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tic
: an incurable romantic
: 기약없는 로맨티스트
01
마음의 형태
"치사하게 또 먼저 가냐."
아침 식사자리에도 없더니, 또 늦잠을 잔 모양이었다. 김남준은 미처 제대로 신지도 못한 신발을 질질 끌면서, 내 옆으로 걸어왔다. 다리가 긴 덕분인지 금방 내 옆에 선 아이는 내 어깨에 제 손을 올리고는 신발을 제대로 신었다. 녀석 때문에 한쪽 어깨가 약한 힘에 푹 꺼졌다. 한참동안 신발하고 실랑이를 하던 아이는 어떻게 묶어도 풀리는 신발끈에 의아하다는 듯이 길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야. 이렇게 하면 묶어야 되는 거 아니냐? 녀석의 손이 신발끈을 여러 번 감았다. 하지만 결과는 힘없이 풀렸고. 아니, 미적분부터 고전 시가까지 못하는 것도 없으면서. 신발끈 하나를 못 묶냐. 한결같이. 나는 결국 아이의 앞에 몸을 굽히고 앉아, 신발끈을 고쳐 묶어주었다. 저번 신발끈 묶어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구만. 대체 신발을 어떻게 신는거야. 김남준은 내 손길에 단단하게 묶인 신발끈을 보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 들었다. 역시, 김탄소. 신발끈 장인. 인정.
"빨리 가자. 진짜 늦겠다. 우리."
"잠깐만."
지금부터 빠른 걸음으로 걸어야 정문 통과까지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김남준은 또 한 번 나를 멈춰세우고는 내 앞에 몸을 낮췄다. 그리고는 제 신발끈을 묶어주느라 쭈그려 앉은 탓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었다. 패딩의 무릎 부근이 조금 더러웠다. 몰랐네. 조심스러운 손길로 패딩을 툭툭 털어낸 녀석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됐다. 이제 가자.
**
간신히 지각을 면한 우리는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따뜻한 공기에 몸을 녹였다. 따뜻해. 나는 내 짝꿍 우석이의 목덜미에 차가운 손을 가져댔다. 그러자 우석이는 바르작 몸을 떨며,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미쳤냐?
"와. 김우석. 그거 한 번 했다고 죽이냐. 친구를."
"진짜 남자였으면 주먹 쥐었어."
"의리 한 번 끝장 난다. 정말."
우석이는 반에 몇 없는 친구 중 하나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남들과 똑같은 걸 해도 소문 나기 좋은 위치에 있었다. 부모님이 워낙 유명했기에. 그래서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레 무던한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그냥 내게 어떤 소식을 들어도, 아. 그러냐. 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 관심 받는 것이 싫어서, 내게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을 찾아 다녔다. 그러다 만나게 된 게, 김우석이고. 김우석은 당장 행성 하나가 떨어져도, 큰일이다. 하고 말 아이였다. 이건 김남준도 인정했다. 김우석은 우리 엄마아빠가 연예인이라는 걸 알고 나서도, 그 흔한 싸인요청이나 집초대 같은 압박을 주지 않았다. 또 김남준이 가정부 아주머니의 아들이라는 걸 듣고 나서도, 어떤 동요도 없었다. 뭐 동요가 있을 필요도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런 거에 예민할 나이니까. 그런데 우석이는 그 말에도 그저 고개만 끄덕이더니 나와 남준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둘이 같이 살아?"
무던한 건 좋았지만, 목소리가 너무 컸다. 질문 자체도 좀 이상했고. 새학기부터 반 아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김우석 덕분에 우리의 관계는 진작에 알려졌다. 불행 중 다행인 건, 김남준의 이미지 덕분에 그 이상의 소문이 돌지 않았다는 거다. 쨌든 그래서 모두가 아는 사이였다. 우리는.
김남준과 김우석과 고등학교 1학년을 함께 보내고, 김우석과는 2학년까지 함께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2학년 때는 아리, 수용, 지연이. 뭐 그런 아주 괜찮은 친구들 여럿도 사귀게 되었다. 이 세 명은 우석이와 같은 중학교 출신으로 낯가림도 없고 구김살도 없는 친구들이었다. 아. 적당히 무던하기도 했고. 고마운 친구들이다.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 때는 거짓말처럼 모두가 같은 반이 되었다. 그냥 2학년 때반에 김남준만 더해졌다고 하는 게 편하려나. 아무쪼록 괜찮은 라인업이었다. 적당히 친한 친구들과 함께 살아 안 친할 수가 없는 녀석 하나. 이 정도면 고3 생활은 뭐 어떻게든 버티겠구나. 싶었다. 학기 초까지만 해도, 저 라인업 중 한 명을 덜컥.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햄찌."
