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의 가장 구석진 곳.
엄밀히 따지자면 자연스럽게 구석으로 내몰려진 곳.
그 곳에서 재환은 익숙한 자세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재환에게 그림이란.
어쩌면 눈을 깜빡이는 일보다도 많았고 쉬웠다.
오늘도 재환은 하루의 아침을 그림으로 시작하면서 가볍게 손가락을 움직인다.
일곱 시.
새벽에 가까운 시간에서의 교실은 텅 비어있다.
고요한 공기 소리가 쾌창한 오후가 아님을 확실하게 증명한다.
재환이 그림을 망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종이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능숙하게 손을 움직여 그림의 마무리를 이어나갔다.
오늘 아침 재환이 그린 건 해바라기다.
여자에게 줄 것이었다.
그림을 완성하는 데엔 약 십 분 남짓 정도가 소요됐다.
재환이 낡은 크로스백을 뒤적여 전문가용 색연필을 꺼낸다.
그러곤 슥삭슥삭.
예쁜 소리를 내며 동그란 해바라기 위에 색깔들을 덧입히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동급생들이 하나 둘 교실 안으로 나타난다.
그 중 몇몇은 재환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넨다.
그러면 재환은 방해받고 싶지 않은 기분에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가 이내 환한 미소로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준다.
재환이 새로운 학교로 등교를 시작한지 약 삼 일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동급생들은 재환에게 특별한 착각이나 환상을 가지지 않는다.
재환은 그저 그들에게 세 살이 많은 복학생 정도다.
실제로도 그는 다른 사람들과 별 다를 점이 없었다.
그냥 똑같았다.
다만 어색한 한국어 때문에 종종 의사소통이 원활치 않을 뿐.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
그는 엉뚱한 구석에서 조금 서투른 행동을 보였다.
재환의 채색은 여자가 교실에 들어설 때 즈음이 되어서야 완성될 수 있었다.
교실 문턱을 들어서는 여자를 발견했을 때부터 재환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지기 시작한다.
얼른 여자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네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지만 그러기엔 조용한 교실의 분위기가 마음에 걸리는 재환이다.
결국 그는 책상 아래로 알게 모르게 손바닥을 움찔거리며 납작하게 몸을 웅크렸다.
재환이 제 옆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여자에게 시선을 집중시킨다.
여자가 책상 위에 가방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재환이 허둥거리며 의자를 뒤로 빼어준다.
덜컹.
하며 그다지 좋지 못한 소리가 교실 안으로 울려 퍼진다.
희번득한 눈동자들이 순식간에 그 곳으로 몰린다.
시선을 받는 일은 언제나 여자에게 고통이었다.
달갑지 않은 상황에 여자가 깊게 미간을 좁히며 재환을 쳐다본다.
그에 재환이, 색연필을 부러뜨릴 것처럼 쥐어대다가 곧 손을 내린다.
“난……. 너 도와주려고…….”
그런 건데…….
바닥을 기는 목소리가 그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동급생들의 날카로운 눈빛들은 떨어져 나간 지 오래다.
“귀찮게 굴지 마.”
“…….”
“안 도와줘도 돼.”
여자가 무심하게 대꾸하며 한 손으로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괜히 무안해진 재환이 헤헤 웃으며 혓바닥으로 입술을 한 번 축인다.
아무래도 좋았다.
언제나처럼 책상 위에 고개를 묻어버리는 여자의 옆선을 바라보고 있는 재환의 시선이 따갑게 이글거린다.
해바라기.
줘야 하는데.
속으로 중얼거린 재환이 완성된 그림을 한 번 훑어보다가 이내 서랍 안으로 그것을 구겨 넣었다.
엎드린 여자의 뒤통수를 쓰다듬는 재환의 손길이 이젠 거의 무의식적이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몇 개의 눈초리가.
별로 마땅치만은 않았다.
살다보면 가끔씩 충고를 던져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그렇게 살지 마.
그러면 학연은 늘 가볍게 되물어준다.
그렇게 사는 게 뭔데?
학연은 부드러워 보이나 절대로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지는 않다.
그는 그저 그런 사람이다.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절대로 뒤바뀌지 못할.
학연이 눈치를 보며 교무실을 빠져나와 길게 꺾인 복도의 모퉁이를 돌았다.
복도는 한산하다.
뛰노는 아이들 하나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몇 걸음 앞에 보건실이 보이기 시작한다.
학연이 점차 걷는 속도를 줄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창틀을 굽이 넘어오는 햇살은 따뜻하고 또 눈이 부시다.
학연이 작게 미간을 좁히며 햇살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그의 얼굴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학연이 무심결에 눈을 감는다.
잇닿는 뜨거움이 지겨울 정도로 싫다.
끔찍하다.
그 일말의 끔찍함은 보건실 문턱에 다다르자 비로소 조금씩 사라질 수 있었다.
