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행복을 원합니다
아무도 고통을 원하지 않죠
하지만 비가 내리지 않으면
무지개를 볼 수 없어요
진흙이 잔뜩 엉겨 붙은 운동화 굽을 털어냈다. 지난밤, 거친 소나기에 섞여 들어온 불청객이었다. 아침부터 뭐야. 귀찮게시리. 허리를 숙여 대강 걷어내는 와중에도 완전히 말리지 못한 머리칼이 얼굴에 달라붙어 질척였다. 끈덕지게 따라붙는 철 지난 여름 냄새였다. 전신 거울 앞에서 멀끔함의 정도를 확인하다 곧바로 현관문을 열자, 때 이른 찬 바람이 훅 끼쳤다. 시계는 여덟 시를 가리키며 무언의 재촉을 했다. 구겨 신은 운동화를 질질 끌며 양팔 각각 가방과 가디건을 둘렀다. 아파트 공동 현관에 다다르자, 습관처럼 운동화 앞코를 톡톡 두드리는 익숙한 뒷모습이 보인다. 인기척에 문득 뒤를 도는 익숙함은 아이러니하게도 언제나 새로웠다.
- “안 추워? 아침 기온 장난 아니야.”
- “이제 가을인데 뭘.”
- “가디건 왜 이렇게 얇아.”
- “네 가디건이 두꺼운 거지.”
- “그럼 이거 입어.”
제 것을 무심히 건네며 두 눈을 깜빡인다. 얼떨결에 받긴 했으나, 입추와 어울리지 않는 두께에 아리송함을 감출 수가 없다. 혹여 계절을 잊는 병에 시달리는 건 아닌지 의심을 품고 있을 때, 한 발짝 앞으로 다가온 그가 자신의 것으로 직접 내 어깨를 감쌌다. 환절기 감기 무서운 거 알아, 몰라. 두어 번 앙증맞게 접은 소매가 대롱거렸다. 뿌듯함을 배로 얻은 주인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지훈아, 이거 입고 학교까지 가면 덥지 않을까?”
- “겨울이 덥나.”
- “가을이라니까.”
- “아픈 것보다 백배 낫다.”
귓등으로 들은 척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그는 손목시계를 흘긋거리며 지각의 유무성을 논했다. 기능을 상실한 얇은 가디건은 팔에 감긴 채 불가피한 추위에 떨었다. 이것은 입어줄 새 주인이 필요하다는 증상이었고, 그걸 놓칠 리 없는 옛 주인은 그것을 불쑥 내밀었다. 이지훈, 이건 네가 입어. 기브앤테이크 정신에, 그는 가만히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어깨 안 맞아. 당당한 말투에 오기가 생기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곧바로 교복 주머니에 잠긴 두 손을 잡아 가디건으로 둘러맸다. 이른 철 느닷없이 튀어나온 가디건 장갑에 당황함이 역력한 그였다.
- “이게 뭐야, 더워.”
- “겨울이 덥나.”
- “언제는 가을이라며.”
- “손 시린 것보다 천 배 낫다이가.”
역시, 받은 건 필시 돌려주는 기브앤테이크가 좋단 말이지. 가디건 소매 끝을 잡아당겨 예상대로 끌려오는 상대방을 향해 바보 따위의 입 모양을 내자, 그는 특유의 바람 빠진 웃음을 내며 예민한 귓가를 자극했다.
- “이런 게 취향인가. 묶는 거.”
- “그런 거 안 보거든.”
- “뭘 보냐고 묻진 않았는데.”
- “……그래, 나도 그 말 한 거야.”
- “혼자 또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모르겠어.”
- “와, 아침부터 진짜 대박이다.”
- “내 말이.”
그가 반듯한 송곳니까지 보일 만큼 늘어지게 웃는다. 새빨간 홍당무는 분홍 가지에 감긴 가디건을 우악스럽게 풀어내 멀찌감치 떨어졌다. 분명 지각을 하고 싶지 않아 빨리 걷는 것이다. 창피하다거나, 창피하다거나, 또한 미친 듯이 창피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학교로 향하는 마지막 신호를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구를 때, 그는 자연스레 내 옆에 서서 몸을 틀었다. 무척이나 여유로운 표정과 함께 말이다.
- “가을이 덥나.”
얼빠진 홍당무는 옆을 스치는 같은 교복 무리의 다급함과 횡단보도를 질주하는 승관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다음 신호가 오고 나서야 현실을 깨닫지만, 이미 한참이나 늦은 뒤였다. 대신, ‘아아, 첫날부터 지각했다’라는 역대 명언을 남기며 방긋 웃는 그가 있었다.
Oh My Rainbow
Kiss me hard in the pouring rain
Chapter. 10 〈그날의 우리>
‘좋아해, 지훈아.’
#35.
평범했고 또한 평범했다. 학년의 마지막 학기에 대한 열띤 응원과 흥분은 존재하지 않았다. 고요하고 고독한, 그야말로 냉기의 장이었다. 안경잡이 몇몇은 헌 참고서에 침을 발라 피치를 올렸고, 또 다른 이들은 그것을 베개 삼아 심연의 잠을 청했다. 어쨌거나 난 전자에 좀 더 가까웠다. 다만, 지루한 사이클의 종착 지점에 가까워질수록 평소보다 숨을 느리게 쉬는 연습을 했다. 같은 공간 속 다른 꿈을 꾸는 수 십만 명의 아이들의 심장, 유독 검푸른 내 것에 이질감을 느꼈다.