"..."
"대답 안 하면, 안 준다?"
"... 뭔데.
이번에는 녀석이 대답없이, 작은 초콜릿 하나를 내 입에 넣어주었다.
"아이고. 잘 먹네."
"..."
"아침도 먹었다면서."
"... 아. 꺼져. 너."
"왜 오늘 아침에 안 깨워줬냐. 모닝콜이 안 와서, 늦잠 잤잖아."
"핸드폰은 폼이야?"
"안 들려. 저런 거는."
"..."
"아침에도 혼자 가려고 하고. 나한테 뭐 서운한 거 있어?"
"아니."
"대답 바로 나오는 거 보니까, 있구나."
다정한 목소리에 하마터면 대답할 뻔했다. 그래. 있다! 어제 잠깐 편의점 다녀온다고 해서 따라갈까 싶어 나갔더니, 학생회 2학년이랑 같이 있더라? 되게 예쁘던데. 아주 좋아 죽더라. 너도? 계속 허허실실. 난 아주 빨간마스크인 줄 알았잖아. 너무 웃어서. 뭐가 그렇게 좋디? 응? 하고. 그런데 나는 몰래 따라가려다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그 장면에 화낼 수 있는 이름이 없었다. 그저 같이 사는 친한 친구. 그 이름으로는 그 장면에 안 어울려도 너무 안 어울렸지. 하다 못해 뭐 썸녀. 그 정도라도 돼야, 뭐 깽판을 치든 모른 척 지나가든. 했을텐데. 나는 목끝까지 차오른 긴 마음을 겨우내 삼키고는 녀석을 노려보았다. 그냥 싫다. 이거야.
"또 얼라처럼 어리광이네."
"야. 저만한 얼라가 어딨어."
"왜. 쪼그만데."
김우석이 끼어들어 답했다. 저만한 얼라가 어딨어. 그러자 김남준은 내 손 하나를 가져가 김우석 앞에서 달랑달랑 흔들며 말했다. 왜. 쪼그만데. 김우석은 그 말에 쪼그만 게 다 얼어 죽었다며, 혀를 내둘렀고 자연스럽게 교과서를 챙겨 김남준의 자리로 향했다. 네 얼라 삐졌으니까, 나는 또 네 자리로 비켜줘야지.
"이제 척하면 척이네."
"삐졌으면 좀 삐지게 둬라. 뭘 또 풀릴 때까지 달래주냐."
"바로 안 풀어주면, 한 대 맞을 것도 백 대 맞아야 돼."
이미 내게 올 때부터 제 교과서를 들고 온 김남준은 당연하게 내 옆자리에 앉았다. 바로 안 풀어주면, 한 대 맞을 것도 백 대 맞아야 돼. 나는 그 말에 김남준의 허벅지를 아프지 않게 툭 내리쳤다. 녀석은 아프지도 않은 제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여러 번 쓸고는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는 제 다리 사이에 내 다리를 가두고는 물었다. 한 대 맞았으니까, 된 건가? 나는 퍽이나 됐다 싶어, 녀석의 다리를 빠져나오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녀석은 내 어깨 위에 손을 얹어 나를 도로 앉히고는 말했다. 이번 건수는 한 대로 안 끝나는 거야?
"뭔 줄 알고."
"뭔 줄 몰라도, 뭐 내가 깨부신 것 중에 하나 너가 찾아냈겠지."
"또 뭐 부셨어?"
"부신 건 아니고, 나 로션 다 써서 너꺼 쓰려고 네 로션 찾다가 떨어트렸어."
"... 무슨 색?"
"하얀 통."
"..."
"내가 깨버렸어. 그거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야?"
"... 너 진짜 원래 네 자리로 다시 가."
"뭐야. 이거 아니야?"
