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거핀
[ macguffin ]
속임수, 미끼라는 뜻. 극의 초반부에 중요한 것처럼 등장했다가 사라져버리는 일종의 ‘헛다리 짚기’ 장치를 말한다.
(영화사전, 2004.9.30, propaganda)
뮤즈
[ Muse ]
1. (작가・화가 등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
2. Muse 뮤즈(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시, 음악 및 다른 예술 분야를 관장하는 아홉 여신들 중의 하나)
최준홍X정대현 <뱀파이어 섹슈얼리티>
정대현은 인내심이 좋은 편이었다. 본인은 그렇다고 '우기지만', 사실 상대적으로도 정대현은 인내심이 제법 좋았다. 어쩐지 맹한 구석이 있고 남들과 동떨어진 세계에 사는 것처럼 다른 면모를 보이기는 했으나 가끔 그와는 반대로 적당히 선을 지키고 상도덕을 중시하는 뱀파이어다, 이거다. 김힘찬이 보기에는 그랬다. 김힘찬은 저의 목숨을 한 번에 해칠 수도 있고 또는 쥐도 새도 모르게 끌고 가 저를 잡아 먹을 지도 모르는, 어쨌거나 저의 목숨을 이랬다 저랬다 쥐락펴락할 수 있는 뱀파이어라고 할 지라도 정대현이 좋았다. -그렇다고 다른 뱀파이어들이 싫은 건 아니지만.- 왜냐면 정대현은 인내심이 좋았고, 상도덕을 잘 지키는 뱀파이어고, 또,
“준홍아, 나는 제발 아침만이라도 네가 내 앞에서 꺼졌으면 좋겠어.”
“왜요? 난 형 얼굴 보려고 아침에 일어나는 건데.”
“난 아냐.”
피를 싫어했다. 컵 안에 가득 채워진 검붉은 것을 보고 헛구역질을 한 정대현이 손을 저어댔다. 사실 김힘찬은 멀쩡한 인간인지라 당연히 저도 저 피가 싫었지만 그래도 좀 살을 부대끼고 살다보니 이제는 저도 그러려니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정대현은 뱀파이어 주제에 피를 무진장 싫어했다. 뱀파이어가 피를 싫어한다는 사실은 듣도보도 못한 개소리라서 처음에는 정대현이 저를 가지고 장난치는 것일까 했으나, 후에 방용국이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이 달의 표어마냥 “대현이는 피 못 마셔.” 하고 말하는 바람에 김힘찬은 그렇구나, 하고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인내심이 좋은 편인 정대현이라해도 피를 든 최준홍 앞에서는 한 없이 바닥을 내보였다. 참을 인 세 번은 무슨, 한 번을 그리기도 전에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갔다. 최준홍은 아침에 일어나면 꼭 피 한 잔씩 원샷을 해줘야 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평소에는 잘만 붙어다니다가도 정대현은 그 아침이 되기만 하면 무조건 최준홍의 옆자리에 가지 않았다. 못 가는 것에 가까웠다.
창백한 얼굴로 저를 피하는 정대현에, 최준홍은 조금 뚱한 얼굴을 했다. 아니 저건 정대현이 싫어하는 거 알면 안 하면 되지, 왜 자꾸 저런대. 그 와중에 김힘찬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사실 김힘찬이라고 모르지는 않았다. 최준홍은 정대현을 괴롭히는 걸 좋아했다. 피를 보고 기겁하는 정대현의 모습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변태까지는 아니고, 그냥 정대현이 좀 애 같은 구석이 있어서 그걸 보는 게 좋다나 뭐라나. 최준홍이 변명한 걸로 치자면 그랬지만 김힘찬이 보기에는 그거나 그거나 다를 건 없었다.
