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짘경] daily love
몸이 자꾸만 떨렸다. 추울까봐 패딩도 껴입고 왔는데 비 온 뒤의 추위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나보다. 입술을 깨물고 속으로 욕을 주워 삼키며 빨갛게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초인종을 한 번 더 눌렀다. 이 시발롬이 낮잠을 자나, 그럴리가 없는데. 그런 건 태일이형이나 영위하는 일과였지 절대 우지호가 할 만 한 여가 생활이 아니었다. 어디 나가지도 않았을거고. 설마하니 제가 초대해놓고(그것도 반 강제로) 튀어서 손님을 물 먹일 만큼 개새끼는 아니라고 믿었다. 친구에 대한 마지막 옅은 믿음이랄까. 경이 킁, 하고 코를 훌쩍였다. 금방 열리겠지, 뭐. 그러나 곧 벨소리가 한 바퀴 돌아 처음부터 다시 울리자 드디어 짜증이 난 경이 발로 문을 퍽 걷어찼다. 야 이런 씹어먹을 새끼야! 외치려는 순간 절대 열릴 것 같지 않던 현관문이 벌컥 열리고 지호가 눈썹을 꿈틀대며 경을 맞이했다.
"야, 아주 다 부숴라 부숴."
"빨리빨리 좀 열어! 밖에 존나 추운데."
"죄송. 근데 중간에 끊고 나올 수는 없잖냐."
"아오 씨, 드러운 새끼."
신발을 벗던 경이 지호의 정강이를 차는 시늉을 했다. 지호는 낄낄 웃으며 간단히 피한 다음 크지도 작지도 않은 원룸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 들어선 경은 눈 앞에 보이는 태고의 우주에 저도 모르게 쯧 하고 혀를 찼다.
"와...... 여긴 올 때마다 업데이트 되는 것 같다."
먹다 남은 감자칩, 껌종이, 맥주캔과 자잘한 휴지며 종이 조각이 경을 반기고 있었다. 군데군데 널부러진 옷가지도 보이고. 그런데 그게 아무 곳에나 있는 게 아니라 교묘하게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몰아넣어져 있었다. 숙소에 있을 때도, 태일의 말따마나 '때려부수고 집어 던지는' 놈 여섯 중 전체 지분율 30%를 먹고 들어가는 인간이였기에 혼자 사는 집의 상황 역시 모르는 건 아니였다만. 역시 명불허전 우지호. 살아 숨쉬는 환경 오염물질 같은 새끼다. 그 와중에 양털 러그는 지켜낸 게 신기할 지경일 정도로. 경은 한심스런 눈초리로 지호를 보며 테이블에 위태롭게 쌓인 종이더미 위에 사들고 온 마데 인 스타상자 아메리카노와 카페 모카를 간신히 올려놓았다. 그건 그렇고 저 슬리퍼는 어떻게 책장 꼭대기까지 기어올라간거지?
"어.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스마트한 집이라서."
에라, 화상아. 언제부터 바퀴벌레 집이 최신 유행하는 주택 디자인이 된건데. 경이 옆에 있던 포스틱 쪼가리를 집어던지면서도 지호를 도와 집안 수습에 나섰다. 경은 새삼 수습 담당 태일의 소중함을 느끼며 숙소로 돌아가면 삼보일orz배로 감orz사함을orz 전하겠orz다고 다orz 짐했다orz. 쓰레기를 닥치는대로 봉투에 모두 쓸어담고 옷들도 주워서 빨래통에 던져넣고, 근데 도대체 청바지는 왜 싱크대 위에 앉아있을까...... 마치 청바지가 저 혼자 걸어다니는 광경을 목도한 표정으로 그걸 집어들던 경이 순간 멈칫했다. 뭔가가 이상한데.
"너 옷이 원래 이렇게 많았나?"
"아 그거 니 손에 있는 바지는 재효형꺼고 저 모자는 태일이형, 티셔츠는 민혁이형,"
넌 그냥 여기 멤버들 초대하지 마라.
"양말은 표지훈, 티셔츠 표지훈, 벨트 표지훈......"
"......"
표지훈 이 새끼는 어딜가든 쓰레기 지분율 50%를 유지하는 모양이었다. 할 말을 잃은 채 저 구석에서 걸레의 형상을 하고 찌그러져있는 검은 섬유 덩어리를 보는데 "니 뒤에 팬티는 권이꺼,"하는 말에 정신이 확 들었다. 누구보다 멋있게 남들보다 빠르게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건 얌전히 접힌 팬티 두 장.
"얜 왜때문에 여깄죠."
"씻을 때 벗어놓고 안 가져 갔더라. 내 꺼 입고 갔어."
