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하는 암호닉 |
레오정수리/포로리/초롱초롱/블루밍/블리/빌딩/나리/내옆에비엔나/낫새우 |
06.
남자들도 생리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달에 한번 배란되어 수정하지 못한 난자가 배출되는 주기는 절대절대 아니고, 그냥... 왜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여자남자를 떠나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끔씩 있는 우울시계 씹어먹은 날. 세상 모든 불행이 나에게 몰빵된 것 같은 날. 누군가 실수로 내 발을 밟는다면 난 그 누군가의 머리통을 밟을 것 같은 날.
그런 날이면 누구나 사고 하나씩은 치기 마련이다. 개처럼 술 퍼마시고 부장님 과장님 팀장님께 안부전화 돌린다거나, 낯술먹고 나이 서른에 엄마한테 젖달라고 땡깡을 부린다거나 하는. 다 고놈의 술이 문제다, 술이.
우리들의 술고래 정택운도 술을 마셨다. 마시긴 마셨는데, 그날따라 들어가긴 오질라게 잘 들어가는데 취하긴 또 더럽게 안 취하는 거다. 결국 고삐리 주제에 혼자 포장마차에 앉아 조미료 맛 나는 우동 한그릇에다 소주를 네 병이나 깠다. 안취한다 안취한다 하고 끝도없이 들이부었더니 훅 가버렸는지 몸이 말이 아니었다. 하늘은 빙빙 돌고 땅은 꿀렁꿀렁 요동을 치는데 핸드폰 붙잡고 SOS 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어찌저찌 연락처에 들어간다고 해도 섵불리 누군가를 불러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씨이발.... 이재환 나쁘은 새끼."
싸웠거든. 남친이랑.
"흑...흐으... 흐어어어엉... 개새끼.... 씨발새끼..... 썅놈의 새끼!!! 내가 언젠가는 조사버릴 거야 그냥!!!!"
평생 손에 물 안묻히고 살게 해줄 테니 커서 꼭 결혼하자고 헤실대던 이재환은 그 말을 내뱉은 지 꼭 일주일하고도 삼일 만에 끊었던 클럽 출입을 다시 시작했다. 가서 뭘 하는지 몰라도 어쨌든 학교도 잘 안나가던 새끼가 꼬박꼬박 출석도장은 찍더라. 속에선 천불이 나는데 한상혁 말로는 한달이면 많이 참은 거라길래 더 짜증났다.
드라마에서는 늘 이랬다. 남친이랑 싸우고 술 퍼마시면 꼭 이렇게 길바닥에 앉아 고래고래 욕하고 진상피우는 여주인공이 흔한 시대였다. 근데 보통 이런 장면에서는 다음에 어떻게 되더라. 택운의 의문을 해결해주기라도 하듯 어둠의 그림자 하나가 성큼성큼 걸어와 모텔 주차장 벽에 기대고 주저앉은 택운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저런, 안좋은 일 있었나보다 이쁜아."
아...그렇지, 추근덕대는 동네 건달들이 나오셔야지. 근데 보통 그런것들은 여자한테 달라붙는 거 아닌가. 왜 굳이 나한테까지 오시나요. 길바닥에 앉아 온갖 욕을 씨부리던 택운의 앞에 머리 벗겨진 남자 하나가 쪼그려앉았다. 뭐지, 이 상황은?
"누구세여어...?"
"나? 지나가던 멋진오빠."
"오빠 아닌데... 아저씨잖아여."
그 와중에 사리판단은 똑바로 한다. 아저씨는 살짝 당황하는 것 같더니만 헛기침을 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취한 정택운은 직쌀나게도 이뻤다. 양귀비 남자버전이라고 하면 되려나. 그것보다 조금 더 말랐고, 조금 더 예뻤다. 그래서 아무리 그 이쁜 입에서 말이 곱지 못하게 나와도 건드릴 수가 없는 거다.
"이쁜아,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집이 어디야?"
"집...? 없는데여?"
없긴 왜 없어, 마녀 세마리 딸린 집이 버젓이 양재동에 건재하구만. 그러나 택운이 지금 그 사실을 인지할 수 있는 상태라면 애초부터 이 머리 벗겨진 멋진오빠랑 말을 섞고 있지도 않았을 거다. 정철벽이니까.
