 희생양은 아니셨을까. 사무실을 따로 분리해놓은 건, 한명씩 데리고와서.. 농..농락, 백현은 눈을 꾹 감았다. 안 돼요!! 유라는 화들짝 놀랐다. 백현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한편의 영화가 제작되고 있었다.
"얼마나 무서우셨으면.. 도 팀장님 회사 내에서 호랑이 팀장으로 유명해요. 깐깐하시고. 게다가 회장ㄴ,"
"...호랑이 팀장이요?"
호랑이? 호랑이가 게이였던가?
"네. 저도 들은 거라 잘 모르겠는데 진짜 되게 무서운 팀장님이시래요. 그래서 직원들이 다 팀장님이랑 팀을 꾸리는 걸 싫어했다던데. 여직원들도 그 팀장님의 외모만 보고 달려들었다가 울면서 나왔구요.. 눈치도 엄청 보게 된다네요! 그런 팀장님과 엄청 까칠하시고 무뚝뚝하신 박 매니저님까지 한 사무실에 있으니 말 다했죠. 아무도 거기에 들어가기 원치 않아했는데.."
...? 뭐요?
"아니 잠깐만요."
"아무튼 조심하세요. 일 실수를 많이 하신 것 같은데.. 오늘 지각하셔서 더 화내셨을 거에요. 팀장님 지각하시는 거 되게 싫어하신다고 들었거든요. 조심하세요 정말."
저는 할 일이 쌓여서 죄송! 유라는 백현의 어깨를 몇번 토닥이고는 계단을 빠져나갔다. 백현은 유라가 한 말이 전혀 와닿지 않았다. 혹 매니저님과 헷갈리신 건 아닐까했는데 또 그건 아니다. 백현이 오늘 하루 겪은 도 팀장은 유라의 말과 전혀 달랐다. 백현은 그 자리에서 계단에 푹 앉아버렸더랬다.
숨이 차서 물밖으로 머리를 뺐다. 푸하억!! 물을 먹어 축 내려앉은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조용한 화장실이 생각이 잠기기에 딱 좋은 것 같았다.
혹시 회사적응 잘하라고, 이제 제대로 부려먹으려고 채찍질하기 전에 당근을 주는 걸까. 보니까 띵가띵가 놀던데 설마 그것도 다른 직원들한테 다 맡기고 노는 건가.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생각에 백현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망했다. 경수가 더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언제나 어김없이 어둠의 밤은 사라지고 맑고 밝은 아침이 찾아온다. 삐비비빅, 삐비비빅. 백현의 침대 옆 책상의 위에 놓인 알람도 그러했다. 7시 정각. 백현은 부스스 일어나 눈을 부벼댔다. 조금 더 자고싶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으나 어제처럼 될까봐 알람을 끄고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곧장 화장실로 직행했다. 칫솔에 치약을 쭉 짜서 입에 물었다. 여기저기를 들쑤시며 치카치카. 물을 입에 가득 채워 우글우글. 퉤! 백현은 짱짱한 이를 씨익 들어내며 빤딱빤딱한 이를 확인했다. 빤따스띡.
대충 세수와 머리를 감고 나온 백현은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전자레인지 위에 놓인 즉석밥을 언제나 그랬듯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렸다. 크지 않은 냉장고를 열었다. 항상 냉장고를 열면 드는 생각이 ‘냉장고 대체 왜 샀지.’ 이거였다. 냉장고를 산 게 무안할만큼 냉장고는 텅텅 비어있었다. 이미 전자레인지에 넣은 즉석밥에게 미안할 정도로. 에라 모르겠다. 아침은 그냥 가다가 샌드위치같은 거 사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회사 옆에도 샌드위치나 커피숍이 있으니 먹을 곳은 충분했다.
백현은 약간은 널널한 시간에 한껏 멋을 부리며 여유를 만끽했다. 옷도 제대로 갖춰입고 넥타이도 몇번이나 고쳐맸다. 빤따스띡.
