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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자 전체글ll조회 1116


원식은 자신의 카페 앞에 주차되어있는 학연의 차로 운전을 해 학연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사실 학연이 자신의 이런 불필요한 호의를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쯤은 원식 역시 알고 있었지만 오늘 같이 우울해 하는 학연을 야심한 시간에 홀로 보냈다간 하루 종일 학연이 걱정되어 일을 손에 잡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에 누구보다도 그것을 잘 아는 학연 역시 자신의 차 운전대를 잡는 원식에게 차마 거절의 표시를 할 수 없었다. 원식은 학연이 사는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학연이 라인 안으로 들어서는 것까지 확인한 뒤에야 콜택시를 불렀다. 그리고 다시 카페로 향해 자신의 차를 타고 집으로 들어설 것이다. 학연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무거운 몸을 침대에 뉘였다. 한참을 울어서 퉁퉁 부어버린 눈과 뺨이 쓰라렸다.

사실 얼굴이 쓰라린 것쯤이야 마음이 쓰라린 것에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학연은 마음이 아팠다. 택운을 10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기까지, 어쩌면 약간의 기대를 걸었을 지도 모른다. 택운이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지는 않을까, 혹시라도 자신을 잊지 않고 기다려주지는 않았을까, 아주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있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우습게도 그런 기대를 했던 자신이 매우 이기적이었음을 깨닫게 해주기라도 하듯 택운은 학연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마치 10년 전 학연이 택운을 두고 한국을 떠났을 때처럼.

학연은 잠을 설쳤다. 잠에 들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어영부영 시간을 보냈고 결국 동이 트는 것을 보고 나서야 간단하게 아침을 차려 먹었다. 넓고 깔끔한 학연의 집. 전체적으로 화이트칼라의 벽지를 보며 학연은 인터뷰 장소를 확인하는 연락을 받았다. 5주 분을 전속으로 잡지에 그에 대한 인터뷰를 실어야 하기 때문에 앞으로 만날 장소는 택운의 개인 연습실로 하고 싶다는 그의 에이전시 측의 제안에 동의를 했다. 홍빈은 몇 번이고 전속 담당이 처음인 학연에게 당부 겸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3년 내내 회사에서 말단을 맡던 학연이 드디어 전속을 맡게 된 것에 홍빈은 아마 앓던 이가 빠진 듯 찝찝했던 그간의 감정들을 털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그 전속 상대가 정택운임에는 변함이 없지만.

“일찍 오셨네요?”

택운의 연습실이 마련되어 있는 그의 에이전시에 도착했을 때 어제 미팅 당시 보았던 택운의 매니저인 재환이 학연을 반가운 얼굴로 맞았다. 재환은 친절했다. 전적으로 이번 계약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쪽은 택운의 에이전시 측이었으나 택운의 매니저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그는 상냥했다. 재환은 들고 있던 간단한 브런치를 학연에게 건넸다. 사실 아침은 챙겨 먹었지만 재환의 정성에 놀라 학연은 고마운 마음으로 그가 내미는 쇼핑백을 받았다. 그리고 놀라울 만큼 학연의 입맛과 딱 떨어지는 메뉴에 학연은 재환을 향해 환하게 웃어보였다.

“지금 저 되게 걱정하고 있어요. 택운이 형이 이렇게 전속으로 인터뷰를 허락한 건 처음이라 학연씨랑 트러블은 없을 지..저 형이 되-게 성격 드럽거든요.”
“괜찮아요. 저도 사회생활 헛으로 하진 않았거든요. 자신 있어요.”
“그래도 마음만은 굉-장히 따뜻한 형인데. 그걸 저같이 오랫동안 함께한 사람만 안다는 게 문제지만.”

학연의 기억 속 택운은 그 누구보다도 다정하고 따뜻했던 사람이었다. 학연은 재환을 향해 작게 웃어 보이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였다. 재환의 안내를 받고 도착한 택운의 연습실 문 앞. 노트북과 그 외의 인터뷰 당시 필요할 파일들이 담긴 가방을 들고 있던 학연은 이만 실례하겠다며 자리를 벗어나는 재환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노크를 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학연은 몇 번이고 문 앞에 서서 깊은 숨을 내쉬었고 문득 연습실 안에서 익숙한 피아노 소리가 들려옴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학연은 노크 없이 문을 연 채 안으로 들어섰다.

