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왜 불러."
"...빚쟁이가..."
"너 또 빚쟁이 얘기 꺼내려고 그러지."
"......"
"......"
"...응...... 왜? 꺼내면 안 돼?"
"넌 진짜 하루라도 빚쟁이 얘기를 안 하면 입 안에 가시가 돋히는구나."
"...그래서 안 돼?"
"아니. 안 될 건 없는데."
"......"
"표정 좀, 진짜... 누구 죽었냐?"
"...곧..."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누구."
"누구긴 누구야. 이홍빈이지..."
"왜 죽는대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몰라서 묻냐......"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
자칭타칭 죽마고우로 불리는 그 둘은 깜깜한 저녁 길을 헤쳐나가며 소소한 대화를 나눈다.
몰라서 묻냐.
하며 제 머리를 쥐어싸는 이홍빈의 행동에 김원식은 그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을 뿐이다.
그리고 그 표정은 점차 친구에 대한 동정심으로 바뀌게 된다.
불쌍한 녀석.
"그럼 몰라서 묻지. 알면 물어보겠냐."
"...아니... 초콜릿을 줄 거면..."
"줄 거면."
"나한테만 줘야 되는 거 아니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그렇잖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병이다, 정말..."
"...지는..."
"...내가 뭘? ㅋㅋㅋㅋㅋㅋㅋ"
"너도 빚쟁이 좋아하잖아... 어디서 아닌 척이야."
"너 만큼은 아니니까 걱정 마."
"어떻게 걱정이 안 돼..."
"아, 너 만큼 병적이진 않으니까 걱정 말라고!"
"그래도 걱정 돼... 어쨌든 좋아한다는 거잖아..."
"야."
"사랑은 쟁취하는 거래."
"...?"
저 멀리에 익숙한 가게 하나가 시야에 들어온다.
잠시 걸음을 멈춰 서로를 바라보고 있던 시선은 이홍빈이 먼저 고개를 돌려버림으로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알아."
"......"
"그거 내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
해맑게 웃고 말아버리는 그 모습에 김원식이 덩달아 웃음을 터뜨린다.
알면 됐어.
"응."
"..."
"근데 넌."
"..."
"항상 볼 때마다."
"..."
"손에 쥐고 있다가 뺏기는 거 잘하더라."
"..."
"너도 알면 됐어."
이상한 적막이 흐른다.
멍청하게 입꼬리를 늘리던 김원식이 슬쩍 표정을 굳히면서 입술을 깨문다.
이홍빈이 아주 잠깐 웃는다.
뜻 모를 침묵이 시작된다.
"맞다. 어제 네가 카톡으로 쏴준 거 잘 봤다."
"...아. 그거. 야. 진짜 쩔지 않냐? 내가 아끼고 아끼던 거 너한테만 특별히 알려준 거야."
"또 다른 거 공유 좀."
"싫어. 미친 놈아."
"왜? 미친 놈아."
"그냥. 미친 놈아."
"시발. 왜. 미친 놈아."
"아. 그냥. 미친 놈아."
"미친... 그거 하나 알려주면 어디가 어떻게 되냐?"
"꼬우면 네가 직접 구글링으로 찾아."
"네가 해서 나한테 주면 되잖아."
"아. 내가 왜? 이 미친 놈이. 은근슬쩍 받아 먹으려고만 하네."
"미친 놈은 지면서 왜 자꾸 나한테 미친 놈이래?"
...그 침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미친 놈.
네가 더 미친 놈이야.
내가 미친 놈이면 넌 미치고 미친 놈이다.
즐.
"뭐해요?"
"...아."
"추운데 안 들어가고."
가게 앞을 서성이는 인영을 향해 한상혁이 말했다.
느슨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발렌타인데이 그 특유의 달콤함이 거리를 반짝이고 있다.
"...네가 안 왔길래..."
"..."
"오면, 같이 들어가려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이재환이 대답했다.
가느다란 시선이 흘긋 가게 내부를 훑는다.
즐거워 보인다.
익숙한 면전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떠들기를 즐기고 있다.
그에 한상혁도 즐거운 표정으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이재환은 그저 그걸 멀뚱히 바라보기만 한다.
"오래 기다렸나봐?"
"...아니."
"아니기는. 추워서 다 얼었는데."
참았던 숨을 내쉬자 연하게 피어오르는 입김이 보인다.
그 여러 개의 덩어리들을 바라보며 한상혁이 말했다.
단 하나의 감정도 섞여있지 않은 가벼운 어투다.