시험이 코앞인데 아프지 좀 마라. 형식적인 담임을 뒤로한 채 삭막한 교무실을 나섰다. 구름 한 점 없는 말간 오후였다. 가방 앞주머니에 구겨 넣은 조퇴증이 지퍼에 걸려 비명횡사를 했다. 찢긴 조각을 모아 복도 쓰레기통에 털어낼 즈음, 휴대폰에 띄워진 짤막한 문장에 괜한 콧잔등을 쓸었다. 수업이 끝나면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라는 지훈의 문자였다. 이유를 묻고 싶었으나, 건조한 손가락은 틈을 주지 않는다. 응, 나중에 봐. 어울리지도 않는 이모티콘까지 합세해 괜찮음을 표했다.
힘없는 발자국은 복도를 지나 1층 중앙 현관 계단을 밟았다. 당일 개봉한 듯한 파란색 빗자루로 계단에 낀 먼지를 진중히 털어내는 승관이 보인다. 날 보자마자 이마에 힘줄이 솟는 것으로 보아 단단히 화가 난 것이라. 생뚱맞은 안부로 분위기를 풀어보려 노력하지만, 웬만한 것으로 풀리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 “지각했어?”
- “아니.”
- “졸았어?”
- “아니.”
- “그럼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 “누가 연락을 밥 먹듯이 씹어 대서 걱정되느라 수업 시간에 딴생각 좀 했거든. 만나면 어깨 콱 물어버리려고 했는데.”
삐딱한 자세로 삐딱한 말투를 읊는다. 심지어 빗자루를 빙빙 돌려 지나야 할 길목까지 막고 있다. 뿌연 먼지가 공중에 일어 주변을 먹는다. 단단히 조인 가방끈을 그러쥐고 마른 입술을 적셨다. 변명이 필요했다.
- “그동안 문자 못 받았냐? 전화하면 다 씹고, 반으로 가면 맨날 숨기나 하고요?”
- “숨은 게 아니라, 정말 우연히 그때마다 진학 상담 있어서…….”
- “됐고, 왜 피하는데?”
- “계속 바빴으니까 갈 시간도 없었지.”
- “그래서, 연락 올 때마다 부재중으로 넘기고?”
- “……너 병원이랑 연락했어?”
- “야…….”
- “했어? 언제? 뭐라고 했는데?”
둔탁하게 내려친 빗자루가 구석에 파묻혔다. 창을 비집고 내리쬐는 햇볕에 잠시 눈을 감는다. 이렇게 해서라도 피하고 싶은 것이다. 승관은 작게 욕을 뱉었다. 극도로 예민해 하는 것도, 죽일 듯이 쏘아 보는 것도 당연한 처사였다.
- “이제 괜찮다며, 혼자 가도 괜찮다면서요.”
- “…….”
- “야, 너 사람 갖고 장난치냐?”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된 건 고등학교를 입학한 그 주의 금요일이었다. 엄마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며칠 밤낮으로 울던 나를 억지로 진료실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담당 의사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꼭 원래대로 돌아오게 해 달라고. 승관은 울다 못해 진이 빠져 허덕이는 날 감싸며 그들에게 말했다.
- ‘제가 같이 있을게요.’
……
- ‘걱정 마세요.’
친구를 잃어버린 건 부승관, 너도 마찬가지였으면서.
#36.
모든 사람을 거부했다.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치를 떨었다. 마지막 3년을 보낼 고등학교 문턱에서부터 삐걱거린 건, 어찌 보면 은수의 죽음 이후 예견된 결과였다. 그런 내 옆에서 승관은 묵묵히 등교와 하교는 물론, 진료받는 날도 어김없이 찾아봐 내 손을 움켜잡았다. 김여주, 쫄지 마. 괜찮아. 으레 습관처럼 진료실 앞에서 꿈쩍하지 않는 내게 건넨 투박한 위로였다. 그때마다 생각했다. 내게 있어 유일한 편은 이제 승관이 너 하나구나, 라고.
다른 반이었던 승관은 교실에서 가끔 내 험담이 들릴 때면 그들에게 윽박을 질러댔다. 죽인다 어쩐다 코앞까지 달려와 협박 아닌 협박을 한 적도 있었다. 좀 더 나아가 몸싸움까지 번지면, 승관을 ‘순둥이’라 불렀던 교사들마저 혀를 내둘렀다. 벌점과 교내 봉사와는 거리가 멀었던 승관은 종종 운동장에서 잡초를 뽑거나 화장실 청소를 도맡았다. 이유는 뻔했다.
- ‘아오 씨! 개새들이 뚫린 게 주둥이라고 똥을 뱉냐? 어?’
- ‘그만해…….’
- ‘줄 세워서 한 번에 계단 열 칸씩 내려가라고 하고 싶네 진짜로.’
잡초 뽑기에 열중하다 열이 뻗쳤는지, 퍼렇게 물든 목장갑을 내팽개치고 운동장에 벌러덩 누워 그날의 햇볕을 맞았다. 끝나고 라볶이 콜? 자신의 옆에 쭈그려 앉아 따가운 볕을 막아주는 내 손바닥에 주먹을 내민다. 대화의 끝은 언제나 라볶이였다. 정작 자신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메뉴였음에도.
그날 이후, 승관의 걱정으로부터 벗어나려 노력했다. 괜찮은 척이라던가, 부러 애들과 말을 트려 무리에 섞여 있다던가 하는 비정상적인 방법들로 날 괴롭혔다. 단발의 효과라도 내고 싶었다. 승관이, 그 아이가 걱정하는 만큼 난 그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물론 매일 밤마다 탈이 나 울곤 했지만.
- “안 그래도 지금 병원 가. 조퇴증도 끊었고.”
- “기다려, 가방만 챙겨서 나오게.”