연습실 내부는 택운을 닮아 무척이나 깔끔하고 단조로웠다. 인터뷰를 위한 파일 철을 가방에서 꺼내었을 때, 학연은 제 눈앞에 등을 진 채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하고 있는 택운을 보았다. DJ Okawari의 Luv Letter. 무던히도 택운과 어울리는 곡. 몇 년 전 택운의 관련기사를 찾아보던 중 어지간하면 짤막한 인터뷰 기사조차 없던 택운이 세 파트 분량의 인터뷰를 했던 적이 있어 학연이 기사를 발견하게 되었고, 택운이 최근 가장 즐겨 듣는 곡이라고 대답했던 곡이었다. 잔잔하고 경쾌한 분위기의 원곡과는 달리 택운의 연주는 언제나 무겁고 투박했으며 거칠었다.

길고 아름다운 택운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춤을 추듯 움직였고 학연은 숨이 멎을 듯한 그 광경에 가슴이 아려왔다. 하얗고 가늘었던 택운의 손가락을 어렸을 적 학연은 유난히도 좋아했다. 오로지 학연을 위해서만 연주를 해주던 그 손을. 지금의 택운은 무엇을 위해 연주를 할까. 적어도 그 당사자가 자신은 아닐 것임에 괜스레 코끝이 찡해왔다.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엿듣는 건 적어도 좋은 습관은 아닌 것 같아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택운의 연주는 멈추어져 있었다. 건반 위에서 움직이던 그의 손가락은 내려와 있었고 건반을 쫒던 택운의 눈은 차갑게 식은 채 학연을 향해 있었다. 놀란 학연이 순간적으로 힘이 빠져 들고 있던 파일 철을 놓치는 불상사가 발생했고 학연은 주저앉아 흩어진 종이들을 다급히 줍기 시작했다. 죄송하다는 학연의 작은 사과에도 택운은 아무 말 없이 학연이 떨어뜨린 종이들을 같이 주웠고 마지막장까지 다 주운 택운이 학연에게 그것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어떤 피아니스트든 자기 연주를 도둑맞고 싶진 않아 해요.”
“……”
“차학연씨는 인터뷰어이기 전에 무엇보다도 팝 칼럼니스트잖아요? 나를 인터뷰 대상이라기보다는 연주자로서 대해줬으면 좋겠는데.”
“..죄송합니다.”
“됐습니다. 별로 듣고 싶었던 말은 아니라서.”

이내 택운은 피아노 옆에 자리 잡은 소파에 앉았고 학연 역시 어색하게 택운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학연을 위아래로 훑던 택운은 연습실 내에 마련되어 있는 인터폰으로 커피 두 잔을 요청했다. 학연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스트레스성 위경련을 자주 일으켰다. 약한 위장 탓인지 카페인이 많이 들어 있는 커피나 녹차는 잘 받지 않아 피하던 편. 10년 전의 택운은 그러한 학연을 배려해 항상 따뜻한 우유나 두유를 학연의 품속에 넣어주곤 하였었다. 10년이라는 시간이면, 학연이 커피를 마시지 못한다는 것쯤이야 충분히 잊고도 남을 시간. 하지만 제 앞에 놓여 진 커피 두 잔에 느리게 눈을 깜박거렸다. 택운은 아무렇지 않게 커피를 마셨고 학연은 떨리는 손으로 커피 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마시는 원두커피. 학연은 쓴 맛을 원체 싫어했다. 입에 맞지 않는 뜨겁고 씁쓸한 맛. 학연은 결국 한 입도 채 마시지 못한 채 잔을 내려놓았다.

택운의 시선이 집요하게도 학연을 쫓았다. 학연은 택운의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학연은 택운의 앞에서 언제나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기에. 탁 소리가 날 만큼 크게 컵을 내려놓는 택운에 움찔했다. 놀란 학연이 택운을 바라보았지만 어느덧 택운은 학연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일하기 전에 한 가지 당부하는데.”
“…네.”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런 눈으로는 나를 안 봤으면 좋겠어요.”
“……”
“왜 나를 그런 상처받은 눈으로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에요.”
“……”
“프로잖아요, 학연씨.”

택운은 어느덧 자신을 잊었다. 학연은 아직도 발목의 낙인과도 같은 흉터를 보며 택운을 기억하고 있고, 10여 년 전 택운이 자신만을 위해 연주해주던 피아노 소리가 떠올라 숨 죽여 울었었고, 적어도 택운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슬프게도 우리를 둘러싸지 않은 10년이라는 시간은 무척이나 길었고 택운이 학연을 잊기엔 충분한 시간이었기에 택운은 지금의 학연을 철저하게 외면해왔다.