최준홍X정대현 〈h〈 span="">oney bunny>〈/h〈>
일기예보의 리포터는 온 몸으로 태풍을 맞고 있었다. 현재 태풍은 수도권 지역으로 북상하고 있으며……. 살신성인의 자세 리포터는 상황 전달을 마지막으로 화면에서 사라졌다. 최준홍은 요 며칠 간 집 밖으로 나가지를 못했다. 태풍이 예상보다 강한 것도 있고, 어차피 강의도 대부분 휴강이었다. 무엇보다 돼지토끼 한 마리만 덩그러니 집 안에 놓고 가자니 마음 쓰이는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제 딴에는 잘 놀겠다고는 하는데 근래 사고 친 게 워낙 많아서. 정대현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최준홍이 마냥 저와 놀아줘서 좋다며 히죽히죽 웃었다. 그렇다보니 집 안에서 안 해 본 게임이 없는 것 같다.
최준홍은 소파 근처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정대현을 흘긋 보고 TV를 껐다. 한 시간 전 쯤부터 거세진 빗발이 창문을 툭툭 두드려댔다. 졸고 있는 정대현을 담요로 감싸 안은 최준홍이 방으로 향했다. 그렇게 먹어대면서도 고작해봐야 초등학생 몸집뿐이 되지 않는 정대현은 그다지 무겁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방문을 열며 “졸려?” 하고 묻자 정대현이 잠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팔을 감아왔다. 침대에 눕히고나서도 떨어질 기미가 안 보이길래 잠시동안 옆에 같이 누워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시계를 보자 아홉시가 조금 넘어가 있었다. 며칠 간 정대현과 쉴 틈 없이 놀아주다보니 몸이 노곤해, 최준홍도 이 쯤 되면 피곤해서 제 정신이 아니었다.
정대현을 마저 재운 뒤엔 최준홍도 본인의 방으로 갔다. 하품을 쩍하며 침대에 누웠다. 피곤한 눈꺼풀이 몇 번 끔뻑거려졌다. 잠에는 금방 들 수 있었다. 하지만 최준홍이 잠에서 깬 건 새벽 두 시가 넘어갈 쯤이었다. 거센 빗발 소리를 뚫고 천둥 소리가 울렸다. 그 전에는 번쩍거리는 번개도 얼핏 본 것 같기도 했다. 최준홍은 어우 시끄러, 하며 이불 속으로 파고 들었다. 그런 도중에도 몇 번 번개가 치고 천둥 소리가 들렸다. 이불로 귀를 틀어막자 그나마 소리가 멀리 떨어졌다. 그러다 방문이 열리는 느낌에 이불에서 고개를 빼꼼 빼내었다.
“…….”
번개가 쳤다. 천둥이 뒤이어 우르릉 꽝, 하고 울렸다. 번개의 빛 사이로 보이는 까맣고 작은 실루엣에 놀란 최준홍이 저도 모르게 억, 하고 소리를 질렀다. 까맣고 작은 실루엣은 그에 더 놀라서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리고는 엉엉대며 울기 시작했다. 최준홍은 그제서야 그 실루엣이 정대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솔솔 오던 잠이 확 달아났다. 당황한 마음에 이불을 걷어내고 정대현에게 다가갔다. 이제보니 하얀 귀가 퐁 솟아있다. 정대현은 울면서도 양 손으로는 두 귀를 꽉 틀어막고 있었다. 눈물로 얼룩절룩한 눈가를 한 번 쓸어내린 최준홍은 정대현을 들어올렸다. 최준홍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정대현은 서러운 듯 칭얼거렸다.
“왜 울어, 왜. 천둥 무서워서?”
“응, 무서운데…,”
“무서운데?”
“너무 시끄러…. 대현이 잠 못 자게써.”
어쩐지 귀 막고 있더라. 최준홍은 어유, 그래써요? 대현이 잠 못 자게써요? 하며 정대현을 놀려댔다. 정대현이 하지 말라고 빽 짜증을 부리고는 최준홍의 어깨를 쳤다. 그 사이 천둥이 한 번 더 작게 쳤다. 정대현은 놀라서 귀를 틀어 막았다. 최준홍은 정대현을 저의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는 자신도 그 옆에 누웠다. 두 손으로 귀를 꼭 막은 정대현은 저의 품에 자꾸만 파고 들려했다. 최준홍은 여름 밤이지만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고서는 정대현을 뒤에서 껴안았다. 목 밑으로 팔을 집어넣어 대신 정대현의 귀를 막아주었다. 몸집만큼이나 작은 토끼 귀는 한 손으로도 충분히 가려졌다. 남은 한 손으로는 정대현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배 문지르기를 해 주었다. 준홍이 손은 약손, 하고 정대현이 잠에 취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배를 문지르는 자신의 손 위로 정대현의 손이 겹쳐졌다.