- “됐어, 괜찮아.”
- “뭐가 괜찮아, 내가 널 모르냐?”
삐뚤어진 넥타이를 휘날리며 위층으로 향하는 승관의 손목을 잡았다. 정말 괜찮아, 혼자 갈 수 있어. 의심 많은 두 눈을 잠재우려 억지 미소를 짓는다. 승관은 공들인 머리칼을 벅벅 헤집으며 신경질을 냈다. 보충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에 잡다한 슬리퍼들이 복도를 울렸다. 마음이 급했다.
- “병원 다니는 거, 지훈이한테는 얘기하지 마.”
- “설마 이게 부탁이냐? 당연한 걸 가지고.”
- “고마워.”
- “지금은 고맙다는 말도 화나니까 빨리 가.”
도착하면 연락하든지. 승관은 먼지를 탕탕 털어낸 빗자루를 옆구리에 끼고 위층으로 사라졌다. 건물 벽에 매달린 전자시계를 확인하며 서둘러 건물을 빠져나왔다. 혹여 그와 마주칠까 간간히 뒤를 돌아보기도 했다. 굵은 햇살이 온 신경을 아릿하게 저며온다. 운동장 모랫바닥을 짓이기는 하얀 운동화, 또다시 진흙이 묻는다. 더덕더덕 붙는 진득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길을 걸었다. 털어내지 않는 것이다.
#37.
‘113호’ 팻말 앞에서 넋을 잃었다.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손톱을 물어뜯는 것도 꽤 오랜만이었다. 약국에서 얻은 청심환 비슷한 알약을 넘겼음에도, 울렁거리는 속은 도통 가시질 않았다. 김여주 님, 들어오세요. 사형 선고와 같은 부름에 다리를 달달 떨었다. 담당 의사는 직접 문밖을 나와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난 꽉 막힌 진료실에 발을 디디며 가벼운 묵례를 했다. 가시 돋친 대화의 시작이었다.
- “승관 학생이 걱정 많이 하던데, 왜 그동안 연락 안 받았어요? 치료를 제때 안 나오면 그만큼 기간도 길어져요. 그건 알죠?”
- “승관이 말고 엄마한테 연락하면 되잖아요.”
- “그렇지 않아도 어머님께 먼저 연락 드렸는데 모두 다 부재중이었고……. 병원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비상 연락망밖에 없었어요."
- “앞으로 전화 받을 테니까, 승관이한테 연락하지 말아주세요. 부탁이에요.”
- “여주 학생이 진료 약속만 잘 지키면 이런 일도 없죠.”
키보드에 바삐 손을 움직이던 의사는 안경을 벗어 테이블에 올렸다. 안부를 가장한 상담을 시작한다는 의미였다. 수험 생활은 어떤지, 교우 관계는 개선됐는지, 학교생활은 어렵지 않은지 따위의 불필요하고도 달갑지도 않은 질문들을 쏟아냈다. 대답은 하고 싶지 않아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알콜 냄새가 진동해야 할 진료실에 진흙 냄새가 났다. 운동화에 엉겨 붙은 진흙, 그것이 왜 은수를 생각나게 했을까.
- “선생님, 은수가 왜 죽었는지 아세요?”
- “…….”
- “진흙 냄새가 나서요. 옷을 빨아도, 몸을 씻어도 나는 냄새 때문에 죽은 거예요.”
- “…….”
- “그럼 그 진흙은 어디서 왔을까요.”
내 치료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그날, 그 시간 속에 은수를 남기고 오는 것. 그러니 내 대답은 그간의 노력을 헛되이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담당 의사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차트를 넘겼다.
- “부모가 던지고, 학교가 던지고, 사회가 던진 진흙에 맞아 죽었는데 왜 다들 모른 척해요? 왜 맞은 애만 불쌍해요? 은수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죽으려고 태어난 아이가 아닌데……. 수능 대신 봐 달라고, 어디서든 듣고 있겠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 말이, 자기는 죽어도 넌 죽지 말고 살아 달라는 거였어요. 난 병신같이 아무것도 모르고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어요.”
- “…….”
- “아직도 아침에 일어나면 연락 올 것 같고, 교실에 엎드려서 눈 감고 있으면 밥 먹자고 달려올 것 같아요. 그런데 눈을 뜨면 아무것도 없어요.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 그럼 전 그때 알아요. 아, 은수야 넌 죽었구나. 죽어버렸구나.”
그녀를 과거에 남긴 채 돌아와야 했을 목표는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가진 모든 기억에 언제나 그녀가 있었다. 떨쳐낼 수 없었다. 아니, 떨치고 싶지 않았다. 그날의 잔해들과 핏물은 닦아내도 닦여지지 않는 문신과도 같았다.
- “선생님, 제가 왜 아직도 살아있는 줄 아세요?”
- “…….”
- “수능 보겠다고 한 약속 지키려고요. 그래야 죽어도 떳떳하게 은수 볼 수 있으니까.”
약속했던 삼십 분의 진료는 그렇게 지나갔다. 의사는 어머님과 연락이 닿으면 바로 부르겠노라 몇 번이고 확인을 받아냈다. 부리나케 빠져나와 숨을 몰아쉬었다. 없던 발작 증세가 도진 모양이었다. 이윽고 수납 센터에서 받은 처방전을 정확히 사 등분으로 접어 어느 쓰레기통 안으로 처박았다.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는 다소 괜찮은 하루였다 생각했지만 말이다.
- “여주…… 김여주?”
- “…….”
- “뭐야, 약 안 받아가?”