며칠 전에 산, 아직 안전캡도 안 뜯은. 그런 로션을 깼다니. 세상 얄미운 짓은 혼자 다 하네. 진짜. 김남준은 제가 실토한 일 외에도 내가 서운해 할 일이 또 있다는 사실에 멘붕이 온 듯 했다. 뭐지, 뭐가 또 있지.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담당 과목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셨고, 우리의 싸움은 중단 될 수밖에 없었다.
**
"밥 먹으러 가자."
나를 깨우는 목소리에 눈을 떴을 때, 교실은 이미 김남준과 나. 단 둘 뿐이었다. 삼교시 때 잠시 잠에 든 게, 점심시간까지 이어진 모양이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시계를 바라보자, 점심시간이 이십 분이나 지나있었다.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키며 김남준에게 손짓했다. 빨리 와. 김남준은 내 의자 뒤의 패딩을 챙겨 걸어오며, 내 어깨 위로 점퍼를 얹어주었다. 밖에 춥다. 감기 들어. 녀석은 제 말을 끝으로 내 패딩이 흘러 내리지 않게 고쳐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종 치자마자 깨우지, 이십 분이나 지나서 깨우는 건 뭐야."
"잘 자길래. 구경 좀 했지."
"그렇다고 이십 분이나 지나서 깨우냐."
"어차피 오늘 메뉴 너가 좋아하는 것도 아니야."
"그럼 깨우지를 말지."
"그래도 배는 채워야지. 오늘 집에 엄마도 없어."
"오늘 이모 안 계셔?"
"응. 엄마 오늘 할머니네 갔어."
"왜?"
"그냥 뭐, 할머니가 부르니까 갔겠지?"
남준이네 엄마, 그러니까 이모가 집에 안 계신다니. 나는 녀석과 의미없는 대화를 주고 받으며, 오늘 저녁은 간만에 시켜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이모는 배달 음식이 몸에 안 좋다며, 될 수 있으면 모든 음식을 만들어주셨다. 물론 그게 너무 감사하지만, 매번 번거롭게 해드리는 것 같아서 죄송하기도 했는데. 오늘은 오랜만에 눈치 안 보고 조미료 왕창 들어간 거 먹을 수 있겠다. 무엇을 시켜 먹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과 함께 급실실로 들어선 우리는 정말로 별 거 없는 급식을 받아, 빈자리에 앉았다. 김남준은 내 마음을 읽은 건지, 반찬을 뒤척이는 내 젓가락을 제 젓가락으로 툭 치고는 말했다. 저녁 시켜 먹을 생각으로 안 먹지 말고, 조금이라도 먹어.
"치킨 시켜 먹자."
"나는 피자 먹고 싶은데."
"그럼 두 개 다 시킬까?"
"먹을 수 있어?"
"할 수 있어."
"그래. 그럼."
피자를 먹고 싶다는 녀석의 말을 수용해, 두 가지를 다 먹겠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김남준은 두 개를 다 먹을 수 있다는 내 말에 그래. 그럼. 하고 답한 뒤, 내 식판 구석을 젓가락으로 또 한 번 툭 쳤다. 녀석은 밥 속에 있는 콩을 골라낸 걸, 귀신 같이 발견하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아. 일부로 대화하는 사이에 골라낸 건데. 언제 본 거야. 나는 느릿느릿하게 콩을 원위치로 옮기며, 인상을 찌푸렸다.
"먹어야 크지."
"그만 커도 돼."
"뭘 그만 커도 돼. 아직 얼라면서."
"자꾸 얼라, 얼라. 그래라?"
1교시에 어설프게 마무리 된 싸움에 다시 불이 붙을 참이었다. 어젯밤 그 아이의 등장만 아니었으면. 저 멀리서 눈도 좋게 김남준을 발견한 아이가 우리를 향해 걸어오며, 녀석을 불렀다. 남준 선배! 그 목소리에 김남준은 뒤를 돌아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했고, 자연스럽게 제 옆자리의 의자를 빼주었다. 아마도 여자 아이가 식판을 들고 이쪽으로 걸어오니까 그랬겠지. 여자 아이는 그런 김남준의 행동에 당연하게 또 그 옆에 앉았다. 내가, 김남준 앞에. 이렇게 떡하니 앉아 있는데도.