"다녀오겠습니다아~"
아무도 없는 집에 큰소리로 인사하고 나온 백현은 발걸음이 가볍다가도 무거워졌다. 걸음이 점점 주눅들듯이 축축 처졌다. 이젠 채찍을 맞으러 가는 걸까. 이젠 매일매일이 야근이겠지. 백현은 곧 닥칠 거라고 예상했다. 도 팀장의 파워채찍질이.
"뽀이~ 긋뭘닁."
은 무슨.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온 백현의 눈 앞에는 어제와 똑같은 포즈(책상에 두다리를 꼬아얹는)로 왼쪽 손으론 커피잔을 들고 오른손으로 샤랄라하게 인사하는 도 팀장이 보였다. 발음 겁나게 굴리네. 백현은 꾸벅 인사를 했다. 호랑이는 게이동물이었나보다. 자신이 알지 못했던 정보에 백현은 공부나 할 걸이라며 생각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앞에는 백현이 온 후에 바로 사무실로 출근한 박 매니저는 가방을 내려놓고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다듬고 있었다. 도 팀장이 ‘찬열씨 안녕.’ 낮게 말하자 박 매니저가 도 팀장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백현은 곧바로 자리에 일어나 머리를 숙였다.
"매니저님 안녕하세요!"
"........"
매니저는 책상 넘어로 힐끔 쳐다보더니 그대로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도 팀장은 닫힌 문을 바라보며 ‘팕 매늬졀 Bye~’ 라며 발음을 열심히 굴렸고 백현은 머쓱해진 뒷덜미에 손을 얹었다. 샌드위치를 먹으려 포장을 탁, 뜯으려는 순간에 도 팀장이 생각났다. 상사에게도 드리는 게 예의겠지. 뭐 샌드위치는 2개니까.
"저, 팀장님."
"응."
"샌드위치 드실래요?"
"혹시 너가 샌드위치니?"
예? 백현은 무슨 소리인지 몰라 되물었다. 그러자 팀장은 푸흑,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먹을래."
"여기요!"
"샌드위치가 너라면 Boy."
"......."
가만히 팀장을 쳐다보았다. 입이 떡 벌어졌다. 님아 자제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채찍이 당근보다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채찍질이나 해주세요. 백현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자마자 도 팀장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큭큭 웃겨. 나 아침 먹었으니 백현씨나 드세요. 도 팀장은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서류를 들고 사무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것까지 확인하다 바로 샌드위치를 와구와구 입에 쑤셔넣었다. 솔직히 도 팀장이 진짜 받아먹었으면 조금은 슬플 뻔했다. 두개 먹어도 배가 안 찰 것 같았거든. 백현은 막 쑤셔넣다가 갑자기 들어온 누군가에 화들짝 놀라 입에 한가득 넣은 얼굴로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방 매이엉임(박 매니저님)....!"
"...드시던 거 드세요."
뭔가를 빼먹고 나갔던 건지 박 매니저는 서랍을 뒤지더니 곧 나가버렸다. 웃음소리가 약간 들린 것 같았다. 백현은 양볼에 가득찬 샌드위치를 우물우물 씹었다. 막 먹다가 제 책상을 보는데 미처 발견 못했던 종이들이 보였다. 두툼하게 쌓인 종이들 위에는 노란 포스트잇이 있었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각 장마다 17장씩 복사해서 10층 회의실에 묶어 놓으면 뽀뽀해줄게. -도경수]
막 날려쓴 글씨지만 조금 깔끔한 글씨체였다. 각 장마다 17장씩하면.. 꽤 많은 양인데. 아니 그것보다 뭐? 뽀뽀?! 백현은 자기가 잘못 읽은 거다 싶어서 다시 차근차근 읽었다. 저건 가까이서 봐도 멀리서 봐도 뒤집어서 봐도 ‘뽀뽀’ 였다. 백현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거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백현은 고작 경수가 장난으로 쓴 말로 5분을 고민했다. 왠지 도 팀장이라면 진짜 뽀뽀할 것만 같았다. 왜? 호랑이니까. 이미 백현의 머릿속 사전에서는 호랑이는 육식게이로 정의되고있었다.