버린 처방전이 다시 눈앞에 나타난 건 굉장한 우연이었다. 한 손에 든 아이스크림으로 날 가리키며 입가에 묻은 진득함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윤정한, 하얀 가운에 박힌 이름이었다.
#37.
병원 뒤뜰은 한적했다. 바로 앞에 산이 보이는 것도, 연못에 오리가 꽥꽥대는 것도, 반 토막이 난 아이스크림을 아까워하며 아껴 먹는 의사도 낯설다. 구겨진 처방전을 들고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내게, 그는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 가디건 지훈이가 아끼는 건데, 네가 입고 있으니까 되게 신기하네. ‘지훈’이라는 이름 아래, 바닥에 떨군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둥근 안경 너머 잔잔히 웃는 얼굴이 보인다.
- “원체 자기가 아끼는 건 손 하나 못 대게 해. 어렸을 때부터 소유욕이 강해서 알사탕 하나만 뺏겨도 으르렁댔다니까.”
- “상상이 안 가는데……. 이것도 추우니까 그냥 입으라고 준 거예요.”
- “그래서 신기한 거야. 얼마나 널 아끼면 그럴 수 있는지.”
- “쌤한테도 으르렁거려요?”
- “잘난 옷 한 번 뺏어 입지도 못했어. 지금도 그게 제일 한이야.”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흔들며 분노를 표한다. 그리고는 소개팅에 나가려 자켓 훔쳐 입다 걸린 이야기, 당시 신상이었던 게임기를 몰래 사용하다가 등짝 맞은 이야기 등, 지훈에 관련된 시시콜콜한 에피소드를 줄줄이 늘어놨다. 장단을 맞춰 웃는 와중에도 불안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되려 증폭했다. 지금과 같은 질문을 받고 싶지 않아서, 혹여 했다 하더라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 “그건 그렇고, 돈 내고 처방전까지 받았으면서 약은 왜 안 받아 가?”
- “…….”
- “갑자기 너무 깊게 들어 왔나? 하지 말까?”
- “……그냥, 먹기 싫어서요.”
- “아아, 그런 이유라면 상관없지.”
의외였다. 의사의 본분을 망각한 듯한 대사였다. 멀뚱히 눈만 깜빡거리는 내게, 그는 동그란 안경을 치켜 올리며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깨물었다. 환자 의지가 있어야 사는 거지, 약만 먹는다고 사는 게 아니야. 처참히 망가진 막대기는 하얀 가운 앞주머니 속으로 사라졌다. 이젠 가을 날씨가 춥다며 발을 동동거리던 그가 슬쩍 가디건 끝을 잡는다. 입어 보면 안 되겠지. 농담을 진짜처럼 하는 것이 승관을 떠올리게 했다. 높게 뻗은 가로등과 달이 한데 어우러져 공간을 만든다. 가끔 이런 분위기는 진실을 토해내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 마법에 걸린 입술은 제멋대로 솔직했다.
- “약을 먹어도 결심은 항상 똑같았어요. 남김없이 사라지자, 지금 행복해도 그것은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니 소멸을 망설이지 말자, 마지막 숙제에 최선을 다하자.”
- “넌 왜 사라지고 싶어?”
- “오래전부터 생각한 꿈이니까요.”
처음으로 내 얘기를 했다. 승관과 담당 의사에게조차 털어낼 수 없었던 깊은 이야기까지 그곳, 그 나무 아래서 모조리 뱉어냈다. 전부터 있었던 우울증과 더불어 은수를 구해낼 수 없었던 죄책감과 알아차리지 못한 좌절감, 나는 왜 여태 벗어날 수 없었으며 또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모든 것들을 숨김없이 전했다. 꽤 담담한 독백이었다. 그는 곧게 세웠던 허리를 느슨히 뉘이며 힘을 풀었다. 부드러운 옆모습은 지훈이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 “죽은 사람은 있는데 죽인 사람이 없네.”
- “…….”
- “진흙을 던진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를 따라 벤치에 등을 기댔다. 적막한 어둠 속에서 오롯이 빛나는 달을 담아 흐트러지지 않도록 눈을 감았다. 진흙을 던진 사람들, 그 사람들은 정말 어디로 갔을까요. 쓸쓸한 목소리가 연못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는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뱉었다.
- “지훈이는 이제 살고 싶어 하는데…….”
- “…….”
- “어떡하나.”
계속 울리던 휴대폰, 그 안에 승관의 메시지와 지훈의 부재중이 가득했다. 전원이 꺼진 휴대폰을 가방에 쑤셔 넣고 벤치에서 일어나 가볍게 묵례를 하는 나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그가 가디건 소매 끝을 그러쥐었다. 다시 찾아와. 수능 끝나고. 내 앞에 선 그가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가운을 가리켰다.
- “아프면 고쳐주는 게 내 의무거든. 그러니까 빨리 와. 지훈이랑 손 잡고 오면 더 좋고.”
- “…….”
- “기다리고 있을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시계를 확인하며 급히 자리를 떴다. 끝인사도 제대로 고하지 못한 채 떠나보낸 것이다. 고요한 뒤뜰에 홀로 그림자가 남았다. 떠나지도, 그렇다고 머물지도 못하는 불완전한 그것이 바닥에 주저앉는다. 지키지 못할 약속이 하나 더 늘은 셈이었다.
#38.
[이번 역은 마포, 마포역 입니다]
출구를 찾는 물음에 한 남자는 손가락으로 계단을 가리켰다. 목적지에 다다르자, 아지랑이 향기와 바닷바람 비슷한 냄새가 코끝을 에워쌌다. 눈으로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길게 뻗어진 마포대교, 한 걸음씩 천천히 내디디며 구기듯 쑤셔 넣었던 휴대폰을 들었다. 전원이 켜지기가 무섭게 울리는 휴대폰, 지훈의 이름이 반짝였다. 난 평소와 다름없다, 그저 평범한 날의 일부였다 중얼거리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 “……어디야, 지금.”