학연이 느리게 보건실에 똑똑 노크를 했다.
불투명한 유리문에 휩싸여 내부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곧 그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낮게 깔린 목소리에 학연이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며 유리문을 열어젖혔다.
“……아.”
“…….”
편한 자세로 앉아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던 남자가 작게 탄성하며 학연을 쳐다본다.
몸 전체를 훑어 내리는 눈길이 마치 본능적이다.
학연이 어떠한 연유로 인하여 오르락거리고 있는 가슴팍을 애써 진정시키며 손등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축축한 식은 땀이 묻어나온다.
굉장히 무료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켜 학연에게로 다가왔다.
보건실은 좁았다.
몇 번 마주친 적 없던 남자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학연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가 환하게 풀어진다.
“국어 선생님이셨던가요.”
“…예.”
“죄송해요. 제가 좀 싸가지가 없는 놈이라.”
“…….”
“진작에 찾아가서 개인적으로 인사라도 좀 드렸어야 했는데.”
아마 그는 학연의 방문이 그저 그런 뜻으로만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남자.
그러니까 원식이 말을 마치고 시원하게 웃었다.
레지던트 생활을 끊고 보건직으로 방향을 틀어 난생 처음으로 부임 받은 학교였다.
이 곳에서 원식은 타고난 적응력으로 나름 괜찮은 사회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학연이 원식의 웃음에 어색하게 올렸던 입꼬리를 내린다.
상처 받은 표정이다.
“차라도 한 잔 드려야 되나요?”
“…….”
“어디가 아파서 오신 건 아닐 거고.”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그 말에 원식이 흥미롭게 눈썹을 모로 치켜 올린다.
학연이 더듬거리며, 여자의 이름을 꺼낸다.
“……아아, 걔요?”
“…….”
“예뻐서 기억해요.”
“…….”
“자주 다쳐 오던데. 며칠 전에도 한 번 왔었어요. 콧대에 상처가 있길래 흉 남으면 안 되니까 밴드도 붙여주고. 그랬었죠.”
“…다른 특별한 점은…….”
“딱히.”
“…….”
“나한테 벙어리인 것 빼고는.”
“…….”
원식이 친근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요즘 애들 무섭던데요?”
“…….”
“잘 좀 가르치세요.”
선생님.
보건실의 열린 창 사이로 살인적인 햇살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데려다주겠다는 상혁의 제안을 거절하고 홀로 늦은 하굣길을 걸어간다.
오늘은 코피가 터졌다.
그가 알면 퍽이나 슬퍼할 사실이라서, 여자는 종일 부러 빤한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상혁을 안심시키기에 바빴다.
그에게는 계단에서 넘어진 것 뿐이라고 일러두었다.
예상대로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이게 여자의 한계다.
악순환은 장소와 시간을 불문하고 빙글거리며 처음을 되풀이한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나는 기억에 여자가 고개를 숙인다.
전학생이 생각났다.
유독 자신에게만 부드럽고 한없이 자상한 태도를 보이는 그.
이유는 알고 싶지 않았고 알 방법도 없었다.
여자는 알아서 타인과의 접촉에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한다.
왜 나한테 잘해주지.
곰곰이 고민해보던 여자가 이내 강압적으로 기대감을 짓눌러버린다.
어차피.
다 똑같다.
늦은 시간이지만 낮이 길어져 주위는 밝았다.
한참을 걸어 나가자 저 멀리에 익숙한 주택단지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자가 생각 없이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잔잔한 리듬이 마구잡이로 귓가를 농락한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더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집 앞을 서성이고 있는 낯선 남자의 모습에 여자의 숨이 턱 막혀버린다.
심장이 멎어버리는 느낌이었다.
가득 짐을 짊어지고 있던 남자가 여자와 눈을 마주친다.
대체 언제부터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걸까.
가파른 눈빛이 올곧게 자신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아니다.
심장이 멎는 느낌이 아니었다.
멎은 줄 알았던 심박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짐은 많았다.
바닥에 짐을 내려놓은 남자가 천천히 여자의 곁으로 다가온다.
새파랗게 질려가는 여자의 얼굴이 안쓰럽다.
그러나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남자가 잠시 뚫어져라 여자의 얼굴을 응시한다.
눈빛에 데일 것 같았다.
그런 남자의 눈빛이 잠시 여자의 귓가로 향한다.
생전 처음 보는 물건 다루는 양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여자의 귀에서 이어폰을 들춰낸 남자가 또 다시 과민한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본다.
비현실적이다.
“이 집 사니.”
“…….”
“아님 말고.”
“…….”
“아까부터 여기만 쳐다보고 오길래.”
“…….”
“말 못하는구나.”
무표정한 얼굴로.
덤덤하게 말을 잇는 남자의 모습은.
실로 비현실적이었다.
Adore Scene
흘러가지 않을 우리들의 시간