유영재X정대현 <문과vs이과>
유영재는 얌전했다. 말로만 그런 게 아니라 정말 머리부터 말 끝까지 얌전한 것으로 무장되어져 있었다. 욕 한 번 할 줄 모르는 곱상한 입매에 누구도 유영재에게 태클을 걸지 못했다. 또래 아이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질과 수준이 낮은 일진들보다 더 무서운 존재, 그런 거. 유영재의 옆구리에는 꼭 책 한 권이 끼어져 있었다. 쉬는 시간의 반 분위기는 간단했다. 소란스러운 남자 반, 수다스러운 여자 반, 그리고 책 읽는 유영재. 가끔 반이 시끄럽노라 하면 운동장 나무 그늘 밑에 앉아 책을 읽었다. 자신들에게 직설적으로 너네들 시끄러, 한 것도 아닌데 아이들은 유영재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걸 보면 괜시리 찔려서 입을 한 번 꾹 다물고는 했다. 어쨌거나 유영재가 앉는 그늘 밑 자리는 우습게도 푸른 풀들마저 유영재처럼 곱상하게 뉘어져 있곤 했다. 행동거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유영재는 전교권에서 노는 문과 탑이었다. 성격이 담담해서 그렇지, 모난 건 아니기에 아이들과도 그저 그렇게 지내는, 본인은 모르는 존재감 갑, 그건 다 유영재였다.
반대로 정대현은 개새끼였다. 남들이 욕으로 쓰는 개새끼가 아니라 개의 새끼. 발발대면서 주인을 쫓아 다니는 개새끼. 곱게 말하면 강아지인데 정대현의 친구들은 개새끼가 입에 더 착착 달라붙는다면서 욕도 뭣도 아닌 어감으로 개새끼야! 하고 정대현을 불러대고는 했다. 유영재가 어릴 적부터 얌전함의 대명사였다면 정대현은 사고만 처대는 망할 개새끼였다. 저게 진짜 개였으면 내가 쫓아냈을 거라며 가끔 애들은 수근거렸다. 그렇지만 정대현은 학교에서 내노라 하는 재간둥이였다. 더불어 문제아이기도 하지만 정대현과 어울리는 무리 중에서 가장 양호한 편이고 성격이 싹퉁바가지니 뭐니 하는 게 아니라서 비중 자체는 재간둥이의 이미지가 컸다. 선생님들도 웬만해서는 정대현을 오냐오냐했다. 그리고 정대현은 공부를 잘 하지는 않았고 그냥 반은 하는, 평범한 수준이었지만 이과였다. 남자들은 그냥 이과나 가라며 작년 담임 선생님이 농담으로 던진 말을 진심으로 알아 들은 정대현이 저지른 일이었다. 그래서 정대현은 유영재에게 멍청한 놈이라며 욕을 들어먹기도 했다. 정대현은 그런 애였다. 누가 봐도 존재감 넘치는 이과 재간둥이 정대현.
유영재와 정대현은 떼어놓고 바라보면 참 자연스러운 그림이었다. 붙어 있으면 이건 희대의 망작처럼 보여졌다. 미켈란젤로가 둘의 모습을 본다면 씨발 좆같네하고 떨어뜨렸을 것 같은 모습. 그러니까 둘은 그만큼 어울릴 수 없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유영재와 정대현은 친했다. 매우. 정대현의 말에 의하면 친하다고 했다. 유영재도 딱히 그 말에 반박하지 않는 걸로 보아서는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둘은 응애응애하며 다리 밑에서 주워 왔을 시절부터 친구였다. 같은 유치원, 같은 초등학교, 같은 중학교를 거쳐 같은 고등학교까지. 그러나 과가 갈렸다. 정대현은 공부 잘 하는 유영재가 당연히 이과를 올 줄 알았다. 담임 선생님도 저더러 -정확히는 모두였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농담이었지만- 이과를 가랬다. 그래서 자연 지망란에 휘갈기듯 체크했다.