학연은 택운을 인터뷰 대상으로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피아니스트들과 같은 연주자로서 택운을 대할 수도 없었다. 택운은 학연에게 있어 평생 잊을 수 없는 ‘첫사랑’ 그 이상, 그 이하의 존재도 아니었다.

학연은 가빠오는 숨을 골라 쉬었다. 그리고 택운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테이블에 자신의 노트북을 올려 두고 전원을 켰고, 들고 있던 설문지를 택운에게 건네었다. 5주분의 인터뷰 질문 내용이 담긴 설문지였다. 검토 차원에서 건넸다지만 택운은 학연이 건넨 설문지를 읽어보지도 않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우선 10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 온 피아니스트 정택운씨의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짧으면 짧게, 길면 길게 대답해주셔도 상관없습니다.”
“사실 오고 싶지는 않았어요. 저도 모르게 제 매니저가 공연 스케줄을 한국에서 잡아두었더군요. 공연을 열흘 정도 남겨두고 있지만 그다지 유쾌한 기분은 아니에요.”

소문과 같이, 피아니스트 정택운은 지나치게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직설적이었다. 혐한 피아니스트라는 소문이 그를 따라다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느끼는 바를 거침없이 표현했다. 그의 대답을 따라 노트북 타자기를 두들기며 문답을 작성하던 학연은 에이전시에 도착하기까지 몇 번이고 질문을 검토했지만, 노골적으로 대답하는 택운에게 굳이 피해야 할 질문은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혐한 피아니스트’ 라는 수식어가 정택운씨를 따라다님은 아마 익히 들어 알고 계실 겁니다.”
“나는 한국을 혐오하지 않아요. 단지, 한국에서 있었던 좋지 못한 기억을 혐오 할 뿐이죠.”

순간 학연은 타자를 두들기던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택운과 시선을 마주하였다.

“제가 한국에 오지 못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하나 있거든요.”
“……”
“듣고 싶으시면, 이야기 해 드릴 수 있어요.”

결국 학연은 지금까지 작성했던 원고를 저장시켰고 황급히 노트북을 닫아 가방에 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가, 무척이나 잔인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10년 전의 학연 자신만큼이나.

“…리사이틀이 얼마 남지 않으셨는데 제가 너무 폐를 끼쳤네요.”
“……”
“오늘 인터뷰는 이어서 공연이 끝난 뒤 다시 택운씨를 찾아뵈어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드린 설문지는 꼭 검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불편하신 질문은 노코멘트로 기입 해주시면 빼도록 하겠습니다.”
“……”
“또, 리사이틀 때 가서 듣고 칼럼을 쓰겠지만 연습실에서의 모습도 원하는 대중들이 많아서 가끔씩은 연습실에서의 택운씨도 쓰고 싶은데, 설문지를 팩스로 보내시면서 같이 스케줄도 보내주시면…”

차마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어느새 학연은 바보같이 울고 있었다.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에 들고 있던 파일 철에도 떨어졌고 택운은 그런 학연을 그저 바라보았다. 어쩌면 꽤나 학연은 나약해져 있는 것 같았다. 학연은 황급히 죄송하다는 말만을 남긴 채 서둘러 연습실을 벗어났다. 에이전시 로비에 있던 재환이 학연을 향해 인터뷰를 잘 끝마쳤냐며 물어왔지만 학연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도망치듯 건물을 빠져나왔다. 무엇을 바라고 택운을 만난 것일까. 분명 제게 곱지 않은 시선과 말들이 나올 것을 알면서도 학연은 상처를 받았다. 택운의 말마따나 프로답지 못했다. 공적인 자리에서 사적인 감정을 끼워 넣는 것.

밖을 나서자 그 예전에 택운이 제게 고백했던 겨울날처럼 차가운 칼바람이 학연의 얼굴을 할퀴며 지나갔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네가 좋다.’
‘운아…’
‘네가 좋아, 연아.’

10년이라는 케케묵은 추억을 헤집고 있는 제 모습은 꽤나 꼴사나웠고, 또한 비참했다.

