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실에서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재환이 수건으로 제 머리를 탈탈 털었다.
미처 닦이지 못한 물방울들이 그의 목선 아래로 주륵 흘러내린다.
차가웠다.
뒷목을 받치는 수건이 있음에도 계속해서 물기가 아래로 떨어진다.
툭.
툭.
툭.
그렇게 입고 있던 티셔츠에 간헐적으로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보기 흉한 얼룩을 형성해냈다.
딱 어깨까지 젖었다.
그러나 재환은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며 그저 뻣뻣한 수건으로 계속해서 머리칼을 부벼댈 뿐이었다.
아마 젖은 옷을 갈아입을 생각은 없어 보인다.
잇닿는 차가움을 느끼지 못하기라도 하는 걸까.
머리칼을 말려주는 대신에 수건은 축축하게 젖어버렸다.
재환이 풍성하게 물을 머금은 수건을 잠시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그것을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걸쳐놓아버린다.
참 웃기지도 않다.
재환이 생각하며 드라이기를 찾았다.
곧 위이잉거리며 따스한 바람이 그에게로 다가간다.
기분 좋은 감촉에 재환이 살며시 미소를 짓는다.
연한 갈색빛의 머리통이 점차 따뜻해지자 그는 유독 그 아래가 시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 때에 이르러서야 재환은 자신의 어깨가 차가운 물기로 인해 젖어있음을 깨달았다.
재환이 잠시 무언가를 생각했다.
그러나 곧 관뒀다.
그는 훌렁 티셔츠를 벗어버리곤 걸음을 옮겨 부엌으로 향했다.
이 곳의 구조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현관과 이어져 있는 부엌과 재환이 매일 아침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고 잠을 청하는 곳인 안방이 그 예의 전부다.
재환의 인생에 있어 처음으로 홀로 얻어낸 월셋방이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냉장고를 열었다.
있을 것 없이 휑한 냉장고의 내부가 보인다.
그 속에서 기어코 우유를 찾아낸 재환이 자연스럽게 껍데기를 뜯고 벌컥벌컥 내용물을 마신다.
또.
또.
자신의 목선에 우윳방울들이 묻어나오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하고서.
그렇게 그는 생각 없이 우유를 들이킨다.
아직 남아 출렁이는 우유곽을 냉장고에 밀어 넣은 재환이 느리게 안방으로 향했다.
그 곳에 들어서자 아까는 느끼지 못했던 생경한 기름 냄새가 그를 덮친다.
안방에는 무수히 많은 스케치북이 너덜거리며 존재하고 있다.
후각을 자극하는 기름 냄새가 오늘따라 역하다.
그가 문득 고개를 들고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을 가득 감싸고 있는 해바라기들이 보인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흰 빛의 밋밋함이었던 천장이 이제는 해사한 해바라기들로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기름을 섞어 그린 재환의 여든 여덟 번 째 해바라기다.
재환이 마음 속으로 그 해바라기들의 송이 수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유난히 긴 목을 가지고 있는 해바라기가 넷이다.
손가락까지 접어가며 열심히 해바라기의 목덜미를 세어가던 재환이 무심코 시간을 확인하곤 급하게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다.
재환이 침대 옆 작은 서랍장에서 새로 맞춘 교복을 꺼냈다.
보푸라기 하나 없는 깨끗한 그 셔츠와 바지가 아직은 낯설다.
재환이 보송한 손짓으로 빠르게 교복을 갖춰 입었다.
낡은 크로스백 안에 필기구와 노트 몇 권을 챙겨 넣은 그가 천천히 현관을 나서며 꾸벅 고개를 숙인다.
어딘가 존재할 자신의 부모님을 향하여.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엄마.
가볍게 미소 짓던 재환이 지층의 월셋방을 나와 스무살의 열 일곱을 걸어나가기 시작한다.
상혁이 또 바뀌어버린 가정부를 앞에 두고 상스러운 단어를 내뱉는다.
씨발.
오랜만에 맞는 아버지와의 식탁에서 그는 좀처럼 표정을 피지 못했다.
가정부가 내미는 원두 커피를 한 손으로 가볍게 받아내던 그의 아버지가 잠시 험악하게 인상을 구긴다.
식탁은 길다.
그 기나긴 사이에서 상혁이 차마 더 이상의 언질을 담아내지 못하고 으득 이빨을 씹었다.
날카로운 눈 맞춤이 시작된다.
그러나 상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소한 쌀밥이 가득 담겨있는 그릇 아래로 시선을 박아버렸다.
아버지가 무지하게 신문을 펄럭이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상혁은 딱딱하게 말했다.
“뭘 어쩌겠다는 거예요.”
“뭘 어쩌겠다는 게 아니다.”
“……난 안 해요. 그런 거.”
“…….”
“잘 먹었습니다.”
그의 앞에 놓인 수저는 언제나 반질반질하다.
상혁이 기나긴 침묵의 사이로부터 벗어나고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아.
말로 못할 짜증이 솟구친다.
책가방을 손에 걸치는 시늉을 하자 아버지가 엄한 소리로 아들을 다그쳤다.
그러나 아들은 가만히 고개를 내저으며 묵묵히 현관으로 걸음을 옮긴다.
단지 풋내 풍기는 어린 날의 반항심이 아니다.
문득 뒤를 돌자 날카롭게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아버지와 서둘러 제 몫의 공깃밥을 치워내고 있는 가정부가 보였다.
