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tic
: an incurable romantic
: 기약없는 로맨티스트
06
착한 우리의 착한 마음
음악실에서의 사건으로 하마터면 늦을 뻔한 5교시를 간신히 맞춰 들어갔다. 양치를 마친 아리와 미영이는 치약과 칫솔을 그대로 든 채로, 함께 들어오는 나와 남준이를 번갈아 바라보고는 말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서로 모르는 척 하더니, 금방 붙었네. 그러게. 나는 애써 아이들의 대화를 듣지 못한 척, 사물함으로 다가가 수능 교재를 꺼냈다. 연애가 즐겁기는 해도, 고삼이었다. 몇 달만 지나면 여름 방학이었고, 그 방학을 지나면 수시 접수를 해야 할 터였다. 곧 있으면 담임 선생님 상담도 돌아오는데. 나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책을 챙기고서도 한참을 뒤에 서 있었다. 그러자 제 교재를 챙긴 뒤 친구들과 장난을 치던 남준이가 가까이 다가왔다. 녀석의 큰 손이 내 머리 위에 턱, 하니 올려졌다. 녀석은 그 손에 약한 힘을 주어 내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기를 반복했다.
"정신 차려."
"차렸어."
"차렸는데 왜 자꾸 멍하게 서 있어."
"그냥."
"그냥이 어딨어. 위험하게."
남준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리 쪽으로 장난감 야구공 하나가 날아왔다. 남자 아이들이 던지고 노는 체육시간 소품이었다. 남준이는 바닥에 떨어진 야구공을 제 친구들에게로 도로 던지며, 교실에서는 하지 말라고 말했다. 녀석의 친구들이 그런 남준이를 노려보며 답했다. 하여튼 김여주는 엄청 싸고 돌아요. 진짜. 그러자 남준이는 그 낯간지러운 답에도 당연하다는 듯 괜히 내 앞에 양팔을 벌리고 딱 버텼다. 싸고 돌아야지. 그럼. 남준이의 대답에 얼굴이 뒷목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미쳤어. 나는 내 앞의 아이를 피해, 자리로 향했다.
06-01
"이제 손 잡아도 돼?"
학교를 오 분쯤 벗어난, 집으로 향하는 골목이었다. 남준이는 군말없이 내 옆을 따라 걷다가, 골목을 도는 순간 물었다. 이제 손 잡아도 돼? 나는 기다렸다는 듯 묻는 아이가 귀여워 살풋 웃음을 터트리고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금세 내 손을 잡아챈 아이는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을 엮어가며 중얼거렸다. 손도 막 못 잡고, 이게 뭐야. 우리 친구때도 손 막 잡았으니까, 그냥 잡아도 될 텐데. 혼자 굳이 의식해서... 나는 부로 아이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한창 유행하는 아이돌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자 녀석도 지지 않겠다는 듯 더욱 크게 제 불만을 중얼거렸다. 아니, 이제는 중얼거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되게 크게 골목을 울렸으니까. 그리고 그 울림은
"둘이 사귀니?"
할머니네 댁에서 언제 돌아오셨을 지 모를. 이제 막 장을 보고 오신 것 같은 이모에게도 전해졌다. 우리의 뒷편에서 걸어오시던 이모는 남준이의 투정을 다 들으신 모양이었다. 남준이는 느닷없는 제 어머니의 등장에 화들짝 놀랐다가도 사귀는 게 잘못은 아니지 않냐며, 우리가 맞잡은 두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엄마. 나 애인 생겼어. 라는 말도 덧붙여서. 나는 남준이와 다르게 당황함을 감출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남준이네 어머니이시고 또 우리 엄마보다 나를 더 잘 챙겨주시는 분이신데. 제가 아드님을 채갔습니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녀석에게 잡힌 손을 빼내기 위해 나름 힘을 주었지만, 녀석은 내 손을 놓을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
"골목길부터는 내 구역이야."
"... 좀 놔."
"너는 학교해."
"..."
"그러니까 손 못 놔."
나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남준이의 말을 따르자면, 여기는 남준이의 구역이었으니까.
06-02
이모는 부엌에서 한참동안 장거리를 정리하셨다. 그리고는 남준이가 씻으러 들어간 걸 확인하시자마자, 내가 앉아 있는 소파로 와서는 앉으셨다. 쟤가 먼저 너 좋다디? 이모의 첫 물음은 남준이가 먼저 나를 좋아했느냐. 였다.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나는 이걸 솔직하게 말해야 하는 게 맞나 싶어, 잠시 대답에 뜸을 들였다.
"어! 내가 먼저 좋아했어!"