일단은 필요한 자료인 것 같으니 하긴 해야할 것 같았던 백현은 손에 가득찬 종이들을 갖고서 앞에 위치한 ‘디자인마케팅 1’ 사무실로 갔다. 들어가자마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백현에게로 꽂혔다. 경은씨, 저 사람이래 저 사람. 저 분이 그 신입사원? 헐 그래? 불쌍해라.. 도 팀장님과 박 매니저님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며칠 안 돼서 해고 당하는 건 아닐까몰라. 저 분 경수씨가 직접 채용한 거라며? 그래? 아니 소문이긴 한데.... 쑥덕쑥덕. 백현의 귀에 꽂히는 이야기들이 다 자기와 관련된 얘기라는 걸 알았다. 도 팀장이 직접 채용? 그건 소문같고. 백현은 머릿속에서 자체필터링을 하기 시작했다. 다들 유라와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둘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백현은 복사기를 돌리면서도 갸우뚱했다. 그때였다.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걸어오는 한 여직원.
"저기요, 옆에 디자인마케팅팀으로 새로 들어오신 분 맞으시죠?"
"아, 네."
"경수씨 많이 무섭죠."
"네."
게이가 무서운 건줄 몰랐어요. 백현은 복사기에 눈을 돌렸다. 여직원은 뒤를 돌아보며 동료들에게 입모양으로 ‘야 이미 왕창 깨졌나보다, 표정이 장난 아닌데? 무슨 변 씹은 마냥.’ 라며 소식을 알렸고 뒤에선 웅성웅성거렸다. 백현이 휙 돌아보자 조용해졌다. 응?
"제가 경수씨랑 팀을 한 적이 있어서 그 고통 잘 알아요.. 힘내세요."
".......?"
여자한테도 그런 짓을 한단 말이야? 백현이 화들짝 놀랐다. 정말요? 팀장님께서 설마 여자한테도..!
"네. 많이 당했죠."
엉덩이를 만진단 말야?! 백현은 경악했다. 여직원은 힘내세요. 그래도 좋은 분이세요. 라며 어깨를 토닥이고는 휙 가버렸다. 호랑이는 게이가 아니고 변태동물이었던가. 백현의 머릿속이 호랑이로 가득찼다. 호랑이 한마리, 호랑이 두마리, 호랑이 세마리. 그러다 곧 호랑이 얼굴이 도 팀장의 얼굴로 바뀌어버린다. 으악! 백현이 머리를 쥐어잡자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어떡해 어제 처음 오셨다던데! 많이 무서우신가봐! 그러게 왜 가서 도 팀장 얘기를 꺼냈어! 딱 보니까 이쪽에 와서 좀 쉬려는 것 같던데! 백현 혼자만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늘어졌다.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회사 상사라고 성추행까지 한단 말이야? 이건 보통 상습범이 아닌데? 백현의 영웅 마인드가 백현의 콧구멍, 귓구멍 등 온갖 구멍에서 폴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어디서 정의로운 냄새나지 않아요? 내 정의로움이 타고있잖아요..☆★ 죄없는 직원들을 성추행하다니! 그럴 순 없어! 백현은 배꼽부터 코끝까지 오는 높이의 종이를 쌓아들고는 위태롭게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를 손이 없어 팔꿈치를 요란스럽게 움직여가며 눌렀다. 곧 문이 열리고 낑낑대며 팔꿈치로 10층을 눌렀다.
10층에 내리자마자 종이탑이 위태롭고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백현은 어어어! 거리며 중심을 잡으며 걸어나갔다. 직원들이 다 백현을 피해 지나갔고 점점 심하게 탑이 흔들렸다. 쏟아질 것 같았다 . 그때였다.