멋진 오빠는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 할리우드 액션이 포함된 몸짓과 표정으로 택운을 살살 꼬드겼다. 역시 고단수다.
"집이 없어?! 어이구, 어떡해. 그럼 오늘은 어디서 자려고?"
"웅...몰라요."
"오빠가 하루만 재워줄까?"
드디어 본심이 나왔다. 멋진 오빠께서는 은근슬쩍 인사불성이 된 택운의 몸을 터치하며 벌써 집에 데려갈 계획을 세웠다. 성급하시긴, 이래서 대한민국이 빨리빨리 문화에 찌들었다는 소리가 나오는 거다.
애가 맛이 갔지만 그래도 측두엽 한구석에 곱게 저장되어 있던 학습내용 하나가 택운에게 머리를 내밀었다. 모르는 아저씨 따라가면 안돼요, 특히 택운이는 더. 유치원 선생님이 어린 택운이를 붙잡고 늘 당부하셨던 말씀이다.
그 선생님은 어린 정택운이 좋아하다못해 환장했던 사탕, 초콜릿 등등을 많이 주셨기 때문에 좋은 분이셨다. 그래서 유치원 졸업한 지 십년 넘도록 그분을 잊을 수가 없는 거다. 망설이는 택운을 붙잡고 멋진 오빠는 설득을 시작했다.
"이쁜아, 오빠네 집에 가면 침대도 있고 좋은 욕조도 있고 맛있는 것도 있고...."
"그리고 넌 뒈지고, 변태새끼야."
엉? 갑자기 들려오는 날선 목소리에 머리벗겨진 오빠는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발차기 한 방에 날아가버려야 했다. 어어...? 쟤 설마. 택운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 십초 동안 모든 상황은 정리되었다. 와이셔츠에 발자국이 이쁘게 남겨진 머리벗겨진 오빠는 바닥에 드러누워 기침만 콜록콜록 해대고 있고, 그 오밤중에 드러나는 실루엣으로만 봐도 미친 기럭지를 가진 정의의 발차기 용사. 그는 바로.
"한참 찾았잖아, 택운아."
그의 애인 이재환.(비고:아까 싸움)
"쿨럭... 켁.... 너 임마 뭐야!!!"
"괜찮아? 저 변태가 벌써 몸에 손댄 건 아니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어디서 어른한테 발을 써 발을!!! 너 누구냐고!!!!!"
"나?"
영웅 등장의 삼대 법칙. 가장 마지막에,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그리고 가장 멋있게.
"지나가던 멋진 게이."
그리고 얘 남친.
+
"그렇게 재수없을 줄 몰랐어."
"누구, 나?"
"너도 그렇지만 교생이 더."
"교생이 누군데. 아, 오징어?"
"오징어라니!!!!! 이 학교 통틀어서 비주얼 원탑인데!!!!!!!!!"
"...재수없다면서."
쉴드 쩌네, 존나 호위무사세요? 재환이 상혁을 비웃으며 조각조각 부숴진 뿌셔뿌셔를 줏어먹었다. 아니 그냥 책상에 놓여있는 걸 집어먹는 건데 왜 땅바닥에 떨어진 걸 줏어먹는 길거지의 포스가 나는 걸까, 생긴건 멀쩡한데. 상혁은 잠시 의문을 가졌으나 그것도 2초에 그쳤다. 귀찮아.
사실 귀찮다기보다 상혁은 지금 의욕이 없었다. 왜냐하면 보기좋게 까였으니까.
"아니 난 분명히 작업을 걸러 갔는데 왜 거기다 대고 면박ㅇ...."
"...."
"...."
"...그러니까 내가 알기로 분명 우리 교생은 남자였는데 말이다."
몰라 샹, 맘대로 생각해. 상혁이 매점을 털어 사온 과자 오천원 어치를 전투적으로 흡입하기 시작했다. 니가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어디 거짓말 탐지기 좀 작동시켜 볼까. 재환이 참맛 초코우유에 빨대를 꽂으며 짐짓 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교생 못생겼어."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재환은 보았다. 새우깡, 오징어 땅콩, 스윙칩, 홈런볼, 바나나킥이 한데 섞여 사람의 입에서 분출되는 광경을. 그리고 재환은 생각했다. 인간이 죽기 전에 꼭 봐야 하는 광경 중 하나가 아닐까 하고.