- “집에 가고 있어.”
- “집 어디.”
- “그냥, 집 근처 다 왔어.”
왜 연락 한번 없었는지 무턱대고 화부터 낼 줄 알았던 예상을 무참히 비껴갔다. 조퇴했다며, 어디 아파? 차분한 목소리에 울컥 울음이 치미는 것은, 다리에 부는 바람이 너무 세서 그러는 것이다. 가을이 겨울 같아서, 당장이라도 얼어 죽을 것 같아서 무서워서 그러는 것이다. 아프지 않다 말하는 것조차 목이 메어 금방이라도 들킬 듯싶었다. 어서 주제를 돌려야 했다.
- “너는, 오늘 어디 갔었어?”
- “그냥, 약속.”
- “밥은 먹었어?”
- “같이 먹으려고 연락했는데 네가 안 받았잖아.”
- “내가 못 됐네.”
- “지금이라도 갈까.”
짤막한 물음에 고개를 젓는다. 다리 어느 한 곳에 멈춰 검푸른 강물을 내려다보며 울먹였다. 내 심장과 닮은 것이 슬프게도 빛이 난 것이라. 두꺼운 소매로 대충 눈가를 닦아내며 옷을 여몄다. 가을이라 말하던 내 말이 무색할 만큼 시린 계절이었다.
- “지훈아, 네 가디건 나 주면 안 돼?”
- “가져.”
- “진짜? 아끼는 거 아니었어?”
-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 “……아니, 딱 봐도 몇 번 안 입은 거 같아서 그러지.”
무의식이라는 게 참으로 무섭다. 얼버무리는 말에 긴장이 서린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너 입어’ 짧은 문장을 뱉고는 옅게 웃었다. 대신 내 가디건은 자신의 것이라 도장을 쾅쾅 찍는 그였다. 하늘에 뻗은 손가락에 박힌 별을 한 줌 쥐어 온기를 느낀다.
- “지훈아, 별 진짜 많다.”
……
- “다 보여주고 싶어.”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언젠가 그를 위해 겨울에 피어나는 별이 되고 싶다고.
그가 태어난 날 한번쯤은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으면 하니까.
그걸로 우린 충분하다 생각했으니.
#39.
수능 디데이를 세는 담임의 짤막한 목소리에, 종례에 목마른 아이들은 저마다 관심 없는 듯한 얼굴로 책가방을 뒤적거리거나 밍밍한 휴대폰을 만졌다. 그럼에도 견제의 눈빛을 보내고 느끼는 이들이다. 마주하지 않아도 보이는 것이다. 원체 먹히는 것이 두려운 나는 창밖으로 저물어가는 오후의 늦 녘을 샜다. 짙은 색을 띠는 오늘의 해는 지난날의 날 비춘 것과 같은 것인지, 고개 숙인 승관을 위로하던 빛이었는지, 누구보다 붉게 타오르던 은수를 감싸던 것이었는지 무언의 물음을 남기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미 여러 겹의 살갗을 잃은 달력은 또 하나의 껍질을 벗겨내야만 했다. 수능 원서 접수 안내문이 뭇 아이들의 손을 타고 내 책상 가운데쯤 삐뚤게 자리했다. 담임은 제출 기한을 강조하며 구석에서 몰래 졸고 있는 한솔에게 책임을 넘겼다. 반장 대신 네가 걷어서 가져와. 한솔은 피곤한 눈을 비비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반장의 부재가 당연시된 평소 교실의 풍경이었다.
종례 후 순식간에 비워진 공간에 덩그러니 두 사람이 남는다. 한솔은 내 앞에 앉아 휴대폰을 뒤적이며 안경을 매만졌다. 심화 반 애들이 너 욕하는 거 알아? 따끔한 바늘에 난 상처를 어루만질 새도 없이, 상대방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어갔다.
- “네가 심화 반 그만둔 이유도, 갑자기 모고 성적 오른 이유도 이지훈이랑 붙어먹어서 그런 거라고 대놓고 욕하고 다녀. 다른 사람들은 노력해서 얻는 등급을, 넌 공부 잘하는 애 피 빨아먹어서 얻는다고.”
- “알아, 나는 뭐 귀 없을까 봐.”
- “아까 부승관이 이상한 소문 퍼트린 새끼 죽여버린다고 교실 문 막아 놓고 난리도 아니었다. 오죽하면 부담임까지 놀라서 달려왔을까.”
- “……부승관 지금 어딨어?”
한솔은 습관처럼 손에 쥔 휴대폰을 내밀었다. 네가 봐, 어디 있는지. 불과 십 분 전 단체 채팅 창에 올라온 동영상의 주인공, 학생부실 바닥에 머리를 박고 저항 하나 없이 얻어맞는 승관이었다.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한 가방을 챙겨 서둘러 교실을 빠져나가려는 찰나, 한솔의 서늘한 목소리가 낡은 문턱을 넘으려는 두 다리를 잡았다.
- “의리는 좋은데 가뜩이나 중요한 시기에 난리 피우는 거, 솔직히 서로한테 방해라는 생각밖에 안 들어.”
- “…….”
- “다음부터 지랄하고 싶음 제발 수능 끝나고 하라 그래.”
한솔의 슬리퍼가 먼저 문턱을 넘는다. 사라지는 햇살, 길어지는 그림자에 문득 또 하나의 실루엣이 겹친다. 손을 흔들며 멀어지던 승관의 젖은 그림자였다.