"이제 나 왔으니까."
"...응."
"들어가요."
같이.
"누나한테 초콜릿 받아야죠."
한상혁이 이재환의 손을 낚아채어 앞으로 잡아 끌었다.
"근데 앞으로 이러지는 말자."
"..."
"싫어지잖아. 내가 더."
이재환이 아무 말 않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가게로 들어서는 인영 중 하나가 바쁘게 가게 안을 뒤집어 시선을 돌린다.
"이게 뭐야아... 진짜. 오빠 때문에 다 망쳤어."
"오모오모. 얘 말하는 것 좀 봐. 망치긴 뭘 망쳐. 완전 예쁘게 잘 됐는데."
"...오빠 눈에는 이게 예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지금 보니까 좀 찌그러지긴 했닭."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좀? 좀?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좀이 아니라... 많이 찌그러졌네. ㅋㅋㅋㅋㅋ..."
머쓱하게 웃으며 리본을 만지작거리는 사촌 오빠의 행동에 권위라고는 없었다.
포장이 이게 뭐냐며 사촌 오빠를 구박하던 빚쟁이의 시선이 날카로워진다.
"...이게 뭐야. 진짜... 기껏 시내까지 나가서 골라온 포장진데."
"(말 돌리기) 빚쟁아. 우리 뮤직뱅크 보자. 오늘 금요일이서 뮤직뱅크 해. 너 좋아하는 제이다이스 나오잖아."
"제이다이스 저번 주에 막방이었거든요."
"...그래."
"ㅠㅠㅠㅠ... 오빠들이랑 애들이 싫어하면 어떡해..."
"@,@... 걔네들은 네가 발로 밟고 찌그러뜨린 다음에 줘도 바보처럼 좋아할 애들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뭔 소리에요... 이홍빈 걔가 또 얼마나 갈굴지 생각하니까 벌써부터 슬퍼지네. ㅋㅋㅋㅋ"
"아니라니까?"
"몰라요. 다 오빠 탓이야. 오빤 잘하는 게 뭐예요, 진짜... (정곡) 차라리 내가 할 걸 그랬어..."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농담이요, 오빠."
"아니라니까 자꾸 걱정하네. 걱정할 것 없다니까."
"...걱정이 안 되는 게 이상하지...!"
"운아! 네가 대답 좀 해봐."
비교적 한산한 떡볶이 가게 안.
빚쟁이가 차학연의 옆에 앉아 마구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그에 테이블 구석에서 각종 초콜릿들을 포장지에 담고 있던 차학연이 대뜸 정택운을 부른다.
카운터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정택운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불러."
"너, 빚쟁이가 주는 거면 다 좋지?"
"...뭐가."
"포장지가 좀 맘에 안 들어도 빚쟁이가 주는 거면 다 좋아할 거지?"
"..."
"그치, 운아? @,@?"
"...몰라."
짧은 대답을 내어놓고 다시 핸드폰으로 고개를 돌려버리는 그.
순식간에 울상으로 변해버리는 사촌 동생의 얼굴을 확인하며 차학연이 진땀을 뺀다.
"야, 야. 정택운. 말을 또 그렇게 하냐. 그냥 좋다고 해주면 안 돼?"
"...(빚먹빚먹)..."
"...헐. 아냐, 아냐. 빚쟁아. 들었지? 택운이가 다 좋대."
"...오빠 귀에 난청증 있어요...? 아니라잖아요..."
"@,@... 난청증 없어..."
"ㅜㅠㅜㅠㅜㅜ..."
"택운이가 다 너 좋아서 그러는 거야. 쑥쓰러워서."
"뭐래. 차학연. 애한테."
포장지로 덮여진 초콜릿들을 만지작거리던 빚쟁이가 초롱초롱하게 차학연을 바라본다.
"오빠. 헛소리는 됐고 빨리 돈이나 주세요."
"돈? 무슨 돈? @,@?"
"이거 포장지 망친 값이요."
"...너무한닭... 난 그래도 너 도와주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도와주려고...... 해준 건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농담이요. 농담."
"애들 왜 이렇게 안 와."
아주 조용히 불만 담긴 목소리가 들려온다.
카운터에 앉아 턱을 괴어버린 그가 무의식적으로 짤랑이는 종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며 네 명의 사람이 입김을 뱉어낸다.
"아, 추워!"
"추워..."
"어, 뭐야. 형들은 벌써 왔네."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탈탈 널어내며 그들의 앞으로 다가간 빚쟁이가 반가움에 미소를 짓는다.