§

택운은 피아노를 어렸을 적부터 무척이나 좋아했다. 건반은 솔직해서 누르는 그대로 소리를 냈고 가식에 휩싸여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 보다 피아노와 소통 하는 것을 좋아했다. 독학으로 여섯 살 때 쇼팽의 발라드 제1번 g단조 Op.23 를 치는 택운의 모습을 본 택운의 새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전했고 그는 전문적으로 택운이 피아노를 배울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보내왔다. 그리고 택운은 1년간의 레슨 뒤 스물 두곡의 작곡을 했다. 다들 입 모아 말하는 수재라는 말을 들으며 예술고에 입학 했을 땐 모두가 택운을 부러워했고 천재 피아니스트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오로지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 좋아서 시작했지만 어느새 피아노 관련 전공의 진로가 아니라면 되지 않는 상황까지 치달았고 모두의 기대가 커질수록 택운은 점점 불안해졌다. 듣고 싶고 좋아서 치던 피아노는 마음이 아닌 머리로 치게 되었고 택운은 처음 학연을 보았던 그날도 그 어느 때와 같이 밤늦게까지 남아서 연습에 몰두했었다. 밑에서 언제든지 자신을 치고 올라올 수 있는 피아니스트들 덕에 쉴 틈 없이 자신의 허리를 졸라매어야 했다. 그리고 시계바늘이 한시를 가리켰을 때에야 만족 하지 못한 얼굴로 일어나 학교에서 마련해준 제 개인 연습실을 지친 표정으로 빠져 나와야 했다.

악보를 구겨 버릴 듯 꽉 쥐고서 복도를 걷는데 희미하게 악기를 모아두는 창고에서 익숙하지 않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처음 듣는 곡에 귀가 먼저 반응했고 이끌리듯 발걸음을 옮겼다. 살짝 열린 문 틈 사이를 비집고 봤을 때 검은 천으로 두 눈을 가린 채 춤을 추는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두 눈을 가린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위태로움 없이 탄탄하게 균형을 잡으며 춤을 추는 모습에 택운은 그만 넋을 잃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움. 그래, 그것은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는 광경이었다. 그 소년의 춤에 흠뻑 빠져 순간 잡고 있던 문고리에 힘이 들어갔고 큰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려버렸다.

‘누구야.’

두 눈을 천으로 가린 상태로 소년이 소리가 난 문 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택운이 당황해 말을 하지 않자 소년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천을 풀었고 곧 감춰져 있던 눈이 택운을 향했다. 평범한 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압도하는 시선이 자신을 응시했고 그 바람에 처음 피아노를 치던 그때처럼 온 몸의 피가 달아오름을 느껴야했다. 계속 택운을 빤히 바라보는 소년의 시선에 저절로 입이 열렸다. 미안, 방해 할 생각은 없었어. 택운의 진심 어린 사과에 춤을 추던 그 진지한 모습과 다르게 소년은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순간 그 미소를 지어 보였던 학연은 택운이 보아 온 사람들 중 가장 눈이 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너 정택운이지?’
‘어?’
‘피아노 치는 거 많이 봤어. 멋있더라.’
‘…고마워.’

부끄러움에 괜스레 무뚝뚝하게 내뱉어진 택운의 말에도 소년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갑다. 차학연이야. 잘 부탁해. 상처 없고 하얀 택운의 손과는 달리 눈앞에 내밀어진 손은 마디마가 밴드로 감겨있었고 약간 까무잡잡한 손이었다. 부끄러운데 안 잡을 거야? 계속 빤히 지켜보는 택운의 시선이 부끄러웠는지 어느새 빨갛게 달아오른 학연의 얼굴에 처음으로 타인 앞에서 환하게 웃어 보이며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차가웠던 택운의 손과 비교 될 만큼 맞물린 학연의 손은 무척이나 따뜻했었다.

“택운이 형.”

저를 부르는 소리에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고 귀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떨어트린 컵 덕에 담겨 있던 커피와 함께 유리파편이 이리저리 튀었다. 뒤를 돌자 놀란 표정의 재환이 택운을 보고 있었다. 멍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서 있는 택운의 모습에 재환은 황급히 가까이 다가왔다. ‘무슨 생각을 했길래 그렇게 놀라는 거 에요?’ 재환의 타박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곧 자괴감이 밀려왔다. 학연을 잊겠다고 발버둥 치던 지난 10년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학연을 그리워하다 결국 증오까지 했던 자신이 자신 덕분에 아파하는 학연을 눈앞에서 봤다는 사실 하나에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했던 10년 전의 날들을 되새기는 자신이 한심해 보였다.