그리고 유영재는 문과를 갔고, 정대현은 이과를 갔으며, 그 날 밤 정대현은 시위를 한답시고 유영재네 방 창문에 돌맹이를 던지다가 창문을 깨트렸다.
씨발 삼각함수 개새끼야. 정대현은 어제 아침 댓바람부터 빠따 세레모니를 했다. 수학 선생님은 이과 수업을 들어갈 때마다 그러셨다. 다음 수업 시간에 삼각함수 공식 시험 칠꺼니께, 외워 와래이. 틀린 갯수대로 처 맞는 줄 알그라. 두 개까진 봐줄끼다. 그리고 그 날 수학 선생님의 눈을 피해 어찌저찌 졸고 있던 정대현은 당연하게도 그 소식을 듣지 못했고 다음 수학 시간은 어제였었다. 들어오자마자 새하얀 A4 용지를 내어주는 모습에 이게 뭐냐며 팔랑대며 쳐다보고 있었다. 시작이라는 소리에도 정대현은 뭣도 모르고 펜만 끄적거렸다. 우리 영재 ´▽` 따위의 말이나 썼다. 옆 짝지가 뭘 열심히 쓰고 있길래 별 생각 없이 몇 개만 컨닝했다. 다섯개 정도 적었는데 선생님이 끝이라며 뒤에서 걷어오라고 하셨다. 뒤늦게 짝에게 물어보니 쪽지 시험이란다. 삼각함수 공식 적기.
와따, 정대현이. 도랐네? 느이 반 꼴찌도 다섯개 틀려묵었는데 니는 뭔데 두 개뿐이 안 맞노?
아뇨 씨발 난 몰랐죠. 칠판을 부여잡고 엉덩이를 들이 댄 정대현이 파닥거렸다. 어찌저찌 컨닝을 해서 다섯개를 적었는데 그마저도 플러스 마이너스 잘못 봐서 세개나 틀렸다. 내 눈 나가 죽어라. 적은 거라도 다 맞았으면 좀 덜 혼났으려나. 다 틀려서 존나 얻어 맞는 것 보다는 차라리 나은 거라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지만 복날에 개 두드리 듯이 좋다고 흠씬 두들겨 패는 수학 선생님의 빠따는 정말 아프다, 이거다.
“그러게 왜 처 자서.”
울며 겨자 먹기로 머리 속에 있지도 않은 삼각함수 공식을 외워댔다. 공식 주제에 존나 많아. 정대현이 니 새끼는 내일 석식 시간까지 안 외워 오면 두들겨 맞을 줄 알아래이. 뭐 언제는 안 두들겨 팼다고. 그래도 그게 농담이 아니란 건 알아서 엉덩이를 부여잡고 알겠다고 했다. 내일 석식 시간은 오늘이었고, 지금이 점심시간이니 몇 시간 남지도 않았다. 아침 자습시간에는 까먹고 잤고, 이제서야 생각나서 달달 외우는데 마음처럼 쉽게 외워지지는 않는다. 그랬더니 최준홍이 와서 저 지랄. 문과 새끼 꺼져.
“유영재한테 알려달라 하던가.”
“걔 너랑 같은 문과거든? 문과 냄새 나니까 저리 가.”
“씨발, 염산 냄새 나는 새끼가 뭐래.”
“넌 먹 냄새 나거든, 미친 놈아?”