#40.
굳게 잠긴 학생부실 문고리를 몇 번이나 잡아당겼는지 모른다. 문짝 가까이 얼굴을 맞대 인기척을 확인하지만, 그 흔한 둔탁함도 아픔을 참는 신음도 들리지 않는다. 연락하는 족족 무시당하는 꼴이, 지금은 보기 싫다는 승관의 마음이었다. 운동장으로 난 복도 창문 밖을 멍하니 쳐다보는 사이, 운동장 한가운데에 축 쳐진 어깨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굳이 보지 않아도 지금쯤 뚱한 표정으로 온갖 욕을 다 하고 있을 아이였다.
완벽히 묶지 못한 신발 끈이 달리는 내내 모랫바닥을 쳤다. 급한 인기척에 슬쩍 뒤를 도는 아이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처진 어깨를 강하게 내리치며 인상을 구겼다. 볼에 매달은 밴드 꼴이 미워서, 한심해서, 누가 봐도 멍청해서, 이유를 들자면 대충 이런 것들이었다. 승관은 맞은 부위를 잡고 한참을 끙끙댔다.
아픈 곳 또 때리는 애를 진정한 친구로 삼아야 되냐? 약이나 가져오지 이 거대한 스매싱은 뭐냐? 꿈이 배구 선수냐? 씩씩거리는 날 흘기며 흘러내린 가방을 고쳐 맨다. 차라리 너 때문이라 화를 냈다면 미안하다 열 백 번 외쳤을 것이다. 그러나 승관은 말을 아꼈다. 지지리도 넘치는 친구의 배려심에, 누가 봐도 못난 말을 지껄이는 나였다.
- “너 미쳤어? 대학 안 가? 생기부 망하는 꼴 보고 싶어?”
- “야, 말을 꼭 그렇게 해야 되냐.”
- “바늘구멍에 낑겨서라도 명문대 들어가고 싶다며, 수시가 네 인생이라며. 이 일 때문에 나중에 발목 잡히면 그땐 어떻게 할 건데? 다 말아먹고 재수라도 하게?”
- “그래서, 그냥 참고 가만히 있으라고? 돌았냐? 너야말로 미쳤냐?”
- “못할 게 뭐가 있어? 사실도 아닌데 왜 화를 내? 제발 앞뒤 분간 좀 하고…….”
못된 말로 승관의 가슴에 못을 박은 것이 죄었을까, 까맣게 일그러진 노을이 시린 눈가를 비집었다. 승관은 한쪽 어깨에 매단 가방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주먹을 굳게 말아 쥐었다.
- “사실이 아니니까 화가 났고, 그게 너라서 더 화가 나. 이지훈이랑 붙어먹어서 점수는 그냥 거저먹는다고? 야, 넌 뭐 노력 안 해? 풀리지도 않는 문제 한번 이겨보겠다고 울면서 밤까지 새운 애를, 손가락에 굳은살 배겨서 아파하는 애를, 그 새끼들이 뭔데 비난을 해?”
……
- “지들이 뭘 안다고 헛소리를 사실처럼 만들어? 왜 다들 맹목적인 비난만 해? 너랑 말도 안 섞어봤으면서 왜 실제로 본 것처럼 얘기하고 단정 짓냐고!”
답답한 듯 욕을 내뱉다 결국 뒤를 도는 아이였다. 내려앉은 어깨가 더욱 위축되어만 갔다. 불안정한 숨을 고르는 상대방의 떨림을 보듬어주지 못하는 나는, 과연 아이가 말하는 ‘친구’의 자격이 있는지, 날 위한 마음을 외면하고 당장 현실을 짚는 것이, 과연 친구로서 옳은 행동인 건지 문득 생각에 잠겼다. 승관을 따라 두 주먹을 움켜쥔다. 빼빼 마른 손등에 툭 튀어나온 허연 마디가 시렸다. 아이의 주변에 입김이 서린 듯했다.
- “저런 새끼들 때문에 너도 어떻게 될 것 같다고…….”
- “…….”
- “진짜 이 세상에 나 혼자 남을 수도 있겠다, 이번엔 은수가 너일 수도 있겠다 자꾸 이딴 생각만 나니까…….”
……난 이제 너 하나 남았는데.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숙인다. 이윽고 교복 바지에 눈가를 벅벅 문지른 손등을 닦아내며 옅은 호흡을 했다. 아이의 친구가 되고 싶은 나는, 모래가 잔뜩 묻은 가방을 일으켰다. 서럽게 울면 닦아 주기라도 할 것을, 왜 이다지도 꾹꾹 눌러대는 것일까. 하나, 둘 켜지는 가로등 밑으로 쌓이는 두려움과 그리움, 승관이에게 쌓인 내 무게는 저들보다 무거울까. 그렇다면 난 영락없는 짐일 텐데 말이다.
- “너도 있고 지훈이도 있는데 내가 왜 힘들어해.”
- “지은수도 그런 말 했어. 나도 있고 여주도 있으니까 자긴 괜찮다고.”
- “승관아.”
- “그렇게 말까지 해놓고 죽어버렸잖아.”
……괜찮다고 했으면서 죽어버렸어. 승관의 한 마디에 벼랑 끝에 몰린 감정이 덜컹거렸다. 주인을 대신해 묵직한 가방을 어깨에 멨다. 등을 보인 채 꿈쩍하지 않는 아이를 대신해 한 발짝 앞서 얼굴을 마주한다. 앳된 열여섯의 네가 보이는 까닭은, 그날의 하늘이 지금처럼 곤색이어서, 계절을 뛰어넘은 겨울의 냄새가 나서, 처음으로 프리지아를 안겨준 내 친구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너도 열여섯의 내가 보이는지 처음으로 묻고 싶었다. 우리의 시간은 아마 거기서 멈춘 듯 보였으니까.