“형?”
“재환아.”
“네, 말씀하세요.”
“나 혼자 있고 싶은데.”

택운의 말에 뭐라고 할 듯이 입을 열다 결국 택운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한숨을 푹 쉰 재환이 알겠다며 리사이틀 준비 잘하라는 말과 함께 연습실을 나섰다. 바닥에는 여전히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고 차마 그것들을 건드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주저앉는 순간 눈앞에 학연이 건네 준 설문지들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집었고 그것을 보는 순간 가슴이 아파왔다. 종이에서 자필로 하나하나 질문을 적은 학연의 손길이 느껴졌다. 동글동글 하던 학연의 글씨체는 어느새 날카롭게 변했고 그것은 그만큼 학연과 제가 떨어져 있었던 시간을 반영해주는 것 같았다.

“..연아.”

택운의 앞에서 울던 학연의 모습이 잔상처럼 스쳐 지나가고 결국 얼굴을 감싼 손가락 사이로 젖은 숨결과 눈물이 흘러나왔다.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다. 학연에게 차갑게 내뱉었던 그런 말들이 아닌, 진심으로 하고 싶었던 말. 너를 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왜 다시 내게 돌아 온 건지. 어쩌자고…도대체 어쩌자고 나를 이렇게 흔들어 놓는 건지. 너는 왜, 아직도…

“학연아…”

학연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러도 허기진 택운의 마음이 채워지지는 않았다. 한번 터져버린 눈물은 끝없이 흘렀고, 억지로 누르면 누를수록 참았던 그 모든 것은 눈물과 함께 계속해서 흘러 택운을 집어 삼켰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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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정모카)글을 읽으면서 주인공들한테 빙의가 잘되서 그런가 보는 내내 가슴이 계속 무너지는줄 알았어요ㅠㅠㅠㅠㅠ택운이랑 학연이 둘다 안타까워ㅠㅠㅠㅠㅠ잘 읽고갑니다ㅠㅠ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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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2
지금도, 10년이 지난 지금도 택운이의 연주가 학연이를 위한 것이었으면 좋겠어요. 허물어지는 실타래가 다시 두 사람을 단단하게 엮었으면 좋겠어요. 나중에는 택운이가 커피 두 잔 대신, 한 잔은 우유를 부탁하고 그걸 학연이 앞에 내려놓았으면 좋겠어요. 좋지 못한 기억, 그렇게 말하는 대신, 차학연 씨, 하고 거리를 두어 이름을 부르는 대신, 결국엔 저도 눈물을 터뜨리면서 연아, 학연아, 하고 소리내어 말한 것처럼 그 앞에서도 이름을 불렀으면 좋겠어요. 바라는 게 너무 많아서 어쩌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다가 이 글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는지 몰라요.
글을 읽으면서 음악을 듣는 편은 아닌데, 오늘은 택운이가 쳤다는 곡이 궁금해서 Luv Letter를 찾아서 들었어요. 무겁고, 거칠고, 투박하기에는 굉장히 아름다운 곡이라서 마음이 아팠어요. 이 곡을 무겁게 두드리는 마음이 어떨까, 하고. 그 표현대로 잔잔하고 경쾌한 곡인데, 음악이 끝날 즈음은 가볍지 않게 내려앉아서 더 그랬어요.
저는 건반을 밟는 남자 속의 사람이 아니라서 두 사람이 울 때 옆에서 달래줄 수도 없고, 어긋나는 감정과 추억들을 마주보게 세워줄 수도 없어요. 하지만 제가 저 글 속 사람이라고 해도 그럴 수 없을 걸 알아요. 학연이가 택운이를 보고, 택운이가 학연이의 귀에 학연아, 연아, 그렇게 불러주기 위해서는 결국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걸어야 할 걸 알거든요. 또 기다릴게요. 플라밍고였어요:-)!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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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3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읽을수록 빠져드네요ㅠㅠㅠ다음편 개대하고있습니다♥♥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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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4
허루ㅠㅜㅜㅠㅠㅠ다음편 진짜기대해요ㅜㅠㅠㅠ어떡해ㅜㅜㅠㅜㅠㅜㅜㅠ아 콧물나ㅜㅜㅠㅜㅠㅠㅜㅠ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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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5
와진짜 읽을수록 빠져드네요 정말 아슬아슬하게
읽고잇어요 앞으로도 좋은글 부탁드립니다
항상감사하게읽을게요♥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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