이모의 물음이 그렇게 크지도 않았는데, 거실 구석에서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모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무려 샤워중인 남준이가 대신한 거다. 나는 저게 미쳤나 싶어 빠르게 손을 내저었지만, 이모는 씻으면서도 대답을 하는 녀석이 마음에 드시지 않았는지 또 물으셨다. 아, 물론 욕실에 있는 아이 들으라고. 더욱 크게. 넌 쟤 뭐가 좋다고 만나니? 맨날 부시고, 잃어버리고, 덤벙거리기만 하는데. 그러자 또 다시.
"김여주는 안 부실거야! 안 잃어버려!"
욕실에도 방음처리를 해야 하나. 이모는 어처구니 없는 녀석의 대답에 인상을 찌푸리셨다가, 뒤이어 들려오는 대답에 결국은 웃음을 터트리셨다. 왜 자꾸 그래! 엄마는! 이모는 절규에 가까운 아이의 외침에 내게 속삭이셨다. 아주 너가 좋아 죽겠나보다. 생전 안 부리던 응석을 다 부리네. 이모는 열아홉이나 되어서 응석받이가 된 아들이 좋으신 건지, 그냥 열아홉 아이 둘의 연애가 즐거우신 건지 연신 미소를 지으셨다. 그리고는 다시 저녁을 준비하시기 위해, 부엌으로 향하시다가 다시 내쪽으로 와서는 귓속말 한 번을 더 하고 멀어지셨다.
'저것도 남자니까 바지 지퍼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해. 이모가 혼낸다고.'
나는 이모의 말을 한참 해석하다, 설마 그 뜻일까 싶어 이모를 붙잡았다. ... 이, 이모? 그러자 이모는 욕실을 한 번 가리키고는 입술에 검지손가락을 가져가셨다. 비밀이라는 뜻이겠지. 원래 아들을 둔 엄마들은 저런, 그... 그런 부분을 가장 걱정하시는 걸까. 어느새 욕실에서 다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아이는 부로 쿵쿵 소리를 내며 거실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넋이 나간 나를 바라보고는 이모에게 향했다.
"뭐라고 했길래, 애가 넋이 나갔어."
"너 흉 좀 봤다."
"엄마는 아들 연애 사업을 도와줘야지."
"본인 연애 사업은 본인이 알아서 해야지."
"엄마 배신이야."
"너도 배신이야."
"나는 왜."
"어렸을 때는 여주가 제일 못생겼다고. 싫다고. 그렇게 지랄염병을 떨더니."
"내가 또 언제 지랄염병을 떨었어! 그냥 그때는 유치원생이니까!"
"어쭈. 그때도 여주는 가만히 있었거든? 그치. 여주야?"
이모의 물음과 동시에 부엌에 있는 시선에 온통 내게로 고정 되었다. ... 하긴. 김남준이 유치원때는 그랬지? 나랑 엮이는 거 싫다고, 달님반 가겠다고. 별님반 싫다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이제와서 연애를 시작한 우리가 말도 안 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어린 나이에 내게 상처를 준 녀석이 괘씸해졌다. 그래서 이모의 물음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하고 답했다. 그러자 남준이는 막 씻고 나와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다가왔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이모를 한 번 살피고는 다시 이모를 등지고 나를 바라보고서는 입을 벙긋였다.
'미안했어. 그때는.'
별님반이 싫었던 일곱 살의 김남준의 사과를 삼 학년 오 반 열아홉 김남준한테 들었다. 으, 간지러워. 나는 그 시간의 간극이 엄청나다 싶으면서도, 그때나 지금이나 결국은 우리가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 신기했다. 녀석은 생각에 잠긴 나를 작은 목소리로 여주야. 하고 부른 뒤, 내가 저를 바라보자 오른 손을 제 입술에 가져댔다. 그리고는 그 손을 그대로 내 입술 위에 살포시 얹어주었다. ... 미쳤나봐. 나는 황급히 소파를 벗어났다.
06-03
시끌벅적하게 시작한 저녁 식사는 시끌벅적하게 끝났다. 나는 여러 의미로 기력이 빠진 몸을 이끌고 방으로 향했다. 저녁을 먹고 간단한 과일까지 먹고 나니, 알맞게 잠이 들 시간이었다. 그래서 다들 자연스럽게 각자의 방으로 향했는데, 나는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이모의 마음이 신경 쓰였다. 이모가 우리의 연애를 반대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떻게 된 일인지 차근차근 설명해드릴 필요는 있다고 느꼈다. 마냥 장난처럼 넘길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는 소리다. 왜냐하면, 우리는 같이 살고. 또 이모는 나한테 남준이네 어머니이기 이전에 나의 이모이고, 엄마보다 더 엄마 같은 사람이니까. 나는 결국 초등학생 때, 남준이가 나 대신 침대 위 천장에 붙여준 야광별의 희미한 빛을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이모한테 가려고.