- “승관아, 나 학교도 열심히 다니고 수능도 대신 본다고 은수랑 약속했어. 난 그 약속 꼭 지킬 거야. 그때까지 절대 아무 일도 없어. 장담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
- “그다음은?”
- “……뭐?”
- “시험 보고 그다음은……. 계속 살아 있어?”
날카로운 화살이 과녁의 중심을 찌른다. 자신의 가방을 뺏다시피 들며 한 걸음 다가오는 녀석이었다. 금방이라도 억누른 화를 낼 것만 같은 그런 눈빛. 대답의 여부는 상관없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 “지은수만 친구고 난 아무것도 아니야? 왜 나만 몰라. 왜 나만 모르냐고…….”
- “…….”
- “열아홉이 네 마지막이라는 말, 은수만 들은 거 아니야.”
차갑게 뒤돌아선 그림자가 멀어진다. 촘촘한 밤은 그 그림자를 따라 걸었다. 언덕 배기 아래로, 또 아래로. 곱슬거리는 뒤통수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멍하니 서 있는 비굴한 나였다.
#41.
목적 없이 돌아다니다 멈춘 사거리 사진관 앞에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찍고 갈까, 다시 올까. 하얀 운동화가 불균형한 원을 그리며 갈피 없는 마음을 대신한다. 얼굴 상태가 영 아닌 것이 모든 고민의 중심이었다. 결국, 건조한 손으로 문고리를 잡는다. 두꺼운 유리문을 당기자, 동시에 내 것과 같은 익숙한 하얀 운동화가 불쑥 튀어나왔다. 서서히 올려다보는 두 눈에 보고 싶었던 얼굴이 자리한다.
깊은 속이 울렁거렸다. 하루 종일 보지 못한 그를 우연히 만난 까닭이었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 그리고 종례 이후에도 털끝 하나 볼 수 없었던 탓에 감정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다. 먼저 간다는 건조한 문자만이 그의 흔적이었고, 내게 남은 건 서운함과 또한 서운함이었다.
사진관 안으로 들어오는 찬 바람에, 카운터를 지키던 주인이 다가와 손짓한다. 학생도 수능 사진 찍으러 온 거면 들어 와요. 자리를 찾아 돌아가는 주인에게 시선을 던지다 몸을 틀어 공간을 내주는 그였다. 들어 와, 추워. 사복 차림의 그는 얇은 셔츠를 벗어 테이블 위에 던져두고 소파에 몸을 맡겼다.
오래된 벽장 시계가 저녁 여덟 시를 알렸다. 먼저 대기 중인 손님을 받느라 정신없는 주인은 ‘십 분’이라는 짧은 한마디를 남긴 채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그처럼 소파 가장자리에 앉아 전부터 덜렁거리는 신발 끝을 조이고 있을 때였다. 바닥에 드리운 그림자에 고개를 들자, 그가 머뭇거리며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자연스레 신발 끈을 쥐고 엉성한 리본을 묶는다. 각각 모양새가 달라 몇 번을 풀어내 묶어내는 고집이었다. 잠시 후, 가볍게 손을 털어내고는 내 옆에 엉덩이를 붙인다.
- “오늘 바빴어?”
- “아니, 그냥…….”
- “전화 많이 했었는데.”
- “응, 봤어.”
- “……무슨 일 있어?”
메마른 얼굴을 살피는 그를 향해 반짝 고개를 들어 둥글게 웃는다. 어디가 끝인지도 모를 기분을 눌러 내리려 안간힘을 썼다. 아니, 없어. 처량하게 놓인 두 발을 구르며 말끝에 힘을 싣는다. 오늘 어디 갔었어? 같이 저녁 먹고 싶었는데. 어색한 리본 끈이 움직임에 맞춰 흔들렸다.
- “그냥, 약속.”
- “맨날 약속만 해……. 밥은 먹었어?”
- “아직.”
- “왜?”
- “너 만날 것 같아서.”
초승달 같은 두 눈이 예쁘게도 웃는다. 이윽고 그는 바지 주머니에서 막대 사탕을 꺼내 내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빳빳한 목소리를 냈다. 그냥, 있길래. 어색한 공기가 싫었는지, 휴대폰 액정에 붙여 둔 전자파 스티커 모서리를 긁어내며 내 눈치를 살폈다. 자꾸 왜 떼어내, 전자파 네가 다 먹는다니까. 매끄러운 그의 손등을 그러쥐다, 물끄러미 얼굴을 훔치는 시선을 알아채고는 급히 멀어지는 건조한 손.
- “왜 잡다 말아.”
- “내가 언제.”
- “지금도 부자연스러워.”
- “내 별명 김 자연이야.”
- “방금 웃겼던 거 알지.”
그가 몸을 기울여 비스듬히 날 밀어낸다. 똑같이 상대방을 향해 몸을 기울이자, 그는 두 팔을 뻗어 안기라는 제스처를 취한다. 지금 아니면 못해. 귓바퀴가 빨개지도록 말을 하고 싶은 것을 보아, 진심 또는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싶은 장난 중 하나였으리라.
가슴팍을 가볍게 밀어내고 주인의 손짓에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진지하게 나와야 하니까 방해하지 마. 곧장 멋쩍게 따라오는 그를 바라보며 터질 듯 말 듯 한 웃음을 참아낸다. 주인은 카메라 위치를 옮기며 자리를 가리켰다.
