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연은 어렸을 때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는 어렸을 때도 남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일이라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다.
약간의 집착으로 비춰질 수도 있는 그 어설픈 사랑의 욕구는 슬프게도 선천적으로 학연의 마음을 조종하고 있었다.
그는 태생이 그런 사람이었다.
처음엔 부모님을 위해 몸을 움직였다.
부모님은 작은 일에도 웃어주며 칭찬에 발린 말들을 늘어주셨다.
학연은 그 느낌이 좋았다.
따뜻하고, 포근하고, 부드럽고, 예뻤다.
잘했다.
언제부턴가 부모님의 그 한 마디가 어린 학연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뒤집어놓는다.
이후에 부모님의 가벼운 칭찬을 들을 때마다 그는 자신도 모를 뿌듯함에 갇혀 더욱 올곧은 행동만을 강행했다.
부모님이 원하는 착한 사람이 되어야지.
겨우 일곱 살을 넘기던 해에 학연은 그것을 고정관념으로 뿌리 깊게 심어두었다.
점차 학년을 졸업해나가는 그의 곁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생겼다.
그들이 학연을 좋아하는 이유는 대부분 같았다.
학연은 언제나 착했고 친절했으며 마음에 여유가 넘쳤다.
그 누구도 그런 학연을 자의로 밀어내지 않았다.
학연이 때때로 시들해지지 않는 이상.
중학교를 졸업할 학년이 되었을 때 그는 맘씨 좋은 국어 선생으로부터 한 가지 칭찬을 듣게 된다.
너, 다른 아이들보다 글을 잘 쓰는구나.
인자하게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헝클여주시던 그 부드러운 칭찬을 학연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기억한다.
아주 오랜만에 학연의 가슴이 뛴다.
그 때부터 학연은 자신의 재능에 조금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학연은 또래들보다 훨씬 좋은 글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다짐한다.
좋은 글을 써서 좋은 칭찬을 받자.
그리고 그 다짐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거대한 규모의 작문 대회에서 상을 타고 백일장에서는 매번 금상을 수상했다.
학교에서는 학연에게 신문 편집을 부탁하기 시작한다.
선생님들 사이에서 모범생으로 칭찬이 자자해지고 부모님 역시 그런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잘했다.
잘한다.
학연은 그런 부류의 말들이 좋았다.
“선생님.”
멍한 생각에 잠겨있던 학연을 툭툭 두드리는 손길은 어쩐지 천진했다.
학연이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았다.
애매하게 웃고 있는 재환이 꾸벅 고개를 숙인다.
그에 학연 또한 어색하게 웃었다.
말끔하게 교복을 갖춰 입은 모습에 뜻 모를 이질감이 들었다.
잠시 이상한 침묵이 그 둘의 사이를 가로질러 지나간다.
“지각은 아니죠? 집이 조금 멀어서요.”
“응…. 아냐. 일찍 잘 왔어.”
“제가 몇 반이라고 했죠.”
“……사 반.”
질문에는 물음표가 없었다.
마치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 은근히 확인을 사설하는 것만 같은 어투였다.
그러나 학연은 그걸 굳이 눈치채어주지 않았다.
“학교에 미술부가 있으면.”
“…….”
“꼭 들어가고 싶네요.”
재환이 그런 말을 하며 활짝 웃는다.
그 둘이 교무실을 빠져나와 나란히 복도의 층을 걸어 나가기 시작한다.
재환의 첫 번 째 등교가 아스라이 시작되고 있었다.
상혁의 말에 택운이 조용히 인도 옆에 차를 세운다.
상혁이 차창 밖으로 여자의 이름을 부르며 몸을 일으켰다.
여자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무심코 뒤를 돈다.
상혁이 아닌 택운과 먼저 눈이 마주쳐버렸다.
운전석에서의 그는 짐짓 날카로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여자가 서둘러 걸어오고 있는 상혁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택운이 유유히 핸들의 방향을 꺾으며 그 곳을 벗어난다.
교정의 언덕 길은 언제나 가파르다.
상혁이 여자에게 웃으며 작게 손을 흔들었다.
“일찍 나왔네?”
가벼운 물음에 여자는 그저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어제 끝나고 같이 가기로 해놓고……. 왜 먼저 갔냐. 말도 없이.”
“…미안, 일이 좀 생겨서.”
웃으며 저를 채근하는 상혁의 말에 여자는 단지 어색하게 입술을 물어뜯을 뿐이다.
상혁이 여자의 곁으로 다가와 깍지를 낀다.
그러나 여자의 표정은 좀처럼 밝아지지를 못한다.
나란히 걸어가는 등굣길에서 여자는 어제의 상황을 잠시 회상해본다.
‘뭐하는 겁니까.’
가느다란 미성에 일동 심장이 멎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여자의 눈이 일순간 커지며 당황감에 젖어간다.
성큼성큼 교실을 들어서며 무표정한 얼굴을 짓고 있는 사람은.
택운이었다.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지만 결코 말을 섞어본 적은 존재치 않는.
그는 그 몇 번의 만남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답답한 잿빛 셔츠를 입고 있었다.