"흐억!"
"어디로 갖다놓으면 됩니까?"
박 매니저였다. 무전기를 오른쪽 뒷주머니에 넣은 찬열은 백현의 종이탑의 반 이상을 가져갔다. 백현은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였고 10층 회의실로 가면 된다고 했다. 찬열의 오른쪽 뒷주머니에 무전이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회의실에서 뭔가 하는 것 같았다.
"회의해요?"
"네. 곧."
회의실의 문이 열렸고 그 안에 들어가자 비서 두 명이 열심히 테이블 사이를 왔다갔다 거리며 바닥청소를 하고 있었다. 찬열의 오른쪽 뒷주머니에 있는 무전기에서 회의시작 20분 전이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백현은 종이를 책상 위에 놓았다. 아무래도 이 종이들이 회의에 필요한 서류인 것 같았다. 도 팀장을 계급장 떼고 싸우는 건 나중 일이고 일단은 회의가 긴박하다. 찬열이 알겠습니다. 하고 무전을 보냈고 백현은 옆에 비서들이 커피나 요깃거리를 내오는 조그만 방에 들어가 스테이플러를 꺼내왔다. 시간이 없다!
찬열은 비서들을 총괄하고 있었다. 넓은 회의실에 비서 2명이 청소하고 셋팅하는 건 무리였다고 생각한 찬열은 2명을 더 부를 것을 요청했다. 백현은 미친듯이 스테이플러로 마구마구 찍기 시작했다. 아니 이게 뭐여 갑자기. 백현은 갑자기 들이닥친 긴박함에 손이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변백현씨 빨리."
"네!"
아니 전날 알려주던가 갑자기 심부름 시키더니 이게 뭐여. 앙? 백현은 불량한 속마음과는 다르게 굽신거리며 손을 빨리하고 있었다. 도 팀장님, 맞으실래요? 취직 이틀 만에, 백현은 상사에게 욕을 하기 시작했다.
다행이도 비서들이 일을 빨리 끝내고 달려와 도와주었고 회의는 탈 없이 시작되었다. 나갈 타이밍을 놓친 백현은 회의실 안에 갇혀버렸다. 결국엔 비서들 옆에 끼어있게 되었다. 높은 직급의 분들이 들어오시고 이 회사의 회장님도 들어오셨다. 다른 회사의 이사님들도 오신 것 같았다. 비서들이 인사를 하는 거에 맞춰 인사를 했다. 막 인사하고 고개를 드는데 도 팀장이 2명이나 들어온다. 엥?
전혀 다른 스타일의 도 팀장은 ‘도승수 이사’ 라는 이름표가 걸린 자리에 앉았다. 형인가? 아침에 보던 도 팀장은 비서실 옆의 방으로 들어간다. 이게 뭐시여. 백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비서실 옆방 문 사이로 작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씨! ...현씨!
"야 변백현!"
백현은 고개를 휙 돌렸다. 팀장님이었다.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는 팀장님에 후다닥 들어갔다.
"뽀이. 내 심부름 잘 했네?"
도 팀장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 노란 포스트잇과 그 여직원과 또 그 또다른 도 팀장의 얼굴이 생각났다.
"고마워요. 변백현씨."
도 팀장의 얼굴이 다가온다. 설마! 백현은 고개를 뒤로 쭉 빼고 눈을 꾹 감았다. 안 돼 이 변태시끼야!! 어딜 남자를 탐하려고!! 끄아악!! 속으로 온갖 비명을 질러대는데, 입술 사이로 뭔가 들어왔다. 어떻게든 입에 들어오는 걸 막으려고 난리를 치는데, 끄으흐븝 음... 달콤한데..? 뺨이 두어번 톡톡 건드려졌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뽀이."
화들짝 놀라 눈을 뜨자 팀장은 앞에 더이상 다가오지 않고 가만히 멈춰있었고 입술 사이엔 화이트 초콜릿이 물려져있었다. 뽀뽀는 아니었구나. 백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입을 오물대며 앞을 쳐다보는데 바로 도 팀장과 눈이 마주쳤다. 약간은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백현은 빠르게 말을 꺼냈다.