이 새기 보소, 존나 뻔뻔하네? 눈을 가늘게 뜨고 지호를 째리던 경이 분노 표출을 시도했다. 오버하는 거 맞긴 한데, 흡사 불륜 발각 현상 같아서 찝찝하다. 안 그래도 요즘 자꾸 유권에게 들이대는 지호 때문에 속에서 천불이 끓고 있던 경이었다. 물론 그렇고 그럴 일 없다는 거 잘 아는데 알 게 뭐임^^? 지켜보는 사람은 미관 상 안 좋고 정신 건강에도 안 좋았는데 뭐 어쩌라고^^. 우지호 존넨쉬룸 짱쉬룸 휙휴나 먹어라^^!
한편 "너 혹시 관 좋아하니?" 경의 얼굴에 대문짝만하게 쓰여진 말을 읽어낸 지호는 픽 웃고 말았다. 5959 이거 누구 애인이라 이렇게 이쁘냐. 질투하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는 건 진즉 알고 있었다. 사실 솔직한 심정은 세상에 질투할 게 없어서 김유권을 질투하냨ㅋㅋㅋㅋ? 였지만 그래도 귀여워서 의도적으로 유권에게 더 들러붙기도 했다는 건, 글쎄. 경이 알았다가는 정말로 내가 관을 좋아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니까 닥쳐야겠지. 지호는 아예 대놓고 싱글싱글 웃으며 아메리카노를 집어들고 경의 앞으로 다가갔다. 눈이 마주치자 경이 피할 틈도 없이 그대로 고개를 내려 오물조물 작은 입술에 제 입술을 꾹 누른 후 떨어졌다. 그리고 귓가에 대고,
"잘 마실게, 경아."
시크하게 내 얘기만 하고 뒤돌아서 uh huh 이게 컨셉. 한동안 굳어있던 경은 얼굴이 하얘졌다가 새빨개졌다가 뭐라 욕을 하려는지 입을 열려다 말고 이내 제 몫의 잔을 집어들고 지호가 배를 깔고 누워있는 양털 러그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발 잘못은 저 코뚱땡이가 하는데 왜 맨날 내가 지지.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늦은 아침의 햇살은 따스하고 보드랍고 간지러웠다. 햇볕 쬐는 고양이들마냥 러그 위에 나란히 엎드려있는 두 사람 위로 반투명한 노란 망사같은 빛이 하느작거렸다. 그 움직임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느긋했고, 여유로웠다. 뭔가 더하고 뺄 것 없이 그 자체로 평화롭고 완벽한 시간. 눈을 감고 저를 덮쳐오는 나른함을 만끽하던 경이 문득 풍기는 씁쓸한 냄새에 슬쩍 눈을 떴다. 옆에 누운 지호가 아메리카노 컵의 뚜껑을 열고 있었다.
"그거 대체 무슨 맛으로 먹냐?"
"쓴맛."
ㅇㅇ그러세여? 많고 많은 종류 중에서 왜 굳이 저 씁쓸한 걸 꼭 골라 먹는지 도저히 존중을 취향해줄 수 없었다. 맛도 그렇고 색깔도 쌔까만 게 무슨 사약같이 생겨서 기분 나쁘다. 경은 푸르르 입으로 바람을 내뱉으며 카페 모카를 집어들었다. 저 쪽 별에서는 쓴 맛이 맛있다고 생각하나보지, 뭐. 물론 본인은 지구인. 컵 뚜껑을 열자 미친듯한 단내가 훅 풍겼다. 휘핑크림에 시럽까지 들어간 커피는 다른 무엇보다도 경의 취향을 저격하는 것이었다. 블루마운틴? 예멘 모카? 필요없어 난 시발 나만의 길을 간다^^!
"너도 참 너 같은 것만 먹는다."
엎드린 상태에서 상체만 세우고 경을 내려다보던 지호가 문득 말을 툭 뱉었다.
"뭐가."
"초딩."
E놈E?
"너도 아메리카노 같이 생겨갖곤 그것만 처먹잖아."
"아메리카노처럼 생긴게 뭔데? 댄디함? 뉴요커? 가을 남자?"
"ㄴㄴ구려."
스윗 펌킨 같은 경의 대답에 지호의 표정이 가차없이 와작 구겨졌다. 경이 그런 지호를 비웃으며 다 마신 컵을 저 멀리 밀어놓고 몸을 뒤집었다. 있는 힘껏 기지개를 쭉 펴자 찌뿌드드한 몸이 한결 편해졌다. 지호도 몸을 반 쯤 돌려 옆으로 길게 누워 팔로 머리를 받친 자세로 바꾸었다. 또 한 번 집 안에 느긋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호가 손을 들어 경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이리저리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마, 잠 와...... 경이 반 쯤 잠긴 목소리로 밉지않게 불평하며 손길을 털어냈다. 쳇. 허전해진 제 손을 내려다 본 지호가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심심하고 나른하고 평화롭고. 무엇보다 부드러운 솜이불 같은 햇빛에 몰려오는 졸음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노란 빛이 속눈썹에 매달려 눈꺼풀이 무거웠다. 자꾸만 눈이 감겼다.