칙칙한 빛깔의 구두굽이 무리들의 앞에 멈춰 선다.
여자의 머리채와 뒷목을 휘어잡고 있던 억센 손길에 순간적으로 힘이 풀렸다.
무리들은 갑작스런 타인의 등장에 도르륵 눈알을 굴리며 서로를 쳐다보기에 바쁘다.
그런 그들을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던 택운이 낮게 깔린 음성으로 지시했다.
‘놓으십쇼.’
텅 비어버린 교실 안을 잠시 둘러보던 그가 무심코 여자를 쳐다봤다.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눈동자가 뜨겁게 얼굴 언저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곧 그 시선은 교실 바닥에 어지럽게 떨어져 있는 담뱃대들로 방향을 바꿨다.
택운이 가뿐하게 상체를 굽혀 그 중의 하나를 집어 올린다.
담배는 아직도 붉은색을 띄며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가 느리게 느리게 그것을 입술로 가져갔다.
‘놓으라고.’
‘…….’
‘했습니다.’
분명히.
그의 입에서 희뿌연 담배연기가 흩날린다.
기가 죽어버렸는지 여자의 피부를 잡아채고 있던 손길이 순순히 그것을 놓았다.
여자는 여전히 놀란 두 눈으로만 택운을 바라보고 있다.
잠시 또 한 번의 눈빛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사람 걱정시키지 마세요.
택운이 한 모금 빨아들인 담배를 교실 바닥에 내던지고는 그대로 교실을 빠져나간다.
그러자 무리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쓴 침을 뱉어낸다.
어디서 또 남자 하나를 만들어 와서는…….
여자가 뒷목의 뻐근함을 느끼지 못하게끔 얼른 책상 위로 고개를 묻어버린다.
“반창고 붙였네?”
“…아, 응…….”
“내가 해주려고 했는데.”
상혁이 피멍이 가려진 콧대를 바라보며 따사롭게 중얼거린다.
다음엔 내가 해줄게.
여자가 암묵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안녕.”
“…….”
“넌 이름이 뭐야?”
귀에 박히는 어수룩한 한국어가 짜증스럽다.
상대하고 싶지 않다.
여자가 푹 인상을 찌푸리며 재환을 노려본다.
그러나 재환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담뿍 선량함을 담고 있는 강아지 같은 눈꼬리가 여자를 응시했다.
본래 상혁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말을 잘 섞지 않는 게 철칙인 여자는 그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눈을 감아버릴 뿐이다.
재환이 고개를 한 번 갸웃한다.
고요하게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만이 즐비한 일 학년 사 반의 교실 안에서 길쭉이 목을 내빼고 있는 사람은 재환이 전부다.
아까 고개를 돌려버린 여자는 아무런 미동이 없다.
재환이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다른 한 손으로는 여자의 뒤통수를 쓰다듬는다.
여자가 잠시 흠칫 몸을 떨어댔다.
그 반응이 의외로 재밌어 재환은 그 유치한 장난을 멈추지 않는다.
“…….”
“…….”
기어이 고개를 돌려 재환의 손을 내친 여자가 날카롭게 눈을 치뜬다.
한껏 찌그러져 있는 표정이 가득 불쾌함을 담아내고 있다.
타인과 결코 말을 섞지 않으려는 여자의 의지가 투철하다.
여자가 아무 말 않으며 다시 한 번 저 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재환의 뜨뜻한 눈망울이 아주 약간의 머쓱함을 지워낸다.
“다들 공부하는구나.”
“…….”
동급생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자세로 교과서와 문제집에 코를 박고 있었다.
느리게 그것을 둘러보다 혼잣말로 중얼거린 재환이 크로스백에서 백지 노트 한 권을 꺼낸다.
그 속에 끼어있는 필통은 그냥 모른 척 자연스럽게 넘겨버렸다.
“저기.”
“…….”
“내가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데. 연필이 없어.”
“…….”
“있으면 좀 빌려줘.”
재환이 여자의 귓가로 조그맣게 속삭인다.
그에 여자는 이젠 거의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재환을 째려봤다.
그러나 재환은 여전히 맑게 갠 웃음으로 여자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입김이 닿은 귓바퀴가 천천히 달아오른다.
여자가 책상 서랍에서 더듬거리며 필통을 찾았다.
그 속에 잠시 손가락을 휘적거리던 여자가 검은색 볼펜을 꺼내어 재환의 책상에 살포시 올려놓는다.
그러곤 여자는 또 다시 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재환이 고맙다며 여자의 뒤통수를 한 번 더 쓰다듬는다.
여자가 얼굴을 구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재환이 펜대를 손에 쥐고서 무언가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힐끔 왼쪽을 자꾸 쳐다보면서 그렇게.
일 교시를 앞두고 있는 교실은 여전히 고요하다.
“예쁘지.”
재환이 어느 순간 완성된 그림을 여자에게로 내민다.
깔끔한 펜선으로 그려져 있는 그림의 무언가는.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자신의 옆모습이었다.
그건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정밀하고 자세했다.
“그래서 부탁인데.”
“…….”
“나 잊지 마.”
재환이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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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가지 않을 우리들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