"근, 근데. 밖에 팀장님이랑 똑같이 생기신 분이..."
"아, 형이야. 여기 회사 이사직."
"헐."
"뽀이, 자꾸 다른 남자 보네? 나한테 집중하랬지."
"...아하하. 아하하...아.."
"나 회의하는 거 잘 봐."
경수는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백현은 나가는 경수를 보다 따라 나갔다. 회의실 문 앞에 서있는 찬열을 발견한 백현은 찬열의 옆에 서서는 작게 소곤거렸다. 수고가 많으세요. 찬열은 그런 백현을 쳐다보다가 검지를 자기 입술에 갖다붙였다. 조용히하라는 손짓이었다. 무안해진 백현은 아예;; 라는 표정으로 맨 앞에 회의준비를 하고있는 팀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회의실에 불이 꺼지고 프로젝터에서 빔이 나왔다.
1시간 가량의 회의였다. 도 팀장은 멋지게 회의를 이끌어나갔고 높은 직급의 분들은 서로 의견을 주고 받았다. 성공적으로 끝낸 회의였다. 끝까지 인사를 마친 백현은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진이 다 빠지는 듯 했다. 나가자마자 다른 회사의 이사들과 인사를 나누고 회의실로 들어오려는 팀장과 마주쳤다.
"어땠어요?"
"회의요? 잘하셨어요. 멋있었어요."
"뻑갈 만큼?"
에휴. 백현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팀장은 푸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백현은 그런 팀장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지금 이렇게 어색하게 웃을 상황이 아니지.
"도 팀장님. 저 지금 몹시 도 팀장님께 실망스러운데요."
"응? 뭐가."
백현의 단호한 말에 웃음을 멈춘 경수는 물음표로 가득찬 얼굴로 나니?ㅇㅅㅇ 이러고 있다. 백현은 말을 이었다.
"회사 상사라는 명분으로 여직원을 그렇게 성추행하시면 돼요? 저한테 장난으로 그러신 건줄 알았는데 완전 상습범이더군요!"
"뭐라고?"
"정말, 여자 엉덩이를 만지시는 분이라니. 저는 팀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뭐라는 거야 뽀이. 성추행이라니. 누가 그런 헛소문을 내."
계속되는 백현의 말에 점차 미소짓던 경수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백현은 흠칫 겁을 먹었다. 점점 가라앉은 팀장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백현은 그, 그게. 라며 지레 겁을 먹었고 팀장은 누가 그런 헛소문을 내냐며 캐묻기 시작했다.
"회사 내에 안 좋은 소문이 도는 건 회사의 분위기를 망치는 행위야."
"...아니.. 디자인마케팅 1에... 아 몰라!! 다들 팀장님 조심하라고 무서운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다들 저처럼 당하셨다던데요! 그말은 즉슨 팀장님이 다른 직원들의 엉덩이 만지고 막 기분나쁘게..!"
"뽀이, 기분이 나빴어?"
"네에!!!..네? 네? 아, 아. 아니요?"
헐, 실수. 말실수. 엄마야. 상사에게 대놓고 기분 나쁘다는 말실수를 해버렸다. 미쳤다. 와!! 변백현이 드디어 미쳤다!!! 백현은 속으로는 백번 천번 자기 머리를 쥐어때리며 아니라고 급하게 말을 꺼냈다. 손사레를 치며 부정을 하는데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미 표정을 굳힌 도 팀장은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어디서 누구한테 그런 소리를 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난 직원들을 성추행한 적 한번도 없어."
"아니, 저.."