"개새끼야!!!! 넌 눈이 꼬추에 달렸냐?!!! 씨발 그렇게 말하는 니가 더 못생겼어 이재환!!!!!!"
....재환은 분명히 평정심을 유지하리라 다짐했었다. 바로 십초 전에.
"내가 못생겼다고? 나 태어나서 못생겼다는 말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데?!!!!"
"지랄 빠네, 코쟁이 새끼야!!!!"
"야 그렇게 따지면 니가 더해, 넌 눈이 너무 답답하게 생겨서 존나 찢고 싶어!!!! 혁아 쌍수하러 갈까?!!!!!"
1초에 다섯 음절씩 속사포 막말을 내뱉는 재환에게 상혁은 결국 꼬리를 내렸다. 나는 언제쯤 저새끼를 말로 이길 수 있을까, 통일 되기 전까진 가능하려나? 그냥 남은 과자로 재환의 입을 틀어막는 물리적인 방법밖엔 쓸 수 없었다. 재환이 입에 가득 들어찬 과자를 우적우적 씹는 동안 상혁은 그제서야 교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러고보니 택운이가 없네."
바야흐로 택운이 사라진 지 2시간 하고도 34분이 지난 후였다.
"...걔 아까 윤리시간 이후로 없던데."
"답 나오네, 너때문이잖아 코쟁아."
"아 왜 또 나야."
몰라서 묻니? 니가 걔한테 저지른 만행을 생각해 보렴. 상혁은 매우 평이한 어조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택운이 앞에서 니 쉴드 많이 쳐줬는데, 솔직히 걔한테 너 존나 나쁜놈이고 똥차인 거 알지? 깔끔하게 포기해, 울지 말고 강해져라. 아마도 상혁이 이렇게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깝칠 수 있는 이유는 택운이 이 자리에 없기 때문이리라.
"정택운 지금 튕기는 거라니까? 걔 아직도 나 좋아해."
"이빨 까지마, 너 쳐다보는 게 존나 살기어린 눈빛이드만."
만약 입학사정관제에 비아냥이라는 전형이 추가된다면 정시 볼 필요도 없이 특기생으로 대학 문턱을 너무나 쉽게 뛰어넘을 한상혁 학생.
"점심시간 얼마 안 남았으니까 빨리 찾으러 가봐라 재환아, 혹시 아니? 어디서 처맞고 있는데 니가 정의의 사도가 되어줄 수 있을지.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절대 내가 가기 귀찮아서 그런 건 아니고."
"걔가 때리면 때렸지 맞을 인물은 아닌데... 기다려 봐, 입은 좀 다물고."
인상을 한껏 찡그린 재환이 상혁에게서 고개를 돌려 교실 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래도 고삼 학기 초라고 양심은 있는지 점심 시간에도 문제집을 펴놓은 아해들이 제법 있었다. 과자도 까고 노가리도 까는 짐승들은 딱 둘. 볼 것도 없이 이재환 한상혁. 그 고요한 환경 속에서 재환의 눈을 사로잡은 이는 단연 우리 임시반장님 되시겠다.
아는 게 정석밖에 없으니 그거라도 펴놓고 끙끙대는 하층민들을 비웃기라도 하는지 세상이 멈춘 듯 정갈한 자세로 참고서와 문제집을 들여다보고 있는 학연에게서 시선이 멈춘 재환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집중해서 보지 않는다면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잠시 후 책상 위에 놓여져있던 학연의 핸드폰이 작게 진동했고, 학연은 전화를 받으며 일어났다.
"어 운아, 왜?"
빙고, 학연을 따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재환이 남은 바나나킥을 모두 입안에 우겨넣고는 빈 과자봉지를 곱게 접어 상혁의 머리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아 왜!!!!"
"쓰레기통이 없어서."
"미친놈....."
택운아 기다려라, 미친놈이 간다.
답글 하나하나 다 못 달아드리는 못난 저를 용서해주세요ㅠㅠㅠㅠㅠ글 올릴 때 빼고는 컴퓨터로 접속을 잘 못해서ㅠㅠㅠㅠㅠㅠㅠㅠㅠ대신 틈 나면 최대한 컴티로 달아드리려고 노력하고 있슴다!!! 정말이예요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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