- “학생 남자 친구야? 아까 들어올 때는 표정 하나 없더니만, 지금은 입이 귀에 걸렸네?”
- “아저씨.”
- “왜, 남자 친구 아니야?”
- “더 해주세요.”
느닷없는 질문에도 당황은커녕 귀를 기울이자, 뒷짐을 쥐고 있던 그가 헛기침과 함께 새빨간 홍당무를 깨웠다. 그리고는 주인에게 다가가 귀띔을 넣는 그다.
- “아직 넘어오지 않아서 계속 기다리는 중인데요.”
- “……야, 이지훈.”
- “맨날 저렇게 이름만 부르다가 끝나요.”
- “다 들리거든.”
- “다 들리라고 하는 건데 이것도 모를걸요.”
카메라 덮개의 먼지를 털어내며 너털웃음을 짓던 주인은 멀뚱히 서 있는 그를 앵글 안으로 밀어 넣으며 손가락으로 날 가리켰다. 어울리는지 옆에 한 번 서 봐. 괜찮으면 찍어 주고. 손님이 빠져나간 저녁 시간, 자세를 잡는 주인을 향해 고개를 빠르게 젓는 그였다. 서둘러 앵글 밖을 빠져나가려는 그를 잡은 건 다름 아닌 앉아 있는 다른 홍당무. 잘 나오면 인화해 달라고 하자. 그는 분홍 가지에 매달린 건조한 손가락을 잠시 훑어 내렸다. 살짝 갈라진 자신의 머리끝을 바삐 정리하는 내 손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작게 웃는다.
- “괜찮아, 안 해도 돼.”
- “아니야, 예쁘게 나와야지.”
- “원래 이런 스타일이야.”
- “아, 이게 코난 머리야?”
- “……쉼표.”
입을 꾹 다물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구부정한 자세를 고쳐 카메라에 집중했다. 내 볼을 콕콕 찌르며 자신도 한 아름 공기를 먹는다. 주인은 앵글을 만지작거리다 좀 더 붙어보라 목청을 높였다. 한 뼘 옆으로 다가온 그가 어깨를 감쌌고, 온전히 전해지는 체온에 더욱더 파고들고 싶은 솔직함이 있었다. 가까운 미래, 어느 경계에 검은 선을 그은 나는 그런 솔직함을 숨겨야만 했다. 그 선을 넘지 말아야만 했다.
- “지훈아.”
- “응.”
- “과학실에서 너 처음 봤을 때, 사실 이런 생각 했다.”
우렁찬 주인의 목소리가 카운트를 센다. 눈을 떼지 못하는 그가 맞잡은 손에 힘을 준다. 단단한 어깨에 얼굴을 기대 오로지 그만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틔웠다. 은수가 내게 했던 것처럼.
- “널 좋아할 수도 있겠다.”
여름의 푸르름은 다시 계절의 뿌리 속으로 사라졌다. 머리를 뜨겁게 달구는 햇볕도 어느새 높게 뻗은 하늘 뒤로 그 모습을 감춘 지 오래였다. 잡은 두 손을 놓아야 할 때가 반드시 있었는데, 그것이 오늘임을 뒤늦게야 깨닫는다.
- “좋아해, 지훈아.”
왔던 길을 되짚어가야만 했다. 처음 서 있던 그 자리, 죽기로 결심했던 그 자리로, 내가 서 있어야 할 그곳으로 돌아가야 할 타이밍이었다.
그저 당장 사라질 수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네가 날 읽지 못한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아마 넌 알지 못할 것이다.
언젠가 너에게 받은 프리지아가 코끝을 스쳤다. 비록 네가 아닐지라도, 나는 이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니, 맺지 못한 결실을 치러야 할 때였다.
Epilogue.
승관이는 알고 있었다. 그날의 나와 은수를. 납골당 앞에서 조용히 중얼거리는 나를, 친구의 죽음을 핑계 삼아 합리화하려는 비열한 짓을, 그 아이는 듣고 있었다.
은수야. 은수야. 왜 너만 죽었어. 왜 너만 도망쳤어. 뭣 같지도 않은 약속 때문에…… 너 때문에 더 살아야 하잖아. 이미 죽었어도 한참전에 죽었어야 했는데, 난 너 때문에 더 살아야 해. 너 때문에…….
은수야. 은수야. 학교 가기 싫어서 손목을 그었을 때도, 숨을 막고 싶어서 벨트에 목을 졸랐을 때도, 그때마다 네가 울면서 그랬잖아. 같이 살아야 한다고. 여기서 죽으면 승관이도, 너도 많이 아파할 거라고. 그래 놓고 네가 죽으면 난 뭐가 돼. 너처럼 살리고 싶어도 살릴 수가 없잖아. 이미 죽어버려서, 내 옆에 없어서…….
은수야…… 은수야…….
왜 너만 죽었어?
왜 너만 도망쳤어?
왜 너만…… 살았어?
승관이는 알고 있었다. 그날의 나와 은수를. 납골당 앞에서 조용히 중얼거리는 나를.
- ‘은수야, 난 내가 죽었으면 좋겠어.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
- ‘지은수만 친구고 난 아무것도 아니야? 왜 나만 몰라. 왜 나만 모르냐고…….’
- ‘우리가 열아홉이 됐을 때, 그때 다시 만나.’
- ‘열아홉이 네 마지막이라는 말, 은수만 들은 거 아니야.’
친구의 죽음을 핑계 삼아 합리화하려는 비열한 짓을, 그 아이는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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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다 왔어요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제 휴일은 이제 앞으로 딱 일곱 시간이 남았네요 이번 주에 완결을 지을 수 있을까요 (헛된 꿈 예쁜 주말 되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