"이모. 자요?"
혹시나 이모가 잠에 드셨을까 문을 연 뒤,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모. 자요? 하고. 잠시 뒤, 이모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어오라고 했다. 나는 침대가 불편하다며 바닥에서 주무시는 이모의 옆에 누우며, 이모를 향해 몸을 틀었다. 그러자 이모는 익숙하게 내 한쪽 어깨를 어루만지시며 물었다. 걱정 돼서 온 거지?
"역시 이모."
"으이고. 이렇게 착해서, 어쩔래."
"뭐가 착해요. 나 이모 아들 홀랑 낚아챘는데?"
"그래서 낚아챈 건, 영 괜찮고?"
"낚아챈 지 얼마 안 돼서 모르겠어요."
"... 둘 다 착해서는."
낚아챈 건 괜찮냐는 물음에 아직은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이모는 작게 웃은 뒤, 둘 다 착하다고 말했다. 나 하나도 안 착한데! 이모한테 저 안 착해요. 하고 답하려는 순간, 누군가 내 대답을 대신했다. 이모와 나. 둘만 있는 줄 알았던 공간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이모를 사이에 둔 반대편에서 들리는 목소리였다.
"봐봐. 착해서 여주도 올 거라고 했잖아."
나보다 먼저 온 것 같은 아이였다. 이모는 내쪽으로 틀었던 몸을 다시 정자세로 하시고는 오른 손으로는 내 손을, 왼 손으로는 아이의 손을 잡으셨다. 쟤는 왜 온 거야!
"너는 왜 왔어?"
"왜 왔냐니. 우리 엄마인데?"
"... 아니. 그니까 지금 왜 여기 있냐고. 너 방에 없고."
"너랑 같은 이유겠지. 뭐."
"..."
"너도 엄마 신경쓰여서 온 거 아니야?"
"... 맞는데."
"내가 이미 브리핑 싹 다 했어. 신경 안 써도 돼. 그치, 엄마?"
이모는 긍정의 뜻으로 내 손을 잡은 손에 약하게 힘을 주셨다. 그래서 우리 둘 다 착하다고 했구나. 이 밤에 쪼르르 하나씩 방으로 오는 게, 이모 눈에는 얼마나 웃겼을까. 나는 이모의 옆구리를 파고들며, 작게 칭얼거렸다. 처음 들어올 때부터 말 해주시지.
"반대쪽에 있는 애가 자기 있다고 말하지 말라던데."
"하여튼 나빴어."
"엄마가 방금까지 우리 착하댔어. 그치, 엄마?"
"그럼. 나 하나한테 미움 받기 싫어서, 둘 다 방으로 쏙쏙 들어오는데."
"들어오는데?"
"둘 다 잘 키웠네. 싶었지."
"들었지?"
이모와 대화를 주고 받은 아이는 의기양양하게 들었지? 하며,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 익숙한 인영이 솟았다. 하지만 이모는 그런 남준이의 손을 놓아주지 않으셨고, 남준이는 제 방에 돌아가 자겠다고 했다.
"자고 가. 여주도."
"네?"
"어?"
이모를 가운데 두고 자고 가라는 건데, 괜히 불순하게 해석한 우리가 되물었다. 네? 어? 그러자 이모는 또 특유의 웃음소리를 흘리시며, 우리를 잡은 양손에 힘껏 힘을 주었다. 아, 아파. 엄마! 아! 이모. 아파요!
"앞으로 둘이 자고 싶으면, 나 끼고 자."
"아, 뭐래."
"아. 이모!"
"아직은 안 돼."
어두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 얼굴 터지려고 하는 거, 다 들켰을 거야. 지금 이 방에서 태연한 건, 이모 뿐이었다.
우리는 결국 그렇게 밤을 보냈다.
조금의 악도 없는 착한 사람들의 고른 숨소리가 함께라고 말해주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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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겨울입니다. 오랜만의 글이네요! 역시 작품으로 인사드리는 게, 마음이 제일 편해요...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ㅎㅎ 이번 회차는 함께 자라, 착함도 서로에게 닮은 아이들의 모습을 담고 싶었어요. 소중한 사람에게 조금도 미움 받고 싶지 않은, 그런 어리고 투명한 감정이 잘 느껴지셨기를 바라면서. 금방 7화로 올게요! 늘 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감사하다고만 하는데, 매일 감사해요. 암호닉은 이 글 업로드 확인하기 전에 제가 확인한 댓글까지만 받을게요! 추가해서, 다음 회차에 함께 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