퍽이나 아름답다.
상혁이 곱씹으며 조금 이른 등굣길을 나서기로 한다.
“……또 싸우신 겁니까.”
“몰라요.”
“왜 싸우셨습니까.”
“모른다고. 운전이나 해요.”
핸들을 쥐고 있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진다.
답지 않게 상혁의 눈치를 살펴가며 라디오 채널을 맞춰가는 그는 저 멀리 나타나는 횡단보도에 서서히 속력을 줄이기 시작했다.
빨간 불.
택운이 브레이크를 밟는다.
“형.”
“…….”
“가정부 또 바뀐 거 알아요?”
“…….”
“이럴 때 보면. 형 진짜 대단해요.”
“…….”
“어떻게 이렇게 질기게 버티냐.”
내심 존경의 눈빛을 담고 있는 그 말에 택운이 작게 웃음을 터뜨린다.
백미러로 보이는 소년의 앳된 얼굴은 어렸을 때와 별 차이가 없다.
다만 조금.
아주 조금.
그 때와는 다르게 무거움이 늘었다.
택운이 인적이 멎어가는 횡단보도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핸들을 몰아 잡는다.
차체가 아까 전보다 조금 더 빠르게 앞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그렇기는 해.”
빠르게 스치는 바깥 풍경을 멍하게 바라보며 상혁이 중얼거렸다.
이윽고 익숙한 거리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더불어 익숙한 여자의 뒷모습까지도.
여자는 좁은 보폭으로 교정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그가 그런 여자를 발견하고 낮게 웃으며 지시한다.
여기서 내려주세요.
학연이 손바닥으로 교탁을 몇 번 두드린다.
결코 작지 않은 소리에 동급생들은 눈을 반짝이며 그 곳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인자한 미소로 교실을 둘러보고 있는 담임 선생과 그 옆에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고 있는 낯선 인영이 하나 보인다.
그를 발견한 동급생들이 잠시 술렁이기 시작한다.
재환은 그 때도 잘 웃지 않았다.
“얘들아. 오늘부터 우리 반에 전학생이 왔어.”
맑게 웃으며 말을 마친 학연이 뜻 모르게 박수를 유도한다.
동급생들은 그저 피어오르는 호기심에 멍청하게 짝짝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예외인 사람이 하나 있다.
오늘도 뒷자리에 앉아 무언의 아픔에 고개를 엎고 쓰라림을 참아내고 있는 여자는.
그저 시끄럽게 울리는 귀청을 틀어막아버리고 싶었다.
“이름은 이재환이고, 나이는 너희들보다 세 살이나 많아. 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조금 서투른 감이 있어도 잘 대해줘야 돼. 알았지?”
선생님은 너희 믿는다.
작게 미소 지으며 학연이 말했다.
새로움에 목이 마른 동급생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하나 둘 재환에게로 닿아오기 시작한다.
그를 지켜보던 학연이 옆에서 재환에게 작게 중얼거렸다.
친구들한테 간단하게 인사해줘.
재환은 그 말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만나서 반갑고……. 잘 지내보자.”
재환이 문장을 마침과 동시에 약하게 웃었다.
매끄럽게 꺾이는 외모에 감탄하던 여학생들이 낯빛으로 설레어하며 푹 유치한 신경전을 벌인다.
재환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학연은 그런 재환에게 몇 번 등을 토닥이어주고 수업 잘 들으라는 당부의 말을 남긴 뒤 교실을 떠나갔다.
여덟 시.
일 교시가 시작되기까지 약 한 시간이 남아있는 시점이다.
흥미를 잃은 동급생들 몇 명이 독하게 책을 펼치며 영단어를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재환이 어깨를 한 번 으쓱이며 교실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뒷자리로 걸어 나갔다.
집요하게 그 딧모습을 쫓아가는 여학생들의 시선이 비단 그렇게 곱지만은 않다.
재환은 재빠르게 고개를 돌리며 교내를 탐색했다.
학연이 따로 앉을 곳을 정해주지 않았다.
비어있는 자리가 제법 숱하기까지 했다.
재환이 무언가를 찾기 위해 계속해서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그러고는 느리게 걸음을 옮겨 풀쑥 여자의 옆에 크로스백을 올려버린다.
무심코 닿아오는 기척에 여자가 날쌔게 고개를 돌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여자가 생경한 인영을 두 눈으로 훑어 내린다.
난생 처음 바라보는 인영의 모습은 어쩐지 부드러운 낯을 띄고 있다.
재환이 익숙하게 의자를 끌어 당겼다.
그러자 앞에 앉아있는 여학생 하나가 충고를 빙자한 유혹의 말을 건넨다.
“재환아. 왜 거기 앉아?”
“…….”
“거기 앉지 말고 다른 데 앉아.”
“내가 맘에 들어서 앉겠다는데. 왜.”
“…….”
“그리고 누가 재환이야.”
언제 봤다고.
내내 무표정으로 말하던 재환이 마지막에 가서는 싱긋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일순간 여자와 재환의 눈이 마주쳤다.
그 처음의 시작은 그렇게.
다행스럽게도 따뜻했다.
Adore Scene
흘러가지 않을 우리들의 시간
너는 내 태양이다.
네가 지면 나는 밤이 되고 네가 나타나면 나는 아침이다.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말인데.
나는 네 눈빛에 데여 딱 죽어버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