"잠깐 잘까?"
"그럴까......"
"나 진짜 오랫만에 낮잠 잔다."
"나도. 근데 자고 일어나서 저녁은 뭐 먹지......"
응? 저녁? 잠잠하다 싶더니, 이번엔 후드티 아래로 살짝 보이는 경의 아랫배를 슬슬 찔러대던 지호가 물음표를 가득 달고 경을 쳐다보았다. 밥 먹어야 될 거 아냐. 지금 자면 한두시간 이내로 안 깰 거 같은데 뭐 먹을지는 생각해 놔야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모습에 지호가 다시 물었다.
"저녁 먹고 갈 생각이었어?"
"그럼 넌 내가 저녁 먹기 전에 가면 얌전히 보내줄 생각이었냐?"
"으음......"
그건 당연히 아니지만.
"애초에 붙잡아놨을거면서 어디서 인권 보호자 코스프레따위를."
"역시 넌 나에 대해 너무 잘 알아. 좀 죽어줘야겠다."
그래도 이렇게 자진해서 있을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덧붙인 지호의 말에 경이 아무렇지 않다는 투로 가볍게 대꾸했다. 나 그냥 가면 너 또 밥 제대로 안 챙겨먹을 거 아냐. 지호는 잠시간 아무 대답 없이 눈만 깜짝이며 경의 얼굴에 시선을 꽂았다. 그러더니 별안간 무차별적인 뽀뽀 폭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으왁! 야, 이 미친자야! 징그러워, 떨어져!"
놀라서 몸을 버둥거리며 질러대는 발악은 자체 필터링. 지호의 입술이 경의 이마 코 볼 턱 입술 눈 할 것 없이 쪽쪽거리며 날아들었다. 5959 이거 누구 애인이라 이렇게 이쁘냐22222222 지호가 마구 웃으며 경을 껴안았다. 퉁명스럽긴 했지만 속으로는 밥 혼자 먹기 싫어서+귀찮아서 끼니를 잘 챙기지 않던 저를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나보다. 그게 새삼 예쁘고 고마워서 표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그렇게 주인 쫒는 강아지마냥 날뛰다가 조금 잠잠해진 지호의 옆구리를 퍽 때려 쫒아낸("숨 막혀 새끼야!") 경이 별 기대는 하지 말라고 미리 주의를 줬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볶음밥 뿐임. 너에게 선택지는 없다, 이응이응?"
"이응이응."
됐어, 그럼. 자고 일어나서 마트 가자. 네놈 새끼 냉장고는 공기 얼리려고 있는 거니까 기대도 안 한다. 딱히 반박할 수가 없는 말에 지호는 쩝 입맛만 다셨다. 저도 가끔은 제가 뭘 먹고 사는지 궁금할 지경이니, 입이 백 개라도 백 개 모두 끌어내려 즈려밟아 없애야 할 판이었다. 쯧쯧 혀를 차던 경이 늘어져라 하품을 하고 편하게 자세를 고쳐누웠다. 이제 닥치고 주무십시다, 우지호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은 경의 모습을 한참 지켜보던 지호가 한 팔을 뻗어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잠시 꿈질거리던 경은 이번엔 저항 없이 순순히 안겨왔다. 품에 쏙 들어오는 느낌이 만족스러웠다. 지호는 맑고 노란 빛이 듬뿍 들어오는 창가를 흘끗 보고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속눈썹에 맺혀있던 빛방울이 눈가를 간지럽히다가, 그 감각마저 저 멀리 내던져진 것 마냥 점점 희미해졌다. 지호가 코 끝으로 옅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제각각 엇나가던 두 숨소리가 서로에게 맞추어 이내 하나인 듯 합쳐졌다. 아무 소리도 움직임도 없는 고요한 작은 방에 유리 틈으로 묻어나는 햇살만이 끊임없이 두 사람 위로 흘렀다.
* 벌들 안녕! 글잡은 진짜 오랫만이네여; 카페 블로그는 그렇게 안 귀찮은데 난 왜 여기만 올리려고 하면 삶의 의욕이 사라질까..... 그 동안 써 놓은 비축분도 장편 빼고 열편 쯤 나오니까 이제 슬그머니 꺼내놓도록 할게요:)
* 바인 속 현실 우지호 작업실 겸 숙소는 조금 어두컴두하고 뭐 그런 느낌이었는데; 사실 지호 숙소 제대로 알려지기 전에 쓴 거라 어쩔 수 없음... 씁,
* 친구와 애인 사이에서 왔다갔다 줄타기하는 직경 너무 좋야요 사랑해요 멋져요ㅠㅠㅠㅠㅠㅠㅠㅠ 보고싶다 러시아 잉꼬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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