먼저 시작한 건 정대현 자신이지만 꼭 자신이 시비를 받은 것마냥 달려들었다. 으르렁 컹컹. 정대현과 최준홍의 입에서는 꼭 그런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유치한 싸움의 종지부를 끊을 사람은 정대현네 반에는 없었다. 그나마 정대현의 머리를 두들기며 말릴 최준홍도 유아 냄새 풀풀 나는 쌈박질의 당사자인데다가, 다른 정대현의 친구들은 학교 뒷편에서 담배를 피고 있을 지 아니면 삥을 뜯고 있을 지, 그것도 아니라면 운동장에서 공이나 뻥뻥 차대고 있을 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서 아이들은 그냥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그래도 그 싸움이 좀 웃긴거다. 한참을 그러고 있을 때에, 앞 문이 꼭 문을 연 본인처럼 조용하게 열리고 닫혔다.
“다이다이 함 뜰래, 개야?”
“떠, 씨발! 정대현 좆만한게.”
이렇게 큰 좆 봤냐, 하고 외치려는데 옆자리가 채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옆을 돌아보자 정대현 스스로의 표현을 비워 존나 한심하다는 눈빛을 한 유영재가 앉아 있었다. 입을 다물었다. 멍청하게 앉아서 쳐다보는 사이, 최준홍이 이 때다 하며 정대현의 머리를 후려치고 꽁지가 빠지게 도망을 갔다. 약았어, 씨발 놈…. 치사하게 싸우는 게 제일 남자답지 못하다, 가 인생의 모토인 최준홍은 항상 치사하게 싸워댔다. 울상을 한 채로 아픈 머리를 쥐려는 정대현보다 한 발 빨랐던 유영재가 먼저 손을 뻗어 정대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들부들하게 저를 감싸는 느낌에 그새 기분 좋아서 홍홍 웃자 유영재도 웃었다. 나머지 팔로는 책상 위로 턱을 괸 유영재가 그랬다. 치사하게 머리를 치네, 뇌세포 죽게. 위로는 아닌 것 같지만 저러고 있는 유영재가 너무 잘생겨 보여서 정대현은 아무 말도 못했다.
“왜 왔어?”
유영재는 정대현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자신이 들고 온 파일에서 프린트물 몇 장과 바나나 우유를 꺼내었다. 어, 뚱바다, 뚱바. 빨대까지 친히 꽂아 준 유영재가 정대현의 입에 우유를 물려주었다. 너 외우는 거 도와주려고. 프린트물에는 공식들이 빽빽하게 나열 되어져 있었는데 그건 방금 전부터 오질나게 외워대던 삼각함수 공식이었다. 정대현이 그걸 쳐다보던지 말던지, 유영재는 샤프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공식을 불러주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고 나서야 정대현은 정신을 차리고 어어, 하며 말을 더듬었다.
“근데 이걸 왜 네가….”
“너 맞았다며. 두 개밖에 못 맞췄댔나.”
“미친, 어떻게 알았어.”
“소문 났지.”
다시금 엉덩이가 아파오는 느낌이었다. 소문 낼 새끼는 최준홍으로 이미 정해져 있다. 개 같은 놈. 남 궁디 불어터지게 맞은 게 뭐가 그리 자랑이라고. 얼굴을 잔뜩 구겼다. 쪽팔리게. 쪽쪽 마시던 우유도 내려놓고 얼굴을 감싸쥐었다.
“귀 빨개.”
유영재는 그러면서 저의 손으로 정대현의 양 귀를 감쌌다. 분명 후끈하게 달아 올라 있을 것이었다. 아오, 쪽팔려 진짜. 제 아무리 재간둥이에 안면 철판 깐 정대현이라고 해도 유영재 앞에서 쪽팔리는 건 쪽팔리는 거다. 고개도 못 들고 창피하다며 징징거리는데 유영재가 귀에서 손을 떼더니 정대현의 이마를 툭 밀었다.
“쪽팔리면 얼른 외워.”
“…….”
“나 이과도 아니라서 필요도 없는데,”
“…….”
“너 때문에 외워 온 거야.”
1. 맥거핀뮤즈에 실려있는 글들은 다 연재하려다가 말았던 글들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