남준이와 여자 아이는 밥을 먹는 내내, 학생회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의 이름과 교내 이야기가 오갔다. 나는 그 시간 속에서 외톨이처럼 떨어져, 벌써 네 번째 밥에 파묻힌 콩의 갯수를 셌다. 아홉 개. 아홉 개. 식판과 젓가락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냈다. 그러자 앞자리 둘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여자 아이는 내 식판을 보고서 물었다. 선배, 콩 안 드세요? 나는 아이의 물음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괜히 손톱을 물어뜯었다. 버릇이었다. 낯선 사람이 있거나 불편한 상황이 될 때마다, 손톱을 물어뜯는 것은. 하지만 이를 알 리 없는 여자 아이는 해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저도 콩 못 먹는데! 하고.
"쟨 못 먹는 게 아니고, 안 먹는 거야."
"에이. 언니가 먹기 싫으면 안 먹는거죠. 뭐."
"애라서 그래."
김남준의 마지막 말에 여자 아이의 시선이 녀석의 얼굴로 향했다. 어려도 나보다 저 아이가 더 어린데, 내가 안 먹는 게 어려서 그렇다니. 앞뒤가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았다. 순식간에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는 내 뒷자리 테이블 아이들이 일어서는 기척이 느껴지자, 같이 몸을 일으켰다.
"먼저 갈게! 천천히 와."
뒷 테이블 무리에는 김우석을 비롯한 반 아이들이 섞여 있었다. 축구를 하고 온 건지, 전부 다 축구복을 입고 있어서 급식실에 들어올 때부터 눈에 띄었다. 일부로 김남준하고 둘이 밥을 먹고 싶어서, 처음에는 모른 척 했는데. 지금은 쟤네를 좀 이용해야 했다. 나는 천천히 오라는 말을 남기고는 그 무리에 섞여 식판을 정리하고는 급식실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어느새 내게 팔 한쪽을 잡혀 있던 김우석이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안 놓냐.
"누군 좋아서 잡은 줄 아냐."
"참나. 급식실 들어올 때부터 눈 마주쳤는데, 모른 척 쌩까더니."
"봤냐?"
"그럼 못 보냐? 아주 쌩까고 바로 뒤에 앉더라."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뭐, 남준이랑 둘이 먹고 싶어서 그랬어. 이럴 수는 없으니까. 나는 녀석의 팔을 아프지 않게 치고는 점퍼를 여몄다. 진짜 춥네. 김우석의 무리는 김우석과 내가 대화를 하는 사이, 이미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김우석은 제 친구들이 던지는 축구공을 받아, 한 손으로 던졌다 받는 장난을 치며 앞서 걸었다.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 불시에 내쪽으로 축구공을 던졌다. 힘이 실려 있지는 않았지만, 갑작스러운 공에 놀란 내가 반사적으로 공을 잡으며 김우석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김우석은 제법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공 잡는 것처럼, 잡아 봐라. 좀."
"... 뭐래."
"답답하다. 답답해."
"못 생긴게."
"와. 갑자기 얼굴 공격이 어딨냐. 그리고 뭐 너는 예쁘냐?"
"너보다는 낫다!"
"참나. 야. 우리는 오늘 축구하는데 심판도 없이 했어."
"어쩌라고!"
"심판 김남준이 해주기로 했는데, 걔가 째꼈다고!"
"근데!"
공만 잡을 줄 알지. 뭐 공 던진 사람 마음도 모르고, 공에 뭐가 묻었는 지도 모르고. 좀 자세히 봐라. 마음도 보고, 그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 지도 좀 보라고.
**
겨울입니다. 두 사람의 관계성이 보였으면 하는 1화였네요! 남준이는 아주 바르고 모범적이지만 탄소 한정으로 개구진. 그런 전형적이지만 주변에서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남사친의 표본이네요 ㅠ_ㅠ 이번 편은 우석이가 하드캐리 한 회차라고 생각하고... 날도 추운데 둘이 빨리 연애나 했으면 좋겠습니다. 어찌됐든 잊지 않고 제 글 찾아주시고 반겨주신 독자 분들 고맙습니다! 덕분에 마음이 따땃했어요...ㅎㅎ
이번 회차부터 암호닉 받을게요! 이번 작품 '로맨틱'은 낭만적인 사람들로 함께 해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