‘저, 도 팀장님! 여기 2013 하반기 매출액과 2014 상반기 예상 매출액 조사 그리고 2014 트렌드에 맞춘 디자인을 직원들끼리 만들어서 장단점과 효과를 조사한 서류입니다! 팀장님 한참을 찾았어요!’ 라며 어느 여직원이 달려온다. 뾰족구두를 신고서 잘도 달려왔다. 아까 복사할 때 뒤에서 웅성거리던 직원들 중 한 명이었다. 백현은 그 여직원때문에 말이 묻혔고 팀장은 뒤에서 달려와 서류를 건네는 여직원을 쳐다보다가 서류를 받고 백현을 쳐다보았다.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해요."
"어.. 아니.."
"할 말 끝?"
백현이 아무 말을 하지 않자 경수는 그대로 시선을 여직원이 건넨 서류로 돌렸다. 팔랑팔랑.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 복도에 가득 울렸다. 백현은 뭔가 자기가 오해를 했다고 생각을 해버렸다. 여직원은 백현을 쳐다보았다. 분명 또 엄청 꾸지람을 들은 거 같은데. 여직원은 가만히 멍때리며 팀장을 쳐다보는 백현을 바라보았다. 불쌍하다고 생각할즈음 팀장이 서류를 닫았다. 이게 끝입니까?
"예? 예! 그, 그렇습니다!"
"다시 해오세요."
"...네?"
"상사의 말을 제대로 안 듣는 건 무슨 예의없는 행동입니까. 다시 해오시라구요. 지금 이걸 디자인이라고 하신 겁니까? 겨우 이 디자인가지고 이런 큰 효과를 바란다고? 지금 회사 몇년 찹니까. 4년 차나 되어서 월급은 그렇게나 많이 받아먹으면서 겨우 이딴 거나 그려냅니까?"
"........"
백현은 팀장과 여직원을 쳐다보았다. 앞에 보이는 팀장은 어제와 오늘보던 그 빌리빌리팀장이 아니었다. 험악해진 분위기에 겁먹은 백현은 자기때문에 화난 채로 여직원을 혼내는 것 같아 점점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엄마 나 지옥으로 풍동스. 회사 생활이 이런 것이었던가. 도 팀장의 꾸지람은 계속되었고 점점 그럴수록 여직원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혼자만 이해 못했던 백현은 저절로 유라와 그 여직원의 말을 이해해버렸다. 자기 혼자 오해했던 것이었다. 그들의 말은 정확했다. 분명 백현 자기 자신에게 보여줬던 도 팀장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도 팀장과 달랐다.
결국 여직원의 눈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져나왔다. 경수는 여직원에게 서류를 넘겼고 훌쩍이던 여직원은 그대로 돌아가버렸다. 백현은 그제서야 복도에 둘 밖에 남지 않은 것을 알아채버렸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오해를 했나봅니다. 정말 죄송합,"
"나는 말야."
"........"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어."
".......?"
"오해하지마 뽀이. 러브라이프를 즐기기도 모자란 우리 시간을 이렇게 어색하게하면 되겠어?"
예?
"그리고 앞으로도 성추행할 생각없어."
".....???"
"니가 있는데 뭐하러."
나니? 나니요? 왓?
경수는 백현의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백현이 몸을 한껏 움츠리자 경수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으며 백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자. 먼저 가는 경수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황급히 따라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몇 안 기다리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올라탄 엘리베이터에서는 경수와 백현, 둘 뿐이었다. 아직도 어색한 감이 흘렀다. 백현이 조용히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전자판 숫자만 보고있자 경수는 백현을 쳐다보았다.
"뽀이~ 왜 그래~"
"화.. 안 나셨어요?"
"화? 뽀이. 우리 둘 사이에서는 러브러브만 존재할 뿐, 화란 건 존재하지 않아."
"아 제ㅂ.."
"씸씨만대 뽀뽀나할꽈아?"
"팀장님!!"
"장난임."
‘장난임ㅋ 푸헹ㅋ’ 마치 약올리는 듯한 표정의 팀장은 6층입니다, 라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그대로 가버렸다. 빨리 퇴근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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