"야! 왜 이렇게 늦었냐."
가볍게 다그치는 말에 이홍빈이 인상을 찌푸린다.
"뭐래. 완전 빨리 왔는데."
"완전 늦게 왔어."
"너 그렇게도 내가 보고 싶었냐?"
"...ㅋ...?"
"하여간. 빚쟁이 나 좋아하는 건 알아줘야 돼."
"학연이 오빠. 지금 당장 거기 초콜릿 중에서 하나 버려버리세요. 주기 싫은 사람이 하나 생겨버려서. ㅎㅎ"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알았어, 알았어."
"뭘 알아. 나 예쁜 거?"
"ㅋ..."
"근데 네 명이 한꺼번에 왔네. 같이 만나서 왔어?"
"아니. 앞에서 만났어."
"헐. 재환이 오빠. 못 본 사이에 더 귀여워졌어... ㅠㅠㅠㅠㅠ.... 오빠... ㅠㅠㅠㅠㅠ..."
"빚쟁이는 안 본 사이에 더 예뻐졌네? ㅋㅋㅋㅋ"
"너 지금 나 앞에 두고 재환이 형 찾는 거냐?"
"(무시) 오빠. 추운데 얼릉 들어오세여!"
"......저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홍빈... 오늘도 불쌍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찔찔이는 닥쳐."
"ㅋㅋ... 너네 커플티냐? 왜 다 니트 입고 있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누나. 나는 안 보여요? 나도 니트 입었는데. 누나가 좋아한다고 해서."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우리 혁이... 남자가 됐어... 아주 그냥... ㅠㅠㅠㅠㅠㅠㅠ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귀여워."
"결혼하자. (진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모오모. 우리 빚쟁이 아주 그냥 박력이 넘쳐버리네! 오모오모."
"...근데 학연이 형 앞에 저거 뭐냐."
"응? ㅎㅎ"
"설마 저게 그 우리한테 줄 초콜릿?"
"ㅎㅎ..."
"은 아니겠지. 저게 어딜 봐서 초콜릿이야. 그치?"
"ㅎ......"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포장지 왜 저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누가 밟기라도 했냐? ㅋㅋㅋㅋㅋㅋㅋ"
"(발뺌) 몰라. 나는 모르는 일이야. 학연이 오빠한테 물어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얘... 얘두라. 안뇽. 좋은 아침. 아, 저녁이구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그게. 내가 예쁘게 포장을 하려고 했는데. 이게 생각보다 어렵더라... 가위로 해도 잘 안 잘려지고...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학연이 형이 한 거였어? ㅋㅋㅋㅋㅋㅋ"
"그럼 그렇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이가 없음에 동갑내기 친구 둘은 그저 웃느라 바쁘다.
어느 틈엔가 카운터를 빠져나와 그들의 자리에 합석한 정택운이 차학연에게 무어라 말을 건넨다.
근데 다들 신경 안 쓰고 지나쳤다는 게 함정.
앞치마를 두르고 주문서를 작성하는 빚쟁이의 손이 꽤나 바쁘게 움직인다.
"뭐 먹을래? 지금은 떡볶이 먹고 가는 길에 초콜릿 먹어라."
"난 오랜만에 햄 사리 먹고 싶다."
"네, 햄 사리는 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햄이랑 또 뭐. 다른 건?"
"라면 추가하자!"
"네. 재환이 오빠가 좋아하는 라면은 백 개 추가하고..."
"저게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음료수는? 안 먹어?"
"나 술 먹고 싶다."
"ㅋㅋ? 미친 놈."
"네 입술."
(정적)
묵묵히 몸을 일으킨 빚쟁이가 '사이다나 드세요.'하며 자리를 뜬다.
괜히 머쓱해진 이홍빈이 제 뒷통수를 가볍게 긁적거렸다.
여전히 초콜릿 포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하염없이 포장지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차학연을 제외한 다섯 명 중에서.
묘한 긴장감이 나돈다.
"ㅇㅅㅇ... 나 사이다 싫어..."
"왜염. 전 좋아염. 그냥 먹어요, 형. ㅡWㅡ"
"@,@... 혁이가 요새 사춘기구나."
"빨리 먹고 싶다. 헷. 'ㅂ` 햄 사리..."
"배고파... ;ㅅ;"
"우왕. 빚쟁이가 서빙해준다! ㅇㄴㅇ!"
...방금 한 말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