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
백 일이 뉘 집 개 이름은 아니지만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악마의 유혹이라도 당한 거야 뭐야. 날 보는 눈빛에 홀려드는 것 같기도 하고. 녀석이 진짜 악마라고 생각하자 기분이 이상했다.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절대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피어났다. 악마라니. 사탄? 루시퍼? 웃기는 소리.
녀석은 내 끄덕임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완벽하게 믿게 될 거야.”
이쯤 되니 무섭기도 했다. 악마라는 존재에 대해 보통의 사람들은 두렵다는 느낌을 받으니까. 아무리 봐도 내 앞에서 자신이 악마라고 주장하는 저 얼굴은 미소년이었다. 저런 얼굴로 홀리니까 사람들이 빠져드는 건가.
“제대로 홀리면 정신도 못 차려.”
또 읽은 거야? 내 생각을? 얼굴이 저절로 구겨졌다. 눈치로 때려 맞출만한 건 아니잖아. 이게.
“이건 나도 신기한데.”
“응?”
“읽혀. 다른 인간들보다 힘이 더 들긴 해도 읽히긴 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은?”
“밥 먹을 생각.”
“와……. 맞췄긴 한데 이건 기각. 눈치로도 때려 맞출 수 있는 거잖아.”
“그림자가 없는 것도 눈치 챘으면서 아직도 믿지 못하는 이유가 뭐야.”
“너 같으면 이게 믿어지겠어? 그림자는... 내가 밝혀내고 만다.”
“밝혀내?”
“내가 이래보여도 뼛속까지 이과 거든. 뭔가 있겠지.”
내가 실눈을 뜨며 녀석을 째려보았다. 녀석이 코웃음 쳤다.
“백 일 뒤엔 지금 네 생각이 틀렸다는 걸 증명해줄게.”
“못하면 네 말대로 사라질 거고?”
“...그래. 조건이니까.”
그래, 백 일. 세 달이면 사라지겠다는데. 그렇게 그를 받아들였다. 백 일을 조건으로.
***
< D - 100 >
참다못해 짜증나는 표정으로 숟가락을 탁상 위에 던지듯이 놓았다. 아침을 먹는 내 모습을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아니, 관찰 중이다. 날 관찰하고 있어. 조금 전 밥을 먹겠냐고 물어보니 또 한 번 크게 웃으며 그런 음식 따위는 먹지 않으니 혼자 많이 먹으라 얘기했다. 그러고는 나를 마주보고 앉아 이제 관찰하고 있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숟가락을 탁 내려놓으며 짜증을 표출한 내 행동을 눈앞에서 보고도 녀석은 미동 하나 없이 턱을 괸 채로 계속 나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하게. 생각해보면 나에게 표정은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었다. 표정 변화가 없다. 감정의 폭이 아주 좁다. 그건 말투에서도 묻어난다.
“다 먹은 거야?”
당연히 눈치도 없고. 한마디로 공감 능력제로다. 어떻게 생각해도 내 머리로는 정신 질환 환자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녀석이 갑자기 인상을 팍 쓰더니 탁자에서 그대로 상체를 밀어 좀 더 가까이 다가온다.
“나한테 공감을 바라는 거야?”
뭐야, 또 읽은 거야? 이제 좀 알 것 같다. 녀석이 돌연 인상을 쓰면 그건 내 생각을 읽고 있는 거다. 이제 생각도 마음대로 못하는 건가.
“우린 인간들처럼 감정이 많지 않아.”
“아... 네.”
“감정에 쉽게 흔들리지도 않고.”
“난 그냥 네가 밥 먹는 걸 쳐다보는 게 부담스럽다는 의미였어."
“그럼 안 봐? 앞에 있는데.”
“같이 밥이라도 먹던가…….”
“인간들 음식은 안 맞아. 네가 만든 음식은 맛도 없어 보여.”
공감 능력이 없는 것도 모자라 배려심도 없다. 간장계란밥은 쉽게 실패하는 음식이 아니거든? 괜스레 심술이 나 다시 숟가락을 들어 이미 다 비벼진 밥을 꽉꽉 힘을 주어 더 비볐다.
“저런 걸 하루에 세 번 씩이나 먹어야 한다니. 가엾군.”
“맛있거든?”
“냄새도 구려.”
예. 예. 그런가 봅니다. 고개를 설렁 설렁 저으며 한 숟갈을 떠먹었다. 근데 진짜 밥을 안 먹어도 되는 거야? 여기서 배꼽시계 한 번만 울려주면 악마니 뭐니 다 거짓말인 거 확정인데.
“배는 안고파?”
“나 참. 별 걸 다 걱정하네.”
“완전 맛있는데. 맛있는 걸 안 먹다니. 악마 인생도 기구하다. 악마는 인생이 아니라 마생인가?”
“살다보니 인간에게 동정을 받는 날도 오는군. 밥이 그렇게도 좋나?”
“밥심이 최고지.”
“그걸 먹으면 어떤데?”
녀석이 내 밥그릇 쪽으로 턱짓을 했다. 어떻긴.
“기분이 좋지. 맛있으니까.”
“그래?”
“응. 근데 진짜 밥 안 먹어?”
“먹을 필요가 없으니까. 난 그걸 먹어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아."
“아... 그래. 그럴 수 있지.”
“인간들이 고통스러워할 때가 가장 즐겁던데.”
마지막 한 숟가락을 퍼던 동작을 멈추었다. 녀석의 얼굴엔 여전히 표정이 없다. 남의 고통을 즐긴다니. 악질이다.
“계약할 때 인간들이 멍청하게 속아 넘어가는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
녀셕의 주변으로 풍기는 기분 나쁜 공기에 미간을 좁혔다. 기분 나빠. 엄청.
“우리도 계약했잖아.”
숨이 턱 막혔다. 우리가 계약을 해? 내가 악마와 계약을 했다는 소리야? 당황스러움에 눈동자가 쉴 줄을 모르고 돌아갔다.
“아 맞다. 기억을 잃었지. 너.”
녀석이 의자에서 일어나 앉아있는 내 턱을 슬며시 잡아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악마와 두 번 계약을 맺은 인간은 네가 처음이야.”
“......”
“역사를 다시 쓰게 된 걸 축하해.”
말문이 막혔다. 놈의 눈동자가 날 집어삼키는 것만 같았다. 흥미로움과 약간의 슬픔, 악랄함, 교만이 가득 찬 검은 눈동자였다. 마른 침을 삼키며 감당하기 힘든 눈동자를 마주했다.
적막한 공간을 깨우는 이질적인 서늘한 소리가 났다. 녀석에게 턱을 잡히는 바람에 고개를 움직일 수 없어 눈동자만 소리가 나는 쪽으로 굴렸다. 어제 실습 나간 병원 소아과 환자에게 받은 노란 장미가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엄습해 오는 두려움에 의자를 조금 뒤로 뺐다. 그는 내 턱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속삭였다.
“뭔데.”
답을 하는 내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심장이 압박감에 세게 조여 왔다. 내가 틀렸다. 환자가 아니야. 내 앞에 있는 놈은 진짜 악마야. 위험한.
“당신은 영원히 나의 것.”
말을 마친 녀석이 혀로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저의 입술을 천천히 핥았다.
계약이 성립되었다. 악마와의 계약.
두 번의 계약은 여주가 기억하지 못하는 계약과
지금 정국이와 100일을 조건으로 맺은 계약을 의미합니당
참고로 노란 장미 꽃말은 '은밀한 사랑'이랍니닷!!
암호닉 신청은 신청글에서 언제든지 해주셔도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W. 사프란(Spring Croc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